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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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문화원 점거농성으로 체포된 대학생들.

1985년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삼민투위(三民鬪委.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위원회. 약칭 삼민투) 주도하에 서울의 5개 대학교 학생 73명이 연합으로 서울 미국문화원(현 서울특별시청 을지로청사)을 기습 점거, 농성을 벌인 사건.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이 선전하자 이에 고무된 학생들은 5.18 민주화운동 계승기간을 맞아 5.18에 대한 미국 측의 책임을 폭로·규탄하기 위해 서울특별시에 있는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계획을 세웠다. 대사관이 아니라 만만한 문화원을 택했다[1]

미국문화원 도서관에 들어간 대학생들은 광주사태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사과하라 등의 구호를 내붙이고 주한 미국 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다, 72시간 만에 스스로 농성을 풀고 나와 경찰에 모두 연행됐다. 원래는 미 측에서 공식적인 사과를 할 때 까지 기다리려 하였으나, 맞은편 건물에서 적십자 남.북간의 회담이 있어 급하게 종료하였다고한다. 만약 북한측에서 손이라도 흔들었다가는...

이 사건으로 서울대학교 삼민투위원장 함운경 등 20명이 구속 기소되었다. 피고들의 재판 거부 사태, 묵비권 행사, 재판부 기피 신청, 변호인단 전원 사임 등 재판과정 역시 파란으로 점철되었다.

윤성민 국방부장관은 국회 국방위 답변형식으로 광주사태의 전모를 발표하였다. 워커 주한 미국 대사도 광주사태는 한국내의 문제로 미국이 책임질 것이 없다라는 해명성의 발언을 하게 되었다.[2]

한편으로 이 사건에 대해 온건한 대책으로 접근하려던 김석휘 법무부장관, 이현재 서울대학교 총장 등이 경질되었다. 김석휘 법무부 장관은 이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시위를 하였고~;; 라며 이들을 변호하였으나 위에 서술된 법정내 재판 거부 사태로 그분에게 눈총맞고 짤렸다. 그리고 허문도 정무제1수석비서관,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 등 강경파들이 득세하면서 학원안정법 파동이 야기되었다.

한편 당시 정권은 삼민투를 수사하면서 지하신문 깃발을 주목한다. 이러면서 흔히 깃발 사건이라 불리는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이 터져나왔고, 민추위 사건 관련자로 김근태 민청련 의장이 불법연행되서 이근안한테 고문을 당한다.

이 사건 내에 웃지못할 일이 있는데, 원래는 5.18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다는 상징성을 살리기 위해서 5월 18일날 진입할려고 했으나 무슨 일인지 일대에 경찰들이 깔리고 미 문화원 주위에 경비가 늘어나 '정보가 누출이되었다', '경찰이 낌새를 맡았다' 등의 루머가 학생들 사이에 퍼졌다. 곧이어 미 문화원 측을 사전탐방하러 갔던 선배들이 헐래벌떡 달려와 사건은 일단락 되었는데, 경비가 늘어난 것은 경찰이 눈치 챈 것이 아니라 단지 주변 건물에 공식 행사가 있어 경비 인원을 늘린 것(...) 이였다 한다. 학생들이 모여있는 건물에서는 보이지 않았으나, 미 문화원 창문에서 바깥을 보던 학생이 플랜카드를 보고 달려왔다고.등잔밑이 어둡다..? 이래서 계획은 연기되서 5월 23일날 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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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점거 당시, 경찰들은 치외법권이라는 점에서 들어가지 못해 건물 바깥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당시, 기자들이 옆 건물로 달려와, 건물 과 건물을 큰 소리로 소리치며 서로에 대한 질의를 하였는대, 이때 바람이 심해 들리지 않았던 것을 삼민투 공동대표 의장 함운경 이 창 바깥으로 몸을 절반을 빼내어 이야기를 전달하였다고 한다. 이때 나온 사진은 아직까지도 미 문화원 점거사건을 설명할때 사용되고있다. 물론 이 이후 위험성을 고려하여 서로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하였다.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가 '강철대오:구국의 철가방'이다.
  1. 이는 당연한 것이, 지금도 그렇지만 미국 대사관은 서울 시내에서 가장 경비가 삼엄한 곳 중 하나다. 철조망으로 둘러친 높은 담장이 버티고 있고, 당시엔 심지어 철창으로 된 회전문을 통해서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아예 내부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들어갈 수없다. 심지어 예전엔 대기 라인에 지붕도 없어서 비자 떼러 갔다가 비가 오면 쫄쫄 맞아가며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군사정권 내내 대사관 주변에는 항시 기동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무모하게 돌진하는 것은 아무 소득이 없다. 구호 외칠 시간도 없다 이미 앞서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1983년 대구 미국문화원 폭발 사건이 있었던 등 미국 문화원이라는 시설은 당시 반미성향 학생운동권의 주요 목표였다.
  2. 당시에는 전시와 평시 가릴 것 없이 주한미군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군은 미군의 승인이 있어야 부대이동이 가능했다. 이에 따라 재야민주화운동세력들, 특히 학생운동의 대다수는 5.18 민주화운동의 유혈진압은 미군의 승인하에 벌어진 일이며 결국 미국이 최종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반미의 무풍지대라던 대한민국에서 1980년대 갑자기 반미 정서가 폭발한 것은 이런 인식때문이었다. 이 부분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며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첨예한 쟁점중에 하나이다. 일단 진압군의 주축이었던 공수부대는 미군의 승인 없이도 이동이 가능했던 부대라는 점과, 인권 문제를 두고 계속 충돌하던 한미관계와 레임덕에 시달리던 미국 지미 카터 행정부의 상황을 고려해 봤을때, 최소한 미국이 묵인까진 몰라도 승인을 한 것 까지는 아니라는 주장이 대다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