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웨스트 더비

(북서부 더비에서 넘어옴)
리버풀 FC
Liverpool 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Manchester United
노스웨스트 더비 (North West Derby)
종합전적
리버풀 FC
Liverpool FC
무승부맨체스터 유나이티드
Manchester United
655380
최근 5경기 전적
일시장소결과대회
2015년 9월 12일올드 트래포드맨유 3 - 1 리버풀프리미어 리그
2016년 1월 17일안필드리버풀 0 - 1 맨유프리미어 리그
2016년 3월 10일안필드리버풀 2 - 0 맨유유로파 리그
2016년 3월 17일올드 트래포드맨유 1 - 1 리버풀 [1]유로파 리그
2016년 10월 18일 안필드리버풀 0 - 0 맨유프리미어 리그

1 개요

잉글랜드 북서부 전통 명문 구단들의 자존심 대결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명문 축구 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리버풀 FC. 두 팀 다 잉글랜드 북서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노스웨스트 더비라 불린다. 또한 둘 다 강을 끼고 있는 무역의 중심이 된 강변 도시이자 공업 도시이다.

2 배경

맨체스터와 리버풀 사이는 고작 30마일로, 한 시간이면 다녀 올 수 있는 거리이다.

맨체스터와 리버풀에 가면 반드시 방문해야할 명소가 있다. 맨체스터는 산업박물관, 리버풀은 알버트 독이다. 산업박물관은 수로 사업을 기반으로 한 맨체스터의 눈부신 성장의 역사를 담아낸 곳이며, 알버트 독은 항구도시의 기초를 닦은 곳이다..

이러한 관광명소들이 보여주듯이, 맨체스터와 리버풀 두 도시들은 18세기 산업혁명 때 급속도로 발전했다.

맨체스터는 철도와 운하 사업으로, 잉글랜드 북서쪽 해안가에 위치한 리버풀은 항만산업으로 눈부신 성장을 거두었다.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맨체스터가 초기에 우위를 가져갔고, 인근에 있던 항구도시 리버풀도 함께 성장했다.

맨체스터는 시대를 앞선 기술로 수많은 공산품을 생산하던 도시로, 영국의 수출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맨체스터 시에서 만들어내는 공산품 양도 많아졌고, 맨체스터는 수출품목을 머지사이드 항구를 이용해 세계로 내보냈기 때문에, 맨체스터 인근에 있던 항구인 리버풀이 수출로 엄청난 수익을 가졌다.
1830년에는 영국 최초의 도시간 철도 노선이 두 도시 사이에 놓여 협력 관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공업물자의 수송을 담당한 것은 맨체스터리버풀을 잇는 철도였는데, 이 노선은 세계 최초로 전 구간에 기관차를 이용한 여객 및 화물 운송을 수행, 근대적인 철도 운송 시스템의 시발점이 되었다.
대영제국 시절 전세계 무역의 절반 이상을 거쳤던 리버풀은 당시 영국 최대 규모의 무역항이었고,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도 리버풀에서 출항했다.

1894년, 맨체스터는 항구의 물류비용이 비싸 공산품을 스스로 직접 수출하기 위해 맨체스터에서 곧바로 아일랜드 해로 연결되는 운하를 건설했고, 그 때 당시 서양에서 가장 큰 운하를 완성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엠블럼에 범선은 이 맨체스터 운하를 의미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전 세계의 경제가 휘청거렸고, 영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승전했지만, 세계 초강대국의 지위를 잃어버렸다. 2차 세계 대전, 그 전쟁이 벌여졌던 한복판인 유럽에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복구에 힘쓰게되고, 이 후 미국과 소련이 최대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2]]

전쟁 이후, 외국인 노동자의 진입장벽이 낮아지면서 항만산업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리버풀은 직격탄을 맞았다. 현지 부두 노동자들은 해고되기 일쑤였고 리버풀의 경제는 휘청거렸다.

그러나 맨체스터는 기반은 제조업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타격을 적게 입으면서 어느정도 유지해갔다.

3 역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878년 창설
리버풀 1892년 창설. 존 하울딩이 에버튼 운영진들과 재정운영에 관한 이견으로 당시 에버튼 중심축을 데리고 나가 개설한 팀이 리버풀이다. 머지사이드 더비참조.

축구사에서 맨체스터와 리버풀, 축구사에서 양 팀이 경쟁체제 돌입했던 것은 빌 상클리 체제 이후였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 리버풀은 2부로 강등되어서 침체기를 겪었고, 반면에 전설적인 명장 맷 버스비의 지도하에서 안정기를 갖게 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혼란스러운 리버풀은 1962년 빌 샹클리 감독이 부임하면서 맨유와 경쟁 구도를 띠게 된다.
1959년, 어떤 알 수 없는 두 남자가 허더스필드에서 경기를 막 끝낸 빌 샹클리에게 가까이 가며 말을 걸었다. (당시 빌 샹클리는 허더스 필드 감독)
그 두 남자는 리버풀 회장 윌리엄스와 디렉터인 해리 래텀이었는데

이봐, 혹시 이 나라의 최고 클럽 감독 자리에 관심이 있나? 라고 물었던 리버풀 보드진에게 빌 샹클리의 대답은

"뭐요? 혹시 맷 버스비가 짐싸는 중이요?"....(라고 맨유 감독직으로 착각을 하기도 했다)

두 팀이 우승을 다투던 기간은 1964 ~ 1967년.
60년대 맨유와 리버풀은 다소 우호적이라고 할 정도 지금보다는 사이가 좋았다.
맨유의 매트 버스비(1909~1994)와 리버풀의 빌 샹클리(1913~1981), 살아생전 두 사람은 매우 절친했던 사이로 유명했기 때문.

- 1960년대 초반에는 양 팀간의 라이벌 관계가 그리 크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적어도 현재 같지는 않았다. 리버풀은 당시 2부리그 팀이었고, 버스비와 샹클리, 양 팀 감독들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 1962년 리버풀이 1부리그로 승격이 되었을 때도, 많은 변화는 없었다. 심지어 필 치스날이 1964년 이적을 했음에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는 에버튼 FC가 더 큰 라이벌이었다... -TV 프로듀서 데이비드 할-

빌 샹클리는 당시 올드 트래포드에서 자주 볼 수 있었고,보비 찰튼경도 안필드에 자주 놀러갔다.
당시 리버풀 팬들이 가장 좋아했던 맨유 레전드는 보비 찰튼경으로, 엘로카드 조차 한 장 안받았던 매너에다가 월드컵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주인공이어서 인기가 많았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항상 샹클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항상 그랬다. 버스비와 함께라면 구단 뿐만 아니라 구단 경영진 회의에도 참석했다. 그들은 언제나 축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샹클리는 맨유 선수들을 보기 위해 자주 우리 클럽을 찾기도 했다. 언제나 붉은 색 셔츠와 넥타이를 멘 샹클리는 인사도 매번 같았다. "어이, 아들, 잘 지내고 있어?"라고 인사 한 뒤에 "넌 올드 트래포드에 오는 게 아니라 리버풀에 왔어야 했어"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데니스 로-
데니스 로는 달걀 껍질 위에서도 춤을 출 수 있었다 -빌 샹클리-

1981년 샹클리가 급사했을 당시, 버스비는 상심이 너무 컸던 탓에 관련 취재 및 전화 통화 요청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맷 버스비경은 빌 샹클리의 후임으로 온 페이즐리의 롤모델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이후.
리버풀에는 과거의 영광을 스스로 걷어 차버리며 세계적으로 축구종주국의 망신을 주는 큰 사건 하나가 일어났는데...

헤이젤 참사 - 1985년 5월 29일, 1984/85 시즌 유로피언 컵에서 리버풀와 유벤투스가 결승전이 열린 보두앵 경기장에서 벌어진 참사. 경기 도중 리버풀 서포터들이 중립지역을 넘어 유벤투스 응원석으로 들어가 각목과 쇠파이프 등으로 무차별적인 폭행을 저질렀고, 그들이 공격한 대상 중에는 일반 관람객들도 있었다. 이에 대응해 유벤투스 서포터들도 맞섰지만, 결국 피해를 본 것은 유벤투스 서포터와 일반 팬들. 리버풀 서포터의 공세에 밀리며 사람들이 출구 쪽으로 도망가다가 결국 사람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낡은 콘크리트 벽이 무너지면서 39명이 사망하고 454명이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헤이젤 참사로 UEFA는 잉글랜드 클럽팀들에게 향후 5년간 국제 대회 출전 금지라는 징계를 내렸는데, 이 징계는 다른 리그 팀들에게 큰 피해를 끼쳤다. 특히 에버튼 FC는 오랜만의 리그 우승을 하여서 유럽대항전 진출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사건으로 인하여 유럽 대항전 진출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는 리버풀-에버튼 간의 갈등의 골(머지사이드 더비)이 더욱더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리버풀이 7-80년대 분데스리가가 유럽을 호령하던 시절 활약하면서 스스로 끌어 올리는데 기여한 잉글랜드 1부 리그의 위상에 스스로가 일으킨 큰 참사로 인하여 리버풀 구단은 물론이고 리그 전체에 큰 피해를 주었으며 많은 팀들이 이로 인해 여러모로 피해를 보게 되었다.

헤이젤 참사로 잉글랜드 리그는 암흑기에서 서서히 들어가게 되었다.
이는 지금과는 다른 당시 클럽의 수익 구조상, 유럽 대회의 진출 여부가 클럽에 재정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헤이젤 참사로 축구 종주국이자 최상위 리그(리그 순위 3위 안)에 속했던 잉글랜드 리그가 29위로 추락하게 된다.

최상위리그 잉글랜드 리그가 어느 정도의 변방리그로 추락을 했냐면,
세리에에선 그저그런 주전급선수였던 파올로 디카니와
타리그 로테이션 멤버수준이었던 베니토 카르보네라가 잉글랜드 리그를 씹어먹을 정도로, 처참하게 망한 리그가 되었다.

결론은 두 팀의 라이벌리는 그저 지역감정에 비롯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는 맨유-에버튼 관계를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에버튼도 마찬가지로 리버풀 연고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맨유와의 교류가 상당히 활발하다. 맨유에서 밀려난 선수가 에버튼에서 뛰고, 에버튼에서 이름 날렸던 루니가 맨유의 상징으로 자리잡는 것도 흔한 일이다.
결국 두 팀은 단순히 지역감정 때문만은 아니고 지역감정과 결합하여 암흑기를 겪어야만 했던 잉글랜드 리그 축구사 문제와 프리미어 리그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를 가진 두 팀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맞수'가 되어 리그 내에서 최고로 치열한 라이벌리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3]

4 여담

- 수아레스의 인종차별 사건이 일어난 던 경기도 노스웨스트 더비이다.

리버풀의 공격수 루이스 수아레스(우루과이)로부터 경기 도중 최소 10번 이상의 인종차별적 폭언을 들었다 -에브라-

조사 결과 백인인 수아레스가 흑인인 에브라를 향해 "검둥이(negro)"라고 모욕한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수아레즈는 8경기 출장 정지와 벌금 4만 파운드(약 7200만 원)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검둥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맞지만 우루과이에서는 인종차별적인 의미를 지닌 표현이 아니다 -수아레스-

리버풀 팬들은 수아레스를 지지하는 티셔츠를 제작해 단체로 착용하며 ‘인종차별 옹호’가 아니냐는 뜨거운 논란에 휩싸였다.
파일:수아레스인종차별2.jpg
이 사건 후 경기 전 선수들이 악수하는 과정에서 수아레스가 에브라와 악수를 하지않아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다. 이 사건 직후 리버풀 팬들 중 백인 우월주의자 소행으로 추정되는 마스크가 발견됐다. 백인우월주의를 상징하는 모양에 리버풀FC를 줄인 LFC가 적혀있고 '수아레스는 아무 잘못이 없다 (Suarez is innocent)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TV중계에 한 리버풀 팬이 에브라를 향해 원숭이 흉내를 내는 장면이 그대로 전파에 탔고, 체포당해 조사받은 적이 있다.

- 맨유의 전 주장 게리 네빌은 2006년 1월22일 리버풀과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골이 터지자 리버풀 응원석으로 달려가 맨유 엠블럼에 입을 맞췄다.

- 맨유의 현 주장 웨인 루니리버풀 태생으로 에버튼 유스를 거쳐서 에버튼에서 데뷔한 후 맨유로 이적한 선수이다. 리버풀의 전 주장이자 리버풀을 대표하는 스티븐 제라드와 절친인데, 두 가족끼리 같이 여행도 가고 루니는 심지어 리버풀의 응원가 YNWA를 불렀다고 한다(...) 아내도 리버풀 태생으로 그녀는 리버풀팬이다(...) 그러나 리버풀 서포터들은 그런거 없고 맨유에서 루니를 가장 싫어하며 루니가 공만 잡으면 야유소리가 엄청나다. 현지 팬의 증언에 의하면 머지사이드 더비 관계의 에버튼 FC 출신이면서 동시에 지역경제 침체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도시의 대표 클럽을 상징하는 선수이기 때문이라는 듯.

- 두 팀 선수들의 엇갈린 운명도 유명하다. 다년간 맨유의 수비를 책임졌던 리오 퍼디난드와 슈퍼서브 올레 군나르 솔샤르는 원래 리버풀의 서포터였으며, 리버풀의 현 주장 조던 헨더슨과 지금은 스토크시티로 이적한 조 앨런은 원래 맨유의 서포터였다.

- 2011년 맨유의 홈구장 올드 트래퍼드에서 열린 FA컵 경기에는 리버풀 원정 팬에게 티켓 9천 장을 배분했다. 그러나 경기 후 리버풀 팬들이 경기장 내 화장실을 파손하며 난동을 부려 현장에서만 18명이 체포되었다. 이후 맨체스터 경찰은 원정 티켓 수를 3천 장으로 대폭 축소했다.

- 리버풀의 전 주장 스티븐 제라드는 자신의 마지막 노스웨스트 더비에서 퇴장을 당했다. 교체선수로 그라운드를 밟은 지 40초 만의 일.

- 헤이젤 참사 이후 리버풀에 또 한번의 사건이 터지는 데, 이것이 힐스버러 참사이다. 당시 맨유 감독이었던 퍼거슨이 가장 먼저 리버풀의 안필드에 도착하여 엄청난 액수를 기부하고 떠났다.

- 여담으로 최근의 노스웨스트더비는 각자의 홈에서 원정팀이 경기력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리버풀은 정신 못 차리고 안필드에서 맨유도 경기력이 안습이다. 2016년 1월 17일 안필드에서 치뤄진 노스웨스트 더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1 : 0 으로 승리를 거둠에 따라 리버풀은 반 할이 이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2년간 5전 전패를 기록하는중(...) 리버풀 팬들에겐 실로 뒷목을 잡을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그 반할 한테 이 경기에서 웨인 루니는 안필드에서 무려 11년만에 득점하는 데 성공했다.

- 과거 잉글랜드 리그에 무지했던 스포츠 기자들이 멀쩡한 더비명을 놔두고 레즈 더비라고 불렀다. 최근에는 조금씩 본래의 더비 이름인 노스웨스트 더비로 정정되는 추세이다.

5 매치기록

현재(2015년 8월 8일)까지의 상대전적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72승, 리버풀: 62승, 무승부: 51회로 맨체스터유나이티드가 약간 우위를 잡고있다.

놀랍게도 두 팀은 역사적으로 단골 손님이었는데도 유럽 대항전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는데, 2016년 유로파리그 16강전에서 드디어 처음 만났다. 2016년 3월 11일 안필드에서 펼쳐진 1차전에서는 데파이와 수비진들의 삽질로 리버풀의 2:0 승리. 2016년 3월 18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펼쳐진 2차전에서는 전반 마샬쿠티뉴의 골로 1:1. 리버풀이 총합 스코어로 3:1로 8강에 진출했다.
  1. 총합 스코어 3-1로 리버풀이 8강 진출
  2.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굴욕적인 뮌헨 협정을 체결하면서까지 전쟁을 최대한 막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뮌헨 협정을 어기고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이 폴란드마저 침공할 경우 선전포고할 것임을 여러 번 히틀러에게 전달했으며, 이를 무시하고 폴란드를 침공한 건 분명 독일이다.
  3. 당시 잉글랜드는 축구종주국으로 자부심이 남달랐다. 오죽하면 초창기 월드컵도 3번(1930년, 1934년, 1938년)이나 출전을 거절했다.웸블리 스타디움을 'The Home of the Football'이라 칭했을 정도니. 1955년 챔피언스 리그도 잉글랜드 축구협회은 맨 처음에 리그 우승팀에게 불참을 권유하며 막으려고 했다. 그런 그들이 1985년 헤이젤 참사로 전 세계에 대망신을 당했으니, 잉글랜드 축구 종사자들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