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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를 암살한 직후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보드리의 그림으로,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을 패러디한 것으로 여겨진다.
1 개요
2 생애
본명은 마리안 샤를로트 드 코르데 다르몽(Marie-Anne Charlotte de Corday d'Armont).
노르망디 소귀족 집안 출신. 고전 비극작가인 코르네유의 혈통을 받았고 13세 때 어머니와 사별하여 캉에 있는 수도원에서 생활하였다. 루소의 저서 등 많은 서적을 섭렵하였으며 자유를 사랑하였고 프랑스 혁명에 열광하였다.
1793년 6월 산악파의 독재체제가 완료된 이후로는 혁명에 의혹을 느끼게 된다. 특히 루이 16세의 처형을 두고 지롱드 평원파와 자코뱅 산악파가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고 근소한 차이로 루이 16세의 처형이 확정된다. 이 와중에 혁명의 양대 산맥인 두 정당은 서로 등을 돌려 원수가 되어버린다. 지롱드파를 비롯한 온건파는 혁명의 수레바퀴가 살육과 피로 점철돼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고 과격파의 수장인 장 폴 마라를 처단할 음모를 세운다. 그 당시 혁명광장에는 늘 잘린 머리가 나뒹굴었고 비릿한 피냄새가 자욱했다. 1792년 9월 2일부터 7일까지 엿새 동안 진행된 9월 대학살 동안 '감옥에서' 살해된 '혁명의 적'들만 해도 1,200여 명에 이르렀다.
한편 코르테는 파리에서 도망쳐 간 지롱드 당원들의 연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이런 미치광이 같은 상황이 종식되기 위해서는 독단적으로 마라를 해치워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9월 학살의 책임이 마라에게 있다고 생각했고, 1793년 1월의 루이16세 처형도 불필요한 일이었다고 여겼다.
사태가 이대로 흐르도록 놓아둘 경우, 프랑스가 혁명파와 반혁명파 사이의 잔혹한 내전에 휩싸이게 되리라는 것이 그녀 생각이었다. 다시 말해 '반혁명분자 사냥 캠페인'이 공화국을 궁극적으로 분열시키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 해 7월 노르망디에서 사촌과 살고 있던 칸을 떠나 파리에 가서 평소 부스럼같은 피부병 때문에 목욕요법(沐浴療法) 중인 마라를 목욕탕에서 만났다. 욕중에서 집무를 보던 마라에게 접근해 외국 군대와 손을 잡고 현 혁명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반동 세력의 명단이 적혀 있다는 위조된 명단을 마라에게 내밀고 마라가 그것을 읽는 순간, 식칼로 무참히 찔러 죽였다.
그러나 애시당초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그녀는 즉시 체포되어 간단한 재판을 거친 뒤 7월 17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재판정에서 코르데는 자신이 단독으로 일을 벌였으며, "10만 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의 목숨을 없앴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 해 1월 루이 16세를 처형하기 직전,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한 말이기도 했다. 똑같은 말이 정반대 상황에서 발설된 것이다.
코르데의 목이 잘려나가자, 르그로라는 이름의 사내가 코르데의 잘려나간 머리를 집어들고 마구 따귀를 갈겨댔다. 열광적 마라 지지자였든지, 허세부리기 좋아하는 멍텅구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행동은 곧 지켜보던 군중의 분노를 샀고, 그 분노를 눅이기 위해 공안당국은 르그로를 징역 3개월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코르데의 살인행위가 참수형에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한 시민들도, 잘려나간 머리에 대한 더 이상의 모욕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나름대로 신념주의자였던 인물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자신이 단독범이라는 코르데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공안당국은 그녀를 부검해 처녀성을 확인했다. 당시만 해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 대부분의 초대형 사건은 남자가 배후에 있거나 주도하는 게 당연했고 잠자리와 살인 음모를 그녀와 더불어 한 남자가 있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처형자들의 의심과 달리 코르데는 처녀였다. 이 처녀는 잔 다르크 이후 프랑스 역사에 개입했던 가장 유명한 처녀일 것이다.
혁명의 열기가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뒤, 적잖은 예술가들이 코르데의 삶과 죽음을 제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앞에서 언급한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나 보드리의 '샤를로트 코르데'[1] 같은 회화 작품 외에도, 그녀의 삶은 소설, 연극, 오페라, 대중가요에까지 흔적을 남겼다.
2014년 가을 뮤지컬 엘리자벳, 레베카를 만든 실베스터 르베이와 미하엘 쿤체가 다시 뭉쳐 2006년 일본에서 제작한 작품으로 화제가 된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의 원작은 엔도 슈사쿠의 소설인데,[2] 여기서 샤를로트 코르데는 '아녜스라는 이름의 수녀로 등장한다. 단, 뮤지컬에서는 안 나온다.
야위고 신경질적이었으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고 하며, 법정에서의 그녀의 침착하고 순수한 마음씨가 세인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한다. 시인 알퐁스 드 라마르틴은 1847년 간행한 <지롱드파의 역사>에서 암살의 천사라는 칭호를 주었다.
코르데가 마라를 죽일 때 입었던 드레스와 보닛 모자는 그녀의 이름을 따 '코델리아(cordelia)'로 불릴 정도로 유행이 되었다.
단두대에서 처형된 직후 그녀의 머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눈을 깜빡였다는 괴담이 있다고 한다. 당연히 폐 등과 분리되어 말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진 사람 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므로 괴담일 뿐이다.
노르웨이 출신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가 장 폴 마라를 죽이는 샤를로트 코르데의 모습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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