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 마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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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20대 자비 마립간 김자비21대 소지 마립간 김소지22대 지증왕 김지대로
시호소지 마립간 (炤知 麻立干) / 비처 마립간(毗處 麻立干)
김(金)
소지(炤知) / 비처(毗處)
생몰년도음력? ~ 500년 11월
재위년도음력479년 ~ 500년 11월 (21년)

1 개요

신라 제21대 임금. 칭호는 마립간. 자비 마립간의 장자로 어머니는 서불한 미사흔의 딸이며 왕비는 이벌찬 내숙의 딸 선혜(善兮)부인이다. 소지 마립간을 비처(毗處)마립간으로도 불린다. 어려서부터 겸손한데다 어질어 백성들이 잘 따른 덕 있는 왕이라고 한다.

2 재위

교통 확충에 매우 관심이 많았던 왕으로, 즉위 9년(487년) 각 지방에 현대의 우체국과 비슷한 시설인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국내 기간도로인 관도(官道)를 개척한다. 또한 490년엔 경주에 처음으로 시장을 열어 각 지역의 물자를 유통시켰다. 이 외 각 지방을 순행하여 병사와 백성들을 위문하고, 재해나 전쟁으로 고통받는 지역의 주민들을 찾아가 고통을 함께 나누는 한편, 유랑하는 백성들을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하여 민심을 수습하는데 힘썼다.

남진정책을 꾸준하게 고수했던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잦은 공격에 대항하여 나제동맹에 따라 가야, 백제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였으며, 493년 백제 동성왕결혼동맹을 받아들여 이찬 비지의 딸을 동성왕에게 시집보냈다.

이후에도 자주 고구려와 전투를 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삼년산성 등을 개축하거나 증축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즉위 3년(481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7개 성을 공격해오자 백제, 가야와 함께 연합군을 구성하여 강릉 부근에서 승리한다. 이 때 고구려, 말갈군은 1천여명이 죽었다고 한다. 즉위 16년(494년)에는 문경 방면으로 쳐들어오는 고구려군을 백제군의 지원을 받아 격퇴한다. 이후 즉위 17, 18, 19년에도 고구려는 계속 신라의 변경을 공격해온다.

특이하게 삼국유사삼국사기에 두 가지의 일화를 남겼다. 하나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오기일(烏忌日)'과 관련된 '사금갑설화'이고 또 하나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처녀 벽화와의 이야기.

3 오기일

삼국유사 <사금갑(射琴匣)조>에 나오는 이야기로 무진년(488년)에 마립간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 그때 까마귀가 와서 울었는데 쥐가 사람의 말을 했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라"

놀란 마립간은 기병에게 명령하여 뒤따르게 했다. 남쪽의 피촌에 이르렀을 때 돼지 두마리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기병들은 멈춰 서서 이 모습을 구경하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길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하라는 추적은 안 하고 이때 한 노인이 연못에서 나와 글을 바쳤다. 그 겉봉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뜯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사신이 와서 글을 바치자 마립간은 처음에 "둘이 죽는 것보다 뜯어보지 않고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지 않나?"했는데 이때 일관(점쟁이)이 "뜯어보지 않으면 누가 죽습니까? 바로 니가 죽습니다." "두 사람은 일반 백성이지만 한 사람이란 왕을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식겁한 마립간은 그 말을 옳게 여겨 뜯어 보니 이렇게 써 있었다.

"射琴匣(사금갑)"(거문고 갑을 쏴라)

마립간이 궁궐로 돌아와 거문고 갑을 쏘자 그 속에서는 내전의 분향을 수도하는 승려와 비빈이 은밀히 간통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주살되었다. 이때부터 나라 풍속에 매년 정월 상해(上亥, 첫 날), 상자(上子), 상오(上午)일에는 모든 일에 조심하여 함부로 행동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며 15일을 오기일(烏忌日)로 하여 찰밥으로 제사 지냈다. 이것으르 속어로는 달도라고 하는데, 슬퍼하고 근심하면서 모든 일을 금한다는 말이다. 또 노인이 나와 글을 바쳤다는 그 연못을 서출지(書出池)라고 했다고 한다. 오기일이 바로 오늘날의 '정월 대보름'이다.

4 소지 마립간과 처녀 벽화

이는 삼국사기 소지 마립간 22년조(서기 500년)에 나오는 이야기. 이 해 9월 소지 마립간은 날이군(지금의 영주시)에 행차했는데 날이군의 세력가인 파로라는 사람이 소지 마립간이 날이군에 행차한 것을 알고 딸 벽화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들것에다 태우고 비단으로 만든 보자기를 덮어 씌워 왕에게 바쳤다. 왕은 음식을 올리는 줄 알고 열어보니 어린 여자가 있어 괴이하게 여기면서 물리치고 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여인이 어지간히 미인이었는지 왕은 궁궐에 돌아와서도 벽화를 잊지 못해 밤잠을 이루지 못했고 벽화에 대한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자 그리움을 못 이겨 수행원 몇 사람만을 데리고 일반 백성으로 위장해 몇 차례에 걸쳐 벽화를 만나러 갔다.

그렇게 밀회를 즐기던 어느 날 고타군(지금의 안동)을 지날 즈음 해가 기울어 어느 할머니 집에 묵게 되었다. 왕이 문득 백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져서 할머니에게 나라 사람들이 왕을 어떤 임금으로 생각하는지를 묻자 할머니는 "모든 백성이 성군이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하오!"라고 말했다. 왕이 이유를 묻자 할머니는 "왕이 날이의 여자에 반해 백성의 옷차림을 한 채 온다"며 "무릇 용이 물고기의 옷을 입으면 어부에게 붙잡히는 법"이라고 충고하였다.

왕은 할머니의 솔직한 말에 부끄럽게 여겼으나 벽화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었고 그래서 벽화를 경주 왕궁으로 불러들여 아들 하나를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소지 마립간조를 보면 벽화와의 이야기가 끝나고 곧바로 이 해 11월에 소지 마립간이 죽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9월에 만났는데 11월에 죽었다면 소지 마립간은 벽화와의 아들을 보지 못하고 죽은 게 된다. 사실 소지 마립간이 이 때 나이가 많았다. 소지 마립간의 생년을 알 수 없지만 후임자이자 6촌 형제인 지증왕이 고령으로 즉위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소지의 나이도 고령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때문에 벽화와 만난지 얼마 못 가서 죽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일각에서는 정치적인 음모가 있지 않았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삼국사기 같은 편년체 사서에서 어떤 사건의 정확한 연대를 모를 경우 그 왕 재위기의 마지막 해에 기사를 수록하는 경향도 있기 때문에 벽화와의 이야기가 소지 마립간조 마지막 해에 수록된 것은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그런데 영주 지방에 전해지는 설화에서는 엔딩이 다르다. 이 설화에 따르면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스토리가 갈라진다. 삼국사기에서는 소지 마립간이 벽화를 데려오지만 이 설화에서는 소지 마립간이 결국 벽화와의 만남을 그만둔다. 벽화는 계속 왕을 기다렸지만 왕은 끝내 오지 않았고 벽화는 크게 상심해서 왕을 원망하다가 영주 중심부에 위치한 구성산성 건너편에 있는 서구대(西龜臺)위에 무신탑을 세우고 연모의 정을 삭이며 상처받은 마음을 달랬다고 전해진다. 사실 삼국사기 기록대로 2개월만에 청상과부가 되고 마는 것도 해피 엔딩은 아니긴 하지만.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 탑은 고려 말엽까지 존재했던 모양으로 공민왕 때 지영주사로 부임한 정습인이라는 사람이 이 탑을 헐어서반달? 관청을 수리하는 데 써버리자 신돈의 미움을 받아 하옥되었으나 다른 신하들의 만류로 겨우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그 후 그 탑을 다시 쌓도록 했다고 하는데 무신탑은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이름이 재수없다는 이유로(無信신용불량) 헐어버렸다고...

5 삼국사기 기록

一年春二月 소지마립간이 즉위하다
一年春二月 죄수들을 사면하고 관작을 올려주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二年夏五月 서울에 가뭄이 들다
二年冬十月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의 곡식을 내어 진휼하다
二年冬十一月 말갈이 북쪽 변경에 침입하다
三年春二月 비열성에 행차해서 군사들을 위로하다
三年春三月 고구려와 말갈이 쳐들어왔으나 신라·백제·가야 연합군이 이를 격퇴하다
四年春二月 큰 바람이 불고 금성 남문에 불이 나다
四年夏四月 비가 오랫동안 내리다
四年夏五月 왜인이 변경에 침입하다
五年夏四月 물난리가 크게 나다
五年秋七月 물난리가 크게 나다
五年冬十月 왕이 재해를 당한 백성들을 위로하다
五年冬十一月 천둥이 치고,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번지다
六年春一月 오함을 이벌찬으로 삼다
六年春三月 토성이 달을 침범하다
六年秋七月 고구려가 침입하자 백제와 함께 물리치다
七年春二月 구벌성을 쌓다
七年夏四月 시조묘에 제사지내고 수묘 20가를 추가로 설치하다
七年夏五月 백제가 와서 예방하다
八年春一月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삼고 삼년과 굴산 두 성을 고쳐 쌓다
八年春二月 내숙을 이벌찬으로 삼다
八年夏四月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다
八年秋八月 낭산 남쪽에서 사열하다
九年春二月 신궁을 나을에 설치하다
九年春三月 사방에 우편역을 설치하고 관도를 수리하다
九年秋七月 월성을 수리하다
九年冬十月 천둥이 치다
十年春一月 왕이 월성으로 옮겨 거주하다
十年春二月 일선군에 행차하여 환·과·고·독을 위로하다
十年春三月 주·군의 옥에 갇힌 죄수를 사면하다
十年夏六月 눈이 여섯 개인 거북을 바치다
十年秋七月 도나성을 쌓다
十一年春一月 놀고먹는 백성들을 농사일로 돌아가도록 하다
十一年秋九月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습격하여 과현에 이르르다
十一年冬十月 고구려가 호산성을 함락하다
十二年春二月 비라성을 다시 쌓다
十二年春三月 용이 추라정에 나타고고 서울에 시장을 열다
十四年 봄과 여름에 가물고 왕이 반찬 가짓 수를 줄이다
十五年春三月 백제 왕 모대가 혼인하기를 청하여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내다
十五年秋七月 임해와 장령진을 설치하여 왜적에 대비하다
十六年夏四月 물난리가 크게 나다
十六年秋七月 고구려군에 포위당한 실죽을 백제 왕 모대가 구해 주다
十七年春一月 왕이 신궁에 제사지내다
十七年秋八月 고구려가 백제 치양성을 포위하자 장군 덕지를 보내 구해주다
十八年春二月 가야국에서 흰 꿩을 보내다
十八年春三月 궁실을 거듭 수리하다
十八年夏五月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넘치다
十八年秋七月 고구려가 우산성을 공격하자 장군 실죽이 이를 물리치다
十八年秋八月 남쪽 교외에 행차하여 농사짓는 것을 보다
十九年夏四月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다
十九年秋七月 가물고 누리의 피해가 발생하다
十九年秋八月 고구려가 우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二十二年春三月 왜인이 장봉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二十二年夏四月 폭풍이 불고, 용이 나타나며 황색 안개가 끼다
二十二年秋九月 왕이 파로의 딸 벽화를 만나다
二十二年冬十一月 왕이 죽다

기록이 많은 편이다.
삼국사기 제3권은 내물 이사금부터 시작하여 소지 마립간으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