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

77c9990e91eaef712bf4a7d4d0f021ae.jpg

遠藤周作 (1923.3.27. - 1996.9.29)

일본소설가.

1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 유학시절까지

1923년 도쿄부 기타토시마군에서 태어났다. 엔도 가문은 돗토리의 이케다 가문의 주치의 집안이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양의로 변신해 의사를 가업으로 삼던 집안이었지만 할아버지가 아들이 없자 돗토리 출신의 츠네히사를 양자로 들였는데 그가 바로 엔도 슈사쿠의 아버지였다.

금융업에 종사하던 아버지가 만주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만주로 건너가게 된다. 그러나 부모 간의 사이가 나쁘다가 결국 이혼을 하게 되면서 엔도는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이모 집에서 살게 된다. 가톨릭 신자였던 이모의 영향으로 1935년 일가족이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큰 형의 영향으로 명문고에 4번이나 재수를 하며 도전했지만 실패했고, 1941년에는 죠치대학 예과 독문과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퇴학당하고 다른 고등학교들에도 도전했지만 잇달아 실패했다. 결국 계속되는 재수생활 때문에 어머니의 경제적 부담이 커지자 대학을 졸업하고 체신성에 들어간 큰 형의 중재로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이때 아버지 츠네히사가 내건 조건은 "구제 고등학교에 들어가던지 아니면 의학부 예과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학부 예과 도전에도 탈락하자 아버지에게는 숨기고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예과에 합격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격노하면서 엔도를 집에서 쫓아내버린다.

쫓겨난 뒤,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며 가정교사 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다가 다시 가톨릭계 기숙사인 "하얀 비둘기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문학적인 소양을 쌓게 된다. 기숙사 친구들의 영향으로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접했고 또한 친구 호리 타츠오를 만나면서 인생이 변화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문학부 예과수업은 줄어들고 근로동원에 동원되어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기숙사에서 접한 프랑스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중 우연히 시모키타자와에서 사토 하지메의 "프랑스 문학 소묘"라는 책을 접하면서 1945년 게이오기주쿠대 문학부 불문과에 입학해 사토 하지메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엔도가 지내던 하얀 비둘기 기숙사는 공습으로 소실되었고 엔도는 늑막염 때문에 입대가 늦춰지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입대를 면했다.

전쟁 이후 다시 대학에 돌아와 프랑스 문학에 몰두했고 한편으로 연을 끊었던 아버지도 엔도가 불문과에 입학했다는 말에 노기를 가라앉히게 되었다. 기숙사가 불타버린 탓에 갈 곳이 없어지게 되자 큰 형의 중재로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서 지내게 되었다.

1947년, 처음으로 쓴 평론이 인정을 받아 카도가와 쇼텐의 문학평론지 "사계"에 게재하면서 문학평론가로 데뷔했다. 이듬해에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어머니, 큰 형과 함께 가톨릭 다이제스트 편집일을 하다가 1950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프랑스에서 프랑스 가톨릭 문학을 공부하면서 한편으로 프랑스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바탕으로 에세이나 르포를 저술해 일본에 보내 게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폐결핵이 악화되는 바람에 결국 박사 논문을 쓰는 것을 포기하고 1953년 일본으로 돌아왔다.

2 작가로서의 생애

1954년 4월부터 분카가쿠엔의 강사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해에 처음 집필한 "에덴까지"와 "하얀 사람"은 친구와 동료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55년에 "하얀 사람"이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설가로서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게 된것은 1957년 발표한 "바다와 독약"에서 부터였다.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소설은 화제를 불러 일으키면서 엔도 슈사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사드 후작의 문학을 연구하기 위해 부인과 프랑스를 여행했지만 귀국후 건강이 악화되어 한때 위급한 순간까지 갔지만 회생하게 되었다. 회생 이후 마치다시의 타마가와가쿠엔의 새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그곳을 "호리암"이라고 이름짓고 "호리암 선생"이라는 필명을 쓰게 된다.

한동안 "바다와 독약" 이상의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가 1966년 또 다른 대표작인 "침묵"을 발표했다. 이후 교수, 극단 대표, 문학잡지 편집장 등의 일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탄생", "여자의 일생", "사해의 언저리", "예수의 생애" 등의 소설들을 내놓았다.

그레이엄 그린의 강력한 지지로 한때 "침묵"이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지만 끝내 수상이 좌절되었다. [1]

1988년부터 1991년까지 고문서 "무공야화"를 기반으로한 3부작 소설을 집필했는데 요미우리 신문에 "반역"을 연재했고 "결전의 때"를 산요 신문에 연재했으며 "남자의 일생"을 니혼게이자이 신문에 연재했다.

한편으로 갠지스강을 무대로 사랑과 영혼의 구제를 소재로 한 "깊은 강"을 집필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3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복막수술을 받았고 이때의 투병생활로 욥기에 대한 평론을 집필할 것을 구상했지만 끝내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1996년 9월 29일 폐렴으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사망했다. 생전의 유언대로 가장 아낀 작품 <침묵>과 <깊은 강>을 관 속에 넣어졌다.

공교롭게도 소설가 시바 료타로와 출생년도와 사망년도가 동일하다.

3 작품의 특징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를 소재로 한 소설을 많이 남겼는데 단순히 그리스도교가 하나의 소재가 된 게 아니라 엔도 슈사쿠 문학의 전반적인 핵심을 이룰 정도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본인이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고[2] 프랑스의 가톨릭 문학에서 문학적인 여정을 출발했기 때문이겠지만.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인공인 "숙적"에서 같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인지 유키나가에 대해 호의적인 관점으로 서술했다. 숙적은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를 일컫지만 알고 보면 고니시의 분량이 더 많으며 주로 고니시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 작품 덕에 일본 내의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한 지명도가 상당히 올라갔다고 한다.

4 기타

소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3]를 썼다. 이것을 원작으로 엘리자벳, 레베카를 만든 실베스터 르베이와 미하엘 쿤체가 2006년 일본에서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들었다.

출생은 도쿄지만 엔도 슈사쿠 문학관은 나가사키에 있다. 나가사키가 가톨릭의 고장으로 유명하기도 하고 본인도 나가사키에서 거주했었다.

나가사키 소토메에 있는 침묵의 비의 구절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인간은 이렇게도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도 푸릅니다."
  1. 이 항목에 노벨문학상 수상 실패 이유로 침묵의 지나친 성적 묘사 때문에 심사위원들이 불쾌해서 탈락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는데, 침묵에는 성적인 묘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한마디로 전혀 근거없는 얘기
  2. 세례명은 바오로.
  3. 국내에서는 90년대 왜색 논란으로 인해 민예사에서 '앙드레 까스뗄로'라는 정체불명의 작가가 쓴 '소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그런데 이게 아무리 봐도 해적판으로 출간한 듯 보인다. 이름이 바뀐 비슷한 경우로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는 마리 스테반드바이트라는 정체불명의 여류 작가의 이름으로 출판되었고, 유리가면도 넬 베르디라는 국적 불명의 작가가 쓴 소설로 마개조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