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양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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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北洋艦隊. 왕조의 말기, 서구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창설되었던 4대 서양식 함대인 북양, 남양, 복건, 광동함대 중 최대,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던 함대로, 정식 명칭은 북양수사(北洋水師)이다. 한때 동양 최강의 함대로도 불리며 기울어가던 청 왕조의 마지막 자랑거리로 위세를 떨쳤지만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사실상 첫 실전이었던 황해 해전에서 일본의 연합함대에 패하면서 허무하게 궤멸당하고 만다.

2 창설

1871년부터 청조는 연안방위를 위해 새로 편성된 4개 함대를 운용하고 있었다. 이들 이른바 4대 수사(함대) 중 가장 강력한 함대는 상하이에 본진을 두고 있던 남양수사(남양함대)였고, 북양수사는 4개 함대중 최약체로 분류되었지만, 당대 청조의 실력자였던 이홍장은 북양대신의 직위에 취임하면서 자신의 세력권에 해당되는 북양수사를 전략적으로 육성하고자 막대한 예산을 북양수사에 집중시켰다. 이 결과, 1884년 청불전쟁 발발 즈음, 북양수사는 남양수사에 버금가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청불전쟁으로 남양함대가 궤멸당하면서 북양함대가 급부상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래서 1890년 즈음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북양수사가 사실상 청조 해군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위용을 자랑하게 된다.

3 극동의 무적함대

문단 제목이 복선
북양함대가 다른 3개 함대를 능가하는 최강의 함대로 불리웠던 이유는, 다른 3개 함대와는 달리 군함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비를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업국이자 해군국이었던 영국과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던 독일로부터 직도입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1884년부터 1885년 사이에 북양함대가 연이어 직도입한 독일제 전(前) 드레드노트전함인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은 7천톤급의 배수량과 30센티미터가 넘는 두께의 측면장갑, 그리고 무장으로 12인치 구경 2연장 포탑 2기, 6인치 구경 포탑 2기를 장비한 거함으로, 영국 다음가는 대해군을 건설하고 있던 기술선진국 독일에서 건조된 전함답게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사실상 이 배들에 맞설 전함이 존재하지 않았고 1891년 일본에의 친선방문 당시에는 일본 해군 관계자들을 패닉에 빠뜨렸다는 일화가 있을만큼 당대의 불침함으로 여겨졌을 정도였다.

비록 1888년에 이르러 청조의 실권자 서태후가 해군 건설에 추가 투자를 중단하면서 북양함대의 증강은 중단되기에 이르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점에서 청조의 해군력은 총 척수 78척, 총 톤수 83,900톤에 이르러 최소한 동양에서는 유이하게 근대적 군비를 갖추고 있던 일본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특히 정원과 진원의 존재감은 대단해서, 일본은 심지어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황해에서 북양함대와 맞붙을때까지도 동급의 전함이 없었다. 황해 해전 당시 일본 연합함대의 기함이었던 마츠시마는 배수량 4,277t밖에 안되는 순양함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당시 보유한 함포들로는 정원과 진원에게 이빨도 안들어간다는 것을 깨닫고 구경 32cm의 대형 함포를 4천톤급 순양함에 달아버리는 미친짓을 했는데 이들이 마츠시마를 비롯한 3척의 삼경함 시리즈였다. 게다가 달아놓은 방식도 순양함의 선두나 선미에 32cm구경의 함포를 아무런 방어장갑 없이 딱 1문만 달았는데 당연히 밸런스가 개판이었으며 장전속도나 선회속도가 바닥을 기었다. 여기에 더해서 위력도 신통치 않았는지 32cm포탄이 정원에 단 한발 명중하긴 했는데 큰 대미지를 주지 못한 걸로 판명됐다. 즉 완벽한 뻘짓. 그나마 3경함은 일본의 독자 아이디어가 아니라 북양함대의 거함에 대응하려는 일본의 오더를 받은 프랑스가 독자적인 아이디어를 넣어서 만든 함선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종의 세트 플레이를 노렸다고도 할 수 있는데, 당대 일본 해군도 이런 컨셉에 불안을 느껴 4번함은 취소해버리고, 이후 프랑스가 아닌 영국이나 미국에 신형함을 주문하게 된다.

4 그러나....

하지만 이러한 위세 이면에는 급조된 해군 특유의 문제점이 숨어있었고, 그 문제점이 끝내 북양함대의 파멸을 이끌어내고 만다.

  • 서양식 군비를 갖추기 위해 서양에서 군함과 장비를 사들이고 교관을 불러들인 것은 좋았지만, 문제는 인적자원의 질이 너무나 형편없었다는 것이었다. 최신장비를 사들여본들 다룰 사람이 없었고, 그 훈련을 시키자고 데려온 서양인 교관은 의사소통부터 어려움을 겪는 형편이었다. 여기에 청조 말기의 극성맞은 부패 풍조까지 겹쳐져서...
  • 북양대신 이홍장은 강력한 해군 건설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점까지는 좋았지만, 원래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면서 대두하게 된 그는 육전에서는 능력을 발휘했을 지는 몰라도 함대 운용에 대해서는 그 역시 한계가 있었다. 이홍장이 북양수사의 최고책임자로 임명한 정여창 역시 청국 내에서는 독보적인 경력과 재능을 가진 자들이었다고는 하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청조 말기의 부패 현상이 너무 심해서 함대 유지 및 보수에 대한 예산이 크게 부족했다. 이건 서태후의 탓이 가장 크지만, 이홍장도 함대의 설립자면서 이런 책임에서는 벗어나기 어렵다. 한마디로 말해서 누구 한사람을 주범으로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당시의 부패상이 너무 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전투시 함대운용전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당장 정여창 자신도 함대의 보전을 염두에 두고, 단 1회의 해전으로 안그래도 적은 양만 간신히 보유한 탄약을 전부 사용할 수 없기에 출격하면서도 상당수의 탄약을 해군의 보급창에 남겨두고 원래 보유할 수 있는 탄약량보다 적은 탄약만 가지고 해전에 임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
  • 정원과 진원은 분명 스펙만 놓고 보면 극동 최강의 전함이라 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이러한 최신식 전함을 유지 및 관리할 역량이 청조에 있었는지 여부도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독일은 청불전쟁 당시 중립을 핑계로 이 함들의 인도를 일부러 지연시킬 정도였으니, 청이 이 전함들을 제대로 다룰지 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여기에 주포는 탄약마저 부족해서 청일전쟁 개전 당시에는 포문당 2~3발 정도의 탄약만 간신히 확보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마저 있을 정도다. 실제로는 도입 초기부터 탄약이 부족한 상태로 오랫동안 예산 부족에 시달리다가 청일전쟁 발발 전에야 겨우 어느 정도 탄약을 추가 구입했다. 그나마 교전시에는 제대로 된 포탄조차 갖추지 않았다. 함대는 물론이고 해안포에서 쏘는 포탄도 제대로 된 철갑유탄이 아니라 폭발하지 않는 불발탄이었다. 포탄 안에는 석탄가루와 흙, 등이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먹어랏 팝콘탄!! # 이런 포탄으로 명중시켜봤자 치명타를 입힐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구조적인 문제도 있는 것이, 그 엄청나다던 12인치 포탑도 말이 포탑이지 사실은 상부가 훤하게 노출된 노출형 포대(…) 덕분에 속사포를 가진 소형함에도 쉽게 제압당할 수 있었다. 물론 해당 군함을 인도할 시점에서는 영국 해군의 신형 전함들 중에서도 주포가 노출형 포대에 탑재된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하지만, 당시의 해군 군함의 발전속도가 매우 빨라서 이미 몇 년 지나지도 않아서 완전한 구식으로 전락한 주포 탑재 방식이었다. 그래서 훗날 뚜껑을 덮어서 간신히 문제점을 해결했으므로 1894년 황해 해전 당시에는 장갑화된 유개 포탑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반대급부로 안그래도 느린 포탑선회속도가 더 느려졌다.
  • 북양함대가 스스로의 위력을 과신한 나머지 다른 함대로부터 제대로 된 지원을 먼저 받는 것을 까먹었고, 다른 함대들도 북양함대 혼자서 일본군을 맞아 싸우는 것을 사실상 방관했다. 국가대 국가간의 전쟁에서 있을 수 없는 이런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이미 군벌의 태동기에 진입한 시점이라 각 함대는 해당 함대를 창설한 사람의 사병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굳이 자기 재산인 함선과 인명을 손실하면서 다른 녀석이 좋아할 일을 할 이유가 없으며, 그렇게 하더라도 나중에 보상받을 길도 막막하기 때문이다.
  • 북양함대는 대구경 주포의 숫자는 일본함대를 압도하였으나, 소구경이나 중구경 속사포의 숫자에서는 열등하였고, 함선의 경우도 정원과 진원을 제외하면 일본함대가 약간 우월했다. 문제는 이 시기에는 아직 협차일제사격같이 대구경 주포의 명중률을 높이는 기술이 개발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대구경 주포는 원거리에서는 느린 발사속도와 조준속도로 인해 명중이 불가능에 가까워서 근거리에서 치명타를 먹이는 용도로 사용되던 상황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실제 전투가 개전하자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정원과 진원외의 타 함선들이 일본군의 속사포에 연속으로 적중당해서 전투력을 상실하고, 정원과 진원은 최대발사속도로 대구경 주포를 발사했으나, 명중률이 크게 떨어져서 별 피해를 못입히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이미 이 시점에서 해전은 참패했다.
물론 썩어도 준치라고 명색이 전함인 이 둘을 당시 일본의 함선으로선 격침이 불가능해서 정원은 159발의 명중탄을 맞고도 건재했다. 그리고 사망자가 불과 17명에 불과할 정도의 단단함을 보여줬지만 포격의 반동으로 사령관이 부상당하며 지휘능력을 상실하는 희대의 개그씬을 연출해버리고 만다. 이는 전적으로 독일측의 설계미스였다. 덕분에 사방이 포위당한 상황에서도 정원과 진원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독자적으로 황해 해전에서 탈출까지 성공했다. 오죽하면 중상을 입고 죽어가던 일본 수병이 '정원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라는 유언을 남겨 이 에피소드로 군가까지 만들었을 정도였다. 특히 대형포를 가진 덕에 어그로를 끌었던 마츠시마가 진원의 30.5센티포에 직격당하며 대파당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죽어가던 수병이 옆의 부장에게 '정원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라는 말을 남겼고 부장은 전투불능이 됐다며 안심시켰다. 이에 그 수병은 옅은 미소와 함께 죽었다라는 이야기가 군가의 줄거리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마츠시마를 대파시킨건 진원인데 왠지 정원이 일본인들의 어그로를 끌며 유명세를 타고 있다.
  • 북양함대의 승무원들은 열심히 전투에 임했으나, 정여창을 제외한 고급 장교들은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함장을 맡은 고급 장교들이 이런 현상이 심해서 잘 싸우던 자신의 함선을 전장에서 임의로 도주하게 만드는 개뻘짓을 수행했다. 역시 이것도 패배의 큰 원인이 된다. 일례로 황해 해전당시 북양함대의 좌익을 맡았던 순양함 중 하나인 '제원'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적전도주했다.

요컨대, 겉보기로는 최강이었지만,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었다.

5 말로

황해해전에서 패배한 후 일본군에게 나포되거나 격침된 함을 제외한 나머지는 위해위에 있는 본거지인 유공도로 피신하였으며, 곧 일본군이 산동반도에 상륙해서 위해위 주변을 몽땅 장악한 후 포위전을 벌였다. 결국 이 과정에서 대다수의 함선이 탈출도 못해보고 교전중에 좌초나 침몰하거나 항구에 정박한 채 나포당해서 북양함대는 사실상 소멸한다.

정원과 진원도 유공도까지 피신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정원은 유공도 주변에서 섬을 포위하려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일본 어뢰정의 야습으로 대미지를 입고 좌초되어 노획을 피하기 위해 자침해버렸고 진원은 노획당하고 마는 최후를 맞이한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간 후, 북양함대에서 아직 쓸만한 함선은 모조리 일본이 압수해서 배상함이라는 명목으로 일본 연합함대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다른 함대가 명목상 지원해준 몇 척의 함선도 북양함대 소속에서 싸우다가 역시 나포되었는데, 이 함선을 돌려달라고 해당 함대의 제독들이 일본군에게 탄원... 한 사실이 있어서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당장 이 문서 내용만 봐도 청나라 대 일본의 싸움이 아니라 북양함대 대 일본함대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는걸 알수 있는데, 이 때문에 과연 청나라가 국가간 전쟁을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는 비난까지 들었다. 그리고 배도 못찾았다. 그리고 일본은 이를 본받아 육군과 해군이 따로놀았다.

그리고 북양함대에서 빼앗은 함선은 일본군이 오랫동안 써먹지는 못했다. 불과 10여년후인 러일전쟁무렵에는 무적전함이라던 진원은 이미 2등전함으로 분류되어 2선급 전력이 되어있었는데 불과 10년사이에 일본은 일등 전함으로 배수량이 두배인 15,000톤급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칠듯한 속도로 발전하던 당시의 군사기술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일화다. 이것도 모자라서 진원은 1908년에는 훈련용 함선이 되고 1911년에는 아예 제적당한후 연습용 표적으로 전용되어 파괴당했다. 1912년에는 매각되어 고철로 스크랩처리됐다. 무적의 전함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던 함선이 준공후 불과 13년만이자 노획후로는 불과 3년만인 1898년에 2선급이 되고 진수 30년째에는 아예 고철로 분해되는 기막힌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6 청일전쟁 당시 북양함대 전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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