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吒忠義
(? ~ 707)
1 개요
백제 출신의 당나라 장군. 출자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돌궐의 사타(沙陀) 계열이 아닌가 의심받았다. 하지만 《문원영화》에서 그의 출신을 삼한구족(三韓舊族)으로 기록하고 있어 백제 대성팔족의 사씨(沙) 가문 출신으로 보여진다.
2 생애
694년 봄 3월 1일에 회의 휘하에서 17명의 다른 장군들과 함께 묵철가한을 공격하게 되었지만 묵철가한이 물러나서 중지되었으며, 696년에 이진충, 손만영 등이 영주에서 봉기하면서 697년 여름 5월 8일에는 우무위위장군으로 있다가 무의종, 하가밀, 누사덕 등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도록 명을 받아 전군총관이 되어 군사 20만을 거느렸다.
698년에는 무중규, 장인원, 염경용 등과 함께 묵철가한을 공격하도록 명을 받아 천병서도총관이 되어 군사 30만을 거느렸고 묵철가한이 조주, 정주 등을 노략질하자 추격하면서도 가까이 가지 못했다.
706년 12월 명사현 전투에서 돌궐군과 싸우지만 3만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다.
707년에 묵철가한에 대해 돌궐을 평정하는 대책을 올리라고 할 때 노보는 사타충의에 대해 용감한 장군의 재목이기는 하지만 본래 큰일을 맡기에는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707년에 당중종의 태자 이중준이 황후 위씨를 제거하려고 하자 이중준에게 가담해 이다조, 이사충, 이승황, 독고의 등과 함께 우림천기병을 이끌고 무삼사, 무승훈 등을 죽이고 상관첩여를 공격했지만 양사욱이 그들을 공격하면서 병사들을 설득하자 병사들의 배신으로 공격을 받아 살해당했다.
3 평가
706년 12월 명사현 전투에서 패전하고 우복야였던 노보가 상소에서 그에 대한 평가를 했는데 대략 용감하지만, 지략이 부족하고 장수로서 소임을 다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사타충의가 먼저 도망간 점과 전군이 패한 점에 대해 당 중종에 고하지만 중종은 우보의 말이 옳다면서도 사타충의를 감싸줬다.
4 기타
여담으로 같은 백제 출신의 흑치상지에 비해선 조명을 뒤늦게 받은 편. 조선 후기 이덕무의 《양엽기》에 사타충의 조를 기록해 두었다. 근데 이덕무 선생은 고구려계 유민인 이희옥, 왕사례의 사례를 드는 것으로 보아, 그를 고구려계로 착각한 듯하다(...) 안습
생애 기록 대부분도 후반 기록들밖에 없기 때문에 그가 백제 유민 몇 세대 출신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같은 사씨인 사타상여, 사택천복, 사택손등[1] 등 당에 투항한 사씨 가문의 인사 중 가장 기록이 많다.
그나마 이도학 교수의 살아있는 백제사(2004), 「중국 속의 백제인들, 중국 바깥의 백제인들」(2009)와 최진열 교수의 대륙에 서다(2010) 정도가 사타충의에 대한 항목을 별도로 다루는 정도다.- ↑ 사택손등은 웅진도독부 함락 이후 일본으로 재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