합비 공방전

1 개요

오의 군주가 일을 하고 싶어 견딜수가 없을 때 하는 일은 정해져 있다.

손호 : 맞다!! 합비다!! 합비를 공략하자!! - 삼국전투기

위나라오나라합비를 사이에 두고 겨룬 전투의 총칭.

2 발단

2.1 합비의 중요성

"합비성은 남쪽으로는 강호에 다다라 있고, 북쪽으로는 수춘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적이 포위하여 공격할 때 수세에 의거하여 우수한 형세를 차지하여..."

── 만총의 상소 중에서(만총전)

합비는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중부 차오후호(巢湖) 북쪽에 있는 성도(省都)로 예로부터 중원(中原)과 강남(江南)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노주(蘆州)라 불렀으며 합비라는 지명은 한나라 때부터 불리웠다.[1] 비슷한 이름의 하비 때문인지 서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 여기는 서주도, 예주도 아닌 양주(揚州)의 구강군이다.

손책이 임명한 여강 태수 이술이 양주 자사 엄상을 공격하여 죽였을 때, 199년 여강매성뇌서진란 등이 장강과 회화 일대에서 수만 명을 모아서 일어나 군과 현은 파괴되었다.

당시 조조는 강대한 원소막 교전에 들어가기 시작한 참이라 형편이 좋지 않아, 당시 사도연이었던 유복이 동남쪽의 일을 처리할 수 있으리라 여겨 그를 양주 자사로 파견한다.

과연 유복은 조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진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혼자 몸으로 말을 타고 가 합비의 빈 성으로 가' 주의 관소를 세우고, 도망치고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고, 학식 있는 유생들을 모아 학교를 세우고, 둔전을 보급하고, 제방을 건축해 논에 물을 대고, 성벽과 보루를 높게 만들고, 나무와 돌을 쌓고, 풀 수천만 더미를 엮었고, 물고기 기름 수천 석을 저장하여 전쟁시 방비 용품으로 삼아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위대한 기적을 만들어 내게 된다. 백성들은 그를 칭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떠돌던 백성들은 강과 산을 넘어 앞다투어 그에게 귀순해 왔다.(유복전)

아무 것도 없던 합비는 유복의 위대한 공적으로 인해 위와 오의 관계에서 어마어마한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형주를 제외하면 합비는 오가 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거점이었고, 위나라는 합비만 잘 방비하면 오군의 침입은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3 전개

3.1 1차 합비 전투(208년 ~ 209년)

208년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오나라 대도독 주유에게 대패함으로서 천하를 거의 움켜쥐었던 조조의 기세는 한 풀 꺾이게 된다. 이 틈을 타 손권은 세력 확대를 위해 주유를 남군성으로 보내 형주를 차지할 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장소는 구강군의 당도현(當塗縣)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합비를 포위하기 위해 출발하게 된다. 허나 이는 실패로 끝난다.

당시 합비 공격은 손권 자신이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나온 친정이었다. 위나라 군은 거의 대부분이 남쪽 지방의 역병 때문에 제대로 힘조차 못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허나 손권은 한 달이 넘도록[2] 맹공을 퍼부었지만 합비를 함락시킬 수 없었다. 당시 합비를 일으켰던 유복은 208년 죽고 난 뒤였는데, 비가 내려 성이 붕괴되려고 하자 사람들은 거적으로 성벽을 덮었고, 밤에는 물고기 기름으로 불을 태워 성 밖을 감시하며 치열하게 저항하였다.(유복전)

이때 조조가 보낸 원군은 장희가 이끄는 기병 천 명이었다. 이때 장제는 계책을 세워 장희가 이끄는 보병과 기병 4만 명이 벌써 도착했으니 찾으라고 하면서 세 개의 편지를 보낸다. 손권은 그 중 두 개의 편지를 입수하였고, 이 엄청난 정보에 놀라워하며 퇴각한다.

손권을 퇴각시킨 건 장제의 편지였지만 합비의 군민들이 합심하여 버텨낸 결과이기도 하였다. 이는 죽은 유복의 탁월한 준비성이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손권이 퇴각하자 백성들은 유복을 더욱 그리워하게 되었다.

양주의 관원과 백성들은 더욱 유복을 추모하였고, 동안우(董安宇)[3][4]가 진양(晋陽)을 지켰을지라도 유복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유복전)

3.2 삼국의 정세

이 당시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손권과 유비는 힘을 합쳐 형주를 정복하기 시작한다. 조인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형주 남쪽에 4군과 강릉을 빼앗긴 것이 당시의 상황. 자세한 것은 형주 공방전#s-3을 참조.

211년 조조는 종요에게 명을 내려 한중장로를 공략하라 말한다. 이에 마초는 불안감을 느끼고 관중의 군벌들을 규합, 조조에게 대항한다.

불안하기로는 익주의 유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송이 유비를 불러 견제할 계획을 말하자 장송을 사신으로 보내고, 유비는 이에 촉으로 들어와 211년부터 212년까지는 장로를 공격하는 시늉만 하면서 민심을 얻기 위해 인심을 후하게 베풀었다. (선주전)

마초의 봉기를 물리친 조조는 212년[5] 위공(魏公)의 자리에 올라 자신의 권위를 천하에 드러내게 된다. 이 해, 장송의 내통 혐의가 드러나 처형당하자 유비는 본격적으로 유장과 전쟁을 벌인다. 213년 방통이 전사하자 제갈량, 조운, 장비가 추가로 파견되었고 다음 해인 214년 갈 곳을 잃은 마초까지 유비에게 합류하여 위용을 갖추자 유장은 마침내 항복한다. 유비가 서천을 점령한 것이다.

213년 조조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함인지 다시 한번 군사를 이끌고 유수를 공격해 손권과 대치하는데, 손권은 편지를 보내 조조에게 돌아갈 것을 권하고 조조는 "아들을 낳으려면 응당 손중모 같아야지 유경승의 아들들은 개돼지와 같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장강 북쪽 해안의 군과 현을 손권에게 탈취당하게 될 것을 걱정하여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내지로 이주하도록 명령했다. 백성들은 서로 놀랐으며 여강 구강 기춘 광릉의 10여 만 호가 모두 장강을 건너 동쪽으로 이주했다.(오주전)

이후 합비 남쪽으론 오직 환성만이 있을 뿐이었다. 주광이 지키고 있는 환성을 손쉽게 점령한 손권은 그 해인 214년 유비가 서천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자 형주를 돌려 받기 위해 제갈근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제갈근과 대면한 유비는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평정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오나라에 전부 돌려주겠습니다."라고 말하므로 인해 손권은 여몽을 보내 장사, 영릉, 계양을 빼앗자 유비는 몸소 5만 대군을 이끌고 공안으로 내려가고, 관우를 익양으로 파견하여 손오동맹에 긴장감이 드높아지며 익양대치가 발생한다.

그런데 215년, 조조가 마침내 장로의 항복을 받고 한중을 손에 넣게 된다. 위협을 느낀 유비와 손권은 결국 상수를 기점으로 형주를 분할한다. 한중을 점령한 조조는 이대로 유비를 공격하라는 사마의유엽의 말을 듣지 않고 하후연장합에게 한중을 지키게 한 뒤 자신은 일단 철수한다.

3.3 2차 합비 전투(215년)

3.3.1 개요

유비와 합의를 맺고 육구로 돌아온 손권은 무려 10만 대군을 동원해 곧바로 합비로 군사를 움직인다. 조조가 한중에 있을 때 결판을 내려는 의도였는데, 조조군의 동남쪽 사령관 장료에게 저지당하고 패퇴한다.

3.3.2 선제 기습

당시 합비를 지키고 있는 인물은 장료, 악진, 이전 그리고 조조로부터 교서를 받아 온 합비 호군 설제등과 7000명에 불과한 병사. 이렇게 손권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장료는 설제가 가져온 교서를 뜯어본다. 그 교서의 내용은

손권이 도착하면 장장군(장료), 이장군(이전)은 나가서 싸우고 악장군(악진)은 성을 지키고 호군(설제)은 그들과 싸우지 마라.[6]

사람들은 모두 황당한 기분을 느꼈지만 장료가 '원군을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싸우라는 지시일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자신의 숙부 이건을 죽인 여포군 출신인 장료와 이전 사이는 그야말로 최악이었고 악진과 장료의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았기에[7] 이 둘은 대답하지 않는다. 이에 장료가 분노하여

성패의 기회는 이 한 판의 전투에 달렸다, 여러분들이 만약 의심한다면 나 장료 혼자서 군대를 거느리고 결판을 낼 것이오!

이런 장료의 말에 이전은 평소 그에 대한 원한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국가의 큰일이니, 그대의 계획이 어떠한지 돌아볼 뿐이고, 내가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 공적인 대의를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청컨데 그대를 따라서 나갈 것이다.

이 말에 장료는 800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잔치를 벌인 다음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긴 화극을 쥐고는 앞장서서 적진으로 돌격했다. 수십 명의 장졸과 두 명의 장수를 죽이고는 큰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손권의 깃발 아래까지 이른다. 손권과 부하들은 크게 놀라 어쩔 줄을 모르며 당황하다가 근처에 있는 작은 언덕으로 도망쳤다. 장료는 손권을 도발했지만 손권은 감히 나서지 못했다. 다만 장료의 병사가 적은 것을 보고는 병사들로 하여금 장료군을 겹겹이 에워싸게 했는데 장료는 포위망을 깨고 퇴각해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낙오된 병사들이 "장군은 우리를 버리십니까!"라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다시 적진에 뛰어들어 그 병사들마저 구출해서 돌아왔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계속된 싸움으로 오군은 사람과 말이 한꺼번에 뭉그러졌으며 감히 싸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참고로 이거 정사 장료전에 수록된 내용이다.

3.3.3 소요진 전투

이처럼 초반에 기세를 꺾여버린 손권군은 10일이 지나도 합비가 떨어지지 않고 역병까지 돌자 손권은 회군을 명한다. 문제는 이때 무슨 생각인지 손권이 최후미인 소요진에 병사 1천 명과 장수 몇 명하고만 함께 끝까지 남았다는 것. 그리고 장료는 여기에 한 번 더 공격을 가한다.

적의 기습에 감녕여몽 등이 죽음을 각오하고 적을 막고 장흠, 진무, 서성, 송겸 또한 적과 싸우며 특히 능통은 자신의 친위대와 함께 손권을 호위하여 싸운다. 손권 또한 직접 활을 쏘며 적에게 대항했지만 이때 장료가 손권을 포착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손권에게 덤벼들지 않으니 손권은 능통과 그의 3백여 시종의 힘으로 포위를 벗어나고 능통은 손권이 포위를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자 마자 다시 자신의 시종들과 함께 장료군에 돌격한다.

그렇지만 그동안 진무가 전사하고 서성과 송겸이 견디지 못해 퇴각하는 등 모랄빵으로 군사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이때 후방에 있던 반장이 마침 도착하여 도망가던 송겸과 서성의 병사 두 명을 죽여 군사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해 앞의 적과 싸우게 하고 감녕은 적에게 화살을 쏘며 군악대한테 어째서 북을 치고 피리를 불지 않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어떻게든 군사들의 정신줄을 챙기려고 든다.

이런 장수들의 희생으로 손권은 나루터에 있는 다리 위로 올라왔으나 아뿔사, 다리의 남쪽 부분이 이미 무너져서 3미터 정도나 나무판이 없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곡리가 말 뒤에 있다가 손권에게 안장을 꼭 잡고 고삐를 늦춰 잡게 한 다음, 채찍으로 말이 뛰는 것을 도와 드디어 진교를 건너뛰게 했다. 그 때 하제가 3천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나루터 남쪽에서 손권을 맞이하여 손권은 위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동안 진무는 전사했고 서성은 상처를 입고 창을 잃은 것을 하제가 되찾아온다. 특히 능통은 수십 명을 죽였지만 그 동안 수많은 상처를 입은데다가 자신이 친근하게 대우하던 3백 시종은 전멸하고 그 자신만이 남쪽의 나루터에 도망쳐와 다리가 끊긴 것을 보고 갑옷 입은 상태로 자맥질하여 손권이 있는 배에 겨우 도착했을 뿐이었다.

3.3.4 후일담

능통은 자신이 아끼던 시종들이 모두 죽은 것을 알자 펑펑 울기 시작한다. 이에 손권은 직접 소매를 당겨 눈물을 닦아주며

공적, 죽은 자는 이미 죽었고, 실로 경은 살아 주었는데, 어찌 사람 없음을 걱정하오?

라며 그를 위로한다. 그리고 그 날 배안에서 잔치를 벌이니(…) 하제가 그걸 보고 눈물을 흘리며 죽을 때까지 훈계로 삼으라고 말한다. 손권은 그의 눈물 또한 직접 닦아주지만 그 다음에 하제는 다시 반란군의 토벌 명령을 받는다(…)[8] 그리고 손권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힘껏 싸운 장흠은 탕구장군 유수독으로 승진시키고 아군의 탈주를 막아 앞의 적과 싸우게 한 공으로 반장을 편장군에 제수한다. 또 손권은 전사한 진무의 장례를 직접 임해 진무의 애첩을 순장(…)하도록 한다. 또 건강실록에 따르면 손권은 자신의 손가락을 피가 나올 때까지 씹어 일생의 교훈으로 삼고 능통을 침실에 들어오도록 허락해주었다고 한다.[9]

위나라에서는 이런 큰 승리를 기뻐하는데 장료가 갑자기 생각난게 있는지 항복한 오나라 장군에게 묻는다.

아까 보니깐 자줏빛 수염을 가진 장군이 있었어. 상체는 길고 하체는 짧고,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던데, 그게 누구요?

그 말에 오나라 장수가 손권이라고 대답하니 장료와 악진은 서로를 쳐다보고 두말할 것도 없이 서로 말을 타고 추격을 하지만 결국 이때까지 얻은 곳에 만족하고 잃어버린 기회를 한탄할 뿐이었다. 덕분에 장료의 별명은 안면인식장애가 되었다.

당시 조조도 이 승리를 매우 크게 여겨 장료를 안동장군에 임명하고, 216년 조조는 손권을 공격하러 가는 길에 합비에 들려 장료가 싸운 곳을 순행하며 오랫동안 감탄의 탄식을 하였다고 한다.

3.3.5 결과

손권의 북상에 대한 의지를 꺾어버린 전투

위촉오 세 갈래의 세력에 있어 그 이후의 전개에 막대한 영향를 끼친 전투

이 패배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오의 지도자가 직접 이끄는 10만의 대군이 고작 7000명의 병력을 어쩌지 못해 사로잡힐 뻔하기까지 한 것은 장강 이남에선 무적에 가깝지만 강북에선 종이 호랑이나 다름없는 오군의 처지를 여실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다행히 이후 유수구 전투에서는 강남한정 호랑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 패배로 손권은 합비보단 형주를 취하여 진출하자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주유의 후임으로 대도독이 된 주화파 노숙이 217년 죽고, 급진파인 여몽이 대도독의 자리에 오르자 이 생각은 더욱더 구체화되어 간다.

결국 이 처절한 패배는 형주 공방전에서 관우의 죽음이 일어나게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물론, 배송지의 말처럼 촉과 오의 관계란 '비록 겉으로는 화목했으나 안으로는 서로 시기하고 방비하니' 얼음장 위를 걷는 듯한 관계라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났을 수밖에 없던 사이였지만, 조조가 손권과 밀약을 맺고 합비 방면의 총사령관인 장료를 형주로 보냈는데도 합비엔 눈길조차 주지 못했던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만큼 당시 오군에게 합비의 공포스러움이 막대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3.4 3차 합비 전투(230년? 233년?)

기록이 상반되어서 두 기록을 모두 적는다.

오주전에서는 230년 위가 합비 신성을 쌓고, 233년 손권이 합비 신성으로 출병한다.

만총전에서는 230년 손권이 합비로 출병, 233년 위가 합비 신성을 쌓고, 그해 손권이 합비 신성으로 출병한다.

3.4.1 오주전의 기록

230년 위가 합비 신성을 쌓았다.

230년 손권이 출병했다는 기록은 없다.

233년 ~ 이 해, 손권은 합비 신성으로 진격하며 장군 전종을 파견하여 육안을 정벌하도록 했지만, 모두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3.4.2 만총전의 기록

230년,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을 때 만총은 예주, 연주의 병력을 소집했고 손권은 군대를 물렸다. 만총은 이것이 계략이라고 판단했고 과연 손권은 10여 일 후 다시 돌아와 공격했으나 만총이 대비를 단단히 해놓았으므로 이길 수 없었다.

233년, 만총은 해마다 손권이 공격해오려는 것을 보고 상소를 올린다.

'합비 성은 남쪽으로는 강호에 다다라 있고, 북쪽으로는 수춘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적이 포위하여 공격할 때 수세에 의거하여 우수한 형세를 차지하는데, 우리 관병이 그들을 구하려면 반드시 먼저 적군의 주력 부대를 무찌른 연후에 포위망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적군이 가서 공격하기는 매우 쉽지만, 병사들이 가서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성 안의 병사를 이동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의 서쪽 30리쯤 되는 곳에는 기이하고 험준한 요새가 있어 의지할 수 있고, 다시 성을 세워 굳게 지킨다면, 이것은 적을 평질 끌어내서 그들의 퇴로를 막는 것이므로 계략면에서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호군 장제는 "천하에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적군의 연기를 보고 성을 부수는 것으로, 이것은 공격을 받지도 않고 스스로 함락되는 것"이라고 반대를 하지만, 만총이 손자의 병법을 들어가며 다시 한번 상소를 올리자 조예는 이를 승낙한다.

그 해 위군이 합비의 신성으로 옮기자 손권이 대군을 이끌고 상륙했다. 이때 손권은 위가 성을 옮긴 것을 오군의 위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사기를 높이기 위해 자신이 직접 병력을 도열하고 과시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를 예측한 만총이 복병을 숨겨두었다가 손권이 이럴때 기습했으므로 오군은 대패하고 손권은 배위로 달아난다.

3.5 4차 합비 전투(234년)

주연전에 따르면 손권은 촉나라와 기일을 약속하여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이 시기 촉 제갈량은 마지막 북벌로 사마의와 대치했다.

234년, 손권은 또다시 10만 대군(만총전에 따르면 이 10만 대군이라는것은 '손권이 스스로 부르던 숫자' 즉 뻥튀기)을 이끌고 합비의 신성에 공격을 가하였다.

이에 만총은 급히 달려가서 수십 명의 장사를 소집하여 소나무를 베어 거(炬 : 싸리나 갈대 같은 것을 묶어서 길을 밝히거나 화톳불을 놓는 물건)를 만들고, 마유(삼씨로 만든 기름)를 흐르게 하여 바람 방향에 실어 불을 놓아서 성을 공격하는 적의 무기를 불태웠으며, 화살을 쏴 손권의 조카 손태를 죽였다. 손권은 또다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전예전과 전예가 계략을 낸 기록이 있다.

명제기에 따르면 조예가 직접 남하한 기록도 있다.

위진전에 따르면 위진이 조예에게 조언한 기록도 있다.

이 전투가 진삼국무쌍 시리즈 2편과 4편, 5편에서 위VS오의 결전이 되는 합비신성 전투. 근데 게임에서 그 말도 안되는 규모는 대체...

3.6 5차 합비 전투(253년)

이건 손권이 아니라 제갈각의 공격이다.

4 오나라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합비가 가진 커다란 의미, 강동의 뛰어난 제장들과 많은 병력 숫자에도 불구하고 오나라는 족족, 정말 족족이란 말 외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싸우는 족족 패배했다. 이 결과 오나라의 중원 진출은 결국 성공할 수 없었으며, 오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강동 구석의 작은 세력으로 천하를 주도하는 세력이 되지 못했다.

과연, 어째서 오나라는 실패했을까? 보통 그 이유로 많이들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들이 있다.

4.1 손권의 군사적 재능

결국 이걸 설명하려면 손권에 대해 설명해야 하기에 손권#s-4.1을 보도록 하자. 결과가 너무 심하게 안습하긴 하지만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료, 이전, 악진이라는 말도 안되는 조합인 것도 감안할 필요는 있을 듯.

물론 공성전은 어려운 싸움이다. 천하의 항우우에스기 겐신같은 사람들도 공성전에선 의외로 약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헌데 그렇다고 보기에는 장료의 기습에 처참하게 털리는 등 야전에서도 안습적인 면모가 너무 많다.

물론 손권의 개인적 무략도 아주 없는 게 아닌게 당장 손권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손견이라는 정말 말도 안되는 장수인지라 손권이 자기 아버지를 닮았더라면 이렇게 처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손권은 자기 아버지에 비해 군재가 한참이나 모자란 위인이었고 공격전술능력은 아버지나 형인 손책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4.2 세병제(世兵制)

손오 세력은 세병제를 군사 제도로 사용하였는데, 손오식 세병제는 타국의 병호제와는 달리 손권이 오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장수들에게 봉읍이라는 명칭의 일정한 토지를 분배하고, 그 토지의 수입과 주민들로 독자적으로 군비를 갖추게 하여, 유사시 손권의 소집에 응하도록 하는 체제였다.[10] 즉, 손권에게 충성을 맹세한 장수들이 저마다 군비와 군제, 사용하는 무기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으로 조직한 사병을 이끌고 손권의 지휘하에 연합하는 형태였던 것이다.

요컨대 손오의 군대는 손권이 모든 군권을 가지고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라 손권은 작은 여러 갈래의 군대들을 이끄는 장수들의 우두머리, 이를테면 삼국연의에서 묘사되는 반동탁 연합군의 맹주 원소와 비슷한 지위에서 군을 이끌던 존재라서 전쟁 시에 지휘 체제가 흐트러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군비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호족들과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고 각개격파를 당할 시에 대처하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완전히 어울리는 비유는 아니겠지만 유방이 60만 제후군을 한꺼번에 거느렸으면서도 제후들이 모인 군대이기에 지휘 체계가 엉망이라 수수 전투에서 항우의 3만 군사에 한번 갈려 분열되자 제대로 싸움 같은 싸움도 못해보고 패퇴당한 예도 있고, 먼 훗날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숫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유하고도 군벌 집합체의 한계를 드러내며 결국 모택동의 공산군에게 패퇴하고 대만으로 쫓겨간 예도 있다.

4.3 강북과 강남의 차이

적벽 전투에서도 그렇고, 북방군은 강남으로 내려오면 전염병 등으로 힘 한번 쓰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걸 반대로 적용하면 강남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강남군은 장강 이남에서는 무적에 가까운 전투력을 과시했지만 일단 홈 그라운드를 벗어나면 전투력이 이상할 정도로 감소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후와 풍토적인 문제도 있고, 중원에서부터 시작해 사방을 모두 평정했던 조조의 군사들이 장강의 페널티를 입지 않고 제대로 전력을 풀로 발휘할 수 있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오군의 여러 차례의 실패는 이런저런 이유들이 합쳐진 결과로 보인다. 어떤 자는 손견[11]이나 주유가 있었더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예상을 해 보기도 한다.[12] 물론 이 또한 상상의 영역일 뿐이고, 또 손견은 돌격대장 스타일이라 항상 맨 앞에 섰다는 점과 주유는 합비가 아닌 파촉을 노렸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알 수 없다.

사실 중국 강남인들이 좀 이상할 정도로 싸움에 약한데 이 전통이 꽤 오랬동안 이어진다. 남북조시대, 오대십국시대 등의 혼란기에 강남 국가는 언제나 경제, 문화 면에서는 번영했지만 군사적 성과는 지지부진 하다가 결국 밀리기를 반복했다. 중국 역사상 강남에서 일어나서 화북을 집어삼킨 왕조는 밖에 없다. 오나라는 단지 이 레이스의 첫타를 끊은 것 뿐.

5 기타 창작물에서

5.1 창천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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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료가 온다!!(遼來來)

합비 전투를 유명하게 한 계기가 된 만화. 료래래(遼來來)또한 이 만화를 통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위의 2차 합비 전투에 나온 만화도 창천항로의 한 장면이다. 작중의 장료무쌍을 보면서 괜시리 쪽수 믿었다가 제대로 개털린 오나라 병사들의 장료에 대한 공포를 간접체험 할수 있다(...).[13] 여담으로 위 장면의 경우, 이마가 좀 튀어나온 양반이 손권.

5.2 삼국지 조조전

장료, 이전, 악진이 강제출진하며 조조는 출진 불가능. 삼국지연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전개로 가며, 태사자가 부하를 잠입시켜 내부의 혼란을 유도하지만 장료가 이를 눈치챈다. 그리고 선택지가 뜨는데 서문을 열 경우 태사자와 주위 부대가 혼란에 빠지고 남문을 열 경우 손권 주위 부대가 혼란에 빠진다. 연의대로라면 서문을 여는게 맞지만 사실 남문을 여는게 좀 더 쉽다. 적군 장수 배치가 서쪽은 태사자 1명밖에 없지만 남쪽은 손권, 정보, 노숙, 장굉 4명이 있기 때문. 병사도 남쪽이 더 적기 때문에 태사자가 구원하러 오기 전에 빠르게 전멸시키고 미리 유리한 진형을 짜기도 쉽다.

2차 합비의 무위는 이후 연의에서 처럼 유수구 전투의 전초인 소요진 전투로 표현된다.
실제로 연의처럼 장료, 이전, 악진이 한때 의견이 갈렸다거나 또는 장료, 이전이 기습하여 오군을 격퇴하는 모습이 그대로 재현된다.

5.3 진삼국무쌍 시리즈

5.3.1 합비 전투

2편에서는 장료의 함정에 의한 태사자 사망이 주요 이벤트. 오군 시점에서는 이벤트 발동을 저지하기 위해 장료를 격파한 후 하후돈을 잡아내는 것, 위군 시점에서는 이벤트를 발생시켜 태사자를 제거하고 나서 남쪽의 감녕을 제압하는 것이 승부수이다.

3편에서는 총대장이 손권이 아닌 손견이다. 덕분에 소사교 서전트 점프 이벤트도 손견이 가져갔다. 안습. 오군 시점에서는 소사교 붕괴 이벤트와 함께 출현하는 이전을 격파하고 난 후에, 강화 상태로 등장하는 장료를 막아내야 한다. 위군 시점에서는 손견을 두 번 격파해야 한다. 1차 격파하면 일시 퇴각했다가 본진에서 재등장한다.

여담으로 양군의 아군에게 유리한 이벤트들을 세어보면 이상하게조조군 측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소사교 붕괴 이벤트를 보고, 오군 사기 저하 이후에 장료가 뭘 하기는 커녕 아무 것도 없다.[14] 감녕이나 육손이 원군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플레이어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군 군단들은 그냥 막 썰린다. 아군들의 사기 저하나 고전 등의 정보 이력밖에 안 날아온다.[15] 반면에 오군은 강화 상태 장료만 때려잡는데 성공한다면 아군 부대들이 적군을 알아서 청소하고 있다.

무쌍모드 한정의 얘기지만 오군 시나리오 5장(혹은 6장)의 번성 쟁탈전을 클리어하면 소사교 붕괴 후에도 손견이쫄지 않고도망가지 않고 도리어 복병을소환해불러내서 반격까지 한다. 초반부터 유리하게 진행해서 장료만 신속하게 몰아내면 전투 끝까지 매우 쉽게 클리어가 가능하다.

4편에서는 위군은 동쪽과 남쪽의 중립거점 점거 후 12시 방향에서 등장하는 감녕 격파, 오군은 조창, 우금 등의 원군 부대와 다섯 번 등장하는 장료 막아내기가 핵심이다. 오군 시점에서의 장료와 위군 시점에서의 감녕은 모두 사기가 최고인 상태로 출현해서 바로 아군 총대장인 손권 또는 조조를 향해 돌진하므로, 신속하게 잡아내지 못하면 총대장 패주로 패배하게 된다.(게다가 강화 상태라서 까다롭다.) 그야말로 "위에는 장문원, 오에는 감흥패". 오나라 플레이시 이 스테이지에서 유니크 무기를 얻는 무장은 능통인데 장료을 4번 격파하는 것이 조건이다, 문제는 장료가 손제리권한테 돌진을 하는데 능통이 장료를 잡는 도중에 손권이 대신 장료를 격파하기 때문에 십중팔구 유니크 무기를 얻는데 실패한다. 그것도 능통이 직접 격파해야 하는데망할 손제리같으니 물론 이부분만 넘기고 2번, 3번은 오나라군과 멀리 있기 때문에 쉽지만 4번은 감녕이 있기 때문에 좀 쉽지가 않다.

위군 모드에서 장료로 플레이시 장료로 적장 셋 혹은 적병 250씩 격파할 때마다 적군 사기하강 이벤트가 일어나며, 적장 아홉 또는 적병 750을 격파할 시 오군이 겁에 질려 공황상태에 빠지고 손권이 놀라는 이벤트가 있다. 참고로 장료의 유니크 무기을 얻기위한 조건이다. 얻는 방법은 10분이내 조인이 오기전에 이 이벤트을 발동시키는 것.

5편의 합비 전투는 그냥 장료가 킹왕짱 최강이다. 장료가 CPU일 경우 일시적으로 전장을 이탈했다가 7분 가량 지나면 돌연 나타나 여몽 부대[16]에 기습을 가하는데[17] 오군 전체 사기가 곤두박질 치는데다 강화된 장료가 적군을 분쇄하고 있다. 만렙 플레이어가 전서 쓰고 들쑤시고 다니는 것만큼 적을 죄다 발라버리고 있다(!!!). 초반에는 다소 많이 밀리는 위군 측에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 구세주, 신님. 오군 측에는 극악 난이도라는 존나 좋은 선물(...)을 안겨준다. 흠좀무

정사가 아닌 손견 무쌍 모드에 들어간 번외편 합비 전투도 존재한다. 손견 무쌍모드라 이번엔 오군이 많이 불리한 상태로 시작해서 동서쪽의 합비거점 둘을 차지해야 한다. 조조, 하후돈, 조비 등 고유 무장들이 추가로 나오고 장료 또한 원군으로 등장해서[18] 오군을 힘들게 만든다.

진삼국무쌍6에서도 등장하며, 위나라 시나리오에서는 전후편 모두 장료로 플레이하게 되고, 오나라 시나리오에서는 전편은 감녕, 후편은 능통으로 플레이하게 된다. 위나라 시나리오는 그야말로 장료의 삼국무쌍. 합비성 위에서 밀려오는 오군을 보고 있다가 걱정하는 이전과 악진을 다독이며 간지나게 뛰어내려 성 위에서 뛰어내리면 죽을텐데 적을 향해 돌진하는 장료의 포스가 압권이다. 장료의 성능이 워낙 좋고,[19] 오군이 숫자만 많지 별거없기 때문에 마음껏 쓸고 다닐 수 있다.

반면 오나라 시나리오에서는 감녕의 100인 결사대가 모티브인 전편은 그럭저럭 할 만 하지만, 후편은 능통이고 감녕이고 다 장료한테 쳐발리고 손권의 굴욕의 다리뛰기(…)가 등장하는 시나리오이니만큼 굉장히 어렵다. 충실한 역사재현 감녕과 손권 둘 중 하나만 당해도 게임오버가 되는 상황인데, 일단 감녕과 손권이 가까이 붙어다니질 않는데다가 위군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도망가기에도 벅차고 아군은 완전히 멘탈이 붕괴되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다. 거기다가 장료는 잡아도 두 번 부활하고 세 번째로 등장할 때는 공방 업그레이드까지 되어 있다. 장료를 세 번째로 잡아야 감녕까지 무사히 도망치면서 클리어. 시리즈 사상 가장 높은 난이도의 합비 전투라 할 만 하다.

7편에서는 위나라 시나리오에서는 이전과 악진이 공식적인 무장으로 등장하면서 위나라빠 입장에서는 감동적이다.[20] 오나라빠 입장에서는 사실모드면 여전히 공격하다가 위군 기습받고 후퇴하는 안습한 상황이지만 IF모드를 진행하여 노숙과 주유가 살아있는 상태로 돌입하면 이 둘의 지략으로 승리해 장료를 격파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끝나는 다른 세력의 IF와는 달리 손권 특유의 상대방 깔아뭉개기가 여실히 나와 전작에 이어 장료 팬들의 불편한 심기를 자아낸다. 뜻은 달라도 서로를 인정하는 유비, 조조나 상대를 그냥 깔끔하게 끝내는 사마의, 사마사나 진삼국무쌍7에서 전작보다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마소와는 달리 손권은 상대방을 농락하고 비하하는 면모가 많아 게임에서도 여지없이 안티를 불러오는 경향이 짙다. [21]

5.3.2 합비신성 전투

신성 전투는 2편부터 나오는데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신성전투에는 손권과 만총이 싸운 것과 후에 제갈각과 사마사가 싸운것이 있는데, 전자는 2,4,5,7편에서, 후자는 6,7편에 등장한다.

여담으로, 소수의 위군이 다수의 오군을 이겼다는 것을 반영하기 위해서 인지, 성들이 하나같이 기동요새(...)인 것이 특징. 원격 조종으로 성문을 여닫는 것은 약과에, 컨베이어 벨트, 커다란 선풍기와 가시 함정, 불을 뿜어내는 조각상 등등...

진삼국무쌍 2부터 등장. 여담으로 234년의 합비신성포위전의 테마곡이 있다. 제목은 The Men of Intelligence. 노래를 들어보면 공방전을 연상시키는 웅장한 사운드가 매력적이다. 진삼 팬들에게 명곡 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그 뒤의 몇 무쌍 작품들에서 중간 중간 나오고 있는 BGM이다. 진삼국무쌍에서 명곡이라 불리우는 BGM들 중 리메이크가 안 되고 꾸준히 진삼국무쌍2에 나왔던 음원으로 게임에 나오는 것을 보면 명곡이 맞는듯 하다.(또 다른 합비신성전투 테마곡으로는 Blast From The East) [22]

적벽대전급의 맵 크기 90% 가량이 전부 성일 정도로 크고 아름답다는 말밖에 안 나올 정도의 규모에다 열몇개나 되는 성문들로 도배되어 있을 정도. 오군측으로 플레이하면 그 성문 하나하나 아작을 내야 하며,[23] 위군측으로 하면 이미 성문이 모두 열려있고 중앙 호숫가에 들어가면 오군 복병이자 궁병 수백명이 활질하고 있는데,[24] 이런 오군을 모두 없애야 한다. 그냥 중앙 가지 말자.

4편 역시 시작하면 거대한 성이 있는데 바깥쪽 외성, 중간의 성, 안에 내성이 또 있는 3중 성벽이다(...). 오군으로 시작하면 일단 외성을 제압한후, 중성으로 들어가 안을 제압해 아군이 충차로 중성의 정문을 뚫을 수 있게 도와주고, 이후 내성으로 들어가 사마의와 조비를 잡으면 완료.이릉대전으로부터 몇 년 후 요절하는 조비가 아직 살아있는 것이 이상하지만 넘어가자 중간에 서쪽의 막혀있던 길이 뚫리며 견희가 빈집털이를 시도하니 주의. 위군의 경우에는 어째선지 오군이 중성까지 들어와 있는 상태로 시작한다. 오군을 몰아내며 선단 위의 손권을 잡으면 클리어. 역시 감녕이 중간의 성의 일부분을 무너뜨리고 빈집털이를 시도한다.

5편도 그 크기가 만만치 않긴 하지만 바깥의 성벽은 좀 작은데, 성 안으로 들어가면 진짜 지옥이 시작된다.성문 깨는게 맛보기였단 말이지요? 정면에 자동 컨베이어 롤러(...)가 발동해서 오군을 밑에 있는 호수로 떨어뜨리고[25] 서북쪽과 동남쪽에는 화염포탑 지옥(...)이 있다. 위군은 당연히 아무 피해도 없지만 오군에게는 문자 그대로 화려한 헬게이트.(...) 이 무슨 마성전설도 아니고... 근데 이렇게 강력한 함정들이 위군 시나리오로 하면 공기화된다. 바로 북쪽의 신비나 동쪽의 전예가 사망하는 순간 그 지역의 불함정이 정지하기 때문(…). 이래저래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합비신성전이다.

6편에서도 합비신성전투가 있지만 위의 전투가 아니라 사마사vs제갈각의 합비신성전투가 나온다. 동흥에서 위나라의 침공을 격퇴하고 역공을 가했지만 오히려 대패했고 이는 제갈각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7편은 다시 위 VS 오의 최종결전 스테이지로 복귀. 오나라 사실 루트에서의 최종 스테이지로 나온다. 거대한 성과 오버 테크놀로지스러운 함정들은 여전하다. 다만 여기서 오가 패해야하는 것이 맞는데 오 사실 루트 마지막인지라 오가 대승을 거두는 것으로 나와 논란이 일기도[26].

한편 진 스토리에서도 등장. 6편과 같이 제갈각이 합비신성으로 쳐들어오고, 사마사가 지휘하는 위군으로 오군을 몰아내는 전투이다. 스테이지가 시작하면 성 내부의 대부분에 오군이 들어와있는데 이를 원격으로 성문을 닫아(...) 성 외부의 오군과 분리시키고, 안의 오군을 각종 함정들을 작동시키며 섬멸해나간다음, 다시 성문을 열고 나와 제갈각을 잡아주면 클리어.

5.4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많은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합비를 도시로 구현하지 않아서 주로 수춘을 합비라고 여기고 합비 공방전을 치뤄야 한다. [27] 그런데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수춘과 건업은 거리가 꽤 멀다. 정말 강 하나 코 앞에 두고 대치하는 실제 합비와 건업과 비교하면 현실성이 많이 떨어진다. 삼국지11 같은 경우 육지[28]vs해상전 식으로 간접경험할 수 있지만 원작과는 거리가 멀다. 많은 팬들이 염원중 하나가 바로 합비성과 합비신성 구현일 정도다.

삼국지 11 파워업키트의 결전제패 모드에서 난이도 3짜리 캠페인으로 등장한다. 장료, 이전, 악진, 장패의 4부대로 손권의 대규모 군세와 맞서야 하는데, 전장이 수비측에게 불리하기로 악명 높은 수춘이라 이벤트를 활용하지 않으면 클리어하기 힘들다. 우선 장료로 능통의 부대를 먼저 퇴각시키면 (일기토를 거는 게 쉽다.) 감녕 부대도 뒤따라 퇴각하며, 최대한 공성병기 접근을 억제하며 장료 부대로 적군을 계속 궤멸시키면[29]연쇄적으로 료래래 이벤트가 떠서 숨통이 트인다. 다음에는 클리어 조건대로 손권 부대만 격파하면 끝. 이 방법 말고도 북동쪽 수문을 공격해 수춘에 달라붙은 적들을 수공으로 몰살하는 공략법도 있지만, 수문 거리가 먼데다 이벤트를 포기해야 하므로 효율성은 오히려 떨어진다. 클리어하면 장료가 동료들과 팀워크로 얻은 승리를 서로 치하하며, 손권이 감녕의 위로를 받고 정신승리(…)와 더불어 퇴각한다.

삼국지 13 영걸전 모드의 요래합비는 장료가 주인공으로 손권을 합비에서 격파하는 내용을 다뤘다. 기본 도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수춘 밑에 거점으로 합비가 등장한다. 오나라 입장에서 여강건업을 통해 수춘을 공격하려면 반드시 합비를 지나야 한다. 그래서 시나리오 모드에서도 오나라나 강동의 국가가 수춘을 먹기 위해 합비에다가 대규모 병력을 꼴아박는것을 볼 수 있다!! 위나라와 같은 중원과 하북을 모두 차지한 세력이라면 굳이 장료라는 먼치킨이 없어도 합비로 압도적인 물량을 보내 강동에서 오는 북진을 저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합비 공격은 역사대로 할짓 없을 때 하는 헛짓에 지나지 않는다(...)

5.5 삼국전투기

역대 삼국지 2차 창작물중 합비 전투에 대해 가장 상세하게 그려내고 많은 공을 들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총 5차례의 합비 전투가 그려진다.

5.5.1 합비1 전투

1차 합비 전투에서는 장제가 손권으로부터 합비를 사수해내는 정사 루트를 따라가는 듯하였으나, 장제의 계략에 속아 돌아간 뒤 한동안 공격을 가하지 않는 정사와 달리 장제에게 속은 것을 깨달은 손권이 직접 선두에 서서 합비를 공격하던 중 장료가 지원군으로 도착하여 손권을 격퇴하는 연의 루트를 섞어내었다.

1차 합비 전투에서 장료가 송겸에게 중상을 입히고 손권을 사로잡는 위업을 달성했으나 태사자주태가 손권을 구출해낸다.

이후 태사자가 계략을 이용해 합비를 점령하려하자 장료가 이를 역이용해 태사자를 죽이고 손권이 물러가며 1차 합비 전투가 마무리된다.

5.5.2 합비2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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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료 무쌍

2차 합비 전투에서는 삼국전투기 연재 역사상 가장 다이내믹하게 그려냈다.[30]

손권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조조의 교령을 확인하는 장료, 이전, 악진은 교령을 따르는 입장과 따르지 않는 입장으로 갈리는데, 장료가 단독으로 교령을 따르기로 결정하면서 손권에게 야습을 가한다.

손권군에게 야습을 가하면서 단번에 대장기 근처까지 돌입하고 손권을 지키려고 막아서는 진무의 창을 못쓰게 만들고, 진무의 복부에 원월도를 박아넣는다. 이에 진무가 목숨을 걸고 원월도를 붙잡고서 서성과 하제에게 장료를 잡으리고 외치자 장료는 진무를 가로로 두동강내며 죽이고, 자신을 공격해오는 서성과 하제의 공격을 튕겨낸다.

이후 이전과 악진이 교령에 따르기로 하며 악진이 성을 지키는 동안 이전이 퇴로를 열어 장료가 무사히 빠져나오게 돕는다.

이에 손권은 퇴군을 결정하지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최후방으로 퇴군하기로 결정하는데, 이를 놓치지 않고 장료와 악진, 이전은 손권의 후미를 찌른다.

장료를 저지하기 위해 여몽은 서성과 반장을 보내 장료를 저지하게 하고, 하제에게 방어선을 만들라고 지시하지만 장료는 서성을 한 칼에 베어 중상을 입혀 낙마하게 만들고 방어선을 붕괴시키고 여몽의 필사적인 저항을 뚫어 손권을 추격한다.

장료가 오는 것을 파악한 능통손권장흠이 지키는 소요진을 대피시킨 뒤 방어선을 꾸려 수하들과 함께 장료와 맞서지만 자신은 장료에게 중상을 입고, 장료에 의해 수하들은 전멸한다. 장료의 공격은 장흠의 필사적인 저항과 여몽이 장료의 후발대를 저지, 그리고 감녕의 측면 공격을 당하고 나서야 중지된다.

5.5.3 성산 전투 ~ 오장원 전투

성산 전투와 오장원 전투 파트에서 각각 짧게 나오는데, 성산 전투 파트에서는 공손연에게 당하여 바보취급 받게 된 손권이 흥분해서 합비를 치다가 만총이 파놓은 간단한 함정에 걸려 패퇴했다고 그려진다.

오장웜 전투 파트에서는 손권이 합비 신성을 공격하자, 만총이 이를 지원하려 하지만 지원을 갈 경우 손권이 후방을 노릴 것이라는 전예의 만류로 만총은 합비 신성을 방치하며 지켜본다. 허나 손권에 의해 함락 직전에 놓이자 만총은 조예에게 서신을 보내 원군을 요청하고 조예가 원군을 보낸다는 답변을 보내자 합비 신성을 구원하러 나와 손태를 죽이고 손권을 격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5.5.4 합비 신성 전투

제갈각이 동흥 전투에서의 승리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합비 신성을 공격하며 함락직전으로 몰아넣지만 장특의 거짓말에 속아 시간과 전력을 낭비하고, 관구검에게 공격을 받아 패퇴한다.
  1. 중국사 내내 화북 지방에서 강남 지방을 공략하기 위한 루트는 세 가지가 있었다. 합비를 위시한 회하 일대를 돌파하는 길, 양양성 일대를 통과하는 길, 마지막으로 사천 지방을 건너 양자강 상류에서 내려가는 길. 후대의 영락제가 회하를 직접 돌파해 강남을 점령했으며, 은 양양을 점령하는 루트를 이용했다. 전국시대 (秦)이 초를 공략하는 데 쓴 길이 사천으로 우회하는 길.
  2. 유복전에는 100일
  3. 중국 춘추전국의 인물. 진(晉)나라가 귀족들간의 내전으로 한(韓), 위(魏), 조(趙)의 세 나라로 쪼개질때의 사람이다. 진양성을 다스리며 조양자(趙襄子)를 섬겼으며 성벽을 튼튼히 수축하고 군수품을 비축하는등 방어준비를 튼튼히 해서 훗날 내전기에 조양자가 진양성을 거점으로 지씨, 위씨, 한씨의 공격을 3년 넘게 우주방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3년의 우주방어 끝에 지씨가문은 조씨가문의 공작으로 한씨와 위씨가 배신하는 바람에 끔살(...)
  4. 합비공방전 당시 유복이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처럼, 동안우도 진양 공방전 당시는 이미 죽은 사람 이었다. 지백에게 포로로 잡혀 러브콜을 받자 자결 한 것.
  5. 혹은 213년
  6. 호삼성은 이것에 대해 "장료와 이전은 용감하고 날카로워서 그들로 하여금 싸우게 하였고 악진이 진중하여 그에게 지키도록 하였으며 설제는 문리이므로 전투를 하지 말게 한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7. 이는 악진이 뒤늦게 투항한 항장 출신이면서 조조군의 고참인 자신과 비슷한 계급에 올라 있는 장료를 고깝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8. 하제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 전문은 하제 참고.
  9. 이것을 사신을 능통의 침실에 넣었다로도 해석 가능하다.
  10. 손권의 오왕 즉위 후 손권은 절도라는 새로운 관직을 신설하여 군량을 비롯한 군수물자의 보급체계를 중앙정부의 재량으로 일원화하는 것을 시도하게 된다.
  11. 조조와 원소가 힘을 합치고도 이기지 못한 동탁여포를 이겨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했다. 손견의 군사적 재능은 오히려 조조보다 한 수 위였다.
  12.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주유도 오나라 장수들중에서 수전뿐만 아니라 육전에도 상당히 능했다.
  13. 오죽하면 위의 장면에서 오나라 병사들이 돌파당하며 생긴 피의 길이 1년이 지난 후에 조조와 장료가 무용담 주고받을 때에 그대로 남아있을 정도.
  14. 손견을 유인하는데 료라이씨(CPU)가 한다는 대사가 '큭, 과연 강동의 호랑이...일단 후퇴하자!'(...)
  15. 심지어 이게 초급 난이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16. 이 전투에서 여몽은 오군의 최고 주력.
  17. 장료가 기습하기 전에 여몽을 없앴다면 손권을 기습한다!
  18. 정사 이벤트의 기습 영상 및 이벤트가 따로 없을 뿐이지, 아군과 장료가 접촉하면 "장료다! 장료가 왔다!"라며 오군 전체 사기 저하가 뜨는건 마찬가지다.오나라 빠들 입장에선 '그냥 기습을 해, 시발놈아'
  19. 6편의 장료는 진삼국무쌍 시리즈에 나온 모든 장료를 통틀어 사기캐이며, 6편의 모든 캐릭터를 다 따져도 강캐이다.
  20. 이때 장료를 도우러 오는 이전이 '숙부'의 일을 언급하는데 장료와 이전의 사이가 나쁜 자세한 원인을 밝히는 장면은 삼국지 관련 작품을 거의 통틀어도 이 장면 말고는 없다.
  21. 애초에 손권 자체가 말년 노망으로 안티가 많은 것이 특징인 반면 진삼국무쌍에서는 유난히 조조 vs 유비의 양극성 구조가 짙기 때문에 더더욱 어중간해진 오나라 세력이 까이는 경우가 많다. 손권은 특히 그 중 첨병에서 까이는 빈도가 높은 것일 뿐.
  22. 다만 이 두 BGM은 장료가 미쳐 날뛰는 2차 합비 공방전이 아닌 합비신성에서 벌어지는 사마의vs육손 구도의 일종의 가상 시나리오에 가깝다. 2차 합비 공방전 BGM은 Surprise Attack(오)와 Wallcrusher(위).
  23. 모든 성문을 개문시키는 방법이 있긴 하다. 위군 총대장이 있는 곳 바로 앞의 정자가 있는 중앙 호숫가에 아군이 도달하면 모든 성문이 한꺼번에 열린다. 하지만 중앙 정자로 통하는 입구는 좌측 끝의 샛길에서 이어지는 통로인데 다른 성문이 모두 닫혀있기 때문에 일부 소수무장을 제외한 전원이 그 왼쪽 입구로 진군한다. 다른 성문앞에서 대기한다거나 그런거 없다. 때문에 플레이어 무장이 중앙 정자까지 가는 경로의 장수들을 다 격파하지 못하면 결국 아군은 진군을 못한채 멍때리고 있다가 사기 높은 적들에게 하나 하나 잡혀죽을 뿐이라 결국 눈앞의 적들을 다 잡아야 한다. 한마디로 그게 그거.
  24. 삼국무쌍 시리즈 3편까진 절대 활 무시하면 안된다. 맞으면 무조건 경직인데다 데미지도 폭발적이기 때문에. 3편에선 목표 조준이 똥망이 되는걸로 그나마 많이 너프 됐지만 2편에서 활만으로 적 총대장을 잡고 적을 쓸어버릴 정도로 조준 밸런스가 사기적이었고 파괴력도 월등히 강했다.
  25. 호수에 떨어진다고 죽거나 데미지를 입는건 아니지만 뺑 돌아서 다시 기어 올라와야 되는데 이게 엄청 긴 시간을 지체하게 된다. 수라모드에서 물에 떨어지면 그 사이에 아군의 1/3 가량이 궤멸당해 있을 정도. 흠좀무.
  26. 촉 마지막 루트에서 오장원에서 승리를 거둬 사마의를 죽이기 직전까지 가지만, 그 때 제갈량이 죽어 급히 후퇴해 어느정도 연의를 반영한 것과는 대조적.
  27. 삼국지9와 10에서는 적벽대전 시나리오 이후 합비 지역에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28. 이때 손권쪽은 도시의 시설물을 파괴할 수 있다. 해적
  29. 세 무장이 서로 친애무장 사이라 의외로 버티기 쉽지만 이 특성 때문에 원호공격으로 막타를 뺏기면 좀 난감해지는 면도 있다.
  30. 특히 2차 합비 전투에서는 작가 청설모의 도움도 받아 삼국전투기의 9컷 분량을 사용하면서 능통과 능통의 수하들을 박살내는 연출을 해주었으며 이 정도의 작화력은 한중 전투에서 조운이 황충을 구해낼때 다시 한번 나타난다. 둘 다 기록에 나왔던 무쌍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