裵鍾大
1952년 7월 10일~
1 개요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고려대학교 법과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고, 1985년부터 고대법대 교수로 봉직해왔다. 주전공은 형법, 형사소송법, 법이론이다.
2 생애
1952년 7월 10일 경상남도에서 출생하였다. 1970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1974년에 졸업했고,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과에 진학하여 심재우 교수의 지도를 받아 1979년 8월 법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그 후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거기에서 하쎄머 교수의 지도로 박사논문 "형법에서의 비례의 원칙(Der Grundsatz der Verhaeltnismaessigkeit im Massregelrecht des StGB)"을 썼다.[1] 1984년 7월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고려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시간강사를 하다가, 1985년 3월 고려대학교 법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1987년 6월 항쟁 기간에는 생명과 생계를 걸고 정권에 맞서 싸우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1987년 6월 19일 고려대 동료 교수 17명과 함께 ‘민의는 확인됐다’라는 펼침막을 들고 고려대학교 본관 앞에서 농성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이로써 민주화운동 세력이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는 데 공헌하였으며, 그 후로도 사회 진보적 이슈에 적극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80년대 당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들의 강의는 거의 예외 없이 지루하고 현학적인 내용이었으며 권위적인 분위기로 흘러갔지만, 배종대 교수의 강의는 전혀 달랐다. 교재를 줄줄 읽는 식이 아니라 학생들과 대화하는 식으로 수업을 이끌어갔으며, 당시의 시국과 학생들의 앞날을 염려하는 이야기도 많이 하였다. 지나치게 이론적인 내용은 과감히 생략하고, 실제로 문제되는 사례들을 위주로 강의하였으며, 유머와 위트감각이 대단하여 수업시간 내내 학생들의 웃음이 터져나오게 하였다. 그 외에 학생들의 고민사항이 무엇인지 수시로 의견을 나누었으며, 힘든 청춘을 이겨낼 수 있도록 따뜻하게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도 많이 하였다. 그래서 1980년대 후반~1990년대까지 배종대 교수의 인기는 고려대학교 내에서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강의만 잘 한 게 아니라, 교내 보직에도 헌신적으로 참여하였다. 1994년 12월부터 1996년 9월까지는 고대신문 주간을 맡았고, 1996년 7월부터 1998년 6월까지 고려대학교 기획처장을 역임했다. 2002년 7월부터 2004년 6월까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장을 맡았고, 2005년 4월부터 2006년 3월까지는 고려대학교 교수의회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교내에서만이 아니라 학계에서의 활약도 대단하였다. 다수의 학술논문을 발표하였고, 2005년에는 한국 형사정책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2006년에는 한국 형사법학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3 학문업적
법학의 현학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매우 강렬하였다. 1988년 고시계에 '법이론 연구'라는 글을 투고하였을 때부터 줄곧 한자어보다 쉬운 우리말을 더 많이 사용하는 논문을 발표하여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권위와 수준이 떨어진다는 볼멘소리도 있었지만, 이에 구애되지 않고 여러 지면을 통해 법학의 고고함, 현학성, 지나친 한자 사용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하며 자기 소신을 밀어붙였다. 결국 그의 소신이 많은 학생들에게서 환영을 받자, 거의 모든 법학 분야의 논문과 교과서에서 한자표기는 자취를 감추었고, 한글표기가 법학계 전체에 걸친 대세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 외에 지나친 도그마틱 위주의 형법학교육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현실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교과서범죄가 형법 교과서 내용의 대부분을 채운다는 점, 형법 교과서나 논문의 문장이 지나치게 길다는 점, 지나치게 독일과 일본의 형법이론을 추종한다는 점,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형법이론의 정립을 위한 노력이 부족하다는 점 등을 계속해서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우리나라의 법학 현실의 문제점을 너무나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수많은 소장 학자들과 학생들에게서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1992년에는 기존 형법학을 단순히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까지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직접 형법총론 교과서를 저술하고 발간하기까지 하였다. 그 교과서는 여러 모로 수많은 형법학자들과 학생들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는데, 그 이유는 교과서 서문은 물론이고 본문의 첫장부터 그 문장 하나하나가 완전히 '깬다'는 데 있었다. 한 권의 법학교과서가 아니라 소설책을 읽는 것처럼 문장이 쉽고 재미있고 간결했을 뿐 아니라 내용도 흡인력이 있어 책장이 잘 넘어갔고, 형식도 워낙 새로워서 기존 교과서의 모든 틀이 무너진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형법교과서는 기존의 다수설을 아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다수설을 샅샅이 비판하였지만, 그러면서도 그 비판에 상당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었다. 교과서 전체적으로 구름 잡는 애매모호한 이야기나 '구라' 섞인 부분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철저히 현실적인 입장에서 오직 논리적인 도구만을 사용하여 자기 학설을 개진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쉽고 재미있고 간결한 문장에 지나치게 힘을 쏟을 경우 학문적 수준이 떨어질 염려도 있었지만, 교과서의 이론적 완결성 역시 흠 잡을 데가 없는 수준이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학생들이 배종대 교수의 형법학에 열광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형법전공에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드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2]
4 트리비아
- 학부 시절 우등생과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고 한다. 공부는 도외시하고 맨날 여기저기 놀러다녔다고 하며 학점도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1985년에 고려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고 하자, 그 소식을 들은 정대후문 근처 어느 하숙집 할머니께서는 "뭐라고? 배종대 그 녀석이 고대 교수가 됐다고? 말도 안 돼!!"라 외치셨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 일단 본인부터가 학창시절 그닥 모범생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다른 고법 교수들과는 달리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 '노오오력하라'는 말을 거의 안 하는 교수로 통했다. 그보다는 '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라' '네가 하고 싶어 하는 걸 하는 사람이 돼라'는 말을 평소 많이 했다. 강의도 마찬가지로서, 다른 교수들(예를 들어 이분)이 학생들에게 죽어라 열심히 경청하지 않으면 듣기가 힘든, 지루하고 빡빡한 강의를 많이 했던 반면, 배종대 교수는 학생들에게 자연스러운 몰입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강의를 많이 했다. 그러면서도 내용적으로 충실한 수업을 했기 때문에, 그의 강의는 고대법대의 대표적인 명강의로 꼽혔다. 아쉽게도 2015년 2학기를 마지막으로, 학부생 강의는 열지 않으며 은퇴 준비를 한다고 밝혔다.
- 그의 강의에서 절대적으로 금기시 하는 것은 바로 지각이다. 일단 지각을 하면 법대 강의실의 강단 양옆에 출입문이 있기 때문에 시선이 그 쪽으로 쏠리며 자신의 강의가 방해받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은 강의시간을 약속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예고없는 휴강을 하지 않으며, 또한 수업시작을 정시에 하는 것으로 학생들과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 한다. 지각을 할 바에야 차라리 결석을 하라고 하며, 대신 결석을 한다고 하여 점수를 깎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출석을 부르지 않고, 가끔씩 제출하는 10분 글쓰기, 15분 글쓰기 등으로 이를 대체한다.) 실제로 학기 초에 지각한 학생들에게 매섭게 호통을 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운동권 학생들과 교류가 두터웠고, 당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서 보기 드물었던 야권 성향의 교수로 분류되었다. 또한 맑시즘 법학이론에도 상당한 식견을 보여주는 등 앞으로 한국에서 본격적인 사회주의 형법이론의 선구자가 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를 모으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는 사회비판적인 시각이 많이 약화되었고, 노조탄압과 집회시위제한 등 각종 정치현안에 대한 참여적 발언을 자제하여 운동권 학생들의 존경을 많이 잃었다.
- 본디 대학교수가, 그것도 유명대학의 교수가 학원에서 강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 신림동 고시학원에서 강의를 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고시생을 위한 학원강의였음에도 불구하고 진도 뺄 생각은 안 하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 사회현안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와 이에 대한 형법학적 접근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여 화제가 되었다.
- 소위 교과서법학(가령 모 대법관은 '우리나라 법학자들은 교과서만 쓰고 연구는 하지 않는 듯?'이라고 원색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에 대해 '그게 뭐 어때서?'라는 쿨한(?) 반응을 보인 적이 있다.
앞으로 더 많은 교과서 내지 연구서가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물론 그 내용이 자기만의 독특한 학문적 경향을 반영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특별히 그런 것이 없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일정한 학문관은 태어나면서 가지는 것도 아니겠고, 계속 연구를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형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출처 : 형법총론, 제5판(1999) 머리말)
- 2002년 5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각종 정치 현안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기대하였던 학생들의 소망과는 달리, 비교적 지엽적인 주제만 건드리면서 화려한 글솜씨만 선보이다가 칼럼을 마치고 말았다. 특히 2002년 10월 25일의 칼럼 '사법시험 소송공포증'에서는 "소송은 ‘진실’ 규명을 목적으로 하고 학문은 ‘진리’ 탐구를 위해 존재한다. 시험은 학문 세계의 테스트 방법이다. 진리를 가늠하는 방편으로 이용되는 수단이다. ‘진실’은 하나이지만 ‘진리’는 그렇게 명쾌한 답변을 할 수 없다는 점에 어려움이 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인간이 무엇이고,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진리’를 말하지 못한다. 대학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 탐구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가르치는 곳일 뿐이다. 시험은 ‘잠정적 진리’를 테스트할 수밖에 없다. [...] 그러므로 시험문제의 정답에 대한 ‘합의’는 이 부분의 전문가인 학자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것이 순리라고 할 수 있다."(?)는 다소 비상식적인 주장을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고시생들이 분노를 터뜨렸다. 이로 인해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 배종대 교수에 대한 원색적인 욕설이 넘쳐나기도 하였다.[3]
- 2004년 이후 온라인 강의실 ‘형법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홈페이지 개설 당시 이미 50대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어느 법과대학 교수들보다도 더 성공적으로 홈페이지를 운영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법대 교수들이 만든 홈페이지의 대부분이 약력과 저서소개가 주를 이루고, 온라인 강의가 있다고 해도 빈약한 것이 다수였지만, 배종대 교수의 홈페이지에는 약력이나 저서 소개가 한 줄도 없이, 강의자료와 질의 응답, 교과서 개정분 등으로 내용이 채워졌다. 특히 매주 수업한 내용을 스트리밍 오디오 형태로 들을 수 있는 ‘음성강의’는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그 후 배종대 교수의 홈페이지는 2014년 네이버 카페로 이전되었는데, 예전처럼 활발한 업로드가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지만, 여전히 운영이 계속되고 있다.
- 2009년 이후로는 형사실정법과 형사정책에 관한 첨예한 법적 문제를 연구하는 대신, 한국법사상에 관한 논문들을 주로 발표하고 있다. 발표지면도 주로 '고려법학'에 한정되고 있는데, 50대 후반 이후 형법학자로서의 생명력은 이제 거의 끝난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한국법사상 관련 논문들 제목을 보면 '세종의 호학(好學)', '세종의 형법사상', '형법과 불교사상', '법치국가형법과 불이(不二)사상', '원효(元曉)의 화쟁(和諍)사상과 형법이론' 등이다. 형법이론에 한국법제사 또는 한국법사상을 접목한다는 시도 자체가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나, 견강부회가 너무 많고 학술논문으로서의 가치가 그리 높지 않다는 평가이다.
- 학부생들이 붙여준 별명은 초기에는 '배종D교수님'이었다. 학점에 대해 아주 약간의 자비가 생긴 뒤로는 'B종대교수님'으로 바뀌었다. 2015년 2학기를 마지막으로, 30년 간의 학부 강의를 끝마치겠다고 하였다. 마지막 수업시간에 그간의 일들을 돌아보는 이야기들을 첨언하였고, 학부생들에게 남긴 당부의 말은, 의외로 담배를 피우지 말 것이었다.
- ↑ 매우 잘 쓴 논문으로 심사위원들로부터 최우수의 점수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 후 수많은 독일 형법학논문에서 인용이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독일유학파 법학교수들은 독일에서의 박사학위논문점수가 최하점으로서, 간신히 박사학위만 받고 귀국한 사람들이 거의 다라고 한다.
- ↑ 물론 이는 배종대 교수만의 공은 아니며, 당시 김일수 교수가 개신교 계통에서 활약하며 수많은 크리스천 법학도들에게 영향을 준 것 역시 원인이 되었다. 1994년에 고대 교수로 임용된 이상돈 교수가 갖고 있던 개인적 인기도 배종대 교수를 능가할 정도였다.
- ↑ 아마도 배종대 교수는 출제오류로 소송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법학교수들이 곤욕을 치르는 게 못마땅하여 짜증이 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출제를 잘못한 교수들의 자업자득일 뿐이며, 이를 교수들의 학문세계에 대한 무시로 봐서는 안 된다 할 것이다. 배종대 교수가 뭔가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은 부분이고, 이 정도면 현실감각이나 학생들과의 소통의지를 거의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 배종대 교수의 괴퍅한 주장과는 달리, 이러한 출제오류의 문제는 학문적 논쟁과 전혀 무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