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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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은 삼년산성(報恩 三年山城)은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에 있는 돌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자비 마립간 13년(470)에 쌓았으며, 소지 마립간 8년(486)에 고쳐 세웠다. 1973년 5월 25일 대한민국사적 제235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역사

삼년산성은 신라가 삼국통일의 전초기지로 쓰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축조한 요새였다. 470년 자비왕 때 완공됐고, 병사 3천 명이 3년 동안 쌓았다. 성을 쌓는데 화강암 약 1천만 개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5세기 한반도는 백제와 신라가 연합해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던 시대였고, 신라는 삼국 중 국력이 가장 약했다. 그래서 견고한 성이 필요했고, 그것이 삼년산성이다.

진흥왕은 이곳에서 조련한 군대를 몰고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죽였다. 백제를 멸망시킨 김유신의 5만 군대가 훈련된 곳도 삼년산성이었다. 무열왕은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을 위한 국제회의를 이곳에서 열었는데, 당나라에 대한 무력시위를 위해서였다. 심지어 고려 태조 왕건도 삼년산성을 빼앗으려다 크게 패했다. 그야말로 불굴의 천년 요새였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유금필의 무쌍으로 쉽게 이긴다

하지만 통일신라 헌덕왕때는 반란을 일으킨 김헌창이 삼년산성에서 관군에 패해 진압됐다.

3 구조

성의 둘레는 약 1,800m이고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10미터 이상으로 대단히 높다. 조선시대의 산성이 산 정상을 두르는 형태로 대체로 낮은 편인 것과 비교했을 때 그야말로 요새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처럼 성벽이 높고 크기 때문에 그 하중도 막대하며, 성벽 모퉁이의 하중이 큰 부분에는 기초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4중의 계단식으로 쌓았다.

동쪽과 서쪽의 성벽은 안으로 흙을 다져서 쌓았고, 바깥쪽은 돌로 쌓는 내탁외축(內托外築)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남쪽과 북쪽은 모두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하는 내외협축(內外夾築)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신라가 이 성을 정말로 철옹성으로 만들기 위해 작정하고 만든 티가 팍팍 나는데, 정문으로 사용된 서문의 경우 성벽이 안쪽으로 휘어 있고 계곡부의 중앙에서 북쪽으로 약간 어긋난 지점의 경사면에 있어 성 밖에서 문의 위치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음은 물론 남북으로 2개의 치성이 배치되어 공격하는 적을 쉽게 공격할 수 있다. 북문의 경우 문 밖에 이중으로 성벽을 쌓아 벽을 돌아 올라서야 문으로 다가갈 수 있게 설계되었고, 동문은 들어오는 길을 'ㄹ'자로 만들어 들어오기 힘들게 만들었으며, 남문의 경우 치성을 설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문을 바닥에서 띄워놓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만 접근할 수 있게 만들었다.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가 있고 주위 암벽에는 글이 새겨 있다. 옥필(玉筆)·유사암(有似巖)·아미지 등의 글씨가 오목새김되어 있는데 김생(金生)의 필체라고 전한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주변에는 수천 기의 무덤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