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수

14421_7469_3842.jpg

朴珪壽

1807년 ~ 1877년

조선의 관료, 학자. 호는 환재. 연암 박지원의 손자다.

젊은 나이에 조정에 나갔을 때 효명세자와 친분이 두터웠고, 효명세자에게 박지원의 사상을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개국론과 조선의 개혁을 논하게 되었다. 효명세자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서 박규수는 그 충격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20여 년간 칩거했다.

그러다가 1848년 증광시 병과로 합격했고, 1862년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그 수습을 위해 안핵사로 파견되어 조정에 백낙신을 파면해 민란을 수습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후 평안도 관찰사로 옮겨갔는데, 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 이르러 통상을 요구했다. 박규수는 흥선대원군의 통상거부정책에 부정적이긴 했지만 일단 미국 함선이 들어왔고 자신의 위치에서는 통상을 허가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군(장교) 이현익을 보내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이 이들을 침입자로 오해[1]하고 붙잡는 바람에 사태가 악화되었고, 결국 박규수는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게 한다. 그러나 는 불태웠어도 되도록이면 생존자들을 구해서 미국과의 교섭에 이용하고자 했으나, 셔먼호의 포격으로 조선인 사망자 일곱을 포함, 다수의 사상자가 나온 탓에 분노한 주민들이 생존자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생존자들을 내주었고, 모두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서 끔살당했다.

이후 미국이 셰넌 도허호를 보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따지자 기생을 미국 장교에게 보내 수청을 들게 해 그들을 되돌려 보내는 데 성공했다. 다만 수청을 든 기생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결국 자살했다는 흑역사가 존재한다.

어쨌든 흥선 대원군이 실각하면서 박규수는 우의정에 올라 고종을 보필하게 되었는데, 일본이 100여 년이 넘어서 처음으로 국교 정상화를 위한 국서를 보냈다. 그러나 그 국서의 내용이 기존의 국서와는 달리 발신인이 덴노로 되어 있었고 '대일본', '칙서' 같은 황제국에서나 쓰는 용어들을 쓴 탓에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여론이 높았다. 그러나 박규수는 그런 문제들은 지엽적인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조정에서는 일본의 국서를 거부했고, 운요호가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포격을 가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나이가 들어 관직에서 물러난 박규수는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1877년에 세상을 떠났다.

박규수는 개화파의 시조로 꼽힌다. 그의 개화사상의 근원에는 조부인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의 실용주의가 기반에 깔려있었다. 북학파들은 청나라로 왕래하는 사신들을 통해 베이징에서 서양 문물들을 접했는데, 이런 연결고리는 박규수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와 박규수 또한 서양의 정세와 문물에 정통했다고 한다. 역관 오경석, 의관 유홍기 등이 박규수와 함께 했던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꼽힌다.

일명 '박규수의 사랑방'은 개화파의 양성소로 불렸을 정도로 박규수가 후학들인 개화파에게 남긴 영향력은 상당히 컸다. 박영효는 자신의 형과 함께 박규수의 집을 드나들며 개화사상을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김옥균에게 전하면서 개화파가 형성된 것이다. 다만 박규수의 개화사상은 서양이나 일본을 너무 순수하게 바라봤다는 한계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1. 통역을 맡은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목사는 조선말을 해서 말은 통하는데 정확하게 뜻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