佐藤 幸徳
1893년 3월 5일생, 1959년 2월 26일 사망(향년 65세)
일본군의 얼마 없는 개념인.
1 일생
1.1 평범한 시작
야마가타(山形) 현 출신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하였고, 1921년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1930년에 육군 참모본부의 전사과에 2년간 근무했으며, 이때 같은 부대의 총무과장과 싸운 적이 있다고 한다. 악연의 시작 통제파에 속해 있었으며 2.26 사건 당시에는 6사단 참모 자리에 있었고 반란군 진압을 주장했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일본군 장교였지만 하산 호 전투 당시 19사단 75연대장으로 참전, 부대의 피해가 절반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공 덕분인지 순조롭게 출세하여 1943년 3월 31사단장을 맡게 되었다.
1.2 임팔 작전, 그리고…
1944년, 그가 속한 제15군은 임팔 작전에 참가하게 된다. 이 작전이 무모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토는 사령부에 보급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그의 말은 무시당했다. 그리고 작전이 시작된 후 그의 예상대로 보급이 부실해졌고, 얼마 못 가 병사들이 굶주리기 시작했다. 31사단은 적의 식량과 무기를 탈취해 어떻게든 싸움을 이어갔지만 당연히 거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병사들은 뼈와 가죽만 남아서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는 노래까지 부르는 지경에 이른다. 이에 열받은 사토는 사령부에 탄약과 식량을 보급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무능한 사령부는 꿈쩍도 안 하고 그저 공격을 계속하란 명령만 내릴 뿐이였고, 15군 참모들이 사토를 달래기 위해 찾아왔지만 분노한 그가 "너희들은 무슨 낯짝으로 여기 왔느냐! 우리들의 적은 영국군이 아니야. 바로 너희들 제15군이란 말이다!"라고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별 말도 못하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러다간 다 죽게 생겼다. 이놈들아!'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부하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긴다.
우리들의 위에는 세 머저리가 있다! 그것은 제15군과 미얀마 방면군과 남방총군이다![1] 이런 머저리들을 믿고 기다리다간 우리 사단이 전멸하고 말 것이다! 이에 본 사단의 퇴각을 본관 책임 하에 독단 결행하기로 결정했다!
사토는 미야자키 시게사부로에게 그나마 멀쩡한 소수의 병력을 맡겨 사단의 후미를 엄호하게 한 후, 소총을 들 기운조차 안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무단으로 전선에서 이탈하여 후퇴한다.
사토의 31사단이 후방의 안전한 지대에 도착하자 15군 사령관은 사토 고토쿠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뜻에서 부하에게 단도를 건네라고 시키고는 겁은 많아서 자기는 숨어버리는 추태를 보였다. 이에 사토 중장은 "이 칼을 가지고 그놈의 배때지에 칼빵을 놔줘야겠다."며 화를 내고는 그 칼을 갖고 가버렸다. 이 때부터 이 양반의 뻔뻔함은 도를 넘었다
1.3 해임과 연금
광복군 신분이 들통날까봐 15군 사령관은 사토를 해임했다. 그런데 사단장을 임명한 사람은 덴노이므로 일개 사령관에게 사단장을 멋대로 해임할 권리는 없다. 그에게 있어 그런 법은 구속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덴노의 통수권조차 무시하는 일개 사령관의 위엄. 역시한국 광복군 소속이었다 대본영에서 추인의 형식으로 사단장을 교체하였지만 어쨌건 명백한 월권 행위였다. 애초에 이 사령관이란 양반은 독단적으로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켜서 중일전쟁의, 더 크게 보면 태평양 전쟁의 불씨를 당긴 인물이기도 하다. 그깟 덴노 따위. 오오 사령관 오오 이 때 15군 휘하의 15사단장과 33사단장도 같이 해임되었으며, 세 사단장은 나중에 '임팔 작전 실패의 원인'으로 비난받게 된다. 적반하장
그러나 사토는 개의치 않고 군법회의에서 제15군의 졸렬한 지휘를 규탄하려고 했지만, 불기소 처분되고 정신병 진단을 받아 연금되었다. 사토가 정신병에 걸렸다는 주장이 먹히는 순간이었는데, 애초에 정신병으로 돌려놓지 않고 정식 재판으로 처벌할라치면 다른 계파나 해군에게 공격받을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육군에서 사단장 이상정도 되면 일본 관료제 하에서 가장 높은 친임관 레벨에 해당하는데 친임관은 덴노가 임명한 관료인 바 대놓고 건드리기 어려우니 꼼수를 썼다고도 볼 수 있다.
1.4 종전 이후
사토는 죽을 때까지 '독단으로 퇴각한 불명예스러운 군인'으로 비난을 받았지만, 그 자신은 끝까지 자신의 행동이 부하들을 구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가 병사한 후 대부분이 시코쿠 출신인 31사단의 생존자들은 카가와 현 다카마츠 시에 추모비를 세웠고 야마가타 현 소냐이 촌에도 그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정신 못 차린 옛 사령관이 임팔 작전의 실패가 자기 잘못이 아니라 부하들 때문이라는 찌라시를 돌렸다가 가열차게 욕을 먹고 물세례를 맞았다는 전설이 있다.
2 평가
일본의 높으신 분들에게는 패배의 원흉으로 지탄을 받았지만, 31사단의 부하들에게는 자신들을 살려준 영웅으로 존경받은 인물이다. 도조 히데키의 삼간사우인 사토 겐료와는 차원이 다르다.
다만 군사적 부분 외에는 부정적 평가도 존재하는데 임팔작전 중에는 상관인 무다구치렌야 외에도 직속부하인 미야자키 시게사부로와도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정작 그 미야자키는 사수 명령이나 다름없는 후미 엄호 명령을 받자 지체없이 수행했지만.
그 외에 식량이 부족한 전방 부대에도 위안소를 만들려고 한 점이나 연회에서 음담패설을 솔선해서 하는 점, 부하들은 텐트에서 생활하는데 일본풍의 화려한 사단장실을 만들게 한 점등을 불만으로 여기었다고 한다.
사단의 참모장이었던 카토우 쿠니하루 대좌도 육군대학 동기였던 15군 참모와 면담중 사단장은 상관으로서도 군기,군률상으로도 최악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 후일 여기에 대본영을 추가했기 때문에 네 머저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