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적

黑山賊

1 소개

후한 말기의 도적집단으로 184년,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면서 각지가 혼란해질 무렵 황하 이북의 산맥지대를 중심으로 발생했다. 그 군세는 1백만에 달했다고 한다. 흑산도와는 관련이 없다.

1백만이라는 숫자는 과장이 있을 수도 있으나, 이들의 활동 영역인 사예 북부의 하내군부터 병주 전역과 기주 북동부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은 황하와 태행산맥을 끼고 있어 지세가 험하고, 흉노,오환과도 영역이 겹치는 지역이었기에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매우 약했으며, 당시 영제의 오랜 실정으로 관아의 수탈을 피해 달아나는 유랑민이 급증했기 때문에 유입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을 가능성은 높다.

황건적의 난 훨씬 이전부터 이 일대에 유랑민들이 다수 유입되어 있었고 이들이 도적떼와 비슷한 생활을 했을 가능성은 높지만, 본격적인 무장 봉기에 나서 조직적으로 군현을 공격하며 노략질을 하던 것은 황건란 직후의 시점인데, 대놓고 한왕조 전복을 표방하며 전국적인 농민봉기에 나섰던 황건란의 여파도 매우 컸겠지만, 흑산의 두령들 중 규모가 큰 자는 군세가 3,4만이며 아무리 적어도 5,6천에 달했다는 서술을 봤을때 그동안 셀 수도 없이 난립했던 소규모 도적떼들이 제각기 흡수,병합의 과정을 거치며 점차 대형화되는 시점과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듯 하다.

흑산적은 가장 강력한 두령이었던 장연을 맹주로 받들어 조직적으로 정부군에 저항했으며 황건란 종결 이후에도 여전히 존속해 황하 이북의 모든 현에서 흑산적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고 한다.

한왕조는 이들을 정벌할 능력이 없었기에 장연에게 관직을 내려 평난중랑장으로 삼고 관리를 천거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는데 이는 사실상 관할 구역 내에서 장연의 자치를 허락한 샘이었다. 하지만 조정측에서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은 것이 한편으론 다른 두령들에게도 관직을 내리며 회유함으로서 장연과의 갈등을 조장했다. 결과적으로 흑산적은 내분으로 무리가 흩어져 예전만큼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한다.

영제 사후 군벌시대가 도래하면서 기세가 수그러들었던 흑산적은 다시 활개치기 시작했다. 흑산적과 가장 대립했던 상대는 인접한 위군을 근거지로 잡은 원소였는데, 이미 191년 무렵부터 여러 분쟁이 보이며, 193년엔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 위군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으나 이후 원소의 집요한 반격을 받으며 세력이 와해되었다.

이후 원소가 죽자 흑산적은 혼란을 틈타 다시 회생한 것으로 여겨지나 조조가 원소의 후계자 원상을 격파하자 장연이 조조에게 투항하면서 완전히 해체되었고, 장연은 열후에 임명되어 500호의 식읍을 받았다.

장연을 비롯한 흑산 두령들의 대부분은 천민출신으로 제대로 된 이름이나 자가 없어서 부르는 별명이 그대로 이름이 된 것이라 한다. 흑산적은 후한말 군웅할거 시대의 여러 군벌세력 중에서도 가장 이색적인 케이스라 볼 수 있지만 사료적인 내용은 매우 부실하며, 삼국지연의에서도 거의 비중이 없기에 제대로 된 관심을 못 받는 주제에 속한다.

2 관련 인물

모두 나름대로 무리를 거느린 두령들이었지만, 대부분은 그 특이한 이름 외에는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원소에게 격파되었다는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