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전간기의 일부


날짜1935년 10월 3일 ~ 1936년 5월 5일
장소에티오피아 전역
교전국23px-Flag_of_Italy_%281861-1946%29.svg.png 이탈리아 왕국23px-Flag_of_Ethiopia_%281897-1936%3B_1941-1974%29.svg.png 에티오피아 제국
지휘관23px-Flag_of_Italy_%281861-1946%29.svg.png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23px-Flag_of_Italy_%281861-1946%29.svg.png 베니토 무솔리니
23px-Flag_of_Ethiopia_%281897-1936%3B_1941-1974%29.svg.png 하일레 셀라시에
결과이탈리아군의 승리
병력총 50만 명
전차 795대
항공기 595기
80만 명
피해규모전사 2만여 명
부상/질병 18만여 명
전사 27만 5천여 명
부상 50만여 명

1 개요

이탈리아 왕국과 에티오피아 제국간이 펼쳐진 두번째 전쟁으로 에티오피아는 이 전쟁으로 패망, 이탈리아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2 배경

전체적인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활력을 찾지 못한 이탈리아의 경제와 산업, 그리고 이를 만회하고자 하는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정권의 대외 확장정책에 있다. 동시에 이탈리아는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패배에 따른 굴욕을 만회하고자 하는 심정이 강했고, 이탈리아령 에리트리아와 이탈리아령 소말린란드를 육로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의지도 강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는 1928년에 이미 양국간 평화중립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고, 국제연맹의 일원이었기에 위의 이유만으로 일방적인 침략전쟁이 일어날 상황은 아니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적어도 1935년까지는 국제사회의 강대국 지도자로서 외교적 신뢰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양국 관계가 전쟁으로 번진 데에는 이탈리아의 침략 야욕을 직접적으로 부채질한 두 가지 사건 때문이다.

하나는 이탈리아-에티오피아간 무력 충돌이다. 1934년 11월~12월에 발생한 아비시니아 위기의 근본원인은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 식민지간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데 있었다. 이탈리아 식민지 정부는 경계가 불분명한 지역을 자국 영토로 해석하고 군을 보내 진지를 구축, 당연히 이를 용납하지 않은 에티오피아군이 응전하여 상호간의 대규모 교전이 발생하여 양측 합쳐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양국은 서로 상대방을 맹비난하고 국경에 군사력을 증원하였으나 이 위기가 바로 전쟁으로 번진 것은 아니었다. 국제연맹은 1935년 초부터 양국간 중재에 나섰고 영국과 프랑스도 당시에는 우호국이었던 이탈리아의 편을 들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위기가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노력했다. 이탈리아군과 무솔리니도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군의 전쟁계획을 준비한 것은 확실하지만 최소한 35년 초까지는 에티오피아에 대한 전면침공에 나설 생각은 없었음이 분명했다.

이는 당시 유럽대륙의 정세에 기인한다. 1935년 3월,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하여 전 유럽에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이때의 이탈리아는 명백히 1차대전의 승전국이자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국으로서 독일의 재군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특히 1934년 오스트리아 수상 돌푸스 암살 사건 직후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시도에 맞서 오스트리아 국경에 군을 급파해 무력으로 맞서 이를 저지한 것이 이탈리아였다.

무솔리니는 영국, 프랑스와 함께 3국이 공동으로 독일의 재군비와 팽창정책에 맞서며 대응한다는 스트레사 체제를 구축했다. 당연히 독일이라는 강적에 맞서는 게 급선무였으니 무솔리니와 이탈리아로서는 굳이 에티오피아를 침략해서 동맹국 영국, 프랑스와 척을 지는 자충수를 거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영국이 먼저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하여 사실상 독일의 재군비를 공인해주었다는데 있었다. 바로 이게 전쟁을 부채질한 두번째 일이었다.

영국-독일 해군조약에 따른 영국의 배신에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격분했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특히 무솔리니는 영국의 배신을 경험하고선 영국이 먼저 대독전선을 파기했는데, 고작 에티오피아를 침공한다고 누가 뭐라 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3 전개

1935년 10월 3일, 이탈리아 왕국군은 에티오피아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에 나섰다. 이탈리아군의 투입병력은 총병력 50만에 항공기 600여 기, 전차 600여 대로 이탈리아가 투입 가능한 거의 대부분의 전력이었다.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이나 각종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글에서는 고작 에티오피아를 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탈리아라며 비웃지만, 사실 저정도 전력 투입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당시 에티오피아군의 총병력은 80만에 달했다. 물론 80만을 모두 동원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병력 수 자체가 엄청 많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것이고, 이탈리아군이 보유한 수백여 대의 전차를 제대로 활용할만한 지형도 아니었다. 에티오피아는 기본적으로 고원 지대다. 에티오피아를 얕잡아본 과거의 이탈리아군이 본국의 증원없이 식민지군 1만여 명으로 침공에 나섰다가 단 한 차례의 전투(아도와 전투)에서 참패해 주력을 모조리 상실하고 참담한 패전을 겪은 것이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다. 즉, 이탈리아가 저정도 전력을 투입하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사실 미군도 베트남과 훗날 이라크와 아프간을 상대하며 엄청난 수준의 전력을 투입하긴 했다 물론 미군이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한 전력은 미군이 보유한 총전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에티오피아로서는 40년 전과 비교해서 여러 면에서 상황이 불리했다. 제일 먼저, 40년 전과 달리 이탈리아가 방심하지 않고 제대로 된 전력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는 것은 아도와 전투의 승리와 같은 한타 싸움을 통한 일발역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국지적인 승리를 여러 차례 거두더라도 이탈리아군이 계속해서 쏟아져나오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또, 40년 전에는 전군을 에리트리아 지역에 투입할 수 있었지만 1935년에는 이탈리아가 그동안 새로이 확보한 식민지인 이탈리아령 소말린란드와도 접하게 되면서 북부와 남동부에서 동시에 방어전을 펼쳐야 했다.

실제 개전 직후 이탈리아군의 대규모 공세에 맞서 에티오피아군은 성공적으로 지연전을 펼쳤고, 오히려 1935년 12월에는 북부전선에서 크리스마스 공세라 불리는 대규모 반격을 감행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에 에리트리아 방면에서 진격하던 이탈리아군은 크게 후퇴해야만 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군도 깊숙하게 진격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고, 남동부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이 깊숙히 진격해오는데다 이탈리아군이 독가스[1]를 대대적으로 사용하는 등의 문제로 반격에 의한 전과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군의 1936년 1월 공세로 에티오피아 남동부 전선은 크게 위축되었고, 같은 해 2월에서는 북부전선에서도 이탈리아군이 독가스를 대대적으로 이용한 반격에 나서며 전선을 돌파했다. 국제법 따위는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례들중 하나다. 실제로 일본도 2차대전 도중 중국에는 마음대로 독가스를 썼지만, 미군에게는 감히 쓸 엄두도 못냈다 그런데 독일은 무슨 깡인지 소련에서도 독가스를 사용했다

1936년 3월 말이 되면 북부전선의 에티오피아군 주력 부대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수도 아디스아바바로 가는 통로가 활짝 열리게 되었다. 에티오피아군은 소부대 단위로 지연전과 게릴라전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2세는 망명하였으며 외교적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정작 저 두 나라는 이탈리아를 대독 공동전선에 붙잡아놓기 위해 에티오피아를 버리려 하는 중이었다.

결국 1936년 5월 5일 아디스아바바가 함락되면서 전쟁이 끝났다.

4 결과

종전 후 이탈리아는 에리트리아, 에티오피아, 이탈리아령 소말린란드를 합쳐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식민지를 건설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에티오피아 황제를 겸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에티오피아 각 지방에선 부족 단위로 이탈리아의 통치에 반발하여 이탈리아는 1940년까지도 이들을 진압하느라 상당한 병력을 할애해야 했다. 이렇게 남은 에티오피아 저항세력은 파시스트 점령군에 맞서 외로운 게릴라전을 벌이다가 본격적으로 2차대전이 터지자 영국령 소말릴랜드를 통해 영국군의 지원을 대거 받아서 오르드 윙게이트 장군의 지휘 아래 성경의 기데온에서 이름을 딴 기데온 군단이란 이름으로 참전, 1941년 에티오피아를 다시 해방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전쟁의 의의는 이탈리아가 대독 공동전선에서 이탈, 독일과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다는 데 있다. 사실 베니토 무솔리니도 처음부터 독일과 협력하기보다 그냥 영국이 뒤통수때린 김에 식민지나 넓히자는 생각이었고, 영국과 프랑스도 같은 이유로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방관했지만 이후 라인란트 재무장에서 무솔리니가 아직 에티오피아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에 적극적으로 영프에 협력하지 못하고 사실상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을 지지하게 되면서 영프와 이탈리아는 등을 돌리게 된다.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일단은 반세기 전 아도와 전투의 굴욕을 갚았다는 식으로 훌륭한 선전거리가 되었지만, 실제 전쟁 과정에서는 태반이 제대로 근대화도 안 된 에티오피아군을 상대로 종종 졸전을 벌이며 미숙함과 부족한 역량을 노출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좀 자숙해서 역량을 먼저 키워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는지 전쟁 끝나자마자 옆동네에서 터진 스페인 내전에 나치 독일보다도 훨씬 더 큰 규모의 대규모 개입을 하면서 일년 예산의 20% 정도나 까먹으면서 막상 메인 라운드라 할 만한 1939년의 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이탈리아군이 졸전을 하는 주된 계기가 되었다. 한마디로 국가 산업과 국력을 전쟁에 쏟아 붓는 총력전으로서의 2차 세계대전은 적어도 이탈리아에게는 1939년이 아닌 1935년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패전 후 영국으로 망명간 하일레 셀라시에는 유명무실했던 국제연맹 회의에서 이탈리아의 제국주의적이고 잔인한 침략전쟁을 강하게 규탄했으며, 이는 이탈리아 대표들만 빼고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각국 대표들에게 비장하지만 동시에 결연한 의지가 보이고,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자국의 정의를 호소한 명연설로 칭송받았지만 이 당시 국제 여론이 좋아봐야 애초에 난리치고 깽판치는 나치스, 일제같은 애들이 국제 여론을 신경 쓰고 사는 인간들이 아니니 실질적인 효과는 없었다. 다만 여기서 발생한 촌극이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게, 하일레 셀라시에가 입장하자 이탈리아측 대표들과 언론인들은 찌질한 침략국 아니랄까봐 야유와 함성을 내지르며 셀라시에의 연설을 방해하려 했고, 심지어 아무리 인종차별과 사회진화론이 판치던 시대라지만 한 나라의 군주를 상대로 열등 인종 깜XX 드립을 치며 훼방을 놓으려 했다.[2] 그러자 이 꼴을 보다 못한 다른 나라 대표들은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고, 결국 당시 같은 파시즘을 향한 길을 걷던 외교적으로는 우방국에 가까웠던 루마니아[3] 대표로 자리에 참석해 있었던 니콜라에 티툴레스쿠(Nicolae Titulescu)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탈리아측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프랑스어누구 좀 저 미개인들에게 출구 좀 보여줘라(A la porte les sauvages!)[4]라고 일갈하자 인종드립 치다 막상 지들이 미개인 취급받은 이탈리아측 인사들은 모두 데꿀멍했다.

이후 에티오피아는 인종차별적 법안과 강제 노역으로 가득 찬 이탈리아 점령군의 학정을 받으며 레지스탕스를 조직하여 싸우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인 1941년에 영국군에 의해 해방된다. 비록 점령 기간이 짦긴 했지만 막장 제국주의자들답게 아오스타 공작 치하 이탈리아 당국은 에티오피아의 주류 민족인 암하라인들을 비롯한 같은 기독교를 믿는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중심의 민족들은 탄압하고, 중간 행정직 같은 위치에 그동안 암하라인들과 반목했던 무슬림 소말리인, 오로모인들을 채워 놓으며 이런 면에서는 참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비해도 꿀릴 것 없는(...) 거한 똥을 싸지르며 훗날 에티오피아 제국의 내부 갈등에 큰 씨앗을 남겨 놓았다.

참고로 생화학무기를 동원하여 나치급 인종청소질을 에티오피아에서 싸질렀던[5][6] 루돌포 그라치아니 사령관은 누가 자기를 암살하려고 했다고 하면서 3만명을 학살했으며, 낌새가 수상하다며 정교회 사제들이 가득 차 있었던 데브레 리바노스 수도원을 수백명의 순례객들과 함께 불태워버렸다. 이 인간같지 않은 '아비시니아의 도살자' 루돌포 그라치아니 사령관은 전후 처리를 하는 동안 그를 전범으로 기소하려고 했던 에티오피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유색인종들이 다스리는 아프리카 후진국"의 의향 따위는 전혀 듣지도 않은 열강들 덕분에 아무런 죄값도 치르지 않고 제명에 죽었다. 당장 1943년 무솔리니 실각 이후로도 충실하게 그의 딸랑이 노릇을 하였으며 살로 공화국 소속으로 자국인 이탈리아 빨치산들도 엄청나게 처죽인 전적 덕분에 본인도 전쟁 끝나고는 무사하게 넘어 갈 거라 생각을 안했다. 하지만 빨치산의 대다수를 장악했던 이탈리아 좌파에 맞서 우익 세력을 키워 줄 필요가 있었던 영국과 미국 당국의 개입으로 징역 19년 판결 나자마자 몇달 뒤에 바로 풀려났다(...).
  1. 이탈리아는 생화학무기 사용을 규제한 제네바 의정서에 대해 10년 전 서명한 상황이었다.
  2. 아무리 이 시대가 미쳐돌아가는 시절이었다 해도 공식석상에서 다른 나라의 군주를 상대로 인종드립을 친다? 게다가 에티오피아는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아도와 전투 같은 전례 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기독교 국가였다는 점을 매개로 중세부터 그 존재가 알려 있었던 당당한 민족의 가족들 (family of nations) 중 하나였다.
  3. 베니토 무솔리니는 루마니아를 같은 로마 제국의 후예라면서 엄청 띄워줬다.
  4. 티툴레스쿠는 프랑스 파리 대학에 유학한 엘리트 출신으로 외무장관 등의 요직을 거친 루마니아의 외교관이며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루마니아 상임대표로 두번 선출되었던 인물로서 파시즘의 행보를 걷던 루마니아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이 강골의 지식인은 후에 들어선 루마니아 파시스트 정권을 정말 가루가 되도록 씹었으며 결국 1941년 3월 17일 망명지인 프랑스 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5. 소위 신사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이탈리아군의 모습은 유색인종을 상대로 했던 에티오피아전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다. 에티오피아전에서 이탈리아군은 파시스트 침략군 본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였다.
  6. 실제로 이탈리아 역사학계 내에서는 한바탕 시끄러운 수정주의 논쟁을 거치며 도달한 결론이지만, 현대 크로아티아달마티아 해안 같이 당시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적 민족주의자들이 마땅히 이탈리아의 성스러운 고토로 취급했던 지방들에선 이탈리아군도 나치와 별 다름 없이 패악질을 저지르며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에티오피아야 본문에 잘 설명되어 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트리에스테를 주도로 오스트리아령 연안주(Österreichisches Küstenland/Litorale Austriaco)라 불렸던 지방은 슬라브인들을 집중적으로 지역 인구 20%를 살해한 전적이 있으며, 비슷한 분쟁지역이었던 쥐트티롤 같은 지방은 독일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대놓고 학살만 안 했지 심한 문화, 언어적 탄압을 가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말마따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독일만큼의 국력이 없어서 패악질을 나치 스케일로 치지 못했던거지, 특별히 더 착해서 그랬던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