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팔 작전

임팔 전투/작전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의 일부
날짜
1944년 3월 8일 ~ 1944년 5월 3일
장소
인도 제국 마니푸르, 나갈랜드
이유
일본의 인도 침략을 위한 교두보 확보
교전국 영국
영국령 인도 제국
대한민국 임시 정부[1]
일본 제국
자유 인도 임시정부
지휘관 윌리엄 슬림
잭 볼드윈
제프리 스쿤스
한지성
무타구치 렌야
카와베 마사카스
무타구치 렌야
찬드라 보세
병력
3만 5천명9만 2천명
피해
1만 7,500명 사상7만 5,000명 이상 사상
(아사자 4만명 이상)
결과
연합군의 결정적 승리, 버마 전선 붕괴
기타
일본군의 흑역사, 일본판 칠천량 해전[2] 해외의 대표적인 한국독립운동

1 참고 동영상

본격 독립운동사의 라마야나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한국 광복군 육군 중장 모전구렴야 장군님의 주옥 같은 말씀 덕에 다큐를 보고 있는지 코미디를 보고 있는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다

영상에서 무타구치의 대사를 맡은 성우의 목소리가 쓸데없이 진지해서 더욱 큰 웃음을 주는 게 사실. 꽤 웃기고 유익한 영상이니 한번 감상해 보기를 권한다. 이하의 항목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스탭롤 성우 명단을 보면 3대 호카게 사루토비 히루젠 역을 담당한 원로 베테랑 성우 시바타 히데카츠가 있다. 사토 고토쿠역.지옥소녀의 거미역과 목소리가 같다

다만 이 다큐멘터리를 진지하게 찾아보실 분은 주의를 요한다. 이 시리즈는 원래 NHK스페셜 중 특별기획의 일환으로, 1989~91년 냉전이 붕괴되며 각종 자료가 쏟아지자 그를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당시 총제작지휘를 맡았던 야마모토 히로시 CP는 상당히 개념찬 인물로 새로운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군의 무능을 신랄하게 깠다. 그나마 1~3부를 제작하고 몇 달의 텀을 둔 후 4~6부를 제작, 총 6부작으로 완결지었다. 그런데 이걸 보고 그 소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펴낸 신죠샤에서 '결장핀 다큐먼트 태평양전쟁사' 7부작을 내놓았다. 그리고 한국 웹에서는 이 두 시리즈가 짬뽕되어 돌아다니고 있다. 1, 3, 5, 7부는 신죠샤, 2, 4, 6부는 NHK판이다. 감상시 주의 요망. 참고로 야마모토 CP는 이후 1994년 NHK 시즈오카 국장으로 영전되었는데, 일본에서 샐러리맨의 좌천은 영전의 형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NHK를 퇴직한 후에는 자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교재로 반전 강연활동 등을 벌이고 있다.

2 개요

우리 일본은 이제 끝났다.

- 일본 해군 중장 다카기 소키치 제독스파이를 통해 임팔 작전 내용을 들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3월 15일부터 7월 1일까지 버마(지금의 미얀마)와 인도 국경 지대에서 벌어진, 일본군 최악의 병크이자 흑역사.

보급을 적에게 탈취한 것으로 채우려고만 하면 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 작전 같지도 않은 정신 나간 짓거리라 그런지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서문에서부터 '보급을 경시한 엉터리 작전', '무모한 작전의 대명사로 인용된다'라고 대놓고 까고 있다. 국내에선 무타구치 렌야만행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런 정신 나간 작전이 승인된 것은 자기 파벌과 자신의 안위만 생각한 일본 육군 높으신 분들의 책임도 크다.

보통 일본군의 작전 명칭 작명은 대부분 카타카나 글자만 하나 붙여서 ○호 작전이라고 한다. 따라서 일본군에서 붙인 작전명은 우호작전ウ号作戦ウごうさくせん이고 Battle of Imphal의 번역상 임팔 전투로 기재하는 게 정상이지만 한국에서는 임팔 작전으로 부르는 경향[3]이 있다.[4] 간혹 임펄 작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참고로, 위키백과는 임팔 전투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밑의 사람들이 반대했음에도 무능한 높으신 분이 밀어붙였다는 점과, 보급을 적에게 탈취해서 채우려 했다는 것과, 결국 패망을 더욱 가속화시켰다는 점에서 독일아르덴 대공세와 유사점이 있다. 아돌프 히틀러가 아르덴 대공세를 계획하자 독일군 수뇌진은 아연실색하며 반대 의사를 개진했다. 육군참모총장 하인츠 구데리안동부전선은 어쩔 거냐며 아돌프 히틀러 총통과 대판 싸웠고, B집단군사령관 발터 모델은 히틀러를 설득하려고 대안 작전까지 입안했으나 히틀러가 끝끝내 밀어붙였다.

차이점이라면, 독일의 경우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이미 약체화된 상태에서 없는 걸 다 긁어모아 마지막 올인은 한 것이었고, 임팔 작전의 경우 굳이 할 필요도 없던 작전을 하여, 버마-벵갈 전선에서 호각을 이룰 정도로 나름 규모 있던 일본 육군 전부를 말아 먹었다는 것.

3 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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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팔은 인도 북동부 아삼 지방에 위치한 곳으로 연합군이 중국으로 보내는 보급로의 시작이라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그렇기에 일본은 이곳을 공략하면 중국 국민당군을 압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인도까지 진격해서 영국군을 저~ 멀리 쫓아내는 데 성공하면 인도는 찬드라 보세의 주도하에 독립과 동시에 추축국에 참전하게 된다고 볼 수 있었다. 추축국 가입은 없더라도 영국군이 인도에서 사라지면 인도 독립만큼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인도 독립 대신 대한 독립의 꿈을 이루었지만

따라서 1942년 8월 과달카날 전투가 시작된 시점부터 이미 임팔 공략에 대한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방위체계가 부실한 데다 현지 사령관들이 반대하여 일단 공략 작전은 중지되었다.

그런데 작전 구상 자체를 중지한 것이 아니라 작전 연구는 계속하게 했다. 여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되었다.

일단 일본군이 버마 지역 방위부터 굳히기로 하고 그 준비를 하는 동안 연합군이 버마 북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 육군의 윙게이트 장군(Orde Charles Wingate, 1903–1944)이 이끄는 공수부대가 버마 서북부에서 게릴라 작전을 시작하고 연합군 정찰 부대가 나타났다. 일본군은 이것이 대대적인 공세의 시작이라 여기고 재편성을 시작했다. 버마 방면 사령관에는 육군 중장 가와베 마사카즈가, 그 휘하에 제15군과 제55사단, 그리고 직할 부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제15군 사령관에 문제의 무타구치 렌야가 임명되었다.

일본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무타구치가 15군 사령관으로 임명될 당시 대규모 인사 이동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15군 내 무타구치 외에 현지 사정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무타구치의 독단적인 전횡이 가능했다고 한다.

4 초기 상황

4.1 그 분의 등장

어이없게도 이 양반은 사단장일 때 당시 다른 사람이 아삼 지역 진공 작전을 계획하자 무모해 보인다고 반대했었다(...) 근데 자기가 지역 사령관이 되자 임팔 작전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면서 "아삼이나 벵골에서 장렬히 죽고 싶다"라고 노래를 했다고.

참고로, 1942년에 계획할 당시가 오히려 그나마 임팔 작전 때보다 일본군에게 더 승산이 있었다. 동남아 전선이 무너지면서 영국군 잔존부대는 간신히 영국령 인도로 퇴각한 뒤 막 전력을 가다듬고 있었고, 당연히 인도의 방위력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임팔 지역을 공략하는 게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한창 일본군의 전력이 정점에 달한 1942년 초 당시와는 달리, 임팔 작전이 시작된 1944년 초에는 이미 연합군이 뉴기니를 탈환하고 일본의 '절대 국방선' 인 마리아나 제도 코앞까지 당도해서 동남아 점령지대와 일본 본토와의 해상 운송로가 끊기기 직전이었다. 처음부터 제대로 보급 작전을 구상해도 실전에서 과연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들 판인데, 무타구치는 그조차도 무시한 것이다.

무타구치는 중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원흉이었다. 당장 제15군의 상급부대는 버마 방면군. 버마 방면군 사령관은 육군대장 가와베 마사카즈로 무타구치가 독단으로 노구교 사건을 일으켰을 때에도 직속 상관이었다. 그 내막은 더욱 가관인데 자신이 속한 계파가 정치적으로 대패하면서 노구교 사건 당시 중국으로 부임한 시점에서 이미 좌천당한 신세였다. 노구교 사건 당시 이 일을 계기로 좌천당한 자기 신세를 만회해보려는 심산으로 공격 명령을 내렸고 마찬가지로 같은 계파였던 가와베도 이를 묵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론은 역시 일본군의 전매특허인 파벌주의의 폐해로 이 '실책'을 만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이미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버마 북부에 영국군 게릴라 부대가 출몰하자 이를 역전의 기회로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당연히 이 게릴라들은 걸어서 온 것이 아닌 비행기로 공수된 것이지만 무타구치는 임팔 작전을 강행한다.

그리고 이 작전에 대한 반대의견이 나오자 자신의 작전에 칭기즈 칸이 했던 '약탈 보급'의 방식을 취할 것이라 하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

적의 것을 빼앗아 전리품으로 확보하는 건 정석 중 정석이긴 한데 이건 엄연히 공수부대로 하는 작전이 아니고 3개 사단에 이르는 정규전 병력으로 치루는 작전이다. 아사다 테쯔야아카기 시게루 급의 타짜라도 자기 판돈 정도는 준비하고 그걸 기본으로 작전을 짜는 법이다. 게다가 이렇게 조달할 수 있는 품목은 현대전에서는 어디까지나 식량까지고, 자군의 무기에 맞는 탄약은 조달 못하는데 일본군의 무기체계는 자군 내에서조차 호환성이 극악이었다. 더구나 식량도 약탈에만 의존하게 되면 항상 필요한 양 이상을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에 식량 부족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적군도 바보냐? 그것도 아니다. 난전 중이라면 모르지만 애초에 난전이 일어나는 전방이라면 보급물이 잔뜩 있을 리도 없고 후방에 있는 보급 지역에는 이미 질 거 같으면 후퇴하면서 챙기거나 챙기지 못한 보급품들은 적들이 못 쓰게 파괴할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청야전술에 패배하게 된 군대들조차도 이런 멍청한 발상으로 출발하진 않았다. 그리고 만약 적군까지 보급은 적에서 취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빈손으로 왔다면(...) 정말로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어차피 그런 머저리같은 발상은 그 분밖에 안 한다.

히로히토 덴노의 막내동생인 일본 육군 대위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이 무타구치에게 저 말을 듣고 "보급은 어떻게 하려고? 만약 적군도 같은 생각이면 어쩌려는가?"라고 직접 질문했다. 그러자 무타구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참고로 당시 다카히토는 육군 대위이긴 했지만 후방 사령부에서만 근무하고 실전 경험도 없는, 군사적으로는 그냥 신참 장교에 불과했다. 그런 인물조차 이런 지적을 할 정도로 무타구치의 작전이 막장이란 것.

포탄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에 싣고 가다가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

저 '식량'으로 쓰겠다는 코끼리, 은 대개 점령지에서 조달하는데 먹이도 제대로 안 주고 부려먹은 데다가 원래 종자들이 장거리 이동을 잘 안하는 종들이라 먹은 소보다 지쳐서 객사한 소가 더 많았다고 한다(...) 일부는 강을 건너다가 떠내려가기도 하고 산맥을 넘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포격에 놀라 도망치기도 했다(...) 심지어 사료 문제를 들먹이자 "이것(가축)들은 초식동물이니 길가의 풀을 먹여 사료 걱정을 할 필요 없다"라고 하기도 했으니 뭐... 그러나 군부대의 보급과 같은 대규모 수송에 동물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길가의 풀'은 조속히 고갈되는 데다 독초 등을 뜯어먹고 쓰러질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마초 역시 보급해야 한다는 점은 이미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군이 경험한 사실이다. 사실 이미 삼국지에서도 마초 보급을 따로 준비하는 대목이 나온다. 참고로 부피가 크고 무거운 마초를 따로 준비할 경우 그 마초를 실을 소와 말을 더 동원해야 하고 당연히 보급 관리에 애로사항이 더욱 꽃핀다 당연히 마초를 수송하는 소와 말을 먹일 마초를 준비하면 실을 것이 더 늘어나니 소와 말을 추가해야 하고, 다시 추가한 소와 말을 위한 마초를 준비하면 실을 마초가 늘어났으니 다시 소와 말을 추가하고... 이렇게 계산을 하다보면 어느 시점에서 소와 말을 추가하지 않아도 되긴 하는데 결과적으로 준비해야 할 소와 말과 마초가 생각했던 것보다 3~4배 정도 불어나게 된다.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현대전에서 항공기의 중요성을 망각했다는 것은 둘째로 치고라도[5] 정작 영국 공군은 포위된 자국 육군 진지에 계속 항공 보급으로 각종 물자를 쏟아부었다. 당시 굶주린 일본 육군들까지 그 항공물자가 자기 쪽으로 떨어지기만을 고대하면서 운 좋게 손에 넣으면 처칠 급여라고 불렀을 정도이다. 게다가 당장 이 작전의 원인이 된 영국군 게릴라들도 당연히 공수된 부대다. 그리고 항공지원이 없는 보병은 적의 제공권 하에서는 보통 큰 피해를 입고 위축되어 작전을 하는데 그 상황이 실제 일어났다. 반면 연합군이나 독일군의 경우는 항공지원이 잘 결합되어 큰 전과를 올린 경우가 많아 심하게 대조된다.

뭐라고? 그딴 걱정은 하지 마. 적을 만나면 총구를 하늘에 대고 3발만 쏘아 보라고. 그러면 자동으로 항복하게 되어있어.

15군 사령부 작전회의에서 '보급이 원활하지 못할 것'이라고 진지하게 염려하는 의견을 제시한 15군 보급참모 우스이에게 농담이랍시고 한 소리다. 무타구치가 적인 영국군을 얼마나 터무니 없이 얕보고 방심하고 있었는지 더 설명이 必要韓紙?

그러나 위의 모든 명언들을 버로우시킨 희대의 명언이 있었으니, 일선 부대에서 보급품이 모자란다고 하소연하자...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

이 말의 경우 "일본인은 주로 채식을 하기 때문에 식량이 떨어지면 초근목피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 또는 "일본군은 원래 초식동물인 고로 주위를 둘러보면 풀이 이토록 많으니 먹을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그 말이 그 말이다. 당시의 참전했던 군인들 중 한 명은 풀을 가리키면서 "식량이 사방에 널려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풀을 뜯어먹으면서 전진하면 된다"라고 말했다는 증언도 남겼다. 조금 전에는 분명 길가의 풀은 소나 말을 먹인다고 했던 것 같다면 제대로 본 거다 인간과 동물을 같이 대우하는 선진 병영 일본 육군 참고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식량이 떨어지자 주변의 식물을 아무거나 집어먹다가 전멸한 사례는 흔하다. 게다가 정글은 사람들의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녹색 사막이라고 부를 정도로[6] 생산력과 인구 부양 능력이 극도로 떨어지는 지역인데 사람이 먹을 만 하거나 많이 나는 식물은 적지만 독성을 가진 식물은 많다. 식물에서 눈을 돌려 벌레나 작은 동물을 사냥한다고 쳐도 그걸로 사단을 이루는 1만 명 이상의 식량이 될 리가 있겠는가? 애초에 저런 것만 먹으면 몸이 버틸 수가 없다. 그 베어 그릴스도 구조받을 때까지 살아남는 시간을 연장 하려고 벌레를 먹는다. 제대로 된 한끼 식사로 벌레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얘기이다. 애초에 군인들은 보급을 잘 받고 식량을 잘 챙겨먹고 해야 전투력이 생긴다. 그리고 극지 생활하는 사람들처럼 전투도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하기 때문에 평상시 성인 섭취량보다 배는 먹어야 한다. 전투식량이 맛은 없어도 열량만큼은 엄청나다는 걸 생각해보자. 근데 이분은 보급이라고는 하나도 모르고 거기에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않는데 군인들이 잘 버티고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는 정글에서는 전투력 유지와 생존을 위해 잘 먹고 체력을 보존하는 게 더더욱 중요한데 풀만 뜯어먹으라는 것은 이미 그 시점에서 전투력을 포기한 수준의 발언이다.

임팔 작전은 버마에서 아라칸 산맥을 직접 넘어서 인도의 북부인 아삼을 기습해 직접 압박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작전 입안과 강행 자체가 자신의 체면(...) 때문이었다고 주위에서 증언했다. 게다가 무타구치가 제시한 작전 기한은 불과 15일밖에 안된다. 물론 버마에서 아라칸 산맥을 직접 넘어서 인도의 북부인 아삼까지 15일만에 갈 수 있을 리 없지만, 보병 개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식량이 15일치이기 때문에 작전 기한을 15일로 잡은 것. 이렇듯 보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작전이었다.

4.2 미친 듯한 태클, 그럼에도 기어이 승인된 작전 계획

하지만 희대의 막장인 일본군이라 하더라도 무타구치 수준으로 눈 뜬 장님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당시 15군 참모장으로 육군 소장 오바타 노부요시가 부임했는데, 이 사람은 20년 넘게 병참 업무만 담당해온 인물이었다. 오바타 소장은 '만 5천톤에 달하는 물자를 어떻게 보급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하자 현지 조사를 통해서 진격로를 면밀하게 검토한 뒤에 "자동차도 모자란 판국에 비만 오면 못 쓰게 되는 도로, 다리도 없는 친드윗 강, 험준한 산이 가로막고 있는데 보급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불가능하다"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무타구치는 나약한 소리라면서 무시하고 오바타를 전투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부임 한 달 만에 해임시켜 버렸다.

15군 산하의 33사단장 육군중장 야나기타 겐죠와 31사단장 육군중장 사토 고토쿠도 들고 일어났지만, 역시 무시당했고 오바타 참모장의 해임 이후에 반대여론은 사그라들었다.

이 작전을 검토하기 위해서 랑군에 모인 상급부대 참모들도 신나게 까대기는 마찬가지였다.

버마 방면군, 나카 에이타로 참모장 : 후방에서 보급이 어렵지 않도록 3개 사단의 배치를 재고해야 한다.
남방군, 이나다 마사즈미 참모장 : 보급 계획을 도외시한 이 작전구상은 실패할 위험성이 높다.
대본영, 사나다 조이치로 작전과장 : "작전구상이 엉망진창이다."

이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한 게 이때는 바야흐로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고 미군의 전면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레이드는 커녕 본진 막기에도 급급한 상황. 이 시점에서 안 그래도 모자란 전력을 분산시키겠다는 이 발상에 참모진들이 미친 짓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도조 히데키의 입맛에는 딱 맞는 계획이었다. 대본영은 8월에 준비 명령을 내렸고 계속 반대하던 이나다 참모장은 10월에 갑자기 해직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 해임은 도미나가 교지의 작품이었다.

무타구치는 작전을 위해 직속상관인 가와베를 이렇게 설득했다.

"각하와 저에게는 이 전쟁의 근원이 된 지나 사변을 일으켰다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작전을 성공시켜 국가에 면목이 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작전 구상을 두고 열린 회의에서 남방군의 아야베 키즈쥬 총참모장한테 이렇게 말했다.

"군문에 몸을 담은 지 어언 30년. 이렇게까지 필승의 신념이 떠오른 적은 없었소. 영국군약하오. 반드시 퇴각할 거요. 보급에 대한 우려는 착각이라 할 수 있소."

이 말을 들은 참모장 나카가 "이 작전 구상은 너무나 위험부담이 크다고 생각되오. 재고의 여지는 없는가?"라고 물었지만 무타구치는 "당신은 실전 경험이 없어서 지레 겁을 먹는 모양이지만, 이렇게까지 준비를 철저하게 한 싸움은 일찍이 없었소이다. 천장절[7]까지는 임팔도, 코히마도 반드시 점령해 보이겠소"라고 자신했다. 그 말까지 들은 나카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때 남방군의 보급을 담당하던 이마오카 유타카 참모가 다시 제동을 걸었다. "말씀하신 대로만 진행된다면야 어떻게든 될 것 같소. 하지만 사단이 적에게 발목을 잡힌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오." 그러자 이번에는 작전 담당인 키노시타가 얼굴까지 빨개지면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소!"라면서 나섰고 결국 모두가 "아, 그렇습니까?" 하고 말한 뒤 더 이상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결국 총참모장 아야베는 이 계획의 인가를 상급부대에 요청하는데 노구교 사건 때도 무타구치의 직속 상관이었던 버마방면군사령관 카와베 마사카즈는 아래와 같은 헛소리를 하면서 통과시켰다.

예전부터 무타구치 군이 공들여 계획한 독립운동 작전이다. 꼭 인가해주고 싶다.

카와베가 이딴 쓰레기 같은 작전 계획에 인가를 해준 것은 무타구치와 카와베가 노구교 사건 이전부터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방면군 고급참모 육군소장 가타쿠라 다다시의 진술에 따르면 "우리 군사령관은 개인 감정에 치우치는 바람에 무타구치의 행동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이 인간도 무타구치와 공범이다라는 뜻.

남방군사령관 테라우치 히사이치[8]도 반쯤은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는지 지휘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를 하면서 통과시켰다.

이 작전을 성공시켜서 교착 상태의 전국을 타개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작전 같지도 않은 물건이 각종 결재단계를 통과하자 대본영 참모장 사나다 조이치로가 마지막으로 제동을 걸었다.

비행기도 자동차도 없는 상황에서는 절대 반대다. 작전 수행을 위해서는 도로 건설을 위한 1년의 기간이 필요하고 이것이 불가능하면 해로수송을 위한 해군의 협조라도 있어야 한다.

당시 육군과 해군간 사이가 어떠했는지 고려하면 육군 장교에게 해군의 협조를 받으라고 권하는 이러한 진언은 받아들여지긴 커녕 찍혀서 모가지 당할 걸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삼간사우로 악명 높았던 사나다조차 자기 모가지 걸고 반대한 점에서 무능한 높으신 분이 보기에도 이 작전이 얼마나 대책 없고 막장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삼대오물로 유명한 육군참모총장 스기야마 하지메가 오로지 파벌만 생각하고 최종승인을 해버렸다.

테라우치 씨 부탁이니 통과시켜주게.

그리고 히로히토는 그렇게 올라간 미친 존재감의 보고서를 읽은 뒤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탄식하였다.

이런 게 정말로 가능하긴 한 건가?

사실 히로히토는 어린 시절 가쿠슈인에 입학했을 때부터 군사 교육을 받았고 야매로 배웠지만 일본육군사관학교도 졸업해 군문에 무지렁뱅이는 아니었다.[9] 그렇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일반인보다 낫다는 정도지 제대로 실전에서 싸워온 직업 군인들과 비교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단순한 군사 교육을 받은 아마추어가 수십년 간 실전을 거친 장군들보다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아 씨바 할 말을 잊었습니다[10]

4.3 찬드라 보세도조 히데키

임팔 작전은 이런 군사적인 면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면도 있었다.

자칭 자유 인도 임시정부[11]수상 찬드라 보세도조 히데키에게 "일본군이 인도를 공격하면 자신은 인도인을 선동해 영국군을 몰아내고 친일 인도 정부를 세우겠다"라고 약속을 한 것이 있었다.

이렇게 보면 찬드라 보세가 영악한 친일주의자로 보이지만 찬드라는 친독에 가깝고 인도의 지배자 영국에 맞서고자 추축국을 선택한 것이다. 연합군을 택했으면 처음부터 독립의 독 자도 못 꺼냈을 것이다. 또 인도가 독립한 데에는 간디의 비폭력 저항보다는 찬드라 보세가 주도한 무력 저항, 특히 찬드라가 이끈 군대가 영국을 공격하려 한 것이 더 결정적인 요소라고 보는 설도 있다. 1942년 영국이 지속적으로 인도를 전쟁으로 끌고 가려고 하자 간디가 불복종 운동을 선언했는데 선언 몇 시간 후 영국군이 인도인 정치가란 정치가는 죄다 감옥에 잡아들여버렸다. 그렇기에 전쟁 중 인도 독립운동가들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독일에 망명하고 있던 찬드라 보세 뿐이였다. 따라서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편이 좋겠다.[12]

도조 히데키도 당시에 다른 전장의 전황이 악화되어 정권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찬드라 보세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나머지 정권 유지를 위해 작전을 인가했다는 증언도 남아있다(...) 그때 찬드라 보세가 부릴 수 있는 '인도 국민군' 병력은 43,000명이었다.

전쟁 이후 찬드라 보세와 인도 국민군 장병들이 전범/반역자 재판을 받을 때 그 변호를 담당한 사람이 다름 아닌 20년간 변호사 영업을 쉬고 있던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13]였다. 재판 당시 인도의 여론은 "방향은 잘못되었지만 그들은 분명히 인도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용사"라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네루 자신은 임팔 작전 당시엔 영국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었다.

  • 일본 우익사관에서의 평가
현재 일본 우익사관 입장에서는 인도와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운 정의로운 전투로 평가한다.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울 좋은 대의명분하에, 1943년 11월 5일~6일간에 열린 대동아회의에 참석한 찬드라 보세는 연설에서 "아시아, 아프리카의 모든 민족의 해방은 이 전쟁(=대동아전쟁)에 있어, 일본과 그 동맹국(=나치 독일 & 이탈리아)이 승리와 성공을 하느냐 마느냐에 달려있다. 일본 여러분의 이름은 새로운 동아시아를 만드는 분들로서만 아니라 '신세계의 건설자'로서도 역사에 새겨질 겁니다"라고 말했다. 연설만 들어보면 친일 맞네 비록 일본은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백인 귀축 침략자에 당당하게 맞서 싸운 이 전투로 인해 아시아 식민지 국가는 더 이상 백인 침략자를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고, 용기를 불러 일으켜서 독립을 이끈 계기가 되었다고 지들끼리 자위하면서 믿는다. 그리고 열심히 이런 컬트 사상 믿음을 인터넷과 유투브를 이용해서 포교 중이다.

4.4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작전

뭐 어찌됐던, 막상 대본영은 이 작전의 결행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제15군에게 명령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훈령을 내린 뒤 회의만 거듭했다.

시간이 흘러서 9월 중순, 현지에서는 준비 명령에 따라 사단별 담당 구역을 설정하고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세웠다. 동부 정면에 제18사단을 배치하여 연합군의 진출을 막도록 하고 제33사단, 제15사단, 제31사단 등 3개 사단으로 임팔을 침공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곧 일본군 특유의 보급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원래 15군은 병참부대 증강안도 함께 대본영에 제출했었다. 처음 계획안에서는 트럭을 보유한 자동차 중대 160개, 말들을 이용하는 치중(輜重 = 보급수송)병 중대 60개, 그리고 5개 공병 연대였으나 버마 방면군을 통과하면서 90개, 40개, 3개로 줄었고 다시 남방군을 거치면서는 26개, 14개, 2개로 더더욱 줄더니 드디어(?) 대본영에 제출될 때는 18개, 12개, 0개가 되었는데 그 이유가 "임팔만 먹으면 다 해결됨!"(...) 이 또한 어이가 없는 게 남방작전 때의 싱가포르 전투처럼 대량의 물자를 노획하는 행운이 또 오리라고 여긴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임팔이 점령 당하면 영국군이 청야전술을 안 할 리가 없을 텐데? 무엇보다 공병을 두고 오면 수리는 누가 하고 뒤처리는 누가 하는지는 고사하고 애초에 수비전부터가 무리이다. 물론 파괴된 도시는 그 자체로 방어력을 발휘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 시가전이 벌어졌던 모든 전투들이 건물의 잔해가 얼마나 놀라운 방어력을 발휘하는지 증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건물 잔해가 시가전에 유용하다 하더라도 최소한 보급과 병력 이동이 이루어지려면 최소한의 정리는 되어야 하며 가능하다면 잔해로 요새화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역할은 오로지 공병의 것이다.

제15사단 주력은 선박이 부족하여 중국 난징에 남아있던 병력 수송이 늦어졌다. 그리하여 병력은 육로를 개척하며 버마로 향하는 가운데 야마우치 사단장과 참모장만 버마에 도착했다. 문제는 이 사단은 전투 경험이 없는 부대였으나 이 작전의 주력 부대가 되어야만 했다. 뭥미.

4.5 목욕탕 결재

이 와중에 현지군은 작전을 빨리 결정해 달라며 남방총군 작전부장인 아야베 소장을 도쿄로 보내 작전 실행을 촉구하기로 하였다. 끈질긴 설득에 대본영이 넘어가 작전 결정을 하고 12월 31일에 육군본부 군사과장 니시우라 대좌가 도조 히데키에게 결재를 받으러 갔는데 마침 도조는 목욕 중.

그때 도조가 물은 것이 유명한 6개 조항이다. 지금 생각하면 저 조항 중 2번째가 압권

1. 보급 문제는 해결 가능한가?

2. 현실성 있는 작전이냐?
3. 증원 병력이 더 필요할 일이 생기겠느냐?
4. 버마 방어에 공백이 생기겠느냐?
5. 상대의 공중-지상 입체 공격을 막을 수 있느냐?
6. 해상으로 연합군이 밀려왔을 때 막을 수 있냐?

모두 기본적으로 전략과 전술을 익혔다면 당연하게도 나오는 질문이었으나 니시우라 대좌는 우물쭈물대면서 도조의 질문에 명쾌한 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꼴을 본 도조는 이런 것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서 무슨 결재를 요구하냐면서 버럭 호통을 쳤고 그제서야 니시우라 대좌는 발등에 불이 떨어져 여기저기 연락을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연락을 넣고 나서야 "확인해 보니 질문하신 것 모두 문제 없답니다"라 답했다. 도조는 그 모습을 보고 한심해 하면서도 '될 대로 돼라'는 식으로 사인을 해줬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태평양 전쟁에서 지적하듯이 도조가 물은 건 상급자로서는 당연한 사항이었다. 문제는 저런 사항은 도조가 물어보거나 군본부 군사과장이 다시 알아볼 게 아니고 무타구치 본인이 사전에 준비해서 도조에게 보고를 올리고 도조가 승인하는 것이 순서에 맞다. 즉, 저런 준비도 없이 기안을 올린 무타구치나 이걸 알고서도 사인해 준 도조나 똑같은 놈들이다.

5 한편 연합군에서는

5.1 반격 준비

물론 연합군이 갑자기 정신을 놓고 미친 짓을 했다면 성공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연합군이 매우 정상이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고 말이다.

서부의 정면에는 길포드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 보병 3개 사단기갑 1개 사단, 윙게이트 장군의 공수부대 6개 여단이 배치되었고 내부에는 독립군의 천재 지략가 무타구치 장군이 이끄는 내부 공작부대가 북부에는 스틸웰 장군의 미, 중군 2개 사단 반, 동부에는 위립황 장군의 중국군 14개 사단이 배치되어 3방면으로 포위 태세를 갖추는가 하면 유력한 공군 부대도 공격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특히 중경으로 보낼 군수물자 수송로인 레도 공로(Ledo Road)와 버마 공로(Burma Road)를 건설하고자 알래스카 공로 2,500km를 8개월 만에 완성한 알로 스미스 공병대가 파견되었다. 이 레도 공로는 인도의 레도에서 중국 운남성 쿤밍(곤명)에 이르는 1,079km의 군용 도로이며, 버마 공로는 미얀마 라시오에서 쿤밍까지 이어지는 1,154km의 군용 도로로 레도 공로는 동북 인도의 유전지대에서 생산된 연료를 운반하기 위한 것이며 버마 공로도 역시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한 목적. 비행기로도 충분히 수송이 가능했지만 비행기로 수송되는 연료=비행기 사용 연료였기에 연료 소비를 줄이기 위해 도로를 뚫은 것.


BurmaRoad_MyanmarBus.jpg
이로하자카
카트라이더

버마 공로를 상징하는 유명한 '24 커브'. 정말 크고 아름다운 도로다(정확히는 레도 공로에 연결되어 있는 중국 귀주성 칭룽현에 있는 도로 사진임. 구글지도 링크[14]). 저 사진을 보고 "왜 길을 구불구불하게 내요? 그냥 일직선으로 내지"라는 말이 많으나 저 도로는 산비탈에 낸 것이다. 당연히 일직선으로 내면 차량은 커녕 사람도 지나가기 힘든 지독한 내리막길 = 반대 방향으로 가면 지독한 오르막길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부러 비스듬하게 내는 것.[15]

연합군은 레도 공로를 '도쿄로 가는 길'이라 불렀으며 이 도로가 일본군 점령지를 가로질렀기 때문에 '싸우면서 건설하고 건설하면서 싸우는' 작전을 펼쳐야 했다. 이 21연속 헤어핀으로 승부다(...)

또한 스틸웰 장군은 태평양 방면의 해상공세에 호응하여 반격 작전을 개시하기 위해 중국군 90개 사단을 미국식 장비로 개편하는 작업도 추진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임팔 작전을 준비하면서 그 결행을 망설이고 있던 43년 9월말, 연합군의 선봉부대는 어느새 후콩 계곡의 북쪽에 나타나 계곡 일대를 정찰 중이던 일본군 1개 중대와 마주쳤다.

5.2 후콩 전투(Myitkyina battle)

후콩 계곡(Hukawng Valley)은 인도 국경을 따라 펼쳐진 동서 30~70km에 남북으로 200km나 뻗은 대정글지대로 우기에는 수많은 하천으로 급류가 흘러 도처가 늪과 연못으로 변해버리는 곳이다. 협곡은 온갖 부패물에서 나오는 독기와 코브라를 비롯한 독사, 도마뱀, 독거미, 전갈, 거머리들이 들끓으며 주변의 산지에는 표범이나 호랑이가 득실거렸다. 원주민들도 맹수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1943년 10월 30일, 일본군이 계곡에서 마주친 것은 중국군 제38사단의 정찰부대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무타구치는 즉시 제18사단 예하 제56연대를 급파하여 중국군 제38사단을 포위하려 했다. 1개 사단 병력을 1개 연대 병력으로 포위하려 한 것이다. 이뭐병.

하지만 이들은 일본군이 지금까지 만난 당나라 군대 중국군과는 전혀 달랐다. 무장도 아주 잘 돼있었고 특히 왕성한 전투 의지는 일본군을 매우 놀라게 했다. 일본군 제56연대는 밀림의 중국군을 포위하여 압박해 들어갔으나 중국군은 전차와 중화기로 원통 진지(Admin Box)를 구축하여 공중 보급을 받으면서 방어하고 있었다. 이 원형 진지는 영국이 고안해낸 전법으로서 종래와 같이 방어진의 일각에 구멍을 뚫고 돌입하여 분단한다는 전법은 먹히질 않았다. 특유의 반자이 어택을 감행해 보았지만 결과는 뻔했다.

결국 후퇴를 하게 된 일본군은 역시나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당시 중국 중앙일보의 종군기자로서 이 전투에 참가했던 장인중(張仁仲)은 당시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였다.

"마인칸 교외에서 연합군에 투항해온 일본군의 영양실조는 놀라울 정도로 심했다. 개중에는 문자 그대로 굶어 죽기 직전인 자도 있었다. 먹을 것을 던져주니 몹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그것을 받아 먹었는데 10일이고 1개월이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은 나무 뿌리나 벌레를 잡아 먹으며 연명했다고 한다."

결국 제18사단은 작전이 종료될 때까지 현 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5.3 메릴의 약탈자들(Merrill's Marauders)

2월 19일, 프랭크 메릴 준장이 지휘하는 미군 제 5307 혼성연대 2,900명이 전선에 도착했다. 이 메릴 부대는 영국군 윙게이트 병단에 자극을 받아 미국이 편성한 부대로 게릴라 훈련부대와 과달카날, 뉴기니의 실전부대와 미 본토에서의 지원병으로 편성된 특수부대였다. 카빈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바주카 등으로 무장한 이 부대는 버마 당나귀 700필에 군수물자를 싣고 현지에 도착했다.

스틸웰 장군은 그들을 반기며 자기 휘하의 부대와 합류시켜 마인칸 공격을 명했고 일본군 제18사단이 3월 5일을 기해 마인칸에서 철수하였으나 메릴 부대가 퇴각로를 차단하여 일본군은 340명의 환자를 등에 업고 정글 속을 굶주림과 말라리아에 시달리며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후에 이 메릴의 약탈자의 전훈을 살려 유명한 그린베레가 탄생하게 되었다.

물론 메릴의 약탈자 부대들도 전사자 272명 외에 열대 질병으로 980명 이상이 죽거나 후방으로 후송되었고 그 후방 후송자 중에는 지휘관인 프랭크 메릴 준장도 있었다. 말라리아 합병증으로 몇 번씩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야 했다고.

6 우호작전(ウ号作戦)

6.1 조공 : 하호작전(ハ号作戦)

일종의 조공으로 버마 남부에서 1944년 2월에 행해진 작전은 하호작전(ハ号作戦)이라 한다(미국 쪽에선 Battle of the Admin Box, Battle of Ngakyedauk, Battle of Sinzweya로 부름).

이것도 역시나 보급 부족으로 박살났다. 게다가 애초에 해당 방면은 한쪽이 바다고 다른 한쪽이 험준한 지형인지라 방어하는 쪽이 100% 유리한 곳이었으므로 결국 조공의 의미도 없었다.

그런데 하호 작전을 앞두고 신통하게도 94식 산포가 영국군의 허리케인 전투기를 격추하는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 아프리카에선 대공포로 전차를 잡고 버마에선 산포전투기를 잡습니다! 하호 작전 준비를 위해 여념이 없는 55 산포 연대의 진지를 향해 방심한 채 일직선으로 달려들던 허리케인의 총격에 1개 소대가 영거리 사격으로 대응하여 박살을 내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즉각 버마 방면군에 보고되었으며 지휘부는 임기응변의 훌륭한 사례로 전군에 하달하고 적 항공기 내습시에는 가능한 모든 화기를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도록 지시했다. 물론 그 이후에 명령대로 공습시 모든 화기를 쏟아부은 부대는 모두 전멸했다. 차라리 그냥 참호에 처박히는 편이 나았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 보병의 주력화기인 아리사카 소총은 느려터진 볼트액션 방식에 후기형 99식이라 가정해도 사용탄이 미군의 .30-06탄(7.62x63mm)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약하다는 걸 감안하면 온갖 방탄과 떡장갑을 두른 연합군 비행기를 격추한다는 것은 더더욱 가능성이 희박한 이야기다. 참고로 독일군은 분당 1,200발 발사속도인 MG42 기관총을 3~4개 이상 결합해 만들거나, 한술 더 떠서 20mm 급의 강력한 대공포를 다수 배치해 화망을 구성해 쏴도 대공포 단독으론 수백킬로 이상 속도로 탁 트인 하늘을 날아다니는 연합군 전투기를 격추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었기 때문에 그냥 쫓아내거나 특정 구획의 접근을 방어하는 목적에 무게를 더 두었을 지경이다.

더구나 임팔에서는 무타구치가 터트린 보급문제로 인해 소지한 탄약의 양도 적었기 때문에 앞뒤 안가리고 부대 단위로 비행기에 쏴댈 정도로 풍족한 상황도 아니었다. 독일군의 경우엔 앞서 말한 고성능 기관총인 MG42를 결합한 지상 대공포론 전투기를 겨우 잡을 수준이라 더욱 흉악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20mm Flak 30, 38 등의 4연장 대공포를 동원했지만 그래도 격추가 쉽지는 않았다. 고고도를 나는 연합군 대형 폭격기 처리엔 강력한 화력으로 유명한 명품 수준인 88mm 대공포까지 동원했는데 이걸로도 맞추기가 힘들어서 연합군 폭격기 한 대를 격추하는데 든 포탄이 평균 3천발 정도였다고 보고된다.

그래서 임팔서 연합군의 대형 폭격기나 수송기를 보병들의 소화기로 격추하는 것은 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고, 근접지원을 위해 저고도를 날아다니고 폭격기보다 맷집이 약한 전투기라도 연사력 부족에 화력조차 안 나오는 일본군의 소화기로는 쉽게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연합군 전투기의 방탄은 38식 아리사카 소총의 의 6.5x50mm탄으로는 건드리는 수준이었고 후기 99식 아리사카의 7.7X58mm이라 쳐도 유효한 수준이 아니다. 참고로 제로센과의 공중전에서도 연합국 비행기에게 큰 타격을 줄 만한 유효탄이 나오려면 20mm 99식 기총, 아무리 약해도 13mm 3식 기관총 이상으로 쏴야 했는데 정글을 행군한 알보병 부대가 그런 장비가 풍족할 턱이 있나. 대전차 소총은 한 발씩 쏘면 이론상 맞출 경우 타격은 줄 수 있지만, 대공포를 비처럼 뿌려도 맞네 마네 하는 비행기에 정확하게 명중시킬 수나 있을지는 뻔한 거고(...) 그리고 조종사나 엔진, 기타 중요부위에 직사로 맞지 않는 이상 동체에 대전차 소총을 한두 발 맞춰봐야 큰 타격을 입는 것도 아니다.

결국 개판인 일본군 장비니 독일군의 몇 배의 탄환과 노력을 투입해도 임팔서 연합군 비행기 1대를 격추할까 말까 한 상황이라 보면 된다. 그래서 앞서 나온 사례도 자세히 보면 보병의 개인화기가 아닌 94식 산포가 격추했다는 말이 있다.

최종 요약하자면 격추하기도 힘들지만 운 좋게 떨어뜨려도 수지타산이 안 맞을 게 뻔했다.

6.2 우호 작전 개시

윙게이트 병단의 공격으로 일본군 후방이 어지러운 가운데 우호작전(ウ号作戦)은 개시되었다. 아무튼 무타구치는 이런 구상을 하달했다.

1. 제31사단은 남쪽에서 재빨리 국경을 돌파하여 북진, 연합군을 견제하면서 임팔로 향한다.
2. 그동안 제15사단과 제33사단은 기습적으로 친드윈강을 도하, 국경으로 향한다.
3. 견제당하고 있는 연합군의 허를 찔러 제15사단은 직선으로 임팔 동북부에 진출, 연합군을 포위한다.
4. 제31사단은 북진하여 코히마를 점령, 북쪽에서 임팔로 향하는 연합군 증원부대를 저지한다.
5. 코히마의 저지 작전에 성공하면 제 31사단의 일부를 임팔의 주전장으로 돌린다.
6. 이 공략 작전은 20일 이내에 끝내기로 하고 전체의 작전 개시일은 3월 15일로 하되 그 중 제33사단의 행동 개시일은 3월 8일로 한다.

이 임팔 작전의 기한은 병사 개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식량에 맞춰서 작전 기한을 정한 것이다. 당시 지고 가야만 했던 무게만 40kg, 보급된 양은 소총탄 240발, 수류탄 6발, 그리고 20일 간의 식량, 조미료 등이었다. 현대전 들어와서 병참이 작전의 중요 요소이고 그래서 작전에 종속적인 수준이 아니라 작전의 한계나 성패를 좌우하는 수준이다. 고로 보급 한계에 맞추어서 작전을 계획한 것 자체는 개념상 맞는 것이고 위에서 보다시피 일본군도 보급의 중요성을 알고 제대로 된 보급 계획을 초안에 실었고 군수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한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작전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수준으로 병참을 준비한 것도 아니고 보급 수준에 맞춰서 작전을 짠 것도 아니라 작전을 짜놓고 거기에서 보급에 맞춰서 실행하라고 하니 제대로 될 턱이 없다.[16]

당연히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친드윈 강을 건너면서 각 사단은 사단이 데리고 있던 동물의 약 1/3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아라칸 산맥(버마와 인도 국경에 있는 산맥으로 산맥 서쪽에 임팔이 있다)으로 접어들자 병들어 죽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고 포격에 놀라 도망가고 하면서 동물의 손실 수는 계속 늘어났다. 결국 제31사단의 경우 친드윈 강 도하 이전에는 125마리의 를 가지고 있었지만 21일 후 코히마에 도착했을 때는 불과 5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 그 동물들이 죽는 바람에 도착한 개인 탄약의 양은 계획의 절반 뿐이었다(...) 더구나 병사들이 짊어진 무게가 일본인들의 평균 체격 기준으로 벅찬 40kg에 육박한지라[17] 정글에 몰래 무거운 장비를 조금씩 버렸는데, 문제는 이 버려진 물건들 중 화력지원을 담당할 산포나 중화기의 부품이나 포탄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 저걸 다 갖고 있어도 빈약한 화력의 일본군인데 약간이나마 갖고 있던 중화기조차 포기한 꼴이다.

이 임팔 작전에 참가한 3개 사단 중 가장 약체로 평가되는 것은 제15사단이었다. 타이에서 도로건설 작업을 하다가 미얀마까지 자력행군 해온 데다가 중화기를 비롯한 각종 화기도 부실하여 야포라곤 31식 산포 18문을 보유하고 있는 게 전부였다. 게다가 사단 전체가 작전에 투입된 것이 아니어서 임팔 작전에 나선 사단장이 자기 사단의 병력을 전부 장악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작전 개시 직전에 사단의 중추인 작전주임참모와 보병단장이 서로 보직을 맞바꾸는 괴상한 인사이동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무타구치의 질타와 독촉에 못 이겨 무리한 돌진을 강행, 3월 28일 임팔의 북면에 가까스로 도달했다. 이것은 코히마와 임팔 사이를 차단하는 것이며 연합군 보급에 큰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6.3 강태공 영국군의 낚시질과 낚인 일본군의 오판

영국 제14군 사령관 윌리엄 슬림 중장은 즉시 대비책을 마련했다. 슬림 중장은 우선 아캡 방면에 있는 제15인도군단 중에서 제5, 제7인도사단을 빼내어 임팔과 데마풀에 파견하는 동시에 제33인도군단에서도 제2사단과 제50인도전차여단을 증파하는가 하면 제14군의 예비대 인도전차사단도 이 지역에 투입했다. 그리고 현지의 제4군단에게도 임팔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제4군단 예하의 제17인도사단은 이미 일본군에게 퇴로가 끊겼고 제23인도사단도 우크룰 남쪽에서 포위당하고 말았다. 이어 제23인도사단은 암호문서 등을 소각한 뒤 그 일부가 탈출에 성공했으나 일본군 제33사단의 사사하라 연대와 대치중인 제17인도사단은 좀처럼 퇴로를 발견할 수 없었다. 제17인도사단은 개전 초부터 일본군 제33사단과 맞서 싸워왔으며 지난 2년 동안에는 무려 30회 이상이나 교전한 경험 많은 베테랑 부대였기에 인도 주둔 영국군 총사령관 해군 원수 루이스 필립 마운트배튼 경[18]도 부대의 탈출을 독려하려고 했다.

이때 제4군단장 스컨즈 중장은 이 사단의 철수를 위해 기발한 구상을 하였다. 제23인도사단 중 1개 연대만을 철수시킨 후 나머지 병력으로 제17인도사단의 구원 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3월 14일, 토이톰 고지의 어느 산허리에 진을 치고 있던 해당 연대 철수 지시가 내리자 연대는 수많은 트럭과 전차를 이끌고 임팔로의 철수를 시작했고, 바로 그 철수 행렬이 산허리를 거의 통과하고 있을 때 일본군 정찰부대가 그것을 발견했다. 정찰부대는 이 사실을 곧 연대 본부에 보고했고 연대장 사쿠마 대좌는 제33사단장 야나기타 중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영인군이 총퇴각했다"라고.

그 말에 사단 사령부는 전선 근처까지 이동했고 철수했다던 제17인도사단은 철수는 커녕 압도적인 포화를 퍼붓고 있었다.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 수많은 전차가 전차포로 일본군의 최일선 진지를 쑥밭으로 만드는가 하면 날아드는 보고는 "영인군의 증원부대가 계속해서 전선에 도착하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러던 3월 23일 밤, 야나기타 중장은 사사하라 연대로부터 문제의 전보를 받았다.

"본 연대는 암호서류를 소각하고 군기를 파기한 후 전원 옥쇄의 각오로 분투하고 있음."

이 전보를 보고 야나기타 사단장은 "연대 전멸이구나!"라고 생각해 철수를 명령했지만 사실은 "죽을 때까지 싸워보겠음"이라는 의미였고 그 결과로 영국군은 무사히 철수했다.

6.4 반성 전보

인도군의 철수를 알게 된 무타구치는 길길이 날뛰었고 27일에는 야나기타 중장에게 후일 반성전보라고 불리게 될 전보까지 받게 되었다.

"본 사단은 군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함. 그러나 다른 사단 방면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근본대책을 강구해주시기 바람."

①본 사단 방면의 정보는 거의 대부분이 비보이며 금후의 작전은 극히 곤란할 것이 예상됨. 따라서 20일만에 임팔을 공략한다는 것은 절망적 상태임. 우기의 도래와 보급의 곤란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임.
②아군의 편성과 장비는 극히 열세에 있고 적군과 비교한 종합적 전력이 불충분하므로 헛되이 인명을 소모할 뿐이라고 판단됨. 이제 임팔 공략은 불가능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고 있으며 설령 그 공략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금후의 방어는 어려울 것임.
③미토키나 방면에 적의 공정부대가 투하된 것은 거의 진공 상태에 이르고 있는 미얀마 본토를 위태롭게 할 것임.

"이건 미친 짓이야. 당장 중단해야 해"라는 의견인데 당연히 이 의견을 무시한 무타구치는 자신의 감정이 그대로 실린 명령문을 보냈다. 이 전문을 받은 야나기타 중장도 감정적으로 거부의 답문을 보냈다. 야나기타의 답문을 받은 무타구치는 분노하여 다시 전진을 명했다. 야나기타도 지지 않고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답문을 보냈다. 작전 이전부터 무타구치는 자기 의견을 따르지 않는 사단장들을 무시했고 심지어 도상훈련 때는 사단장 없이 참모들로만 훈련을 했다!

결국 명령을 받은 대로 전진을 계속했다만 그는 부대를 3대로 나누어 선대가 먼저 목적지를 정찰하고 중대가 따라가고 후대는 선대와 중대가 떠난 뒤 얼마동안 남아서 후방을 살피는 안전 위주의 전진이었고 결국 4월 22일, 무타구치는 격노하여 직접 제33사단을 찾아 사령부에 뛰어들어 참모들의 눈 앞에서 일반 사병을 대하는 식의 거친 말투로 야나기타 중장을 몰아붙였다! 이뭐병.[19]

결국 분노게이지가 폭발한 무타구치는 야나기타 중장을 해임시키고 그 후임으로 자신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인물인 다나카 중장을 제33사단장으로 앉히기로 결정했고 이런 사태가 전개되자 버마 방면군 사령관 가와베 마사카즈 중장은 난처해했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사단장을 교체하는 이런 일이 있어도 되는가? 하지만 전선 사령관인 무타구치의 의견을 중시하기로 하고(...) 5월 15일자로 야나기타 중장을 해임하고 다나카 중장을 그 후임에 임명했다. 그리고 제15사단 야마우치 사단장 역시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시바다 중장을 임명했다. 야마우치 중장이 해임된 이유는 그가 앓고 있는 폐병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무타구치의 작전에 은근히 반대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6.5 비센푸르(Bishenpur) 전투

가까스로 33사단은 임팔 평야의 입구까지 도달했지만 비센푸르 요새에 부딪친 제33사단은 우선 남아있는 소형 전차를 앞세워 요새를 돌파하고자 했으나 영국군의 포화 앞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자 신임 다나카 중장은 남아있는 화력을 모두 집중하여 요새를 격파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제33사단의 포병 화력은 불과 150㎜ 유탄포와 100㎜ 캐논포 몇 문이 고작이었고 그것도 영국군의 포화 앞에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심지어 반자이 어택으로 이불 속에 수류탄 여러 개를 싸서 전차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공격을 했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고 마침내 비센푸르 요새의 언덕을 일본군의 시체로 메워 그것을 엄폐물로 삼아 진지를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러일전쟁 당시의 노기 마레스케의 전법, 즉 203고지의 재현이 시작됐던 것이다. 결사대가 모집되어 자살 돌격을 감행했지만 비센푸르의 방어선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6월로 접어들자 포탄이 바닥나고 병사들은 굶주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동안 영국군의 병력은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보급 물자를 실은 수송기가 영국군 진지의 상공에 대편대를 이루어 왕래하는 모습이 일본군의 눈에도 띄었다.

결국 다나카 중장은 SOS를 쳤지만 대본영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전투기 24대를 미얀마 전선에 파견할 것임. 단, 10일간만 사용 후 즉시 원대로 복귀시키도록 할 것."

이 무슨 기한제 아이템도 아니고...
긴급 전투기 세트 (10일)/얻는 조건: 대본영에게 SOS를! 이벤트 참가시 파견한다는 전투기가 랩터인가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에서 전투기 24대란 적이 오지도 않는 후방에서나 경비로 쓸 수준이지 일선에서는 제대로 된 전력도 되지 않는 한 줌의 병력에 불과하다. 이런 수준의 지원을 지원이랍시고 시간 제한까지 주면서 준다는 것 자체가 대규모 작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공군의 지원을 배제하고 싸워왔다는 소리다. 뭐 이미 무타구치의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는 말에서 짐작한 사람이 많았겠지만... 근데 그동안 영국군이 항공기로 보급하는 걸 몇 번이나 봤을 텐데 이걸 전투기로 방해할 생각도 안한 건가... 설상가상으로 이미 연합군의 비행기는 3,000기가 넘어가고 있었다.

6.6 코히마 점령과 테니스 코트의 전투

그런 와중에 임팔 작전의 최우익을 담당한 제31사단의 임무는 2가지였다. 코히마의 점령과 임팔로의 증원군 저지이다. 이 코히마는 인도 아삼주의 수도 디마푸르과 친스키아 방면에서 오는 도로가 합쳐져 임팔로 향하는 요지이다. 따라서 코히마를 점령하는 것은 임팔로의 길을 차단하는 것이다.

사토 고토쿠 중장이 이끄는 제31사단이 친드윈 강을 건넌 것은 3월 15일이었다. 여기에서 좌익 돌진대인 제31보병단장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소장이 지휘하는 제58연대로 구성된 '미야자키 지대'가 4천명의 병력으로 코히마를 향해 본대와 나뉘어 돌진했다. 미야자키 부대가 아라칸 산맥으로 접어들었을 때 미야자키 소장은 병사들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기상천외한 발상을 해냈으니 그것이 바로 염불이었다. 인도로 가는 원정길이니 염불을 외며 산을 올라가라는 그의 명령에 일본군은 염불을 외며 아라칸 산맥을 넘었다(...)

미야자키 부대가 코히마 외곽에 도달한 것은 4월 5일이었다. 여기서 휴식한 미야자키 부대는 6일 새벽 4시 반에 코히마를 기습하였고 코히마를 지키던 영국군은 자신들의 계산보다 2주일이나 빨리 일본군이 나타난 것에 당황하여 코히마에서 부근 고지로 철수했다. 이때 미야자키 연대장은 부하들의 총을 몽땅 버리게 한 다음 노획한 영국군 무기를 장비시켰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아주 현명한 조치였다. 사실상 아리사카 제식소총의 탄약 보급은 끊긴 상태로 상대가 흘린 보급물자를 주워다 싸우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나마 탄약 보급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당시 일본에서 에게 노획한 대다수 무기는 가져가서 사용하는 게 금기였으며 심하면 군법으로 처벌받는 경우까지 있었으니 미야자키가 얼마나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는지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테니스장 양 끝에 서로 참호를 파고 서로 총격전을 벌이고 수류탄 던지기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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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 테니스 코트의 전투(위키피디아)가 벌어진 곳.

이 회전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전투가 중요한 이유는 안습했던 임팔 전투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제대로 싸웠다고 할 만한 전투를 했기 때문이다. 즉 이 외의 전투는 전부 일방적인 학살이나 자멸이었다는 것(...).

결국 압도적인 영국군의 화력에 부대는 밀려버렸고 공방전 10일 만에 일본군은 절반으로 줄었고 식량도 다 떨어졌다. 일본군은 이제 영국군의 수송기가 뿌리는 보급 낙하산이 자기네들 쪽으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보급이 사실상 사라진 일본군은 이것을 처칠 급여라고 불렀을 정도다. 그러나 처칠 급여의 양 자체가 사단급의 인원에게 충분하지 않았고, 험준한 지형에 뿌려진 보급품을 주우려 적의 눈을 피해서 수색하고 수거하는 과정이 집에서 받아보는 택배처럼 녹록할 리가 절대 없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고 연합군도 바보가 아닌지라 눈에 불을 켜고 보급품을 주우려는 일본군을 찾아다녔고, 아예 적당한 위치에 떨어진 처칠 급여 주변에 숨어 기다리며 저격 등으로 인간낚시를 시도하는 경우들도 많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보급품이 모자라니 저런 상황이 예상되더라도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주워야 했다는 것이 함정. 심지어 저격이 들어오는 와중에 처음부터 일정 숫자가 죽을 걸 예상하고(...) 러시안 룰렛처럼 여러 명이 동시에 달려나가 주워와야 하기도 했다.

더욱 불쌍한 것은 저렇게 병사들의 목숨으로 대가를 주고 처칠 급여를 받아와 식량이나 약품을 예상하고 열어봤더니... 못 먹는 탄약이나 무기라도 나와주면 그나마 다행인데, 쓸모없는 연합군 모자나 피복, 텐트 등이 상자 가득 나타나 멘붕을 초래하는 일자주 벌어졌다. 더구나 일본군 병사 상당수가 학력이 낮고 귀축영미를 주장하며 외국어 교육을 금지한 영향으로 영어를 모르는 까막눈이 많아 라벨을 읽어보고 선별해 주워오는 일 같은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굶주림과 백병전으로 미야자키 부대는 전멸해버린 중대가 3개나 있었다. 미야자키 부대의 병력은 5월이 되자 원래의 1/4로 감소한 형편이었고 사토 사단장은 미야자키 부대의 자살 돌격을 금지하면서 방어 태세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7 재앙의 도래

7.1 공격 중단

전선 보급로는 완전히 막혀버렸고 제5비행사단장 다조에 중장에게는 사토 중장으로부터 애처로운 전보가 날아들고 있었다.

"탄약 1발, 쌀 1알도 없이 적의 식량을 탈취하여 전투를 계속 중. 이제 최후의 기대를 공중 수송에 걸고 있을 뿐임."

이어서 제15사단장인 야마우치 마사후미 중장이 병을 얻어 지휘를 못하자 지휘권을 이양받은 시바타 중장의 전보도 날아들었다.

"이제 본 사단은 호우와 진흙탕 속에서 굶주림과 질병 때문에 전투력을 상실하고 있음. 제1선 부대로 하여금 이런 지경에 빠지게 한 것은 실로 제15군과 무타구치의 무능이 그 원인임."

4월 28일, 무타구치는 랑군에서 파견된 방면군 군수참모 우시로 소좌 앞에서 마침내 이 작전의 불가능함을 시인하게 된다. 이윽고 우기가 닥쳤으나 제15군 예하 병력에게 총탄 한 발, 쌀 한 톨마저 보급할 수 없었다.

4월 29일, 쇼와 덴노의 생일인 천장절이었다. 무타구치는 이날까지 임팔과 코히마를 점령하고야 말겠다고 이야기했으나 현실은...

4월 30일, 우시로 소좌는 랑군으로 돌아가자마자 대본영에서 전선 시찰을 위해 파견된 스기다 참모에게 임팔 전선의 상황을 보고했다. 그리고 임팔 전선이 가망없음을 보고한 후 5월 말까지 작전을 계속한 후 그 뒤에도 전황에 변화가 없을 때는 작전을 중지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스기다는 가와베 등 방면군 사령부의 막료들이 말한 임팔 전선의 승리 가능성과는 반대되는 의견인지라 우시로에게 자세한 현지 상황을 듣고 나서야 그의 말을 믿게 되었고 이러한 것을 대본영에 보고했다.

그러나 이 보고를 듣고 나서 현지로 파견된 방면군의 주임참모와 남방총군의 작전주임참모는 작전 수행 가능이란 대답만을 들었을 뿐이다. 즉, 무타구치 렌야는 속으로는 임팔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지만 상급부대 앞에서 허세를 부렸던 것이다.

7.2 연합군 반격

일본군이 이런 곤란에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명장 무타구치 장군과 스틸웰 장군이 지휘하는 중국군 제38사단과 제20사단은 천천히 카마인에서 모가운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선발대인 제5307연대는 5월 17일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미티나 비행장을 탈환했다. 이와중에 윙게이트 장군이 비행기 사고로 전사했지만 윙게이트 병단은 전의를 잃지 않았고 제14여단을 증원하여 육상으로 남하하는 제16여단과 호응하여 철로 폭파와 함께 핀봉 부근의 일본군 군수품 창고를 불살랐다. 일본군의 혼란을 확인한 마운트배튼 제독은 5월 11일, 제14군 사령관 슬림 중장에게 일본군 제15군에 대한 총공격을 명했다.

이때 일본군들은 이런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1절: 낮에는 비행기 밤에는 박격포, 비처럼 쏟아지는 포탄 아래로
육탄공격대는 오늘도 나가는가, 나라를 위한 일이지만 아아 코히마

2절: 비 내리는 아라칸을 끝도 없이, 어깨에 들것 메고 방황하지만
굶주린 배를 채워줄 보급이 없어, 오늘도 끼니를 찾아 이동한다네

(후렴구) 이거 정말 고생이에요(...). 왠지 귀엽다

일본 본토의 도조는 5월 17일, 덴노에게 "작전 진행은 순조로우므로 불굴의 정신을 다하여 건투에 임하겠나이다"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수신할 사람은 적국 수상 같은데?

이미 4월 말에서 5월 중순에 걸쳐 남방전선을 시찰하고 돌아온 하타 히코사부로 참모장이 "임팔 작전의 미래는 극히 곤란해 보인다"는 시찰 보고를 올렸었지만 도조는 이 보고를 듣자마자 "나약한 생각"이라며 정신력 드립치며 버럭 화를 냈다. 일본 본토에 화려하게 전해졌던 작전 초기의 성과(...)는 전황의 악화로 정권이 오늘내일하던 도조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고 임팔 작전의 성공 여부에 도조의 정치 생명이 달려있었으므로 하타가 시사한 작전 중지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7.3 제31사단장, 항명 선언

뼈만 남은 부하들이 굶어 죽어가면서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는 노래를 부르는 참상을 본 31사단장 사토 고토쿠 중장은 결국 폭발, 제15군에 식량 보급을 요청하는 전보를 치고 곧이어 이번 작전의 잘못을 낱낱이 열거하고 즉시 작전 중지를 요구하는 전보를 쳤다. 이 전문에는 사토의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러나 제15군의 답신에는 보급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없이 단지 공격을 계속하라는 명령만 있을 뿐이었다.

보급을 이유로 철수를 요청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음. 무슨 일이 있어도 현 위치를 사수할 것. 임팔 점령 후, 본 군은 반드시 귀 사단이 코히마를 점령한 노고를 보상해줄 것임.

이에 사토 중장은 이런 전문을 보냈다.

공격 계속 명령 접수했음. 그러나 명령만으로 병력이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귀하의 사고 방식이야말로 이 작전을 실패로 이끌어 가는 중대 요인이 되고 있음. 눈앞의 본 사단 1만 장병은 아사 직전 상태에 놓여있음. 탄약은 고갈되어 맨손의 병력으로 화해버렸음.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것은 모두가 귀 제15군에게 그 책임이 있음. 귀군은 이상 사실을 판단, 반성하여 본 작전을 즉시 중지함으로써 폐하의 적자들을 개죽음으로 이끄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과감한 조치를 강구하기 바람.

한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게 다 렌야 네놈 때문이야. 못해, 배째!.

이렇게 전문이 계속 오가자 15군 참모들이 5월 28일 사토 중장을 달래기 위해 찾아왔지만 오히려 "너희들은 무슨 낯짝으로 여기 왔느냐! 우리들의 적은 영국군이 아니야. 바로 너희들 제15군이란 말이다!"라고 길길이 날뛰면서 규탄하는 바람에 찍소리도 못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결국 사토 사단장은 독단적으로 철수하기로 마음 먹고는 참모진과 부하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질러 버린다.

"지금 우리 사단의 위에는 3개의 머저리 집단이 있다.[20] 제15군과 미얀마 방면군과 남방총군이다. 이런 머저리들 믿고 기다리다간 우리 사단이 전멸하고 말 것이다. 이에 본 사단의 퇴각을 본관 책임하에 독단 결행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5월 31일 밤, 영국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고 코히마를 지키고 있던 마지막 부대가 최후를 알리는 고별 무전을 보내오자 사토는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먼저 부상병 1,500명의 후송을 명한 뒤 좌익부대장이었던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소장에게 병력 600명을 맡겨 후퇴 엄호를 명한 다음 6월 3일 사단 내 각급 간부를 소집하여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때 미야자키 소장은 전혀 일본군스럽지 않은 작전을 통해 31사단을 무사히 탈출시켰고 엄호부대도 탈출에 성공했다.

그렇게 제31사단의 독단 퇴각이 시작되었다. 제31보병사단의 중앙돌파부대인 제138연대장인 토리카이 츠네오 대좌는 코히마 방면에서 철수할 당시 피로로 인해 무거운 소총을 버리는 병사 뿐만 아니라 군복 단추까지 뜯어 무게를 줄이려던 병사들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그나마 31사단의 후퇴가 다른 사단에 비해서 순탄했던 것은 31사단이 전진할 때 주민들을 약탈하지 않고 교섭을 통해 정당한 방법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물자를 입수한 덕이었다. 그때문에 31사단이 패퇴할 때도 원주민들은 그들을 가엾게 여겨 약간의 식량을 제공해주거나 휴식처도 내주었지만 다른 사단들은 진군 과정에서 원주민 마을을 약탈하여 식량을 획득했기 때문에 철수 과정에서 도움을 받기는 커녕 그들의 습격을 받기도 했으며 원주민들은 연합군에게 정보를 넘겨주기도 했고 밤에는 횃불로 연합군의 전투기를 유도해주기도 했다.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퇴각이었던 것이다.

이 사토 고토쿠의 독단 퇴각은 옛 일본군 역사에서 항명 1호 사건으로 꼽힌다. 사토 고토쿠가 얼마나 극적인 결단을 내린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7.4 항명의 충격

31사단 병사들에겐 사토 고토쿠의 퇴각 결정이 희소식이었지만 무타구치 렌야에겐 날벼락이었다.

6월 6일, 버마 사령관 가와베 마사카즈가 무타구치를 찾아왔지만 둘 다 아무 말도 못했고 달라진 것도 없었다. 그 이유가 참 어처구니 없었다.

가와베 : "무타구치 중장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무타구치 : "나는 가와베 장군의 참된 심중은 작전 지속에 대한 나의 생각을 떠보기 위한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그것을 장군에게 실토할 수 없었다. 나는 다만 먼지투성이인 내 풍모를 보고 장군이 알아차려 주기만을 바랐다."

가와베 : "나는 랑군으로 돌아왔다. 내 눈에는 귀기 어린 빗속에서 일선을 지키고 있는 장병들, 특히 파렐 전선에서 악수를 나눈 인도 국민군 장병들의 모습이 역력히 떠올랐다. 만일 냉정하게 이 전황을 판단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이미 이때 작전 중지를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전에는 나의 생각 이외에보다 더 큰 성격이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라도 남아있다면 그것으로 최후까지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가와베 : "이 작전은 내 시야를 벗어나 뭔가 커다란 의미가 있다. 이 작전에는 일본과 인도 양국의 운명이 걸려있다. 찬드라 보스와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한시가 시급한 상황에서 연인도 아닌 사람들이 누가 곤란한 말을 먼저 꺼낼 것인가를 두고 서로 미루기만 하고 있었다는 것...이런 떠넘기기는 할힌골 전투 참가 부대였던 23사단에서 벌어진 바가 있다. 일본군은 이런 병크짓을 반복한 것이었다. 무타구치 렌야는 실제로 상황을 파악하러 온 대본영의 장군 앞에서 체면 때문에 차마 후퇴하겠다고 말도 못하고 후퇴하라고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다가 말을 못했다는 엄청난 위대함을 자랑한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사토 고토쿠 중장은 후퇴지에도 식량과 탄약이 없자 분노를 거듭하며 계속 후퇴했고 무타구치 렌야는 사토 중장이 자신을 만나러 오자 자결해버리라며 단도를 남겨두고 정작 자신은 숨어버리는 추태를 보였으니 사토 고토쿠 중장은 "이 칼로 무타구치의 배때기를 쑤셔버리겠다"며 그 칼을 갖고 이를 갈며 나가버렸다.

결국 6월 20일, 무타구치 렌야는 사토를 해임해 버렸지만 사토 중장은 이미 각오하고 있던 일이고 군사 재판이 열린다면 그때 제15군과 무타구치의 잘못을 낱낱이 규탄할 작정이었다. 근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정작 정신병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연금당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무타구치 렌야가 사토 고토쿠의 입을 막기 위해 상부에다 정신병에 걸렸다고 보고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당시 일본의 관료 제도의 특성상 사토 중장의 지위에 대해 정식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어려웠던 것도 있다.[21]

사토 고토쿠는 1959년에 죽을 때까지 '독단으로 철수한 불명예스러운 군인'이자 '임팔 작전 패배의 원인'이라며 높으신 분들로부터 비난받았지만 31사단의 부하들은 그가 자신들을 살렸다며 감사의 뜻으로 추모비를 바쳤다. 그리고 현재 그 항명 행위는 비난받을 짓이 아닌 부하들을 살린 행동으로 평가받는다. 항명 행위가 범죄가 아닌 정당한 행동으로 평가 받았으니 이건 뭐...

여담으로 전후 무타구치는 스파이 작전의 성공을 보고하는 미군의 심문을 받으면서 이렇게 진술한다.

"저는 작전이 실패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상부에 보고를 할 수 없었기에 작전을 그대로 진행하면서 명령이 하달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타구치를 심문하던 미군 헌병은 이 말을 듣고는 빵 터져서 5분이나 웃어댔다고 한다. 그리고 이 내용을 토대로 언론에 공개했고 그 결과 전미가 웃었다(...). 일본에서는 장군이 개그맨을 웃깁니다!

7.5 작전 중지와 백골가도

5월 말. 임팔 북부를 공략하던 일본군 제15사단도 병사들이 인근 마을을 약탈(할 수 있던 일본군 부대는 차라리 운이 좋았을 정도)하거나 보급품을 자체 조달하기 위해서 진지를 내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리고 6월 22일 33인도군단이 포위망을 뚫고 임팔의 제4군단과 상봉함으로서 일본군의 우호작전은 사실상 끝이 났다.

일본군(정확히는 무타구치 중장)은 이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일본군 제33사단에 보충병 1개 연대를 보강시켜 인도군 제17사단 지역을 돌파하려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일본군 제15사단과 야마모토 부대도 더 이상 공격을 펼칠 능력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6월 말, 마침내(...) 무타구치는 작전 중지를 결정하고 그 뜻을 방면군에 올렸다. 그러나 방면군은 "이런 소극적인 의견을 접할 줄은 몰랐다"면서 오히려 제15군에 계속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 이유가 정말 가관인데 무타구치가 절망과 죄책감에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을 한 가와베 방면군 사령관이 일부러 공격 명령을 내려 무타구치의 기분을 맞춰주려(...) 했던 것이다. 전쟁이 온통 코미디로 가득 찼다

그러나 무타구치가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부대가 움직이지도 않는 사태에 직면한 상황에서 작전 중지 외에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없었다. 방면군은 마닐라에 주둔하고 있던 남방군에 고급 참모를 파견하여 작전 중지의 의향을 전달했다. 7월 2일, 마침내 남방군은 임팔 작전의 중지를 방면군에 명령하게 된다. 결국 작전 개시 4개월이 지난 7월 3일 우호 작전을 중지하고 투입했던 부대를 모두 철수시켰다. 가와베에 따르면 작전 중지를 생각하기 시작한 지 무려 2개월이 지난 후였다고 한다. 가져갈 수 없는 무기와 장비는 모두 내버려졌으며 심지어는 움직일 수 없는 중상자와 병자도 버리고 철수했다.

퇴각에 임한 병사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며 육상과 공중에서 영국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보급이 끊긴 지 오래되어 병약해진 탓에 말라리아와 장염에 걸린 환자들이 차례차례 일행에서 낙오당했다.

영국군의 기동병력이 추격하자 퇴각로는 점점 더 많은 무수한 전사자와 아사자, 병사자의 시체와 백골들이 쌓여갔는데 열대 우림의 습하고 더운 기후 때문에 시체는 3일만 방치해도 피부가 다 썩어서 육탈(탈골)됐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영국군은 전염병의 창궐을 우려하여 추격을 멈추었고 생사를 불문하고 석유를 끼얹어 길가에 널부러져 있던 일본군들을 소각 처리했다.

비바람에 씻겨 하얀 뼈가 드러난 동료들의 시체들을 보고는 병사들은 백골가도(白骨街道) 또는 야스쿠니 가도(靖國街道)라고 불렀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전사자 위패는 모두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졌으니까 죽어서 야스쿠니로 가는 길이라는 이름으로 붙였기 때문이다.

8 작전 결과

일본군은 전사자 32,000명, 병사 및 아사자 40,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이는 각 사단마다 90%에 가까운 손실로 전멸을 넘어 섬멸되었다.[22] 반면 연합군의 피해는 사상자 17,500명이었다.[23] 아무리 일본군이라지만 이쯤 되면 애처롭게 느껴진다

당연히 사토 중장은 군법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사토 중장은 오히려 이걸 별렸다고 한다. 재판장에서 무타구치와 그 일당의 추태를 낱낱히 까발릴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판 결과는 사토 중장에게 정신병판결을 내렸고, "정신적으로 하자가 있는 자에게는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며 예편시켜버렸다. 이는 제15군, 버마방면군 등 상부조직과 군 장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결과적으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임팔 작전의 실패 책임과 소재를 육군 상부가 스스로 감추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작전 책임자인 무타구치는 15군 총철수 이전에 퇴각로 '시찰'을 명목으로 먼저 도망간 사실이 드러났지만 겨우 예비역에 편입되는 경미한 징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육군 예과 사관학교 교장으로 승진했다. 또한 그의 상관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으며, 더러는 승진까지 했다!

자신도 병을 얻어 후송된 야마우치 마사후미 사단장은 임종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공격할 탄환도 없고 지금은 호우와 진흙 속에서 병과 기아에 전투력을 상실했다. 제1선부대가 처한 이런 현실은 군과 무타구치의 무능 탓이다."

임팔 작전의 실패로 인해, 그 전까진 호각지세였던 일본군의 버마-벵갈 전선은 붕괴해 1945년 3월에는 아웅 산 장군이 이끄는 버마국방군이 일본군을 몰아내는 결과를 초래한다. 당시 버마를 책임지고 있던 스틸웰 장군도 무타구치 만큼은 아니지만 전투 태세도 갖추지 못한 채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일관하며 일본군을 얕잡아보고 무리한 공세를 추진하다가 1941년에 버마를 날려버리고 걸어서 버마 국경을 넘어 달아나는 추태를 보인 무능한 인간이었고 이 치욕을 씻겠다고 중국군 예비대 수십만을 멋대로 차출해와서 이를 갈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놈의 오만한 근성 어디 버리질 못하고 버마의 일본군이 얼마 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며 멋대로 공격했는데 실제로 버마의 일본군은 스틸웰 주장의 3~5배에 달했다. 하지만 때를 맞춰 무타구치가 자폭해준 덕분에 그는 역사에서 까일 거리를 겨우 하나 줄이게 되었다. 근데 이 항목을 보면 스틸웰 장군은 굉장히 유능해 보인다 오오 무다구치 효과

9 여담

9.1 무타구치 렌야의 각종 일화

  • 임팔 전선의 전황이 악화되던 당시 자신은 전선 지휘부 옆에다 기생집을 차려놓고 무조건 오후 5시 땡~ 하면 업무 마치고 기생집에 들어가서 마시며 노느라 나오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황이 한참 악화되자 전선 지휘도 제대로 안하는 주제에 사령부 옆에다가 제단을 쌓아두고 신불에게 이기게 해달라고 비느라 그나마 주간에 하던 업무 처리조차 전부 뒤로 밀어버렸다.
  • 휘하 병사들은 그에게 "적보다 무서운 바보 대장" 혹은 "귀축 무타구치"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각하가 좋아하시는 건 첫째가 훈장, 둘째가 여자, 셋째가 기자" 제0순위가 대한독립 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옛부터 나 죽어 죽어 하는 사람치고 진짜 죽고 싶어서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령관님이 저한테 할복하겠다고 말씀하셨으니 저는 부관의 책임으로 일단 '형식적'으로라도 말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령관으로서 정말 책임을 느끼신다면 그냥 닥치고 배를 가르십시오. 아무도 안 말립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배를 가르십시오. 이 작전의 실패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라며 권총을 내밀자 무타구치는 그를 노려보고는 살아갈 의지를 곧추세웠다.

  • 게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생존자들이 간신히 안전지대에 들어오자 장교 전원을 집결시켜 1시간 넘게 훈시를 하는 바람에 영양실조 상태에 있던 장교들이 쓰러져 기절하거나 심지어 사망한 사례조차 있었다. 아무리 영양실조 상태였다지만 일반 병사도 아니고 그래도 사정이 좀 나았을 장교들이... 그리고 이때 한 연설에서...
"사토 그놈은 무기가 없어서, 총알이 없어서, 쌀이 없어서 도망쳐왔다. 이게 말이 되는가. 총이 없으면 대검이 있다. 대검이 없다면 이빨이 있다. 야마토 정신을 잊었는가.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라는 말이 나온다. 신이 지켜주면 왜 병사가 9만에서 1만으로 줄었냐 신이 고통 그만 받으라고 데리고 가셨나보다

  • 15사단장도 31사단장과 비슷하게 작전 취소를 건의했다고 경질되었는데 새로 임명된 15사단장이 장교들의 군도를 검사하니 전부 녹이 슬어있다고 화를 냈다. 하지만 장교들이 살고 있던 곳은 항상 물이 차있는 참호였으니 녹이 안 슬래야 안 슬 수가 없었다. 보급품이 부족해 비가림도 못했다. 녹이 스는 건 둘째치고 그 물바다 위에서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참... 참고로 임팔이 위치한 마니푸르, 나갈란드, 아삼 일대는 몬순 기후와 히말라야 산맥과 아라칸 산맥의 영향으로 인해 지구 전체에서도 비가 많이 오기론 손꼽히는 지역이다.[24]
  • 전쟁 이후 영국군이 그래도 임팔을 친 건 연합군의 의표를 찌른 좋은 발상이었으며 임팔 전선이 유지되었으면 연합군으로는 매우 고전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물론 당시 일본군이 임팔을 점령할 능력도 전선을 유지할 능력도 없었다는 것을 빼면"이라고 말하며 조롱했다.
  • 임팔 전선에 투입된 부대 중에는 남방 전선(남태평양 지역)에서 이동된 부대도 있었는데 그 중에는 과달카날 전투에서 굶어 죽을 뻔한 부대도 있었다. 지못미. 과달카날과 임팔에서 모두 살아남는데 성공한 생존왕 운 좋은 병사는 "과달카날보다 더 끔찍하다!"라는 말까지 남겼다. 그도 그럴게 과달카날에서는 어떻게든 보급해보려는 노력이라도 했다만 임팔에서는 그런 거 없다. 그런 걸 떠나서, 이런 미친 전투를 두 번이나 겪은 그 병사는 운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모르겠다 전투에 참전해야 했던 건 불행이고 살아서 가족을 다시 볼 수 있던 건 행운이다
  • 무타구치는 죽을 때까지 임팔 작전이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교훈을 얻은 것이라고 했다. 즉 1944년의 임팔 작전이 없었다면 동남아 전선의 붕괴는 더 빨랐고 더 파멸적이었다는 말씀. 그러나 1945년의 영인군의 버마 진공은 원래 계획에 없었다. 즉, 다시 말해 임팔에서 일본군이 말아먹은 몇 개의 정예사단 때문에 급하게 진공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러한 약체 일본군의 저항과 우기에 대한 우려로 버마 진공 역시 간신히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오히려 임팔 전투 때문에 동남아 전선의 붕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확하다.
  • 전쟁이 끝난 뒤에 임팔 전투의 일본군 전몰자 유족들이 위령제를 지낼 때 그 자리에 나타나서 <임팔 전선의 패배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부하들이 잘못 싸운 것>이라는 유인물을 나눠주려다가 물세례를 받았고 이쯤되면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후로 이 전선에 참여한 부하였던 사토 고토쿠미야자키 시게사부로 같은 옛 부하가 죽었을 때도 장례식에 출몰하여 똑같은 짓을 저지르다가 유족들에게 욕설과 같이 멱살을 잡히고 바깥으로 내쫓겼던 적도 있었다. 심지어는 죽기 전 마지막 남긴 말도...
"나는 잘못이 없어. 부하들이 잘못한 거야!(私は悪くない、部下が悪い!)"

...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으며 이후 자기 장례식에서조차 유족들에게 "임팔 전선의 패배는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다른 놈들이 못나서 실패한..." 이라는 유인물을 돌리게 했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하다, 정말.

9.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참전

파일:Koreanindependencefighter.jpg
파일:Koreaburma1.jpg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속 군대인 한국 광복군 대원 9명이 미얀마 전선에 투입되었을 때 영국군과 함께 바로 이 임팔 전투 당시 활동하였다고 한다. 주로 심리전을 전담했으며 포로의 심문이나 통역, 일본어 번역, 선전물 제작 등을 맡아 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대장 한지성, 부대장 문응국, 대원 최봉진, 김상준, 나동국, 박영진, 송철, 김성호, 이동수. 부대의 명칭은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功作隊)이다. 명칭의 뜻은 인도-미얀마 전선의 공작부대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영국 육군 중~대위 계급을 부여받고 피복 또한 영국 육군 장교와 동일한 것을 착용했다. 인면전구공작대는 포위된 줄 알고 탈출을 포기하려던 영국 육군 1개 사단을 통신 감청 등을 통해 아직 포위되지 않았음을 알려 무사히 후퇴시키는 공로를 세웠고, 이 때문에 영국군이 보다 많은 인원을 배속시켜 줄 것을 광복군에 요청했으나, 수십 개의 사단과 맞먹는 파괴력을 지닌 무타구치 총대장의 호위를 이유로 중국 국민당 정부가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시기상 다른 광복군은 실제 전투를 겪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이 광복군 내의 유일한 실전 참가 부대이다.

10 창작물에서의 등장

  • 여명의 눈동자에 나오는 최대치는 여옥과 헤어져 임팔 작전에 참전했다가 부대가 소멸하고 홀로 살아남아 중국 국부군에 구조되었다가 자기를 구해준 조선인 장교와 함께 팔로군에 들어간다.
  • 버마의 하프 (ビルマの竪琴) - 일본 전후문학으로, 타케야마 미치오의 소설. 1950년대에 영화화 되었다. 한국에서도 번역판이 나온 바 있다. 임팔 작전시의 일본군 낙오병이 소수민족에 의해 구출되어 신분을 버마 승려로 위장하고 전후 영국군에 항복해 포로가 된 자기 부대원을 찾아간다는 내용. 이때만 해도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반성이 가득했던 일본 전후세대의 인식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도 구타와 같은 악습이 횡행하던 일본군 병영 생활을 노래와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고 묘사하는 등 미화하고 있다.
  • 사자에상의 마스오와 노리스케가 원작 만화에서는 임팔 작전의 생존자이다.
  • 엔도 슈사쿠의 유작 <깊은 강>에는 이 임팔 작전에 참전한 기쿠치라는 인물이 나온다. 살아남기 위해 죽은 동료의 인육까지 먹어야 했던 처절한 상황이 묘사된다. 당연히 무다 장군님은 개새끼(빠가야로)라고 까인다.
  • 모에! 전차학교 5권에서 임팔 작전이 다루어지고 동시에 무타구치 렌야를 깐다. 심지어 무타구치 렌야의 사진 아래 설명문에 "(나쁜 의미로) 전설적인 장군, 무타구치 렌야 중장" 이라 써있다.
  • 파워프로군 포켓2의 히든 석세스 전쟁편에서 나오는 돈가스 작전(トンカツ作戦)의 모티브가 이것. 다른 점이라면 수송 수단으로 소나 말 대신 돼지를 사용했다는 것.
  • 가공전기 만화 몽환의 전함 야마토에서는 도죠 히데키의 언급으로만 등장. 츠지 마사노부의 소련 침공과 더해져 일본 육군의 손실율 74%를 달성한 최악의 졸전이라고.
  • 걸즈 앤 판처 극장판에서는 쿠로모리미네 여학원을 꺾고 전국고등학교 대회에서 우승한 현립 오아라이 여학원에 폐교 조치를 내리면서 전차도 세계대회 유치 및 프로리그를 육성하려는 문부과학성 학원함 교육국의 결정을 임팔 작전급의 폭거라면서 대차게 까는 내용이 전차도 신문을 통해 전해진다.
  1. 무타구치 렌야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사실이다. 아래 여담 항목 참조.
  2. 우리는 그나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분전으로 라도 했지만 여기는 그냥 개발살(...)
  3. 2013년 4월 9일 기준 구글 검색시 "임팔 작전"=4,390건, "임팔 전투"=2,250건.
  4. 70년대 연재된 소설 여명의 눈동자에도 임팔 작전이라고 쓰여있다.
  5. 당장 자기네 나라 해군조차 항공기에 웃고 항공기에 울고 있는 상황. 아무리 육군과 해군의 관계가 막장이었다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항공기의 중요성을 무시한다는 건 정말 말도 안되는 뻘짓인 것.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딱 1년 전쯤에 항공기때문에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그것도 부겐빌섬에서
  6. 정글은 동식물의 밀집도는 높지만, 특정 종의 밀집도는 생각보다 굉장히 낮다. 그러다 보니 특정 개체만 섭취 가능한 종은 생존하기 어려우며, 특정 개체가 대량으로 불어나는 경우도 드물다. 이런 곳에 수만 명의 사람이 먹을 식량이 있을 리가...
  7. 天長節. 당현종이 처음으로 황제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했는데 처음에 천추절로 하다가 나중에 이렇게 바꾸었다. 황제의 생일을 가리키는 낱말도 그때그때 달랐는데 명청 시대에는 성절(聖節)이나 만수절(萬壽節)이라고 불렀고, 대한제국은 후자를 받아들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군주정 국가에서는 군주 생일도 국가경축일. 제국주의 일본에서는 당나라 시절의 용어를 받아들여 덴노의 생일을 천장절이라 부르며 법적인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무타구치가 말한 천장절은 당연히 당시 히로히토 덴노의 생일인 4월 29일이다. 일본 정부는 종전 이후 해당 명칭을 천장절에서 천황탄생일로 바꾸었고, 헤이세이 시대로 들어오자 날짜를 현 덴노의 생일인 12월 23일로 변경하였다. 다만 4월 29일 자체는 쇼와 사후에도 녹색의 날이란 이름으로 기념일로 유지하다가 어느새 스리슬쩍 쇼와의 날이라고 바꾸었다.
  8. 1대 조선 총독이자 무단 통치로 악명 높은 테라우치 마사타케의 아들이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똑같이 막장
  9. 심지어 참호전을 배울 때는 교사들이 궁궐 내에 기관총을 비치한 참호를 파려고 했을 정도였다.
  10. 애초에 문명이나 대전략 같은 전략계 게임, 적어도 스타크래프트 밀리맵을 어느 정도만이라도 하면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지 알 수 있다. 상대는 공중으로 지원/보급하는데 군사가 죄다 지상용이니(...) 상대는 뮤탈리스크 2부대, 아군은 시체매와 공성 전차만 각각 1부대씩막지도 못하고 멀뚱히 보급을 지켜봐야 하는 데다가 지들 보급은 제대로 오지도 않고 중간에 거의 다 사라져버린다. 즉 군사 교육을 안 배워도 전략 게임 몇 판만 해보고 느끼면 얼마나 헛소리인지 이해가 쉽다. 전략 시뮬까지 갈 것도 없이 삼국지 같은 전쟁문학이나 역사책만 읽어도 이것보단 나은 작전이 나올 것이다! 에라이 병신아 본격 PC방 리거만도 못한 식견의 장군사실 삼국지만 봐도 작전시작전 밥지어서 먹이고 든든한 상태에서 싸우게 한다
  11. 싱가포르 점령 직후 일본이 세운 일종의 괴뢰 집단.
  12. 사실 아일랜드영국에게서 독립하기 위해 나치와 손을 잡은 경력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북아일랜드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의용군 형식으로 독일에 지원한 '블루셔츠'라는 아일랜드인들이 있다. #
  13. 인도 초대 수상이자 인도의 국부인 그 분 맞다.
  14. 위성지도로 보면 지도에 표시된 길과 많이 어긋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구글 지도는 중국이 지도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어긋난 곳이 많다.
  15. 특히 오르막이 문제다. 등산의 경우에도 갈 지(之)자로 산행을 하라고 하는데, 경사가 심한 경우엔 길은 짧더라도 체력 소모는 더 크기 때문이다.
  16. 오해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서 풀어서 설명하자면, 과거에는 50이 필요한 전략이 30이 필요한 작전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이 내려지면 보급 능력을 무시하고 일단 50자리 전략을 구상하고, 어떻게든 50을 보급하려고 하고, 전장에서도 50 짜리 대전략에 맞춰서 행동을 했다. 현대전에서는 보급 한계가 30이라면 50짜리 전략은 애초에 고려하지 않고 30짜리 전략을 세우고 30짜리 전쟁을 한다. 그런데 일본군은 50이 필요한 작전을 수립하면서 보급은 30밖에 안되니까, 전장에서 30으로 50이 필요한 전략을 하라고 한 것이다. 사실 상식적 선이라서 비율이 30과 50이지, 임팔 작전의 규모와 필요한 보급량을 고려하면 이 정도 비율로 안 끝난다. 비유하자면 30만원 주고 50만원짜리 물건을 사오라고 한 격... 물건이면 깎아보기나 하지
  17. 이 정도면 체격 조건이 훨씬 좋은 미군 병사라도 이미 버거운 수준이다.
  18. 1970년대에 IRA의 폭탄 테러로 왕실 요트와 함께 폭살된 그분 맞다.
  19. 선임 장교가 후임 장교를 갈구는 일 자체는 흔한 것이지만 갈굴 때는 부하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 해야만 한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후임 장교의 리더쉽이 큰 타격을 받으며 지휘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장교를 갈구는 짓은 금기사항이다.
  20. 나중에는 대본영이 추가되어 "'4개의 머저리 집단'이 이런 참극을 빚었다"고 말했다.
  21. 일본의 관료들은 크게 친임관, 칙임관, 주임관, 판임관의 4종류로 나눠졌다. 그런데 육군의 경우 사단장 정도 되면 가장 높은 친임관(예를 들어 조선총독이나 xx대신, 정무총감이 포함)에 해당했는데 친임관은 덴노가 친히 임명하는 자리인 바 제아무리 군부라 할지라도 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22. 대개 30%의 병력이 사상하면 전멸로 취급된다. 일반적인 경우 전투부대 30% 지원부대 70%로 부대가 구성되기 때문에 30% 손실이면 전투력을 상실했다고 보기 때문. 전투병력의 비율이 더 높은 일본군이라 할 지라도 90%는 전투병력비율을 훨씬 넘어선 수치다. 이 정도면 완전히 섬멸되었다 봐야 한다.
  23. 12,603 이라는 말도 있다. 여하튼 일본군에 비해서는 엄청 낮다. 그리고 사망자와 부상자까지 합친 숫자다.
  24. 아삼 인근 메갈라야 주의 체라푼지란 마을은 1년동안 22,987mm의 비가 내리는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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