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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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범(徐光範,1859년 11월 8일 ~ 1897년 7월 17일 또는 8월)은 조선 말기의 정치가이며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명이다. 본관은 달성(대구)이다. 미국식 이름은 케네스 서(Kenneth Suh).

1 생애 초반

서광범은 1859년 11월 8일 평안감사 사택에서 이조참판을 지냈던 서상익과 생원 박제완의 딸 반남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정조 때의 무관 서용보이다.

소년기에 안동 김씨 김병지축구 선수가 아니다[1]의 딸과 결혼했으나 요절하고 광산 김씨와 재혼하였다. 첫 부인이 안동 김씨였던지는 몰라도 일찍부터 김옥균과 가까이 지냈으며 외가 친척인 박규수의 집을 함께 출입하게 되면서 동시에 오경석, 유홍기 등의 통상 개화론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그래서 곧 1882년박영효, 서재필, 김옥균, 홍영식 등과 개화당을 조직했다.

1880년(고종 1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규장각 대교·검교, 홍문관 부수찬·홍문관부응교, 세자시강원 사서·세자시강원사서 겸 필선 남학 교수(南學敎授), 부응교 등을 지냈다. 1882년 4월 김옥균을 수행하여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김옥균과 함께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였고, 7월 임오군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했다. 8월에 참찬관으로 임명되었다. 1882년 9월에는 임오군란 뒤 일본정부에 대한 배상금 청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박영효가 일본수신사로 파견되자, 또다시 박영효의 종사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신진 문물을 견학하였다. 이때 박영효의 권고로 수신사 일행이 귀국할 때 잔류, 별도의 시찰단 일원으로 파견되었던 김옥균과 함께 남아 일본을 돌아보고, 이듬해 3월에 귀국하였다.

1883년 규장각대교(待敎)에 임명되고 경연시독관을 겸하였다. 1883년 6월에는 보빙사(報聘使)가 미국에 파견될때 보빙전권대사 민영익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의 주요 도시를 시찰하였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후 1884년 6월 1년 만에 귀국하였다. 그 영향을 받아 서양 선진문물에 관심이 많았고, 여러 차례의 외유를 통해 개화·자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변화에 대한 희망 역시 남달리 강하였다. 이후 1884년 7월 승정원 동부승지, 내무 참의(內務參議), 8월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병조참의,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2 갑신정변

1884년에 그는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등 급진개화파들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겨우 3일만에 실패하고 만다. 그는 주동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함께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고 변복하고 인천 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 집에 은신하였다가 겨우 일본으로 탈출하게 된다.

물론 갑신정변 실패 이후 그의 가족은 몰살당했다. 아버지 서상익은 한성부 감옥에 투옥되어 8년 간 수감생활을 하던 중 굶어죽었고 아내 역시 10년 간 투옥되어 있었다. 이 외 나머지 가족들 역시 모두 처형당하게 된다.

이렇게 서광범이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서광범의 문중인 달성 서씨에서는 그의 항렬에 해당하는 항렬자를 바꾸는데 '광(光)'을 '병(丙)'으로 바꾸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갑신정변의 주역 서재필 역시 같은 집안이라 서재필의 항렬 역시 '재(載)'에서 '정(廷)'으로 바뀌게 된다. 달성 서씨는 무려 2세대에 해당하는 항렬자를 바꾼 것이다.(...)[2]

그러나 그 뒤에도 조선 조정에서는 그를 죽이려고 일본에 암살자를 파견했고 조선 정부의 소환령과 일본 정부의 무성의로 위기감을 느껴, 1885년 5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미국에서의 망명생활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뉴욕, 뉴저지 주 및 워싱턴 등을 전전, 주로 미국 동부지역에서 거주하면서 사탕수수 농장과 커피 농장, 오렌지 농장에서 잡역부로 생계를 유지했다. 1892년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여, 미국 연방정부의 교육국 인종학과에서 번역관 겸 통역관으로 일하였다. 이때 그는 미국 정부기관지와 일반 잡지에 조선교육론(Education in Korea)과 조선민담(Korean Stories)을 게재, 발표하기도 하였다.

1894년 인사개편으로 해고되어 교육국의 사환을 하는 등 어렵게 생활하였으며, 그의 명성을 알아본 일본인 개화인사의 주선으로 워싱턴에 있는 신지학회(神智學會)와도 관련을 맺어, 신지학회의 지역지부 건물의 관리인으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3 갑오개혁

그 이후 1894년에 조선으로 돌아와 박영효와 함께 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에 참여하였다. 2차 갑오개혁1895년 3차 갑오개혁(을미개혁)을 적극 추진하였며 박영효, 유길준, 김윤식, 김홍집과 함께 단발령을 도입하기도 했다.

4 도미와 최후

1895년 제4차 김홍집내각(1895. 10)에서는 학부대신에 기용되었다가, 친러, 친일 양쪽의 이해관계에 의해 12월 11일에는 주미특명전권공사로 좌천되었다. 이때 미국의 로노크 대학은 김규식 등 조선인 유학생이 있었으므로, 그는 특별히 로노크 대학의 졸업식 행사에 참석했고, 대학에서도 주미국 조선공사인 그에게 명예 법학 석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관파천(1896. 2)으로 친일내각이 붕괴되고 친러정권이 들어서자 곧 현지에서 해임되었다.

해임된 후, 당시에는 천역으로 알려진 폐병이 악화되어 회복하지 못하고, 조선으로 귀국하지 못했다. 1896년 6월 20일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명되지만 돌아오지 않고 다시 미국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1897년 7월 17일 또는 8월 미국에서 일생을 마쳤다. 유언대로 화장하고, 유골은 1898년 봄 본국으로 송환되어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논현리 비정동(碑井洞) 산31(현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89-10) 야산에 유교식으로 다시 장사지냈다.

5 기타

역사책에 갑신정변 부분에서 아주 잠깐 나오는 인물이다. 참고로 조선에서 최초로 양복을 입은 사람이다.(1881년부터 양복을 입었다.) 또한 국내 최초의 성경 번역자이기도 하다. 알고 보면 현대 우리 실생활의 숨어있는 선구자 1892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1. 김조순의 손자다. 김조순의 둘째 아들 김원근의 아들.
  2. 이는 다른 갑신정변 주역 들의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안동 김씨에서는 김옥균 항렬의 '균(均)'을 '규(圭)'로 바꾸었고 반남 박씨 문중에서는 박영효 항렬의 '영(泳)'을 '승(勝)'으로 바꾸었으며 남양 홍씨 문중에서는 홍영식 항렬의 '식(植)'을 '표(杓)'로 바꾼다. 이들이 신원 된 뒤에도 이미 바꾼 항렬자를 다시 바꾸기는 뭐했던지(...) 현재는 바뀌기 전과 바뀐 후의 항렬자를 모두 인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