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조 히데키

추축국 의 주요 지도자들
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
아돌프 히틀러카를 되니츠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베니토 무솔리니피에트로 바돌리오
일본 제국
쇼와 덴노고노에 후미마로
(전쟁 이전)
도조 히데키고이소 구니아키스즈키 간타로
역대 일본 총리
38.39대40대41대
고노에 후미마로도조 히데키고이소 구니아키
파일:4QmKTki.jpg
이름(東條(東条)[1]英機, とうじょう ひでき)
생몰년1884년 12월 30일 - 1948년 12월 23일
총리 임기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18일
출생지일본 제국 도쿄
사망지일본 도쿄
정당대정익찬회
종교신토불교[2]
배우자이토 가쓰코

1 개요

내 친구병졸 출신이지만, 나는 장군이오. 걱정할 거 없소.

- 스기야마 하지메가 작전이 정치에 질질 끌려가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자 한 대답.

"전력비율은 삼분의 일이라 해도 일본에는 세계 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황국정신이 있다"

-1941년 9월 일본과 미국의 전력차 비교 결과 도무지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육군성 군사과의 보고에 대한 답변.

일본군의 수괴로 아시아 전체를 짓밟으며 나아가 미국 진주만까지 침공한 태평양 전쟁의 최고 원흉[3]이자 일본군의 수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아시아의 히틀러.

일본군 육군 소속이며 최종계급 대장.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장교의 이미지가 '안경 끼고 콧수염 기른 빡빡이' 로 정착된 것은 이 사람 탓이 크다.

워낙에 벌여놓은 일이 거대하고 잔혹해서 유능하고 과감한 성격의 장군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일본군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무능했던 인물이다. 멍청하고 쓸데없이 부지런한 작자한테 권한까지 쥐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반면교사로 딱인 인물. 지도자의 돼먹지 않은 철학과 부도덕으로 국가가 어느 정도의 파멸까지 갈 수 있는가에 대한 좋은 예시.

2 전쟁 이전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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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 시절의 도조

아버지[4] 때부터 군인 집안이었고 도쿄 출생으로 육군대학을 다녔는데 아버지는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도조 히데키의 성적은 매우 좋지 못했다. 특히 유년시대엔 싸움대장이였으며 겁도 없이 상급생 20명에게 덤비고 뒤지게 얻어맞은 다음에야 싸움을 접고 공부에 전념했다. 육군대학 시험을 앞두고서 합격에 필요한 학습 시간을 계산해서 하루에 공부 시간을 정하고 쪼개서 시험을 준비했다. 근데 3번이나 떨어진 후 간신히 졸업했다.

그렇게 어찌저찌 졸업한 뒤 관동군 헌병사령관, 참모장, 일본 육군 차관을 역임했다. 다만 육대 출신 엘리트들과는 다르게 다양한 직책을 전전했는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초슈 쪽 라인에게 찍혀서 한직을 돌았다. 실지로 육대 출신이면 갈 까닭이 없는 한직인 헌병사령관도 했다. 육군의 헌병대가 큰 권력을 행사한 조직이지만, 그와 별개로 사령관의 권한은 별 것 없는 자리였고, 사실상 이 자리를 주면 좋은 말할 때 나가라는 뜻이었다.

물론 도조는 때를 기다린다는 측면에서 그냥 역임. 이후에는 당시 군부의 최고 유력 파벌이였던 통제파의 주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는데, 통제파의 수장이였던 나가타 데쓰잔이 황도파 장교 아이자와 사부로에게 암살당하자 그 뒤를 이어 도조가 통제파의 수장이 되었다.

그가 관동군에 헌병사령관으로 있었을 때 그 악명 높은 731 부대가 생체실험도 했고 프로파간다라는 말도 있지만 10만의 반일 분자를 재직시 1만으로 줄였다는 평도 얻을 정도였으며, 실지로 만주에 부임했을 때 딸들에게 "몸값도 없고 굴복할 생각도 없으니 비적이 납치해도 구하지 않겠다"라 공언했다고 한다. 그래서 도조 히데키에게 면도기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그 이유는 도조가 일을 빠르게 처리했기 때문에 이런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936년에는 대립 관계였던 황도파가 2.26 사건을 일으키자 도조가 이끄는 통제파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적극적으로 황도파의 쿠데타를 진압하였다. 결국 황도파는 완전히 몰락하고 통제파가 군부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게 되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확대 되었다. 이후로 내각은 각료의 인선이나 정책에 대해서까지 군부의 요구를 수용해야 했고, 군부는 내각을 지속적으로 압박하여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5]를 부활시키고 군의 정치 개입을 용인하는 등 '국방 국가' 구상을 정강으로 내세워 군부의 권력을 끝없이 강화시켰다. 또한 본격적으로 군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던 나치 독일과 독·일 방공협정을 체결하고 군사비 약 14억엔을 포함한 방대한 예산을 편성하는 등 정치체제의 군국주의화, 파시즘화를 가속화시켜 나갔다.

1937년에는 국민당 정부와의 타협을 반대하고, 중앙의 통제파와 연계하여 중일전쟁이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도록 유도했으며1940년에 고노에 내각에서 육군 대신에 임명된 후에는 외무 대신과 협력하여 일본 제국이 추축국에 가입하는 일에도 한몫 했다. 그 후에는 태평양 전쟁을 기획하고는 그 기획안을 육군 수뇌부에게 공개하여 열렬한 지지를 얻고, 1941년 10월에는 대미 개전을 반대하던 고노에 후미마로를 압박하다가 결국 고노에 내각을 무너뜨렸으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을 주둔시켜 영국미국을 상대로 슬슬 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오랫동안 끝나지 않고 지속되자, 도조는 "이 상황에서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무리하게 전선을 늘리는 것은 위험하다."며 태평양 전쟁의 개전을 '중일전쟁이 마무리 되고 어느정도 전후 수습이 된 후'로 미루겠다는 뜻을 밝힌다. 하지만 이미 도조가 공개한 태평양 전쟁 기획안에 취향저격 당한 육군 강경파는 당장 전쟁을 시작하자며 난리를 쳤고, 우습게도 태평양 전쟁의 기획자인 도조가 태평양 전쟁 개전에 반대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전 총리인 고노에는 "심각하게 폭주하는 육군을 통제하고 대미 개전을 막을 수 있을만한 인물은 황실의 큰 어른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정도 밖에 없다."며 나루히코를 새로운 총리 후보로 추천했고, 도조 역시 당장은 대미 개전에 반대하는 입장이 된 만큼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쇼와 덴노의 최측근이였던 기도 고이치는 "지금 육군은 황실의 큰 어른이든 뭐든 간에 자신들 뜻에 따라주지 않으면 무시해버리고도 남을 놈들이다. 지금 당장 육군을 통제하고 대미 개전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은 군부의 수장인 도조 히데키 뿐이다."라며 도조를 총리 후보로 추천했다. 이 말을 들은 쇼와 덴노는 고민 끝에 "이른바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는 말이로군."이라며 도조를 총리로 임명했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태평양 전쟁의 기획자였던 도조는 미국과의 외교적 갈등을 풀어나가기 위한 새로운 내각의 총리가 되었고, 일단은 교섭을 통해 미국과의 갈등을 해소해보려 노력했으나 미일 양국 간의 입장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도조의 이러한 방침 변경에 큰 배신감과 실망감을 느낀 육군은 그를 따르기는 커녕 도조 내각마저 압박하며 당장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도조는 결국 쇼와 덴노와 기도 고이치를 찾아가서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을 설명하고는 "이 상황에서 계속 전쟁을 피하려다가는 여론이 분개하고 육군 강경파가 폭발하여 쿠데타가 일어나 황국은 결국 대규모 내전 상태가 되어 자멸할 것이다."라고 전했다.

즉, 도조는 육군 강경파의 뜻대로 당장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며 덴노를 거듭 설득했고, 더이상 육군을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한 쇼와 덴노도 이를 승인했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마침내 도조는 진주만 공습을 명령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

3 태평양 전쟁과 전시 총리로서의 행적

1억의 일본인들은 이제 조국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희생해야 한다. 세계의 평화라는 제국의 목적을 위해 이러한 우국충절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미국도 영국도 두렵지 않다. -도조 히데키, 진주만 공습 후 미국, 영국에게 선전포고 중

정의 없는 국가는 망하고, 이상 없는 국민은 쇠퇴한다. 다행스럽게도 황국 일본은 이 2가지를 모두 갖고 있다.
-1942년 3월의 연설 정의 없는 국가, 이상 없는 국민 2개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망하고 쇠퇴했나 보다

육군 강경파의 폭주 때문에 사실상 억지로 일으킨 전쟁이였으나, 놀랍게도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연속으로 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던 도조도 "내가 미군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괜한 걱정을 했었다."며 모든 걱정과 근심을 떨쳐버리고 적극적으로 전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게 실망감을 느끼던 육군 역시 다시 도조를 적극 지지하며 믿고 따르게 되었다.

한편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수많은 관직을 집어먹으며 더욱 권력을 강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문부, 상공, 군수대신까지 겸임하게 된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태평양 전쟁에서의 패색이 점점 짙어져가며 도조가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이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전황이 악화되자 일본 정계는 물론이고 해군 측에서도 도조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비난 여론이 급격히 늘어났으며, 그와 동시에 점점 더 전황이 막장으로 치닫자 결국엔 통수부, 즉 육군의 참모총장과 해군의 군령부장이 ‘전시 통수권 독립’을 명목으로 중요한 군사 정보를 도조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도조는 1944년 2월 21일 ‘국무와 통수의 일원화’를 명목으로 육군 참모총장과 해군 군령부장의 경질을 단행하고 본인 스스로 참모총장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이 무렵의 도조 히데키는 현대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국방부 장관 교육부 장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안전행정부 장관 기획재정부 장관 육군참모총장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인 셈.

실질적으로는 차관이 장관직을 하니 이렇게 겸직해도 일단 겉모양은 그럭저럭 굴러갔다지만, 대부분의 관직은 1년도 안 가서 물러났다.

이렇게 통수권 독립의 관례를 깨고 행정수반인 총리대신, 육군 군정의 장인 육군대신, 육군 군령의 장인 참모총장 3직을 장악해버린 도조는 정계와 해군으로부터 "육군이 완전히 도조의 사병 집단이 되어버렸다", "천황의 대권 마저 대놓고 침해하는, 그야말로 '도조 막부'가 따로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일본 헌법과 정치/군사제도의 구조상 전시내각을 총리의 의도대로 끌고 가려면 주요 장관직을 총리가 얻어야만 했다. 장관 1명이라도 정책에 딱지를 놓고 파업하면, 당시 일본은 각내 불일치로 내각 전체가 깡그리 물러나야 했으니. 당시 일본의 체제에서는 총리의 권한이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조는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상술했듯이 도조는 총리가 되기 전부터 이미 군부의 수장이였다. 그리고 군부는 당시 일본에서 실질적인 최고 권력 집단이였기 때문에 군부의 최고 권력자는 곧 일본의 최고 권력자나 다름 없었다. 애초에 군부는 내각의 통제를 아예 거부하며 오히려 틈틈이 무력으로 내각을 압박하고 있었고, 통수권자인 덴노에게는 충성을 맹세했지만 이 또한 덴노가 군부의 뜻대로 나라가 돌아가게끔 국가원수로서의 권한을 행사해주는 대가로 군부는 덴노를 무력으로 압박하지 않고 충성한다는 암묵의 룰이였기 때문에 결국 덴노도 군부의 눈치를 보며 행동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군부와 내각을 모두 점령한 도조는 이미 절대적인 권력자였고, 심지어는 국무와 통수의 일치 및 강화를 주장하며 육해군 통수부 총장의 경질을 단행하고 스스로 참모총장까지 겸임했다.

그러나 도조가 전쟁을 이끌면서 점점 그의 매우 실망스러운 군사적 능력이 끝없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여기에 그의 답 없는 인재 등용 능력까지 더해져서 온갖 무능한 바보들과 미치광이들이 군에서 높은 자리를 해먹는 바람에 일본군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희대의 막장 집단 중 하나가 되어버리고 만다.

일본군을 대전말 막장 집단으로 만든 데는 도조 히데키도 단단히 한 몫 했다. 대표적인 예가 1941년 1월 8일 육군 대신이었던 도조가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군기가 흐트러지고 있다며 발령한 훈유(訓諭)인 '전진훈'. 전진훈에서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지 말라"고 항복 금지를 명문화하여 쐐기를 박아놓는 바람에, 태평양 전쟁에서 무수한 일본의 젊은이들이 옥쇄라고 쓰고 개죽음이라 읽는 상황에 몰려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정작 자기 자식들은 전쟁터로 보내지도 않았다. 도조 히데키의 장남은 눈이 나쁘다는 이유로 안전한 만주의 풍만발전소로 보냈고, 차남은 미쓰비시 공업에서 자동차 사장을 지냈으며, 3남은 육사에 입학했지만 졸업은 못하고 항공자위대에서 소장 계급까지 진급 했다. 수백만 명의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희생됐지만 끝까지 세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지 않아서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태평양 전쟁이 그야말로 개막장으로 치닫자 일본 정계에서도 도조 히데키에게 비난 여론이 급격히 늘어났다. 언론 통제로 민간과 군에서는 나라 돌아가는 자세한 꼴을 몰라 대놓고 비난은 못했는데, 당시 일본의 정보 통제가 워낙 철저해서 정부의 고위 관계자조차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를 몇 달이 지나서야 알 정도였다. 심지어 도조 자신도 처음엔 제대로 몰랐다. 해군 군령부에서 제대로 정보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조는 해군의 보고를 그대로 천황에게 올렸는데 천황이 자신과 다른 수치로 알고 있었던 것을 듣고는 그제서야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를 알았을 정도였다.

사실 통수권자인 쇼와 덴노 말고는 전체적인 전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인물이 없었다. 비록 도조가 군부의 수장이였다고는 하나 엄연히 육군 출신이였기 때문에 해군 측에서는 당연히 도조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도조에게 전시 상황을 보고할 때에도 중요한 내용은 빠뜨리거나 아예 왜곡해서 보고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반대로 육군의 전시 상황에 관해서는 도조가 쇼와보다도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과달카날 전투 당시 육군 참모본부 작전부상 다나카 장군이 선박 지원을 요청[6]했지만 도조가 거부하자 욕설을 퍼부어 경질되기도 했다.

무타구치 렌야의 희대의 팀킬 만행인 임팔 작전을 하는 것에도 이 인간이 기여했다. 다만 이 부분은 결재받을 때 우물쭈물 준비도 안한 걸 그냥 넘어간 아랫사람 책임도 있다. 거꾸로 도조는 임팔 작전시 위험사항을 정확하게 인식했다.

실제로 도조는 "보급 문제는 해결 가능한가?", "현실성 있는 작전이냐?", "증원 병력이 더 필요하겠느냐?", "버마 방어에 공백이 없겠느냐?", "상대의 공중-지상 입체 공격을 막을 수 있느냐?", "해상으로 연합군이 밀려왔을 때 막을 수 있냐?" 등을 물어봤다. 그래봐야 어차피 결재했지만.[7] 자세한 것은 임팔 작전 참조.

다만 아주 뻘짓만 한 건 아닌지 일본 육군 항공대 소속 항공기들에 방탄장갑과 연료 자동 봉입장치를 장착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렇게 갈수록 여러 삽질과 문제점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면서 도조 히데키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도조는 자신을 비판하는 장성은 요직에서 해임시켜 전사할 확률이 높은 최전선으로 보내거나 예비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언론인, 지식인, 관료 등은 나이에 상관없이 ‘징벌소집’하여 이등병으로 전선으로 보냈다.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정적이나 비판 세력에게 강권적인 통치를 자행한 것이다. 특히 헌병사령관이었던 경험을 살려 본래 군인 · 군속에 대한 군사경찰을 주 임무로 하는 헌병을 자의적으로 국회의원 등 정치가를 비롯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도 광범위하게 활용하며 공포정치, 이른바 ‘헌병정치’를 실시했다.

이 글을 보면 알겠지만 의외로 히틀러처럼 정권을 잡는 정치적 능력만큼은 우수한 것처럼 보인다. 일단 주류 인맥에서 찍혀서 오늘 내일하던 사람이 순식간에 군부의 수장이자 독재자가 된 것을 근거로 들 수 있다.

4 총리 사퇴 후 죽기까지

이미 전황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이던 1944년 7월 일본 본토 폭격을 할 수 있게 된 사이판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며 스스로 총리 직을 사퇴했다. 이것도 도조가 만주국 이래로의 맹우인 기시 노부스케를 장관직에서 해임하려고 시도했으나 기시가 "나 자르려면 네놈도 절대 국방선 붕괴의 책임을 지고 같이 물러나라!" 면서 강경하게 고집을 피운 덕분에 같이 사퇴했다.

그러나 당연히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어도 도조의 어마어마한 권력은 건재했으며, 사퇴 직후에도 고이소 구니아키를 대놓고 꼭두각시 총리로 내세우는 등 지속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전쟁을 이끌었다. 게다가 고이소가 원로 중신들에게 탄핵당한 후에는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육군 대장 하타 슌로쿠를 차기 총리 후보로 추천했다. 그리고는 스즈키 간타로를 추천하는 해군과 문관들을 "육군이 아닌 사람이 총리가 되어버리면 국토 방위의 주력군인 육군이 내각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곤란해질 것"이라며 협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미 도조의 위험성을 알아버린 쇼와 덴노는 스즈키를 총리로 임명했고, 도조와 육군은 정말로 내각의 지시를 거부한 채 따로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후에 쇼와 덴노, 스즈키 총리, 그리고 중신 대부분이 항복을 주장한 끝에 결국 태평양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일본 통치가 시작되면서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일본 시민들은 뻔뻔하게 살아있는 도조 히데키에게 "너 때문에 자식이 죽었다. 할복해서 국민에게 사죄하라", "빨리 자결하라"는 수만 장의 편지가 집으로 왔지만 무시했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시민들로부터 돌로 맞아서 시체가 거꾸로 매달리는 사진이 보도됐을 때에는 겁을 잔뜩 집어먹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추악한 시체는 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놓은 짓이 워낙 많은지라 종전 뒤 전범 재판에 섰다. 재판에 올려지면 사형이 거의 확정인 상황에서 체포되기 직전인 45년 9월 11일 권총 자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심장을 쐈다가 빗나갔다. 이때 당시 미 육군 병사의 피를 수혈해서 목숨을 살렸다. 이로서 도조는 살아서 포로가 되고 극진한 치료까지 받는 크나큰 치욕을 당함으로서 전진훈이 다 헛소리였음을 몸소 입증했다.

게다가 도조가 자살기도를 한 정황을 살펴보면, 권총 자살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머리 관자놀이나 턱에 대고 쏘거나 입에 물고 쏘는데 도조는 드물게도 가슴에 대고 총을 쏜 점, 도조는 왼손잡이였는데 자살을 시도할 때는 굳이 심장을 쏘겠다고 오른손으로 피스톨을 다루다 조준이 빗나간 점, 항복 방송(8월 15일)부터 주요 전범 체포 명령(9월 11일)까지 한 달 넘게 자살할 여유가 있었는데도 가만 있던 인간이 하필 미 육군 헌병들이 잡으러 대문까지 도착한 것을 창문 너머로 보고 자살소동을 벌여서 곧바로 병원으로 실려간 점 등 수상쩍은 점이 한둘이 아닌지라, '실은 죽기는 싫은데 책임지는 척은 해야 할 거 같으니까 자살 쇼 한 거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고 있다.

사실 자살 소동 이전에, 자살 여부를 상의하기 위해 육군성에 가서 육군 대신인 육군대장 시모무라 사다루 장군과 상의하였다. 자살하고 싶으면 혼자 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관청에 출두하여 남과 상의를 하다니, 자신이 자살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닌 셈. 시모무라 장군은 "국가가 항복한 것이지 도조 당신 개인이 항복한 것이 아니니 개인적 치욕이 아니다. 더욱이 당신이 나서지 않아서 일왕이 책임을 지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말하며 자살을 말렸다. 이 정도까지 말했는데 자살 시도한 것은 "나는 자살할 테니, 모든 패전의 책임은 일왕이 책임지셈"이라는 뜻. 이후 전범 재판 때 "나의 모든 행동은 일왕의 뜻에 따랐다"라고 증언하여 책임 회피성 발언을 하는 등, 전혀 책임질 자세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심장의 위치를 몰라 의사를 불러서 가슴에 원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 매일 목욕을 마치고 나서 부인의 도움을 받아 원을 다시 그렸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원의 위치가 바뀌었는지 엉뚱한 곳에다가 쏘았다. 총도 그의 사위 고가 히데마사 육군 소좌(육대 58기)가 자살하면서 남긴 콜트 32가 있었는데 굳이 위력이 약한 호신용 콜트 22로 자살 시도하였다. 이에 극우 인사인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는 2005년 산케이신문에 심지어 당시의 미 육군 헌병 부사관도 '대장이 그런 꼬락서니라니! 뭐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손으로 막을 수 있는 콜트 22로 가슴을 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라는 글을 기고 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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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사진이 도조가 자살에 실패한 다음날 신문 1면에 사용되는 일이 벌어졌고, 욕을 먹었다.

이 사람도 패전의 책임을 일본 국민과 정부에게 전가하는 발언을 했다. 거의 마지막 재판에서 '나도 사실은 덴노가 시켜서 그랬다' 라는 발언을 했는데이건 명백한 책임 회피였다. 쇼와 덴노 역시 국가원수로서 전쟁을 허가했으니 책임이 무겁지만, 애초에 태평양 전쟁은 도조가 기획한 일이였고, 쇼와 덴노가 수 차례 반대했음에도 거듭 설득하여 최종적으로 허가를 받고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도 도조였다.

그게 미국 정부에 의해 명백하게 확인되었기에 쇼와 덴노가 주동자급이 아닌 가담자로 분류되어 황족 특별 대우를 감안하더라도 기소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당시 일본 상층부에서는 전범등으로 인해 천황에게 심려를 끼쳐서는 안 되기 때문에 개전에 대해 천황은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A급 전범들은 오오후나 포로수용소에 임시 수용되었을 때 부터 "그건 우리가 저지른 일이고 천황은 아무것도 몰랐다."라고 대응하였다.

얼마나 철저히 왜곡하는지 "덴노는 진주만 공습 사건을 몰랐다."라는 황당무계한 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최고지휘관인 도죠만 덴노가 시켰다고 주장한 것이다.

일본 안에서 자체적으로 전범 재판을 하더라도 도조는 사형 판결 확정임이 좌우를 막론하는 의견이다. 그나마 반인륜적 범죄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일본군의 전쟁범죄 대다수가 육군이 저지른 것이였고, 도조가 육군의 전시 상황에 한해서는 통수권자인 히로히토보다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 모든 잔혹행위를 알고도 묵인했다는 뜻이니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애초에 태평양 전쟁을 기획하고 일으킨 장본인이 도조였으니 사실상 태평양 전쟁 자체가 도조가 저지른 대규모 학살이나 다름없다.

끝내 극동국제군사재판에 A급 범죄자로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48년 12월 23일 0시 1분에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도조는 처형되기 직전까지도 전혀 참회하지 않으면서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彌咤, 부처님 곁)의 곁으로 가는 기쁨이여" 라는 유언시를 남기기도 했다

도조는 사형 선고를 받은 다른 A급 전범들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화장되어 7명[8]의 유골은 태평양 먼 바다에 버려졌으나, 화장지 등 남은 유골의 일부를 일본 한복판에 안장했다. 자세한 내용은 순국7사묘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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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되기 직전의 도조.자세히 보면 처형되는 도조를 바라보는 미 육군 헌병장교의 표정이 매우 유니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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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직하거나 훌륭한 군인과는 3만 8천리 정도 떨어졌으며 정권을 잡는 정치적 능력은 제법 뛰어났으나,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정치가'로서의 능력은 형편없었다. 그냥 권력 강화하고 자기 이득이나 챙기는 전형적인 악질 독재자였다. 사실상 그냥 막장. 그 유명한 무능의 대명사 무타구치 렌야심복으로 쓰고 직속 상관으로부터 '이놈은 쓰면 안 됨'이라고 평가받던 츠지 마사노부를 인재라고 격찬까지 하면서 등용할 안목이었으니 말 다했다. '파시스트' 라는 점을 빼고 봐도 그냥 개막장이다.

그의 수기에서 발췌

"싸움은 최후의 한순간에 결정되는 법인데 일본 제국이 가지고 있는 힘을 십분 발휘해보지도 않고 적들의 선전책동에 휘말려 무릎을 꿇게 됐다."

"적의 위협에 겁먹고 손을 들어버리는 내각 지도자와 국민의 얼빠진 정신을 믿고 전쟁에 나선 것은 개전 당시 책임자로서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

"신폭탄에 움츠러들고 소련참전에 움찔해 무조건 항복하면 국민의 전투 의사는 급속히 사그라진다. 이런 사태는 군의 통수 지휘에 지대한 혼란을 일으켜 전투력을 저하시킨다."

"동아시아와 일본의 보호를 위해 많은 군인과 국민이 희생했는데 끝을 보지 못하고 섣불리 화평을 맺는 것은 적에게 종속되는 길."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지도자라는 자가 자신 잘못이라는 말도 안하고 정작 남 탓을 하다가 죽었으니 지도자로써는 영 아니였던 양반임은 분명하다. 이쯤이면 태평양전쟁에서 죽은 일본인들이 불쌍할 지경.

5 평가

5.1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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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있는 말은 간체로 '일본 A급 전범 도조 히데키가 중국 인민에게 사죄합니다'. '중국 인민에게 사죄하라'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대로 읽으면 '일본 갑급 전범 동조영기 향 중국 인민 사죄'. 동조영기는 위에도 나와있듯 도조 히데키를 그대로 읽은 것이다.

보통 이런 대접. 대한민국, 중국, 미국, 영국 등 이놈 때문에 고생한 나라들은 이놈이라면 학을 뗀다. 당연하지만 미국에서 가장 많이 까인다. 중국에서도 많이 까이긴 하지만 중국에서는 독단적으로 학살을 저지른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넘사벽급으로 많이 까이는지라... 근데 현대 미국에서는 더 꾸준히 까이는 나치도 있고 일제에 대한 증오심 자체도 아시아권에 비하면 낮기 때문에[9] 분명히 안 좋은 이미지라서 나왔다 하면 풍자당하지만 히틀러 정도로 메이저하게 까이지는 않고 누군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지금은 김정은보다 덜 까인다. 그런데 피해를 크게 당한데다 일본과 국민감정이 여전히 안좋은 아시아국가에선 여전히 정말 심심하면 까이는, 가장 많이 까인 인물로 빠질리가 없는 아시아판 히틀러 취급. 한국에서는 조선 식민통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온 국민이 다 아는 이토 히로부미가 더 개썅놈 이미지기도 하니 현재 도조 히데키를 가장 씹어먹을 만큼 까는 나라는 중국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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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중국에서는 도조 히데키 얼굴 모양을 한 아이스크림이 등장했다. 사진에 나와있는 문구는 '국가가 겪은 치욕을 잊지 말자(勿忘國恥)'는 표현을 살짝 비튼 '나라의 치아를 잊지 말자(勿忘國齒)'와 '만인이 함께 도조 히데키를 먹자'는 뜻이다.이 아이스크림을 선보인 회사는 상하이의 아이스크림 브랜드인 아이시즌으로, 상하이 최대 유제품 회사인 국영 광밍 식품공사의 계열사다. 사실 이전에도 중국 국영 기업들의 반일 정서 이용 마케팅 사례는 종종 있었지만 전범의 머리를 씹어먹도록 하는 제품이 나온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5.2 현대 일본의 미화

도조가 화장된 후 그 유명한 고이소 구니아키의 전담 변호사를 지낸 산몬지 쇼헤이(三文字正平)[10]는 작자가 화장장에서 이 7개 인간 쓰레기들의 남은 유골을 모아서 이들의 무덤 겸 제단인 순국7사묘라는 네오 나치도 생각 못한 희대의 등신짓을 했다. 자세한 것은 순국7사묘 참조.

야스쿠니 신사에 이 사람도 합사했다. 일본 정부가 '몰래' 모셔놓았다고. 그리고 이 사람의 손녀인 도조 유코[11]난징 대학살일본군 위안부를 부정하고 정치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촉구하며 미국의 원자탄 사용을 비난하는 성명을 낼 것을 촉구하는 등의 병크를 벌였다. 참의원 선거에도 나왔으나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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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유코KBS의 다큐멘터리에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한 징병 조선인/대만인의 유족들과의 대담에서 "당신이 당신 아버지의 진심을 아느냐?", "일본을 위해 싸워주신 당신의 아버지께 감사한다" 는 둥의 막장 발언으로 한국인들의 혈압을 상승시키는데 지대한 공헌도 했었다.[12] 결혼하느라 성이 바뀌어서 도조란 성은 통명이다. 일본 우익들이 재일 한국인이나 재일 중국인들이 통명 쓴다고 까댐을 생각하면...

일본 우익들이야 이 인간이 그 당시 최고지휘관이라 어쩔 수 없이 미화하지만, 우익에서도 '일본군을 말아먹은 졸장'이라고 욕하는 이들도 꽤 있다. 우익들조차 거론하기 싫어하는 무타구치 렌야라든지 츠지 마사노부 같은 인간을 유능하다고 써먹었으니 오죽할까?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최악의 졸장이라 말할 정도로 일반적인 무능함을 넘어 세계 근현대사 최악의 졸장[13] 도미나가 교지한테는 의형제까지 맺었다. 도조 유코는 '저런 멍청한 부하들을 등용하여 아군을 무수히 죽이며 패전에 기여한 점은 어떻게 생각하슈?' 라는 질문에 그래도 다른 유능한 부하들도 등용했다고 넘어가면서 반론조차 못했다. 물론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멍청한 부하에 대한 후한 대우를 생각하면...

인도인 펄 판사의 회고록을 원작으로 하여 그를 영웅시한 영화 프라이드가 만들어져 흥행에 성공한 바 있지만, 극우 단체들의 반복적인 관람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뿐이지 대중적 흥행은 영 별로였다 한다. 심지어 개봉 첫날에는 극장에 교련복 입은 시커먼 사내놈들이 우글거려서 일반 관객은 접근도 못하는 분위기였다고... 그리고 이 영화 감수 및 제작에 이시하라 신타로와 가세 히데아키[14]가 참여했다.

우익적 견해로 유명한 베츠미야 단로는 도조를 가리켜 "인사계원으로나 쓸모 있고 지휘관으로서는 중대장조차 위험하다"고 적시했다. 실제로 도조는 연대장 시절에 인사계 이상으로 사병들의 처우와 복장에 솔선수범한 군인으로 평가받았다. 연대장에서 퇴역하거나 전사했다면 좋은 의미로 남았을 사람

5.3 당대

이 사람에 대한 주변인들의 증언은 어떤 면에선 정말 천차만별이라 이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 방해이기도 하다. '지나친 완벽주의자', '면도날' 같은 별명이 있는가 하면 '맘씨 좋은 할아버지라 가을에 날씨 좋은 날을 골라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서 운동회를 열고 과자를 나누어주었다' 는 말도 있다. 후자의 경우 손녀인 도조 유코가 한 말이지만. 하지만 추후에 사병들에 대한 처우를 보면 이 부분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히데키의 조카도 육군 장교였는데, 하루는 도조 히데키의 집을 방문했다가 하녀와 담소를 나누었다. 이 모습을 보고 갑자기 조카의 뺨을 때리면서 '이놈이 체면도 없이 여자한테 정신 놓고 뭐하냐?'라고 막 뭐라 했다고... 진짜 웃긴 건 나중에 도조 사후 이 조카가 결혼했는데 신부는 그때 담소를 나누던 하녀였다는 거다.

사실은 그 하녀는 도조가 수작을 부리던 중 이었는데 도조 조카가 NTR 하려고 해서 그런거라 카더라

그래서 조카의 아버지인 히데키 남동생은 도조와 의절하고 나중에 이 조카는 반극우 성향 인사로 바뀌었다 한다. 참고로 이 조카의 아버지인 도조의 남동생은 형의 사형 선고에 매우 고소해했고 야스쿠니 신사에도 일체 안 갔다. 게다가 부하들이 옥쇄를 준비하자 "안경 쓴 바보 두 마리(도조와 히로히토)들을 위해 아까운 니네 목숨을 날리지 마라"라고 했다. 바꿔 말하자면 덴노에 대한 충성심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야마구치[15] 출신들을 싫어해서 육군대학 면접관으로 재직시에 야마구치 출신 수험생들에게 '귀관이 면접 장소까지 걸어오는데 몇 보였나?', '본교 화장실의 변기는 모두 몇 개인가?' 등의 어이를 안드로메다로 관광시키는 질문을 하여 다 떨어뜨렸다. 그러나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의 일본 육군 내 분위기는 반초슈벌이었던지라 도조가 아니더라도 야마구치 현 출신들은 어차피 육대 입학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두가 군 내에 강력한 파벌을 만들어버린 야마가타 아리토모 탓이지만.

여담이지만 총리로 재임하던 시절 도쿄를 시찰하면서 사람들이 을 낭비하는지 확인한답시고 하수구를 살펴보면서 쌀이 몇 알 떨어졌네, 낭비하네 떠들어서 사람들의 어이를 털었다는 일화도 있다고 한다. 그는 연대장 시절 부대 취사장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자 음식이 맛없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렸다. 수상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뭐만 하면 시찰하면서 쓰레기나 하수구를 뒤지면서 뭔가 의미 부여하는 것을 좋아했다. 수상 직위에 있는 이가 할 짓이 아니라는 지적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절대 국방권은 도서 지역 확보를 거친 비행장 건설로 할 뿐 삽으로는 이룰 수 없다며 도조의 전략을 대놓고 디스한 신문기자자기 명령으로 일본 육군 이병으로 징집해 당시 격전이 벌어지던 이오지마에 보내서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중간에 일본 해군에서 이 기자를 육군 입대일 하루 전 날짜에 징병[16]하는 식으로 데려가 버려서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연히, 해군은 그 기자를 말단 수병으로 죽게 냅두진 않았고, 종전시까지 정훈 업무에 종사시켜 종전 시까지 살아남게 해 줬다.자세한 내용은 죽창사건 항목 참조.

전범재판소에서 오카와 슈메이라는 극우사상가도 전범으로 기소되었는데 재판정에서 도조 히데키의 뒤통수를 때리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해 정신이상으로 사형을 면했다. 그가 말년에 코란일본어로 완역했으니 정신이상은 사형을 면하기 위한 연기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아무튼 재판정에서의 모습을 담은 저 짤방합성이 아니다! 실제 2차세계대전 갤러리에서 이 사건을 배경으로 쓴 도조x오카와 야설이 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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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지식의 창고>라는 책에 따르면 도조 히데키는 단 것을 좋아해서 그의 치아 상태는 군대 상태보다도 훨씬 나빴다고 한다. 체포 당시 치아 전체를 틀니로 바꿔야 했을 정도. 아돌프 히틀러도 단 것을 좋아해서 치아가 성치 않았다는데 나쁜 놈은 서로 닮아가는 듯. 실제로 아돌프 히틀러와 도조 히데키는 둘 다 당분 덕후였다는 점 뿐만 아니라 의외로 세세한 부분까지 닮았다.

  • 집권 능력 우수
  • 효과적인 선제 공격
  • 과도한 전선 확장
  • 물량 공세에 역전 당함

또한 단순히 동맹 관계인 것을 넘어서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도 서로를 매우 좋게 평가했다. 실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히틀러는 도조를 환상의 파트너이자 든든한 동맹으로 여겼고, 도조 역시 히틀러를 '친구'라고 칭할 정도로 좋게 생각했다. 그리고 훈훈하게 지옥까지 함께 갔다 그야말로 천생연분...

미 육군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미 해군 치의관 조지 포스터와 잭 맬러리는 도조의 틀니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이 유명한 환자에게 장난을 치기로 작당했다. 그들이 만든 틀니는 아주 잘 맞았지만 거기에는 모스 부호"진주만을 기억하라"는 문구를 새겼다.

5.3.1 부하

"병사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입대한다. 여러분은 이들을 아버지처럼 자애롭게 대하고, 나이가 많은 병사들에게는 형으로 대하도록 명령해야 한다. 그리고 입대하는 자의 가정환경, 본인의 직업, 능력을 모두 알아두어야 한다. 입대하는 그날까지 중대의 신병의 이름을 기억하라. 왜 그래야 하는가. 병사는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 날은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저승길을 갈 동료이기 때문이다." - 1929년 4월 제 1사단 보병 제 1연대장으로 부임한 후 부하들에게 훈시한 내용

매우 놀랍게도 일반 병사나 부사관, 하급 장교들에게는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지 같은 상관이었다고 한다. 도조는 신병이 들어오면 일일이 부모를 찾아 뵙고 "귀한 자식을 맡겨주셨으니 끝까지 보살피겠습니다"라며 부모와 입대하는 자식 모두를 안심시켰고 형편이 어려운 가장이 입대하면 동사무소를 통해 생계비를 받을 수 있도록 하여 불안을 해소해 주었다.

게다가 도조는 평등주의에 철저하여 식사도 사병과 같은 것을 먹었다. 이건 그 당시 일본군 장군들로써는 굉장히 이례적인 반응이다. 특히 같은 군국주의자 항목의 하나야 타다시와 비교해도 훨씬 나은 대접이다. 항목 참조하길 바란다. 부하들을 어찌나 사랑했는지 한 번이라도 다른 반찬이 나오면 병사들의 식단에도 그 반찬이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고는 만약 없을 경우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부하에 대한 배려가 깊어 사단장 시절에는 병사들과 부사관들의 건강과 가족사항까지 세세하게 기록해 이름을 외웠고 부하인 부대장들에게도 병사들의 신상명세와 집안 사정 등을 꼼꼼하게 확인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그 부하들 중에 부모가 위독하다거나 집안에 큰 우환이 있을 경우 사단장의 권한으로 전역증도 발급했다고 한다.

부대 훈련 때도 도조는 군 생활이 병사들에겐 평생 남는 기억이 된다며 체력이나 전투 기술이 부족한 병사들에겐 핸디캡을 적용하여 훈련에 낙오하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심지어 시골 출신 병사가 도시 출신보다 면역력이 약해 결핵에 걸리기 쉽다는 군의관의 조언을 듣고 결핵 검진을 위해 당시(1920년대)로선 최신 기술인 X선 장비를 즉석에서 도입하기도 했다.

또한 야전 부대장 때는 물론이고 총리 재임 시절에도 관저의 임원들과 총리관저를 지키는 병사들을 모아 식사를 대접하며 운동회와 보물찾기도 열었다고 한다. 심지어 도조의 운전기사 역시 "총리님만큼 훌륭하신 분은 진짜 처음 봤습니다"라고 증언했다.

만약 도조가 총리를 역임하지 않고 그냥 사단장 등 야전 지휘관이나 헌병사령관에서 퇴임을 했더라면 아마 못해도 최소한 기타나 평범한 인물 측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며 조금 과장하면 대인배 항목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격언을 몸소 증명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로 꼽을 수 있겠다.

5.4 한국의 평가

일제강점기를 겪었던 한국의 입장에서는 일제 군국주의 및 제국주의를 앞세운 만악의 근원으로 평가받고, 한국 침략의 주범 중 하나이자 한국사에 있어서도 한국을 침략하는데 선봉장으로 나선 악한이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이름만 나와도 펄쩍 뛰게 만들고, 분노와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장본인. 1992년부터 일본 대사관 앞에서 할머니들을 모이게 하여 지금의 수요집회를 만들게도 했다.

지원병 및 학도병으로 강제 징병되었거나 노역장으로 강제 징집된 노인들 입장에서도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게 만드는 장본인이자 만악의 근원으로 부상한 인물이며, 그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요약하면 만악의 근원 중 하나. 다만 한국 대중매체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계몽사에서 80년대 나온 한국사 책에는 야사로서 머리를 빡빡 깎고 망상에 찌들어 미국을 공격한 광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미친 짓한 증거로서 연설할 때마다 깔개로 성조기와 영국기를 썼다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

6 대중매체에서

만화 지팡구에도 나오는데 초기 연재분에서는 악의 축 그 자체로 묘사하고[18] 단 한 장면 나온 도조의 모습은 세밀화로 그린 악의 축 그 자체.

후기에는 매리애나 결전[19] 직전에 학도병 출전식 장면에서 다시 나오는데 전반부의 악마적 카리스마와는 달리 어느 정도 이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를 구현한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대놓고 부하들이 디스함을 알지만 이미 미쳐버린 군을 나름대로 제한하려면 강화는 위험하다는 의견, 즉 군이 완전히 미치게 만든 일본보다는 차라리 화끈하게 져야 낫다는 의견을 독백으로 제시한다.

도라 도라 도라에도 한 장면 나온다. 배우가 삭발을 하기 싫어서인지 뽀글파마 백발로 나와서 압권.

드라마 더 퍼시픽에서 박격포 훈련 때 마네킹을 타깃으로 하는데 마네킹에 'Tojo'라고 이름표가 붙었다. 옆에 앉은 친구 마네킹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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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해방군의 훈련용(?) FPS 광영사명에서는 왠지 도조의 얼굴을 한 자위대 병사가 적성군 일반 보병으로 등장한다. 게임의 초기 버전에선 미군으로 보이는 군대가 적성군이었건만 개발 와중 센가쿠 열도 같은 중일 관계 악화로 중간에 바뀐 듯. 이것 말고도 민간용 온라인 버전의 2차 대전 상하이 일본군 웨이브 미션에서도 일본군 병사들이 죄다 도조의 면상으로 등장한다.

복거일 옹의 대체역사소설비명을 찾아서에서는 도조 유신을 일으킨 것으로 나온다.
  1. 살아있을 당시에 자신은 자신의 이름을 쓸때 '東條'로 썼지만 지금의 교과서 학술지 등에서는 '東条'로 표기한다. 일본어 위키에선 '東條'로 되어있다. 당장 바로 위의 사진만 봐도 東條이다.
  2. 사실 정확히 말하면 정토진종이라는 일본 불교 종파 일원이며, 불교론 죽기 전에 개종한 것이다.
  3. 국가원수로서 전쟁을 허가한 쇼와 덴노 또한 전쟁 책임이 무겁지만, 전쟁을 기획하고 일으킨 장본인은 도조 히데키 본인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의 책임이 크며, 법적으로도(일말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을지안정) 태평양 전쟁의 총책임자였다.
  4. 이름은 도조 히데노리. 도조 히데키랑 달리 굉장히 유능했으며 이 사람은 오히려 착검돌격을 반대했다. 게다가 이 사람은 전술 연구의 선구자다.
  5. 육군대신, 해군대신의 보직 자격을 군 현역에게만 부여하는 제도
  6. 해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육군은 해군과 별개로 수송선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단, 규모가 해군 통제하의 선단보다 작아서, 상당 부분은 해군에 위탁하긴 했다.
  7. 임팔 작전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전부 No였던 상황이었다.
  8. 다만 이 중에서 억울하게 사형받은 사람도 있다.
  9. 미국의 밀리터리 관련 픽션에서도 나치 외에 가장 많이 악역으로 등장하거나 까이는 대상은 소련, 중국, 북한 등 공산 국가들이지 일본군을 그렇게 까대지는 않는다. 자국을 비판하는 성향이면 되려 원자폭탄 투하를 까기도 하고...
  10. 무슨 일인지 이전판까지 三文字正平을 고이소 쿠니아키라고 소개하면서, 친절하게도 그 유명한 조선 총독 고이소 쿠니아키와는 동명이인이라는 설명까지 붙어있었다. 물론 이는 완전히 잘못으로, 산몬지 쇼헤이는 코이소 쿠니아키의 변호인을 맡았던 사람이다.
  11. 웃긴 건 도조 히데키의 장남을 제외한 모든 도조 히데키의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이 도조 유코를 비웃었다고 한다.
  12. 사실상 상대편의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죄다 회피하고 녹음기처럼 자기 할 말만 해댔다.
  13. 그냥 적은 게 아니다. 윙드 후사르가 세운 교환비를 압도적으로 능가했으며 심지어는 충무공께서 세운 교환비와 맞먹는 화려한 전적을 세웠다.
  14. 70년대 한국 정계에서 친한파로 통하다가 지금은 혐한에 앞장서며 일본 극우 홍보나 한다. 93년에 박태혁이라는 가명으로 한국을 헐뜯는 <추한 한국인>이란 책을 내서 잘 팔리기도 했지만 이후에 수익 배분 문제로 고소를 겪으면서 자신이 쓴 게 드러나 책이 회수되기도 했다. 프라이드 대박 이후로 무르데카란 인도네시아를 무대로 한 일본 극우 영화를 만들었다가 인도네시아의 반발로 일본 기업들의 피해가 크면서 받은 소송 문제로 이후로 극우 영화 제작, 감수를 포기했다.
  15. 과거 초슈 번. 한때는 이곳 출신의 육군 파벌이 득세하였다 게다가 도조의 부친인 도조 히데노리는 제1기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음에도 러일전쟁 중 여단장으로 전투에 참가했을 때의 실수를 초슈 파벌에게 트집잡혀 한직으로 맴돌다가 퇴역당했다.
  16. 전쟁 이후 해군도 징병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육해군 모두 징집 영장이 나왔다 해도 자기가 징집된 군과 다른 군으로 지원해 입대해버리면 징집 영장은 무효가 되었다.
  17. 그런데 정작 맞은 도조는 놀란 다음 뒤에 누군지 확인하고 그냥 웃고 치운다. 마치 친한 친구가 자기에게 장난으로 그랬다는 듯이 말이다.
  18. 오죽하면 덴노나 기타 궁정 대신들도 아는 미라이의 비밀을 '도조가 알아서는 안 된다'라며 대놓고 이야기한다.
  19. 칠면조 사냥이 아닌 이 작품 한정의 대체역사. 여기서 전략적 무승부를 함으로서 지팡구의 역사는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