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
마티아스 | ← | 페르디난트 2세 | → | 페르디난트 3세 |
1578~1637
재위 1619~1637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재위 기간 동안을 30년전쟁으로 보냈다.
1578년 그라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남부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는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 카를 1세였고 어머니는 바이에른 출신의 마리아였다. 페르디난트 2세는 어려서부터 5년 동안 예수회가 세운 앙골슈타트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자연히 예수회의 영향을 어려서부터 받을 수 밖에 없어 독실한 가톨릭 교도가 되었다. 1595년에 비로소 앙골슈타트 대학교를 졸업하고 슈타이어마르크 대공이 되었다. 루돌프 2세와 마티아스의 권력 다툼에는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마티아스 황제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마티아스의 사촌 동생이 되는 페르디난트 2세가 자연스럽게 다음 황제 후보자로 떠올랐다. 1617년에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됐다는 것은 보헤미아에 있는 신교도들을 매우 불안하게 했다. 그동안 루돌프 2세가 내려준 칙서 덕분에 신앙의 자유를 누렸는데 페르디난트는 가톨릭 교도인데다 자신의 영지에서 신교도들을 몰아낸 일로 상당히 유명했던 것이다. 보헤미아에서 프라하 투척 사건이 발생하고 신교도들이 싸울 준비를 하기 시작하자 그는 보헤미아에서 일어날 반란을 진압해야 한다는 강경책을 주장했다.
마티아스 황제의 총신 클레즐 추기경이 보헤미아에 미지근하게 대응하자 1618년 페르디난트 2세는 클레즐을 투옥하여 티롤의 암브로스 성에 가두고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이 의회에서 페르디난트의 보헤미아 왕 자리를 빼앗는다고 선언하였으나 다른 선제후들의 지지로 명목상의 보헤미아 왕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고생을 거친 끝에 1619년 드디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페르디난트는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의 휘하 장군인 틸리 백작의 활약으로 보헤미아의 반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1622년 그는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의 왕에 오른 것을 반역으로 간주하여 그의 선제후 직위를 박탈하고 막시밀리안 공작에게 선제후 직을 넘긴다.
1625년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4세가 30년전쟁에 개입하자 위기감을 느낀 페르디난트는 예전에 자신을 도와준 적이 있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발렌슈타인은 페르디난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뛰어난 전략으로 덴마크군을 몰아낸다. 1629년에 페르디난트 2세는 신교도들이 빼았았던 교회재산을 다시 교회로 원상회복시킨다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더불어 절대 황권을 수립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수많은 제후들은 페르디난트의 정책에 대해 반발한다. 특히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는 이것이 발렌슈타인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발렌슈타인의 월권행위는 많은 영주들의 분노를 샀기 때문에 페르디난트 2세는 결국 발렌슈타인을 직위해제한다. 1630년에 스웨덴의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개입하자 페르디난트는 즉시 발렌슈타인을 재등용한다. 1632년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브 아돌프가 전사하자 발렌슈타인은 멋대로 적군과 평화 협정을 진행한다. 거기에 한 발 더 나가 발렌슈타인이 페르디난트 2세를 제거하고 보헤미아의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미자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1634년 결국 발렌슈타인은 암살당했다. 그 뒤에 제국군은 레겐스부르크를 재점령하고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웨덴군을 무찔렀다. 1635년 신교도들과 프라하 평화 협정을 체결해 페르디난트 2세는 전쟁이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과 루이 13세가 전쟁에 직접 개입하기로 결심했다. 이 둘은 합스부르크 가가 더 이상 강력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프랑스가 네덜란드, 스웨덴을 꼬셔 30년전쟁에 신교도를 도우러 가담하게 된다.
페르디난트 2세는 1600년에 첫 부인인 마리아 안나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장남과 장녀가 모두 어릴 때에 죽고 마리아 안나도 1616년에 죽었다. 1637년에 사망했다. 3남인 페르디난트 3세가 다음 황제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