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6세

프랑스의 역대 국왕
루이 15세루이 16세(루이 17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루이 16세의 초상화, 앙투안 프랑수아 칼레, 1778년
왕호프랑스와 나바르의 왕 루이 16세
(Louis XVI Roi de France et de Navarre)
이름루이 오귀스트 (Louis Auguste)
생몰년도1754년 8월 23일 ~ 1793년 1월 21일 (38세)
출생지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사망지프랑스 공화국 파리 콩코르드 광장
재위기간1774년 5월 10일 ~ 1791년 10월 1일 (17년 144일)
대관식1775년 6월 11일
장례식1815년 1월 21일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왕.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15세의 왕세자 루이 페르디낭과 마리 조제프 드 삭스[1]의 장남이다. 왕세자 루이(1729 ~ 1765)와 왕세손인 형 부르고뉴 공작 루이가(1751 ~ 1761) 사망한 후, 그의 장남인 루이 16세가 루이 15세의 후계자가 된다. 루이 15세가 사망한 후 즉위했다.

2 개인적인 면

2.1 가정적인 남편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한 이후, 그때까지의 프랑스 왕들의 일반적인 관례와는 달리 애인을 들이지 않고 아내하고만 금슬 좋게 살았다. 결혼하고 나서 왕위에 올라서도 얼마동안은 성관계가 없었는데, 이에 대해서 무수한 소문[2]이 돌았다. 이런 소문에 걱정한 루이 15세가 자신이 직접 저명한 의사를 데려다가 진찰했던 기록이 나중에 공개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성적 능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또한 당시 스페인 대사의 보고에서도 성적 불구는 아닌 것 같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즉, 결혼 초기에 자식이 없었던 것은 본인이 아내와의 성관계를 피했기 때문. 이 때문에 즉위하고 난 뒤에도 이 소문을 걱정한 요제프 2세가 여동생과 루이 16세를 만나러 직접 프랑스로 온 적도 있다. 하지만 나중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사이에서 다산하여 2남 2녀를 보았다.[3]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아름다운 애인을 탐닉하고 무수한 여자들을 농락하길 즐기던 루이 14세, 루이 15세와 비교해보면 루이 16세의 성생활은 대단히 왕답지 못한 것이라, 당시 프랑스에서는 루이 16세의 성적인 능력을 의심하는 루머가 많이 퍼져 있었다.[4]

아내인 마리가 첫딸을 낳았을 때에는 크게 감격하며 "자연 속에서 편히 쉬어라" 라는 뜻으로 별장인 트리아농 궁전을 선물했다고 한다. 처음에 마리는 남편을 답답해하며 친정으로 보내는 편지에도 그 부분을 언급했지만 딱히 큰 불화는 빚어지지 않았고 두 부부 사이에서 아이들이 연달아 태어나며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자녀들에게 엄격하게 예절교육을 시킨 아내와는 달리, 아이들의 청을 모두 들어주는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자녀들에게 다정했던 것은 루이의 조부인 루이 15세나 고조부인 루이 14세도 보여준 면모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아이를 4명 입양했다.

2.2 스펙은 좋았지만

프랑스 혁명을 막지 못한만큼, 무능하고 어리석은 인물로 흔히 평가되고 있다. 사실 무능한 군주란 이미지도 조금 재평가받은 것이, 90년대 학습만화 같은 것을 보면 단순히 무능한 왕이 아니라, 군대와 비밀경찰을 동원해서 국민들을 탄압하는 사악한 폭군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2010년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사실 이미지처럼 정말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한다. 여러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시계나 가구를 만드는 시시한 취미라고 평가된 것도 과학에 대한 그의 조예를 보여주는 증거로 보인다.공돌이 [5] 영국의 역사가 데이비드 흄과 만난 경험으로 역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손수 번역하기도 하였던 만큼 상당한 지식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리학 등의 학문에도 능통했으며, 무엇보다도 가족을 사랑하는 자상한 사람이었다.

2.3 문제는 리더십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 좋은 군주는 아니었다.
왕의 자식으로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좋았을텐데

문제는 군주로서 제일 중요한 덕목이 크게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부족했고, 그가 바보가 아니라 지성인이라는 건 주변에서 인내심을 갖고 이해하고 배려해 줘야만 발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냥 일반인으로 살아도 이런 사람은 바보 취급을 받는데, 군주였으니 설명이 필요없다.

지독한 원시였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사람도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고, 다른 사람들을 대하기를 매우 어려워했다. 거기에 원시 때문에 평소 자세와 걸음거리가 매우 초라하여 이는 대인기피증과 사회공포증으로 이어졌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제대로 된 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평소에도 국정 운영은 커녕 의사소통마저도 힘든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어 국민들과 신하들에게 천치, 머저리등의 인상을 심어주었다.

아내인 마리 앙투아네트마저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이 16세를 그 딱한 사람이라고 언급하며 동정할 정도였다. 직접 루이 16세를 만나본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 또한 그를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이야기를 해 보면 의외로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평했다. 그말인 즉, 평소에는 영락없는 바보 천치로 보였다는 말이다. 인내심을 발휘해서 오래 이야기한 후에야 의외로 뛰어난 지성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말. 천재훼이크 한 마디로 말해서 통치자로서는 최악의 성품이었다.

사실 당대 귀족들이나 다른 나라 군주들도 별반 교양없는건 마찬가지였으니(…) 교양이 없는 것이 크게 흠 잡힐 것은 없었다. 하지만 호구로 취급받으면 '군주의 강력한 권위'로 귀족과 국민을 모두 휘어잡아 국가를 동작시키는 절대왕정의 원리체계 자체에 문제가 생긴다. 게다가 루이 16세는 진짜로 호구였다.

후계자 생산에 대해서도 진지한 고려가 없었던 듯 하다. 결혼 이후 10년이 넘게 지나도록 아내와의 성관계를 하지 않아 자식을 매우 늦게 보았는데, 이는 결국 프랑스 왕위계승권자들의 권력 암투를 불러와 동생들인 프로방스 백작아르투아 백작, 또 제2왕족가문인 오를레앙 가문이 우유부단한 왕 아래에서 통제되지 않고 세력을 키우는 기반이 되었다. 이렇게 분열된 왕실은 혁명이 일어나자 똘똘 뭉치기는커녕 서로 다른 편 아래에서 으르렁대며 루이 16세의 가장 큰 적이 되고 말았다. 예컨대 오를레앙 공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으며, 프로방스 백작은 루이 16세가 처형되자마자 조카인 루이 17세를 무시하고 스스로 국왕을 자처했다. 아르투아 백작 또한 장인인 사르데냐-피에몬테 국왕을 등에 업고 자신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했다.

루이 16세는 우유부단하고 주변의 분위기에 잘 흔들리는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혁명기에는 혁명파들에게 둘러싸이면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거나 혁명 기념에 함께 참가하기도 하는 등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상황이 진정되고 보수파들에게 둘러싸이면 자신의 결정을 엎어버리고 반동적으로 회귀하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태도는 사람들에게 루이 16세가 지극히 '기만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보였고, 루이 16세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루이 16세가 아무리 호구, 바보, 천치 취급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진짜 지능이 낮은 것이 아니었으니, 오히려 호구의 가면을 쓰고 신뢰를 무시하는 위선자로 보이게 하였다.

3 위태로운 재위기간

왕 본인이 무능하더라도 시스템이 안정되어 있거나 뛰어난 인재의 보좌를 받아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히도 루이 16세는 '루이 14세의 콜베르'를 찾아내지 못했다… 가 아니라, 튀르고라는 인재가 있었지만 스스로 잘라버렸다. 더불어 당시의 프랑스는 큰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루이 14세 때부터 심각하게 불균형화된 프랑스의 경제구조가 백여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더욱 고치기 힘들게 된 것이다.

루이 14세 시절부터 프랑스 왕실에는 계속해서 부채가 쌓여가고 있었다. 루이 14세와 루이 15세는 강국 프랑스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의 지불능력 이상의 돈을 여기저기서 빌려다 썼다. 당연히 빚이 쌓일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의 재무장관들은 더 많은 돈을 빌려서 이 부채를 충당했다. 그나마 루이 14세 치하는 식민지 개척과 중상주의, 수출위주의 경제 정책으로 프랑스의 국부가 절정에 달한 시기였기에 국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그의 말년에 거의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그렇게 쌓여온 빚은 루이 16세 치세에 와서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 국가 예산의 60% 이상이 100년 동안 루이 14세와 15세가 빌린 돈의 이자를 갚는 데에 쓰였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 상태로도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기에, 루이 16세의 즉위와 함께 재정총감이 된 안로베로자크 튀르고가 개혁을 시작한다.

우수한 계몽주의자이자 경제학자인 튀르고는 우선 모든 부서의 지출을 재정총감의 권한으로 일일이 검사하여 정부의 적자 폭을 줄이고, 미국독립전쟁에의 개입을 반대하며 위기에 빠진 프랑스를 살려낼 대대적인 개혁을 준비한다. 1776년 1월에 왕실에 제출한 6개 포고령이 그것인데, 부역에 대한 귀족적 특권을 폐지하여 공평한 과세를 매기면서 길드의 독점권을 금지하여 백성들에게 경제적 자유를 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런 튀르고의 노력 덕분에, 그 해에 프랑스 정부는 네덜란드의 은행으로부터 낮은 이자율로 돈을 빌릴 수 있게 될 정도로 국가 신인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기득권을 침해받게 된 귀족들은 가만있지 않았고, 자신의 지출을 일일이 검사받게 된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튀르고를 싫어하게 되면서, 결국 바로 그 해 5월, 튀르고는 사임하고 개혁은 끝장나버린다. 튀르고를 해고해놓고 콜베르를 못 찾았다고? 또한 튀르고가 그토록 반대하던 미국 독립전쟁에까지 지원과 개입이 시작되며 프랑스의 재정문제는 끝장나버린다.

결국 시간이 꽤 지나서야 루이 16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전까지 면세특권을 누리고 있던 귀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다. 이 귀족들의 재산이라는 것은 정말로 어마어마해서 그들이 조금만 양보해서 세금을 낸다면 국가의 빚을 한번에 갚고도 남았다.[6] 당시 프랑스에서 면세특권을 누리는 귀족의 대부분은 루이 14세와 15세 시절 왕의 허가 아래 관직을 구입한 부르주아 계층[7]으로서, 인구의 3%라는 무지막지하게 많은 수에 달했다. 거기다 일부 지방의 귀족들은 납부되는 세금을 자신들이 착복하기도 했다.

사실 이 부채 문제는 루이 16세가 절약-증세 라는 정상적인 방법을 썻다고 해도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었다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이 막대한 부채는 프랑스 혁명 정부에게도 상속되어 혁명 정부의 재정을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급기야는 교회 재산을 털어버리거나, 훗날 나폴레옹디폴트를 선언하고 배째버리는 바람에 처리되었다.(…) 사실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실은 재정 상태가 꾸준히 안 좋았고, 역대 프랑스 왕들은 이 부채 문제를 마찬가지로 그냥 배째거나 성전기사단이나 교회 같은 만만한 놈들을 탈탈 털어서 해결했었다.(…)[8]

하지만 기가 약하고 신앙심이 깊은 루이 16세가 이런 방법을 쓸 수 있을 리도 없고, 귀족들에게 세금 내라고 하려니 귀족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프랑스의 귀족은 루이 14세 치하에서 기가 꺾인 후 서서히 세를 불려나가, 당시에는 국왕의 명을 거부할 정도로까지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9] 실은 루이 14세가 그렇게 대외활동에 올인하고 사치를 부린 것은 전부 귀족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즉 후대의 왕들은 그로부터 '강력한 왕권'와 '막장 재정'이라는 유산과 부채를 동시에 물려받은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유산은 다 까먹고 부채는 불려나갔다.

절대왕정자체가 명시된 법으로 왕권의 강화를 꾀하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나 길드, 귀족 등의 긴밀한 협력체제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었는데, 하물며 세력을 회복해가던 당시의 귀족들은 루이 16세에게 버거운 상대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왕의 권위가 매우 강력한 절대왕정 국가였으며, 부르주아 계층 역시 강력하게 성장해 있었으므로 왕이 그들의 지지를 확보하면서 관료들이 제시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준다면 충분히 능력을 발휘하여 개혁에 도달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튀르고 같이 우수한 인재가 무슨 정책을 내더라도 보수파 귀족들이 반발하면 루이 16세는 뒤로 물러서기 일수였으니, 개혁 시도→반발→퇴보가 반복되면서 도무지 개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개혁파들에게는 왕에 대한 실망감만 커지게 되었다. 튀르고의 후임으로 재무총감이 된 네케르 역시, 유사한 개혁안을 제출했다가 1781년에 파면되고, 1788년에 다시 복귀했다가 루이 16세의 이런 우유부단한 성격에 진절머리를 내고, 당시 프랑스 연간 국가예산안을 공개하고 사표를 내버렸다. 우리가 당시 프랑스의 경제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는 건 이 네케르의 덕.

1789년 5월 5일, 삼부회가 175년만에 소집되었다. 그러나 브루주아 계급(제3계급)이 머릿수에 따른 표결권을 주장하면서 폐회되고, 6월에 제3계급들의 국민의회가 세워졌다(테니스 코트의 서약). 그리고 그 해 7월, 혁명이 일어났다.

4 혁명 발발

이렇게 모순점들을 계속하여 뒤로 미루기만 하니, 쌓이고 쌓이다가 결국 터진 것이 프랑스 혁명이다. 루이 16세는 '언젠가 이 날이 올 줄 알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 하는데 혁명당일(1789년 7월 14일) 루이 16세의 일기장에는 사냥감을 잡지 못했다. 특별한 일 없음이라고 써 있었다.[10] 얼마후 그는 파리에 삼색모표를 달고 오면서 혁명에 대한 지지를 천명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분위기는 영국명예혁명 같은 입헌군주제혁명의 분위기였다. 하지만 결말은 청교도 혁명 야 그래도 찰스 1세는 간지있는 말 하면서 자기 처형을 부정하고 갔다 우유부단한 군주의 위엄인가

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루이 16세는 혁명의 원인은 비교적 정확히 판단했던 반면, 입헌군주제는 내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외국의 지원을 받으면 혁명세력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여 헌법을 잘 지키려고 하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혁명 이후 극심한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고 대부분의 일을 아내에게 의지했다. 이러던 중 돌아온 네케르를 해임하기도 했다.

특히, 1791년 6월, 처가인 오스트리아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하면서 신뢰성은 결정적으로 추락했다. 한 마디로 국왕이 나라를 버리고 달아났다는 얘긴데 어떻게 쉴드가 불가능한 잘못이다. 그나마 선조는 외적을 피해 달아난 거다. 이건 이거대로 문제지만 하필이면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그 군대를 이끌고 돌아올 계획이었기 때문에, 급속하게 악화된 여론은 되돌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민 중 다수가 국왕을 옹호하고 있었으나, 이후로는 급진파가 득세하게 된다. 더불어 계획을 주도했던 왕비는 그야말로 국가의 적이 되었다. 원래는 도망갈 생각이 없었으나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권위와 신변에 위기를 느꼈고, 결국 왕비의 의견을 받아들여 파리를 떠나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대로 도망갈 계획을 짰다.

5 폐위와 처형

나의 피가 프랑스 국민의 축복을 위해 흐르게 하소서! - 처형되기 전에 남긴 유언

결국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고(1792년 4월), 그와 왕비가 오스트리아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태는 벼랑끝으로 달려갔다. 입법의회와 시민들은 궁전을 점거한 다음 국왕 부부를 감금하고 왕정을 정지(1792년 8월 10일 봉기)시켰고, 혁명정부의 제 1공화국이 출범했다(9월 21일). 루이 16세는 그 해 11월 오스트리아와 내통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드러나면서 "시민 루이 카페(Louis Capet)"[11] 신분으로 재판을 받고 반역죄로 1793년 1월 21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사실 일반적인 상식과 다르게 루이 16세는 절대 국민에게 인기가 나쁜 군주가 아니었기 때문에[12], 투표에서도 단 몇 표 안되는 차이로 간신히 처형이 가결되었을 만큼 루이를 죽이는 데 반대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게다가 루이 16세의 사형에 찬성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형식적인 사형 선고 이후의 집행유예를 지지했다. 하지만 사형 선고 이후 집행유예를 투표용지에 기입하는 것을 자코뱅 강경파들이 날려버렸다. 흔히 말하는 좌파 우파 구분의 시발점이기도 한데, 동양처럼 서양 역시 왕을 시민이 목 자르겠다고 하는 게 어지간히 부담스런 판단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물건너 영국에서 찰스 1세를 처형하자 당시 프랑스는 왕 모가지 치는 과격한 놈들이라고 디스했던 과거가 있었고, 그 영국마저도 올리버 크롬웰이 죽고 난 이후 다시 왕정을 복고하였다.

온건한 사람들은 왕을 죽이는 대신에 살려서 입헌군주제로 가고자 했고, 급진적인 사람들은 시민과 대의, 루소적 망상 같은 것들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왕의 목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바로 이 점에서 왕을 죽이자고 하는, 한 체제의 완전한 단절에 준하는 결정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들이 대체로 좌파, 그래도 어떻게 왕을 죽이나 했던 사람들이 바로 온건파, 우파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결정을 한 사람들이 의회 좌측과 우측에 나눠 앉은 것이 결정적 계기이기는 하다. 혁명파는 당연히 무리한 논리에 기댈 수밖에 없었고, 혁명세력들 중에서도 급진파의 한명이었던 생 쥐스트는 "왕이 무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혁명이 유죄일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왕에게 죄가 없다면 혁명이 죄가 된다" 라고 할 정도였다.[13] 이제 와서 왕에게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으니, 그냥 죽이자는 식이었단 얘기. 자코뱅 강경파들은 재판도 필요없이 그냥 죽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지롱드 당원들의 강력한 반발로 마지못한 정치적 재판을 거행했다.

재판정에 선 루이 16세는 매우 겸손한 태도로 자신에게 가해진 50여가지 혐의에 대해 조목조목 항변했으며, 최대한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14] 이 모습을 본 장 폴 마라조차도 저 사람이 유죄만 아니었다면[15] 정말로 존경스러운 사람이라고 평했다. 루이 16세의 변호인들에겐 수백통의 문서를 처리하기 위한 며칠의 짧은 시간만 주어졌고, 그들이 열심히 변호했음에도 국민공회는 그들의 변론을 전혀 검토하지 않고 즉각 표결에 들어갔다. "우리가 설사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폭군을 심판하는 입장의 사람들이더라도 죽었으면 죽었지 절차를 따라야 한다."던 법치주의자들의 절규는 혁명 과격파들에게 무참히 짓밟혔고, 혁명 과격파와 합세하여 루이 16세 이후의 왕위를 노린 일부 군주정 지지자들의 반란표로 루이 16세의 죽음이 결정되었다.[16] 이렇게 국민 감정에도 상당히 거스르는 급진적 과격 혁명노선을 타면서 혁명파는 점차 피에 굶주린 폭력 공포정치에 의존하게 된다.

위의 재판이 끝난 다음 날 루이 16세는 감옥을 나서면서 아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죽더라도 복수할 생각일랑 하지 말거라!"

단두대 앞에서, 그는 예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수갑도 차지 않고 코트도 벗지 않으려고 했으나 절차이므로 어쩔 수 없다는 말에 받아들였다. 다만 가장 좋은 의례용 옷을 입고 왕만이 타는 금장 마차를 타고 단두대로 실려갔다. 유언"짐의 피가 프랑스 국민의 행복을 강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17]였다. (단두대에 처형될 때도 시민들은 아무 소리 안했다 카더라) 혁명 정부는 그가 죽기 싫어서 단두대 앞에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며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러 권총을 겨누어 억지로 눈을 가리고 처형했다고 악의적인 선전을 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랫동안 기독교적 수련을 쌓았던 루이는 매우 담담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루이 16세를 처형한 샤를 앙리 상송은 '루이 카페'는 스스로 코트를 벗고 묶으라고 자신의 손을 내밀며 입시해 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의연하고 지엄한 태도로 죽었다고 반박했다. 상송은 루이 16세만큼이나 카톨릭 신앙의 원칙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그를 칭송했다. 그를 죽인 사람이 하는 말이라서 묘하기 그지없다.[18] 혁명 초기 파리의 폭도들이 왕궁으로 난입했을 때나(1792년 8월 10일 봉기), 죽기 직전 등에서 나름대로 위엄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그의 운명을 바꿀 순 없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기소설을 쓴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를 품위있게 죽는 법만 알았다고 평했다. '상송가회고록'이나 왕의 목을 친 남자' 란 책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상송은 처형 직전까지 그를 살리려했고 그가 사형된 이후에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를 추모하는 미사를 열기도 했다(그땐 가톨릭이 금지되서 은둔생활 중인 신부를 직접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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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8세 때 조성된 무덤(왼쪽)과 기념물(오른쪽)

처형 직후 마들렌 성당에 잠시 매장되었던 루이 16세의 유해는 동생 루이 18세에 의해 1815년 1월 18일에 발굴되어 사흘 뒤인 1월 21일 프랑스의 역대 국왕과 왕비들이 잠든 생 드니 대성당으로 아내와 함께 이장되었다. 그리고 2004년 6월 8일 루이 17세의 심장이 부모의 곁에 안장되어 사후 2백년이 넘게 흐른 뒤에야 일가가 영면에 들었다.

6 기타

참고로 몹시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해서 수감되었을 때는 간수의 가정사정까지 신경을 써주거나 프랑스내에 있어서의 고문을 금지하기도 했다. 살짝 백치미가 있는건지, 새벽 기도를 하다가 꾸벅꾸벅 졸기도 했으며, 모에? 개인적으로는 좋은 사람이였다는 평.

어찌 보면 구시대가 남긴 숙제를 풀지 못해 희생된 셈. 다만 군주로서 국가의 막장화를 막지 못한 것은 변명이 불가능한 실책이다. '다 선조들 뒷처리하다 그런 거지 루이 16세는 잘못이 없잖아염' 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국왕이란 원래 '그걸 어떻게든 해결하는 것'이 그 존재의의다. 어떤 문제에 봉착하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결하여 국가와 왕가를 존속시키는 것이 국왕의 의무, 통치자란 그걸 위해 앉혀놓는 자리고 못해낸다면 왕조와 함께 멸망하는 수밖에 없다. 달리 만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다정한 성격'이나 '오랜 기간 교분을 가지면 알 수 있는 의외의 지성'은 한 개인에게는 덕목이 될 수 있으나, 왕을 위한 덕목은 아니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왕으로서 국가의 위기를 해결할 능력을 가지지 못했던 것' 정도를 들 수 있겠다. 물론 바렌느 사건으로 해외로 도주하여 혁명 진압에 외세를 끌어들이려 한 것은 어떻게 변명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더 큰 문제는 루이 16세의 실제 행동 자체도 구시대의 문제 해결은 커녕, 문제를 심화시키는 짓만 했다는 거다. 예를 들어 국가 수익은 별로인데 쓸데없이 전쟁에 끼어든 걸 그대로 따라했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걸 끼어들면서 그렇잖아도 망한 재정을 더 말아먹었다. 똑같이 선대에서 있는대로 말아먹은 망국의 왕인 숭정제가 비판받지 않는 게, 실책이 있긴 했어도 국가를 되살리기 위해 눈물나게 노력했고 실제 성과도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 16세는 과세 문제에서 몇가지 시도는 했었지만, 결과적으로 성과를 보인 것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동정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맏형인 왕세자가 결핵으로 죽자 왕세자가 된 것이었고, 원래 이름인 오귀스트를 루이로 개명해야만 했다. 본인 스스로도 왕이 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근데 이건 루이 15세도 그렇잖아 할아버지가 죽고 자신이 왕이 된 것을 알았을 때는 두려움과 중압감에 아내와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어떻게 본다면 이쪽도 군주제의 엄연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군주제를 증오하던 시민들에게 처형되었지만.

여담이지만 시계말고도 왕태자 시절부터 자물쇠 덕후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궁 안에 전용 대장간이 있었다고…. 그 밖에도 미국에서는 독립전쟁을 지원했기 때문에 다른 국가에 비해서는 '의외로' 인기가 있었다. 그 때문에 프랑스 재정을 말아먹었지만 뭐, 미국인은 프랑스 재정 문제는 알바 아니니까.(…)

마지막 왕이라는 점에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니콜라이 2세조선고종과는 여러 공통점이 있다. 직계 후손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전자, 성격이나 능력 면에서는 후자를 매우 닮았다. 푸이는? 글쎄...

전설에 의하면 루이 16세의 처형 장면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손수건으로 왕의 피를 닦아 호리병에 보관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한 부호가 소장하고 있던 그 호리병을 발견했는데 손수건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호리병 속에 들어있는 말라 굳어진 피를 분석한 결과 실제 루이 16세의 것이 맞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규명됐다. 루이 16세의 조상 앙리 4세의 머리에서 추출한 유전자와 대조했다고. 관련 기사 다만 기자가 영어로 된 원본 기사를 그대로 번역했는지 앙리 4세를 헨리 4세라고 썼는데 영어와 프랑스어의 발음 차이일 뿐 철자도 같기 때문에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잉글랜드 왕 헨리 4세와 혼동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번역에 주의를 했어야 했다.

7 과연 억울한 죽음인가?

일부 서브컬처산 프랑스역사물[19]등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의의를 잘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20] 루이 16세를 무고한 죽음이라고 묘사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해석이 일부 불까 들을 중심으로 한국에도 이래저래 확산되었는데, 사실 루이 16세는 선량한 사람이었고, 그의 치세에 상황이 악화된 것도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면 루이 14세부터 내려오는 것이어기 때문에, 그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이 좀 무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처형당한 것은 이런 정치의 문제라기보다는, 직접적으로는 오스트리아와 내통했기 때문이었다.[21] 사실 이것만 아니었어도 루이 16세는 사형은 당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왕비처럼 지지세력이 거의 없어서 엉뚱한 죄를 뒤집어씌워도 문제가 안되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더더욱. 또한 혁명을 무위로 돌리려는 반동세력에게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는 직접적인 본보기로서의 의미도 있었다. 즉 그가 개인적으로 선량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의 제거는 역사 발전의 수순에 있어서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러시아 혁명 이후 처형당한 니콜라이 2세도 마찬가지였지만, 루이 16세는 적국과 내통했다는 점에서 당시 프랑스 법상으로도 사형 선고를 하는 게 맞았고, 처형당할 이유가 니콜라이 2세보다도 훨씬 많았다. 오히려 진짜 억울한 건 마리 앙투아네트다.

이는 근본적으로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하는가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에 기인한다. "군주제적 가치관"에서 혁명파는 왕권을 제약하는 역적이고, 루이 16세가 외국(오스트리아)의 힘을 빌려서라도 왕권을 회복하는 것은 정당하다.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루이 16세의 처가집이다. 유럽에서 군주끼리 서로 힘을 빌려주는 일은 흔했다. 처가집의 힘을 빌려서 반란을 진압하고 왕권을 회복하는 것은 군주제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국가주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죄였다.

사실 이 시기 유럽의 군주들은, 자국의 평민보다는 다른 나라의 군주와 더 가까운 사이였다. 서로서로 결혼으로 맺어지거나, 형제 자매끼리 왕위를 나누면서 상당히 가까운 친척 지간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친척이다보니 서로 연락도 자주 하고 지내는 사이니까 당연히 더 친밀할 수 밖에 없고, 신분과 입장이 완전히 다른 평민과는 달리 '같은 군주'라는 점에서 입장과 신분이 동일하기 떄문에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여지'도 많았다. 물론 때때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 전쟁조차도 '친척들 간의 재산다툼'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공화제적 가치관"에서 이 시도는 시민과 그 대표들을 역적으로 몰아서 외국 군대의 힘을 빌려서 죽이려 하는 사악한 적대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루이 16세가 명분을 부여해서 끌고 온 오스트리아 군대가 파리에 입성하면 무수한 사람들이 역적으로서 살육당할 것이 분명했다. 정치적 가치관과 권력 투쟁을 논하기 전에 프랑스 시민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사형판결이 굉장히 신속하게 결정된 진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프랑스 백성들은 아직 전통적인 권위와 관습의 영향으로 루이 16세를 "우리들의 왕"으로 여기고 어느 정도 대우를 하고 있었으나, 루이 16세는 그들의 신뢰를 배신하고 학살을 시도하려다가 걸린 셈이다. 학살 목표로 지정되었던 시민들과 대표의 감정이 폭발할 수밖에 없다. 생쥐스트가 한 말도 실제로는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왕에게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혁명을 지키기 위해 죽여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우유부단한 성격인 루이 16세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의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사실 의문스럽지만, 당시 시민들은 "왕의 배신"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루이 16세에게는 파리 시민들보다는 차라리 처형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더 친근하고 믿음직한 사람이었겠지만 말이다.

8 21의 저주?

루이 16세는 사실 저주 때문에 죽었다는 설이 있다. 도시전설이기는 하나 저주받은 다이아몬드, 21의 저주가 유명하며, 특히 21의 저주는 2015년 8월 9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링크 해외에서도 기막힌 우연으로 다루고 있는 모양인데 이를 다룬 서적도 있다. 저주받은 다이아몬드 이야기는 믿거나 말거나는 자유이긴 하지만 21의 저주는 정말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루이 16세의 불운과 일치한다.

루이 16세는 숫자 21에 대한 강박증이 있어 21시 전에 잠들거나 21일에는 외출을 삼갔으며 심지어 먹는 반찬의 숫자도 21개가 되지 않게 했다. 루이 16세거 이렇게 21의 강박증을 가지게 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루이 16세는 어린 시절 잔병치레를 많이 했고 2살 되던 해에는 결핵으로 죽을 뻔했다. 그러자 손자를 걱정한 루이 15세는 점성가를 불러 점을 쳤다. 점성가는 "루이 16세는 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숫자 21을 조심해야 한다"고 예언을 했다. 왕이 되려면 아버지와 형이 살아 있는데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나 생각했지만, 이후 루이 16세의 아버지와 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루이 16세는 점술사 말대로 왕이 됐다.

점술사의 말이 사실로 드러나자 루이 16세는 숫자 "21"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에 사로잡혔고 왕이 된 후에도 강박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루이 16세에게는 계속해서 21의 저주가 따라붙었다. 루이 16세가 대관식을 하기로 결정된 때는 그의 나이 "21살" 때였다. 그러자 루이는 21세에 어쩔 수 없이 대관식을 했으나 매우 불길한 징조를 직감한 루이 16세는 왕위 대관식이 열리고 왕립학교에서 열린 축하식에 어쩔 수 없이 참석했는데, 그날 따라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거센 빗줄기가 몰아치자, 학생대표가 축사를 낭독하는 도중에 그냥 왕궁으로 되돌아와버리고 만다.[22] 불길한 숫자 21을 크게 의식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루이 16세는 학생대표가 낭독하는 축사를 외면한 채, 축하식이 끝나기도 전에 왕궁으로 돌아와버린 거다.

왕위 대관식은 그 나라에서 가장 중대한 행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축사낭독 도중에 새로 부임한 왕이 그냥 왕궁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축하식에 참석했던 수많은 대신들과 귀족들, 그리고 축사를 낭독했던 학생대표에게 심한 모욕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옹졸하고 졸렬한 왕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느끼게 했다.

또 특이하게도 왕족들이 루이 16세에게 자신들이 큰 빚을 졌는데 빚갚을 능력이 없으니 프랑스 정부가 그 돈을 대신 갚아줄 수 있누냐고 요구해왔다. 근데 그 왕족의 숫자가 "21명"이였다. 이에 또다시 공포심에 사로잡힌 루이 16세는 21명 왕족들의 빚을 갚기 위해 세금을 올렸고 이로 인해 국민들이 점점 불만이 쌓여졌고 결국 프랑스 혁명을 일으켰다.

왕궁이 전부 무력화되고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자 루이 16세는 가족들을 데리고 몰래 베르사유 궁전을 빠져나가 프랑스국경 부근 바렌느 숲속으로 도망가다가 결국 혁명군에 체포되고 만다. 그런데 루이 16세가 혁명군에게 체포된 날이 하필이면 1791년 6월 "21일"이였다. 또한 혁명세력인 국민공회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하는데 그 날이 바로 1792년 9월 "21일"이였다.

결국 1792년 9월 "21일" 루이 16세는 국민들에게 공개 재판을 받게 되며 1793년 1월 "21일" 사형을 당한다.

루이 16세의 사형을 주장한 사람은 바로 17년 전 비를 맞아가며 루이 16세에게 환영사를 낭독한 그 학생대표였다. 당시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가 숫자 21에 대한 불안함에 환영사를 듣지 않고 자리를 떠나자 모욕감을 느꼈고 결국 그의 사형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또 루이 16세를 사형 당하게 한 단두대가 만들어진 날도 1790년 1월 "21일"이었다. 그 당시 왕이었던 루이 16세가 단두대 사용을 허가해 주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루이 16세는 자신이 허가했던 단두대에서 자신이 참수형당하는 신세가 된다.

9 가족 관계

10 대중매체에서 루이 16세

베르사유의 장미에 등장했다. 원판 성우는 야스하라 요시토. KBS판은 홍승섭, EBS판은 홍범기.

현실의 루이 16세가 모티브… 아니, 그냥 루이 16세 본인이다. (일단 브리타니라는 가상의 국가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브리타니가 사실상 프랑스다) 이 쪽은 자신이 무능하다는 걸 자각하고 있지만 절망했다! 바꿀 수 없는 현 실정에 절망했다! 를 외치고는 방구석에서 당시 총사대장이었던 아르카르나제(얀 지스카드)와 함께 주석으로 만든 병정 인형을 이용한 미니어쳐 게임이나 하고 있는 히키코모리였다.
이후 혁명이 터지고,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까지 몰리지만 아르카르나제가 스스로 핏값을 지불. 데스틴 몽트뢸에 의해 나폴레옹으로 탈바꿈한다. 이후 포병 운용 + 아르카르나제에게 전수받은 보병사격전술[24](일명 '대천사의 무지개')에 의해 승승장구. 이후 사브리나를 손에 넣으려 하나 실패한다. 이후 행적은 실제의 역사와 거의 같다. 나폴레옹 참고.
  1.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2. 고자라거나, 자연포경이 아니라거나.
  3. 단 둘은 일찍 죽었고,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차남 루이 17세 둘만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살아있었다. 그나마도 루이 17세는 혁명 시기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학대받다시피 하다 요절했고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만이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물론 평탄한 인생을 살지는 못했지만)
  4. 당시 사회분위기는 남자가 마초적인 성향이 짙은 분위기였다. 그런 상황속에서 루이 16세의 성향은 국민들에게 비호감을 살만했다.
  5. 오늘날에야 시계는 흔하디 흔한 걸로 평가받지만, 쿼츠 시계가 없던 당시에 시계는 고도의 기술력이 총동원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특히 기계공학적인 면에서 높은 수준의 기술력이 시계를 통해 나타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루이 16세의 시계제작에 대한 관심은 달리 말하면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여전히 기계식 시계는 무진장 비싸고 엄청난 기술력이 들어간다. 일설에 따르면 현존하는 단두대 칼날도 루이 16세가 새로이 디자인해준 것이었다. 원래 단두대의 칼날은 반월형이었는데, 루이 16세가 그 모델을 보고는 "이래가지고는 목뼈에 칼날이 걸려서 사람이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칼날을 대각선으로 세워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후 그는 자기가 개량한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게 된다(…). 오오 인권 오오 그래도 그 덕분에 죽음은 조금 덜 고통스러웠을지도.
  6. 하지만 그때 당시 성직자(당시엔 이들도 귀족이다.)들은 "하느님도 세금을 내시나?"라는 말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 댓가는… 프랑스 혁명 항목을 참고해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알 수 있다. 그야말로 갈려나갔으니…내라면 내야지
  7. 법복 귀족이라고 부른다. 구 봉건 귀족은 대검 귀족.
  8. 물론, 프랑스 왕들이 몽땅 이랬다고 보면 곤란하다. 어떤 일에나 예외라는 게 있기 마련이고, 저질 금화를 발행한 선왕들과는 달리 양질의 금화를 발행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 한 샤를 5세 같은 경우도 있다.
  9. 위에서 나온 귀족의 면세특권 해제의 건이 그렇다.
  10. 바스티유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시종장이 가져오자 "반란인가?" 라고 물었고 시종은 "아닙니다 폐하. 혁명입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다만 이 유명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우선 혁명이 지금의 의미가 된 것은 프랑스 혁명이 처음이다. 본문에도 언급되지만, 원래 혁명은 점성술이나 천문학에서 별의 순환을 의미했다. 단적으로 revolution이란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언급되는 인물은 코페르니쿠스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프랑스 혁명 이전에 사용된 것은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한 이후에 왕정복고되는 상황 등이다. 때문에 우선 저 문건 자체가 의심스럽고, 실제로 사용되었더라도 지금의 혁명이란 표현과는 전혀 다른 의미일 것이다. 대충 민란인가? 정변인데요 정도의 문답이 아니었을까
  11. 참고로 카페(Capet)는 부르봉 왕조의 본가인 카페 왕조의 시조인 위그 카페의 남자 후손의 본래의 성이다. 여태까지는 자신의 영지의 지역명을 성으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본래의 성을 부를 일이 없었다.
  12. 루이 16세가 150년만에 삼부회를 소집한 덕에 프랑스 곳곳에선 루이 16세를 자유를 회복해주신 임금님이라고 칭송했고, 왕에 대한 비난은 익히 알다시피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을 현혹하는 외국년이라며 거의 모두 뒤집어썼고, 그마저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선에 힘쓰는 선량한 왕비였기 때문에, 상당부분 억울한 것이었다.
  13. 여기서 일설에 위하면 생쥐스트를 루이 18세가 매수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건 가능성이 낮은 것이 진짜 매수당했으면 무조건 죽이라고 하면서 최소한의 정당성도 없는 폭군으로 몰아붙이지, 혁명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어떻게 보면 루이 16세에 대한 옹호가 될 수 있는 발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14. 여담으로 루이 16세는 '국민의 피에 미친 폭군'이란 죄목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모든 행동은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 조용히 항변했다.
  15. 마라 류의 강경파들은 루이 16세를 이미 죽이기로 결정은 내렸으니 무죄일 수가 없다.
  16. 왕의 조카조차도 왕을 죽이라고 투표했고 그 순간 공회장 안에서는 신음소리가 곳곳에서 울렸다 한다.
  17. 혹은 "프랑스 인들이여, 짐은 무고하게 죽는다."
  18. 다만 상송은 사형 집행만을 맡았을 뿐이다. 사형집행인이야 위에서 결정하면 사형을 집행할 뿐인데 뭘 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상대편 인사들을 처형하면서 자리를 지킨 사형집행인도 적지 않다.
  19. 대표적으로 라 세느의 별, 베르사이유의 장미진정남 나폴레옹
  20. 일본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기본적으로 민중운동은 단발적이거나 국소적인 것에 그쳤고, 민중은 대체로 지배층(고대에는 귀족계층, 중세-근세에는 사무라이 계층, 현대에는 관료)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미국의 시민운동이나, 한국의 4.19와 같이 지배층을 전복한 영향을 끼친 민중운동이 드물기 때문에, 일반화하기는 약간 성급할지 모르지만, 일본의 작품들은 대체로 대중운동을 우발적 혹은 우연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21. 처음에는 오스트리아 출신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주도한 게 아닌가 했지만, 확인 결과 루이 16세가 직접 저지른 게 맞았다. 왕비는 간첩죄가 무죄가 되었기에 다른 죄를 적용해야 했는데, 사형에 해당하는 게 거의 없어서 결국 근친상간죄를 날조하게 되었다. 참고로 현재도 근친상간은 독일 등 여러 나라에 처벌법이 있고, 처벌규정이 없어도 발각 즉시 사회에서 100% 매장되는 패륜 행위이다.
  22. 이때 학생대표가 나중에 프랑스 혁명에 불을 지피고 루이 16세를 처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로베스피에르였다. 결과적으로 예언은 틀리지 않은 셈.
  23. 왕으로 즉위하지 못하고 죽은 루이 16세의 형 루이 조제프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리고 그 역시도 혁명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24. 보병을 2열로 배치시킨 후, 전의 1열이 사격하고 재장전하는 시간적 공백 사이에 후의 1열이 사격. 이것을 반복하면 그 당시에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연사가 가능해진다. 사실 활이나 석궁 등에서 활용되었던 전술이며, 정확한 제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