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10월부터 1941년 4월까지 계속된 추축국의 그리스 침공.
목차
1 배경
안 해도 되는 침공을 했다가 쓸데없는 출혈만 거창하게 본 침공 [1]
1939년 초,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발칸 반도 남부의 약소국 알바니아를 강제로 병합하여 발칸 반도에 거점을 확보했다. 과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에게 해에서 도네카니사 제도와 로도스 섬을 확보하고 있던 이탈리아는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골몰했다.
이러던 차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프랑스가 항복하고 얼떨결에 나치 독일 편에서 전리품 얻으려고 참전한 무솔리니는 프랑스 침공에서의 군사적 실패를 만회하고 이 대전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 한다는 목적에서 이탈리아 군대에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무솔리니의 야망은 시작부터 아돌프 히틀러의 반대에 직면했다. 무솔리니는 아드리아 해, 발칸 반도에서의 패권을 위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공격하고자 했지만, 히틀러는 이에 반대하고 오히려 유고슬라비아를 추축동맹에 가담시키고자 했다. 동맹국의 반대에 직면한 무솔리니는 유고슬라비아 대신, 독일이 손을 쓸 수 없는 그리스를 자국 세력권에 편입코자 했다.
결국, 이집트 전역이 마무리되기도 전인 10월 28일, 그리스에 주요 거점의 할양, 이탈리아 군의 주둔 허용 등을 요구로 최후통첩을 날렸으나, 그리스 왕국의 실질적 지배자인 메탁사스 총리는 노(Οχι, ohi)!를 외쳤다.
실제로는 프랑스어로 "Alors, c'est la guerre"(그래, 전쟁이다!)라고 말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저 이야기로 와전되었다. 하여튼 지금도 그리스와 키프로스에서 10월 28일은 "Ohi day"로, 공휴일이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노'와 함께 정말로 전쟁상태에 돌입했다. 헉.
2 이탈리아군의 공세 실패와 그리스 군의 반격 (1940. 10 ~ 1941. 3)
그러나 정작 이탈리아군은 개전결정에서 개전까지 불과 2주일의 준비기간밖에 갖추지 못했다. 더군다나 주력의 대부분은 이집트를 침공 중이어서 그리스 전선에는 생각보다 많은 병력을 투입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이탈리아군은 손쉽게 이길 거라는 생각에 병참준비는 허술했고, 제대로 된 전투 없이 그리스를 점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오토바이와 승용차 밖에 없는 그리스의 기갑부대에 비해 CV-33, M11/39같은 전차를 갖춘 기갑부대가 있는 육군, 지중해 바다를 두고 영국 해군과 맞상대할 수 있는 해군, 프랑스제 구식 폭격기 2대가 실제 운용가능한 전체 전력인 그리스 공군과 비교하면 넘사벽인 공군이 있으니 이런 시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군은 견고하게 방어전을 수행했다. 침공 당일부터 11월 13일까지 이루어진 핀두수 산 전투에서 이탈리아 군의 정예라던 제3 줄리아 산악 사단이 3천 명에 가까운 인명피해를 입고 와해 수준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으며, 11월 중순이 되자 이탈리아군은 그리스에서 쫓겨나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히려 11월 중순에 이르면서, 그리스군은 반격을 개시해 당시 7대 열강국가라던 이탈리아를 상대로 전면공세에 돌입했다. 모라바 강 전투에서 이탈리아 군 제26군단이 참패하고, 뒤이어 알바니아 영내의 사란다와 코르치아가 그리스군에 넘어갔으며, 11월 하순에는 알바니아의 1/4이 그리스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어떻게 하면 15일만에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로 진행된 공세가 역관광을 넘어서 공수가 뒤바뀌면서 침공까지 당해서 출발점은 물론 영토의 상당수를 날려먹는지 궁금해질 지경일 정도다. 이에 비견할 것이 북아프리카 전역인데, 이것도 이탈리아군의 작품.
그리스군의 공세는, 알바니아에 겨울이 찾아오고 빈약한 약소국인 그리스군의 병참한계가 드러나면서 종료되었지만, 이탈리아는 전 세계에 망신을 당했다.
일례를 들자면 그리스 공군이 가진 폭탄이 동나니까 화장실 변기나 구멍난 신발, 빈 깡통등을 탑재한 다음 이탈리아군을 폭격…하는 그리스 공군기가 있을 정도였으며, 양측 모두 방한용 장비가 있을 턱이 없어서 그리스군은 잠을 잘 때 여러명이 1장의 모포를 덮고 자곤 했는데, 깨보면 그리스군 사이에 이탈리아군이 코를 골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할 지경.
이를 만회할 목적으로 이탈리아군은 대규모 병력을 증원하여 1941년 3월 9일부터 약 1주일간 춘계 대공세를 펼쳤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이 종료되었다.
이탈리아군은 지상전에서 총체적 난국에 빠졌으나, 그리스에 비해 압도적이라는 해군세력은 영국 해군에게 도망치기 바빠서(…) 전황 타개에 전혀 도움을 못 주었으며, 오히려 타란토 공습으로 된통 당한 후에는 바다로 나오지도 못했다. 거기다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의 반격으로 순식간에 키레나이카를 상실하고 리비아 식민지를 모조리 잃어버릴 위기에 빠지며 전면적인 패전 위기에 봉착했다.
3 교착기의 중대한 변화
나치 독일과 아돌프 히틀러는 애당초 그리스를 포함한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선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제멋대로 그리스를 침공한 이탈리아에 화를 내고 승전 중인 그리스에 축전을 보냈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하도 못싸워서(…) 이탈리아가 전선에서 이탈할 가능성과 함께, 남지중해 지역에서 영국군이 압박할 가능성이 고조되면서 결국 독일은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선과 발칸 반도에의 개입을 결정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는 에르빈 롬멜을 사령관으로 하는 북아프리카 군단이 보내졌으며, 발칸 반도에 대해서는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추축동맹에 가담시킨 다음, 이탈리아가 이미 전쟁 걸어서 우리편 될 수 없는 그리스를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히틀러는 그리스에서 출격하는 영국 폭격기들이 루마니아의 플로에슈티 유전을 사정거리에 두고 있다는 것을 두려워 했다. 당장 플로에슈티 유전은 독일이 대전 기간 동안 확보한 최대 규모의, 그리고 거의 유일한 유전이었다.
영국도 그리스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참전계획을 눈치 챈 영국은 그리스의 독립 및 안전보장을 약속하며 1941년 3월부터 비밀리에 지상군 병력을 그리스에 상륙시키기 시작, 최종적으로 약 6만여 명이 그리스에 전개했다.
한편, 그리스는 이탈리아와 질적으로 다른 독일의 본격적인 참전을 두려워했으며 때문에 對독일 정책에 있어 매우 신중하게 접근했다. 때문에 영국의 병력지원 제의도 비공개적으로 수용했으며 독일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메탁사스 수상의 급사로 인해 새로 선출된 수상은 전임자에 비해 비밀을 유지하는 노력 측면에서는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인데다가 이미 영국군의 그리스 진주는 주 그리스 독일 대사관에 의해 파악된 상태였다.
그리스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유고슬라비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추축동맹에서 탈퇴하는 일이 벌어졌으나 그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을 버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4 나치 독일군의 전면 총공세와 전역의 종결 (1941. 4)
1941년 4월 6일, 나치 독일군의 발칸 반도 작전이 개시되었다. 그리스는 서부 알바니아 전선, 중부 유고슬라비아 전선, 동부 불가리아 전선을 모두 지켜야 하는 열세에 놓여 있었으나 이 열세를 어떻게든 만회할 방법은 그리스 중부로 후퇴하여 전선을 좁히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할 경우 발칸 전쟁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지속적으로 싸워서 얻은 동부 영토 전체는 물론이거니와 테살로키나같은 중요 항구도시를 상실하므로 그리스군과 그리스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리스군이 확보한 전선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는데, 서부의 알바니아 전선과 동부의 메탁사스 방어선을 잇는 중부 방어선은 소수의 경계 병력만 있는 상태인데다가 애초에 이런 배치를 한 이유는 유고슬라비아가 건재하여 중립국으로 남는 것을 가정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방어선의 중요 부분을 망하기 직전인 다른 국가가 막아주겠지 하고 넘겨버린 것.
결국 이 약점은 영국군이 투입되었어도 커버할 수 없었고, 독일군은 정확히 이 약점을 찔렀다.
동부전선에선 불가리아 국경의 메탁사스 방어선 정면으로 독일군 18군단 5산악, 6산악, 72보병사단과 30군단 50사단, 164사단이 공세를 펼치는 사이, 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국경을 관통한 제2기갑사단이 메탁사스 방어선을 우회하여 그리스 북서부의 중요 항구도시 테살로키나를 함락하고 메탁사스 방어선을 포위해 버렸다. 결국 메탁사스 방어선의 그리스군 6만여 명은 독일군에게 항복, 동부전선이 붕괴되고 이 여파로 이름만 남아있던 중부전선도 무너졌다.
결국 4월 15일, 서부전선만이 전선을 유지하는 가운데 중동부전선이 내륙으로 크게 후퇴하고, 이윽고 그리스-영국 연합군은 비참한 패주를 시작했다. 아직 영국 공군은 본토방위에도 힘겨워하던 상황이라 그리스 일대의 제공권은 루프트바페에게 넘어가 있었고, 이들의 퇴로는 전투기의 기총소사와 Ju87, Ju 88의 폭격으로 피로 물들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빈약한 영국 공군이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사투를 벌렸는데 유명한 작가인 로알드 달이 참여했었고, 이는 그의 자서전에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있다. 정말 처절하게 싸웠으며 그러던 중 아테네에서 13기의 호커 허리케인으로 200여기의 독일 전투기와 맞서(!) 90분동안 27기를 격추하는 대전과를 이루기도 했다. 이 사투의 강도는 전투기 에이스인 Pat Pattle이 이 전역에서 전사할 정도로 강했다.
이 시점에서 영국군 지휘부는 작전의 목표를 그리스 방어에서 영국 원정군의 철수로 방침을 바꿨다. 동 시기에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의 북아프리카 군단이 예상치 못한 전면공세에 나서, 전선이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애당초 그리스 원정군이 많은 규모도 아니기도 했다. 이처럼 계속되는 패배로 국가방위가 불가능해지고 영국이 철수를 준비하자 절망감에 빠진 그리스의 새 수상은 4월 18일 권총자살했다.
한편, 서부 알바니아 전선의 주공을 맡은 이탈리아군은 또 다시 전면공세가 실패로 돌아가 공세계획을 망가트릴 뻔 했다. 대체 하는게 뭐냐? 그러나 독일군에 의한 중동부 전선의 붕괴로 서부전선의 그리스군 역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를 가만히 냅둘 독일군이 아니었다.
그리스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슈츠슈타펠 아돌프 히틀러 여단이 측면에서 비스듬히 내려가는 공세를 단행한 것이다. 이에 맞선 그리스군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안타깝게도 상대는 지금까지 상대했던 이탈리아군과는 질적으로 다른 독일군이었다. 이탈리아군 같았으면 포기했을 그리스군의 방어선을 향해 무모하다시피할 정도로 돌격해오는 독일군의 공세에 그리스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퇴로가 차단된 상태에서 탈출을 위한 마지막 총반격을 개시했으나 독일군의 거센 역습으로 좌절되자 서부전선의 그리스군 사령관은 4월 20일 독일군에 항복했다.
웃긴 것은 이 때까지 이탈리아군은 그리스군을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더 웃긴 것은 무솔리니가 이탈리아가 항복조인식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항의해서 4월 23일에 다시 항복하는 개그가 있었다는 것이다.[2]
4월 24일에는 과거 테르모필레 전투가 벌어졌던 테르모필레 지역에서 영국군은 철수를 위한 지연작전을 개시, 2파운더 대전차포의 매복사격등을 통해 1차적으로 독일군 기갑부대의 공세를 격퇴했으나 결국 독일 산악부대의 우회공격으로 패퇴했다. 그래도 철수작전을 위한 귀중한 이틀의 시간을 벌었다.
테르모필레를 마지막으로 영국군은 각지에서 수송선단에 승선, 크레타 섬으로 철수했으며 대부분이 알바니아와 메탁사스 방어선에서 항복하여 거의 남아있지 않는 그리스 군은 저항의지를 상실했다. 결국 4월 27일, 독일군 선두부대가 아테네에 입성함으로서 그리스 전역은 종결되었다. 그리고 그리스 본토는 추축국의 괴뢰 국가 그리스국이 수립되었으며, 대부분의 영토는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이 분할하여 갈라먹게 된다.
그러나 아직 그리스의 마지막 영토인 크레타 섬에 영국, 그리스군 철수부대가 있는 상황이었고, 히틀러는 크레타 섬의 비행장까지 제압해야 플로에슈티 유전지대가 안전하다는 이유로 크레타 섬에 대한 공격을 지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