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왕후

조선의 역대 왕세자빈
경종
빈궁 심씨
(왕세자빈)
경종
빈궁 어씨
영조
빈궁 서씨
(왕세제빈)
조선의 역대 왕비
경종
단의왕후
경종
선의왕후
영조
정성왕후
조선의 역대 왕대비
숙종
혜순왕대비
경종
경순왕대비
영조
예순왕대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시호경순효인혜목선의왕후(敬純孝仁惠睦宣懿王后)
출생지숭교방(崇敎坊) 사저
사망지창경궁 어조당
본관함종(咸從)
배우자경종(景宗)
아버지함원부원군 어유구
어머니완릉부부인 이씨
생몰
기간
음력1705년 10월 29일 ~ 1730년 6월 29일
양력1705년 12월 14일 ~ 1730년 8월 12일(향년 26세. 만 24세)
재위
기간
1718년 ~ 1720년(빈궁)
1720년 ~ 1724년(왕비)
1724년 ~ 1730년(왕대비)

1 생애

영돈녕부사 어유구(魚有龜)의 딸로서 어유구는 노론 영수 김창집의 제자이며 일가가 모두 노론계이다. 1718년 14세(만 12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되어 같은 해에 왕세자(경종)와 가례를 올렸고 다음 해인 1719년 9월에 관례를 올렸다.

1720년 숙종이 사망하고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경종의 초비인 단의왕후 심씨의 왕비 추봉과 그녀의 왕비 책봉을 동시에 주청한 것이 청나라에 트집 잡혀 1721년에야 고명을 받을 수 있었다. 경종 1년, 경종 부부에게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하여 노론 4대신(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와 왕대비(인원왕후)의 강력한 추진으로 연잉군(영조)의 왕세제 책봉이 결정되었을 때 그녀의 나이는 갓 17세에 불과했다. 일설에 따르면 연잉군을 반대하여 종실과 비밀리에 연합하여 소현세자의 직손인 밀풍군 탄, 혹은 밀풍군의 아들인 관석을 입양하려 하였으나 경종의 급서로 실패하였다고 한다.

1724년 경종이 사망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불과 20세의 나이로 왕대비가 되었다. 영조 2년에는 대비전이 있는 창덕궁이 아닌 경종이 세자 시절 거처하던 창경궁 저승전(...)에서 지냈으며, 1730년 8월 12일(음력 6월 29일) 창경궁 어조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거처하던 저승전은 후에 세자궁으로 개조되어 사도세자의 처소가 되었으며 저승전 건너편에 위치했던 취선당[1]은 세자궁의 소주방으로 개조되었는데,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정신질환을 앓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불길한 저승전에서 자라고 취선당에서 지은 밥을 먹은 탓이라 하였다.

2 야사

  • 시동생인 영조와 사이가 두드러지게 좋지 않았는데, 즉위 초부터 선의왕후는 남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영조를 위한 예식과 절차를 거부하기 일쑤였고, 영조는 왕대비인 선의왕후에게 올려지는 물품을 매번 삭감하여 국고나 백성에게 돌렸다. 왕대비(선의왕후)에게 진연을 올리자는 홍치중의 주청이 있자 영조가 진노어린 비답을 내려 종실 전성군 이혼 등 종친부가 일제히 상소하여 진연 올리기를 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조는 "나의 성의가 부족한 것 때문에 (선의왕후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며 비난과 책임을 회피하였고, 이후 진연을 올리는 것이 정해지긴 하였지만 수차례 연기되었다. 영조는 선의왕후의 국상 기간 중에 후궁 숙의 이씨를 빈으로 삼고 대대적인 혼인잔치를 열어 도성 안팎은 물론 노론 대신들까지 탄식을 쏟아낼 정도였다.
  • 선의왕후를 죽음으로 이끈 병명은 밝혀지진 않았으나 죽기 직전까지 몸을 떨며 통곡을 하고 읍성(눈물을 흘리며 우는 소리)을 냈다고 한다. 이에 영조가 의관들이게 그러한 증후를 본 적이 있는지 묻자 중관이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 대답하였다.
  1. 희빈 장씨가 살던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