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차

생몰년도? ~ 기원전 473년
재위기간기원전 495년 ~ 기원전 473년 (23년)
(姬)
부차(夫差)[1]
가족관계아버지: 합려 후궁: 서시

1 개요

춘추시대 오나라(吳)의 제 7대이자 마지막 왕.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와신상담 끝에 아버지의 원한을 보복하는데 성공한 복수귀였으나 하필이면 그 상대가 복수귀끝판왕이자 근성가이인 바람에...

재위 중반기까지만 해도 숙적인 월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며 아버지 합려의 뒤를 이어 오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명군이었으나, 재위 12년(기원전 485년)에 접어들어서는 교만에 빠져 혼군으로 전락하여 오나라를 망하게 하였다.

2 부차의 복수

합려가 (越)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숨을 거두었다. 태자였던 파(波)는 처를 잃고 요절해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오의 최고 실력자였던 오자서의 지지로 부차가 옹립된다. 부차는 가시가 많은 장작 위에 자리를 펴고 자며, 방 앞에 사람을 세워 두고 출입할 때마다 "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하고 외치게 하였다. 부차는 매일밤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원한을 되새겼다. 부차의 이와 같은 소식을 들은 월나라 왕 구천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오나라를 먼저 쳐들어갔으나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오자서의 도움으로 오나라의 국력을 키운 복수귀 부차에게 대패하여 오히려 월나라의 수도가 포위되고 말았다.

3 원수를 풀어주다

싸움에 크게 패한 구천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회계산(會稽山)에서 농성을 하였으나 견디지 못하고 오나라에 항복하였다. 그런데 부차는 지금 멸해야 후환이 없다는 오자서의 발언을 무시했고 월과 강화에 들어갔다. 포로가 되어 오에 잡혀온 구천이 똥맛을 봐 건강을 살펴주고 미녀 서시, 정단(鄭旦)을 바치는 등 아첨하고 뇌물을 주자 구천을 월로 돌려보내는 희대의 병크를 터트린다!아들아 복수는? 계속되는 승리로 교만해진 부차는 제후들을 소집해 패자에 오르겠다는 헛된 야망을 품었고 오자서와의 의견 충돌이 계속된다. 부차는 (齊)에 말도 안되는 협박장을 써서 오자서에게 들려보낸다. 제의 손으로 오자서를 죽이겠다는 뜻이었으나, 이를 간파하고 있던 제는 오히려 오자서를 융숭히 대접하여 돌려보낸다. 이를 참지 못한 부차는 결국 오자서에게 명검 촉루(屬鏤)를 내려 자결을 명하고는 그 시체를 장강에 던져버린다.

4 구천의 복수

부차가 대군을 이끌고 제를 공격하는 도중 구천은 오를 기습해 태자가 사망했고 나라의 대부분이 구천에게 장악된다. 부차는 구천에게 전에 살려준 예를 들어 항복했다. 마음 약해진 구천이 순간 망설였을 때 범려가 "쓸개를 핧으며 복수를 다짐하던 일을 잊으셨습니까!"라며 진언하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전에 자신을 살려줬기 때문에 차마 죽일 수는 없었는지 백호의 장[2]으로 봉하겠다고 제안한다. 부차는 자신이 늙어 군왕을 섬길 수 없다며 그 제안을 거절하고 저승에서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며 고소산에서 얼굴을 가린채 자결했으며 그 뒤 오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합려와 부차, 그 아들까지 3대가 월나라에 의해 희생되었다. 흠좀무

5 여담

5.1 창작물

태평광기에서는 월나라에서 바쳤다는 여인이 이광(夷光), 수명(修明)으로 나와 부차가 그녀들이 마치 옅은 안개 속에서 샇인 한 쌍의 난새처럼 보였으며, 지수의 물가에 떠 있는 연꽃처럼 보였다면서 두 명의 아름다움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 했다. 또한 월나라가 오나라를 침공하자 부차는 두 미녀를 품에 안고 화원으로 달아났는데, 월나라 군사들이 두 미녀를 보고 선녀가 하강했다고 하면서 쳐다보기만 하고 함부로 범하지 못했다고 한다.

5.2 유물

1983년 강릉 마산 호북성 초나라 무덤에서 오왕부차모가 발굴되었다. 오왕부차모(吳王夫差矛)의 기부(基部)에 두줄로 8자의 금착명문이 있으며, 오왕 부차가 자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 합려의 경우처럼 부차라는 두 글자 이름 대신 외자 이름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불명.
  2. 호는 가구를 세는 기본 단위로, 백호는 1백가구. 즉 왕에서 동네 이장으로의 대강등이며, 왕의 자격이 없다고 말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