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

조선의 붕당
훈구파사림파
동인서인
북인남인소론노론
대북소북청남탁남준론완론시파벽파
* 붉은 계열은 강경파, 푸른 계열은 온건파

1 개요

老論

조선시대에 등장했던 당파 중 하나. 서인에서 갈라져 나왔다.

이덕일을 필두로 하는 몇몇 학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대중 매체의 영향으로 많은 대중들에게 조선 멸망의 빌미를 제공한 만악의 근원이란 인식이 강하다. 삼대장 중 하나 예를 들어 인터넷 상에서 지금도 흔히 떠도는 노론 = 영남 = 친일파 = 현재의 기득권층 설. 조선 붕당의 계보를 조금만 살펴봐도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개소리. 얼마나 개소리냐면 먼 훗날 전라도 새누리당, 경상도 민주당 운운하는 격이다. [1]

세간에서 조선을 말아먹은 수구꼴통 악의 축으로 찍혀 있는 서인 집권 세력 전체에 공통되는 사항이지만, 이들의 주요 활동 기간인 경종, 영조, 정조 시기를 보면 이들과 각 군주들과의 관계, 펼치거나 지지한 정책 및 발휘한 영향력이나 남긴 업적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정조 사후 조선을 망친 것이 정순왕후 김씨와 노론 벽파라는 소리가 많지만, 실제로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전자는 자연사, 후자는 깔끔히 제거 당한 것만 봐도...

2 서인의 분열

2.1 경신환국

숙종시기에 있었던 잦은 환국으로 인해 서인남인의 처지는 자주 바뀌었다. 일단 예송논쟁현종이 남인의 손을 들어주면서 서인들은 밀려났고 숙종 초까지는 조선시대에 단 한 번 있었던 남인천하였다. 그러나 1680년, 남인의 이환이 서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한성부에서 괘서사건을 벌였다가 실패했고, 밀려난 후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서인에서 남인들을 몰아낼 기회를 포착한다.

바로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이자, 당시 서인의 거두였던 김석주가 '(탁남의 영수 허적의 서자) 허견이 (남인과 친한) 왕족들과 함께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한 것. (명성왕후는 김육의 차남 김우명의 딸이고 김석주는 김육의 장남 김좌명의 아들이다.) 남인 측에서는 북벌을 주장하는 이들의 힘이 강해 대표적으로 윤휴가 있었다. 이를 위해 18,000명을 무과로 뽑아두고 군사훈련을 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남인과 숙종이 물 밑으로 북벌과 군사 부분에서 협력하는 관계였다면 오히려 서인들이 역풍을 맞고 박살날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었으나, 실제로 허견이 역모를 꾸미고 있던 것은 맞았으며 남인들에 대해 현기증을 느끼고 있던 숙종에게도 절호의 기회였다.

이에 뒤이어 일어난 삼복의 변 등으로 인해 조선 4대환국 중 첫번째 환국인 경신환국이 발생하며 남인 정권은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붕괴되고 다시 서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헌데 정권을 잡은 후 남인들의 처리 문제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졌다. 강경파는 송시열, 김수항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온건파는 윤증,박세채,남구만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남인들의 처리문제 뿐만 아니라 강경파는 민생명분을 중시하고, 온건파는 북방 개척과 실용을 중시하는 등 관심을 가진 분야도 달랐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론이 압도적인 우세였는데 이유인고 하니 김석주의 친구이자 서인의 거두인 김장생의 손자 훈련대장 김익훈이 남인을 일망타진하기 거짓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는데 당시 자신을 구원해준 정치적 구세주 김석주의 비위를 맞춰주던 송시열이 "김익훈이가 내 스승의 손자인데 내가 못도와주고 있으니 부끄럽다."라고 김익훈에 대한 공세를 멈추라는 지시를 은유적으로 내렸으나 오히려 그의 태도에 실망한 젊은 서인들이 김석주의 독주를 저지하며 강력 처벌을 요구한 박세채 등의 태도에 반하여 소론으로 갈피를 잡았고 남구만, 윤증 등도 소론을 지지하였다.

2.2 회니시비(懷尼是非)

이러한 분열경향을 정치적 분야까지 확대시킨 게 회니시비 사건이었다. 윤증의 아버지는 병자호란강화도 수비의 총책임자였던 윤선거였다. 그가 1669년에 사망하자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을 찾아가 아버지의 묘에 쓸 묘갈명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윤증이 아버지가 남긴 편지들을 송시열에게 주면서 문제가 터졌다.

윤선거가 아직 생존 중이던 시절에 윤휴를 가지고 송시열과 논쟁을 벌이다가, 송시열이 격분하자 윤선거가 자신의 생각을 표명하지 않겠다고 해서 일단락된 사건이 있었다. 그 이후로 송시열은 윤선거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정작 남긴 편지글을 보니 윤휴를 여전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걸 알게되자 묘갈명을 성의없이 써서 내줬다. 어떻게 썼는가 하면 "박세채가 이미 잘 써줬는데 내가 또 써줄거나 있냐 ? 복붙."(...) 농담이 아니라 '그의 말을 인용할 뿐, 딱히 더 써주진 않음' 이라고 했다.

윤증이 묘갈명을 받아보고는 '스승님이 무언가 잘못 알고 쓰신 것이다.'고 생각해 다시 부탁했으나 소득이 없었고 송시열의 측근들이 강화도에서 죽겠다고 할때는 언제고 비겁하게 살아 돌아왔다고 하며 윤선거를 욕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윤증은 격분하여 송시열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후 1681년에 윤증은 신유의서 (辛酉擬書)를 통해 '송시열은 주자를 높이 받들고 평생 따랐지만, 정작 자신의 행동은 주자를 따르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송시열의 학문을 통렬하게 까버리면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큰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이 편지는 박세채가 윤증을 말려서 송시열에게 부치진 않았으나, 박세채의 사위이자 송시열의 손자였던 송순석이 몰래 필사해서 송시열에게 전해지게 된다. 송순석 입장에서는 할아버지를 맹비난하는 글이니 그냥 넘기기는 어려웠었던 듯. 송시열은 즉각 과거 자신의 수제자였던 윤증을 크게 질책하는 편지를 보냈고, 윤증도 지지않고 편지를 보내 반박하니 극도로 예절을 차리면서도 상대를 비난하는 문장으로 가득찬 편지 공방이 이어졌고, 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나머지 "너님과는 절교!" 라는 편지를 서로에게 보내게 된다.

2.3 경종 시기

숙종 말기의 서인세력은 노론이 완전히 장악한 시기였다. 장희빈의 죽음 이후에 남인에 대한 온건론을 주장한 소론의 인기가 아주 바닥을 친것이다. 노론의 영수이긴 해도 서인의 거물인 송시열, 김수항 등이 죽음을 당하고 갖은 수모를 당한 노론은 물론 소론까지도 분노에 휩싸여 있었는데 소론의 영수 남구만장희재 등에게 자비를 내리는 한편 정작 같은 서인이자 인현왕후복위를 꾀했던 소론 한중혁 일당은 가혹하게 처벌한 것이 빌미가 되어 수많은 소론들이 노론으로 전향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소론의 재야영수인 박세채마저도 장희재를 처벌하고 남구만은 부끄러운 줄 알라! 고 주장하면서 소론이지만 노론에게도 평가가 좋았던 박세채의 문하생들이 대거 노론으로 전향함으로 노론이 절대 다수가 되었다. 그나마 남구만, 유상운 등 소론계 대신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세자(후일의 경종)가 마음에 안들었던 숙종이 세자 지지파인 소론을 병신처분으로 개발살내면서 소론은 숫적은 물론 정치적으로 열세로 몰리게 된다, 반면에 노론은 김창집, 이이명 등이 삼정승을 차지했고 당시 노론의 우두머리였던 이이명이 숙종과 독대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소론이 지지했던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권 유지를 위해 무리수를 두다가 역관광당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고, 신임옥사목호룡의 변으로 인해 개박살나고 말았다.

2.4 영조~정조 시기

영조는 노론이 지지한 임금이었으나 영조 자신은 탕평을 기치로 정치운영을 해나갔다. 소위 완론 탕평이라고도 불리는 쌍거호대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인좌의 난으로 인해 소론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노론이 정계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는 이인좌의 난 항목을 참조. 그러다 사도세자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임오화변이 터지게 되면서 문제가 굉장히 복잡해지는데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면서 의리를 내세워 노론만이 충신이라고 주장하는 벽파와 왕의 탕평에 동의하는 시파로 분당된다. 벽파, 시파 분당 시기를 헷갈리는 사람이 많은데 처음으로 벽파와 시파가 언급되는 건 정조가 즉위한지 좀 지나서 '의리에 매달리는 편벽한 무리인 벽파'와 '시류에 영합하는 무리인 시파'가 근래에 생겼다는 상소가 확인된다.

벽파가 과거에 척신 홍봉한 등에 맞서던 청명당을 중심으로 한 노론의 (영조 말엽 기준으로) 젊은 선비들이 주도층이 된 반면에 시파는 노론 외에도 소론, 남인 등도 참여한 당파였다. 이 당시에 소론, 남인은 사실상 괴멸한 당파였기 때문에 왕의 정책에 무조건 찬성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었다. 예외적으로 소론 대신 서명선은 벽파이긴 했지만 진짜 드문 케이스고 소론이나 남인이라 하면 100% 시파라 보면 된다.

이상하게 벽파가 정조에 맞선 당파라는 얘기가 많이 퍼져 있다. 주로 이덕일이 이런 류의 책을 내면서 벽파=만악의 근원, 그 전에 벽파의 모태인 서인=만악의 근원임을 주장한다. 벽파의 전신인 청명당은 정조의 왕위 즉위를 적극적으로 도운 당파였고 훗날 벽파의 수장이 되는 김종수는 정조의 스승이자 심복이기도 했다. 정조는 척신들의 방해공작을 저지하고 본인의 왕위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최측근 네 명을 동덕회(同德會)라 이름붙이고 매년 이를 기념하는 모임을 가졌는데, 그 구성원은 홍국영(후일 숙청), 서명선(소론), 정민시(노론 시파), 그리고 김종수(노론 벽파)였다. 또 정조 본인도 학문적으론 벽파에 가까웠다. 탕평 정책 또한 자신의 뜻을 따르는 자들만 포용하는 영조의 정책과 달리 의리를 중시하는 준론까지 파트너로 만드려고 했다. 이는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에서도 드러난다. 정후겸, 홍인한이 숙청되고 경주 김씨, 풍산 홍씨가 쓸려나간 자리는 한때 청명당이라 불리며 척신 정치 청산을 외쳤던 벽파들이 차지한다. 하지만 정조는 사도세자 추숭을 꾀하면서 왕의 말에 고분고분한 시파 세력을 육성했고 준론 탕평을 내세우며 벽파와 시파의 공존을 꾀했지만 정치적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벽파는 반역정당으로 낙인찍힌 소론, 남인과 한 조정에서 일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고 정조 말년에는 김종수 등이 체재공 같은 역적과는 한 하늘 아래에서 살수 없다고 선언하는 등 막장까지 치닫게 된다.

김종수 사후에는 김종수보다도 더 강경파인 심환지가 벽파의 수장이 되었는데 그나마 사도세자 추숭을 꾀하는 정조를 이해하는 빛이라도 내보였던 김종수와는 달리 심환지는 같은 벽파인 서명선조차도 소론이라는 이유로 탄핵하는 골수 강경파라서 여러번 정조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고 거기에 남인은 수장인 채제공 사후에 이가환을 비롯한 핵심인물들이 성장하지 못해서 지리멸렬한 상황이었다. 이에 매우 초조해진 정조는 죽기 전에 5.30 하교(일명 오회연교)를 비롯한 격한 하교를 내놓으며 심환지보고 왜이리 고집불통이냐면서 꾸짖기도 했다. 결국 벽파에게 의리를 포기하게 하는 것을 실패한 정조는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닫고 궁여지책으로 안동 김씨를 끌어들이게 되니 이것이 세도 정치의 서막이다.

3 노론의 분열

3.1 영조 ~ 정조 시기

벽파와 시파의 근간을 보려면 영조 말엽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영조가 홍봉한을 비롯한 노론계 척신 가문을 대대적으로 끌어들여서 조정을 장악한 이후, 사실상 노론은 정치적 의리를 내세운 당파라기보단 왕의 뜻에 충실히 영합하는 척신과 그리고 그 척신들에게 아부하는 탕평당 무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 제동을 거는 무리가 있었으니 김종수, 심환지, 윤시동으로 구성된 청명당의 무리였다. 이들은 "소론, 남인은 역당"이라는 병신년의 의리를 추종하는 세력이었고, 건전한 정치를 추구하여 예로부터 폐단으로 지목되던 척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홍봉한을 축출하기 위한 행보를 밟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힘이 부족했던 이들은 진정한 노론 사대부임을 자처하던 김귀주의 경주 김씨와 손을 잡았다. 경주 김씨도 척신이니까 어찌보면 자기 부정이지만, 김귀주는 자신이 反 홍봉한의 기치를 든 의리의 사대부임을 주장했고 세력이 절실했던 청명당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홍봉한은 빠르게 성장하는 경주 김씨의 세력에 위기를 느끼고, 경주 김씨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는 의미에서 영조에게 아뢰어 경주 김씨를 중용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다. 하지만 영조는 "내 마누라가 어질어서, 그러면 안 되다더라."라면서 거부했고 얼마 후 홍봉한은 천거를 너무 많이 해서 짜증난다는 이유로(…) 파직당한다.

이에 홍봉한은 이를 영조를 옆에서 꼬드긴 경주 김씨의 소행으로 보았고, 얼마 후에 안국동에 사는 홍봉한을 빈정대며 한유의 망국동 망정승 상소가 올라온다. 영조는 짐짓 홍봉한의 편을 들어 한유를 흑산도로 유배보냈다가, 얼마 후에 입장을 돌변하여 홍봉한을 죄주고 한유를 석방한다. 그런데 돌아온 한유는 신이 나서 홍봉한을 까대다가 실수로 사도세자 문제를 꺼냈고, 격노한 영조에 의해 처형당하고 만다.(…)

이후 풍산 홍씨와 경주 김씨는 각각 삼왕손과 정조를 등에 업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 원래는 풍산 홍씨가 정조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입장이었지만, 정조가 노골적으로 외가에 싸늘한 반응을 보이자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을 중심으로 "아무래도 세손이 위험하니 혹시 모른다"고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 은전군, 은신군 쪽에 줄을 대게 되었다. 그러자 경주 김씨 측에서 맹공을 가해 "왕손들이 추종을 외람되이 거느리고 무엄하게 굴었다!!"고 탄핵했고, 분노한 영조는 왕손들을 모조리 귀양보내고 홍봉한과 홍봉한의 눈치를 보던 삼정승까지 잘라버렸다. 이에 고무된 김귀주는 홍봉한의 여러가지 비행을 담아 홍봉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게 역풍이 되고 만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눈치를 챈 영조는 "이것들이 내가 믿는 건 세손과 중전밖에 없는데 이따위 짓을 해?"라고 경주 김씨와 풍산 홍씨를 모두 죄주었다.

둘이 모두 나가떨어진 자리를 화완옹주의 양자, 즉 영조의 수양손자인 정후겸과 손을 잡은 홍인한이 차지하여 둘의 연립 정권이 영조 말엽의 조정을 장악한다. 홍인한은 명백히 反 정조의 입장이었는데, 그렇다고 조선왕조의 특성상 대놓고 세손을 공격할 수는 없으니까, 지극히 지엽적인 의리를 들고 오면서 정조의 대리청정을 방해하는 식으로 세손의 영향력 확대를 방해했다. 이에 정조홍국영, 서명선과 연합하여 청명당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홍인한의 무리를 공격하는 소를 올렸고 이에 분노한 영조가 대리청정을 강행함으로 정조의 대리청정이 시작된다. 3개월 후에 영조가 승하하면서 정조는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정조는 즉위 직후 홍인한과 정후겸을 처형했고 화완옹주를 내쳤다. 그리고 소위 이름도 유명한 준론 탕평을 시행한다. 하지만 정조의 즉위를 도왔던 청명당의 무리는 "역적과는 놀지 못하겠다!!"고 번번이 조정을 파토냈고, 남인 체제공은 그들의 주 공격대상이었다. 청명당 중에서도 강경파였던 심환지는 자신들의 동지이자 입장을 같이하는 서명선조차도 소론이란 이유로 공격했고, 분노한 정조가 이조판서 김종수를 불러 "일을 어떻게 하길래 조정이 이렇게 개판이냐?"라고 혹독하게 질책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어이없는 사건 중 하나인 김하재 사건이 터진다. 김하재는 전 영의정 김양택의 아들로, 이조참판을 하다가 파직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열린 제사에서 김하재는 예방승지에게 쪽지를 건냈는데, 그 쪽지가 왕을 욕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정조는 쪽지를 보고 "이 나라가 그에게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가 이런 짓을 하는가?"하고 분노했고, 글을 보여달라는 요구에도 "이런 글은 여러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하니 불태우는 것이 좋다!!"고 태웠다. 잡혀온 김하재는 "역적 김일경이 죽은 해가 갑진년인데, 올해가 갑진년입니다. 저도 김일경처럼 악명을 떨치면서 죽고 싶어서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다."(…)라는 미친 소리를 지껄였고, 소원대로 김하재는 물론 그의 직계들까지 죄다 처형되고 그의 집터는 파헤쳐져서 연못이 된다.

그런데 몇년 후에 정조의 준론 탕평에 동의하는 신료들을 "시의에 영합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하는 상소가 올라온다. 그러자 정조는 "헐, 이거 그 역적 김하재 놈이 했던 말인데 이게 무슨 망발이냐?"라고 꾸짖었으나, 이때를 즈음해서 구 청명당 계열은 '편벽한 무리'란 뜻의 '벽파'로, 탕평당 계열은 '시의에 영합하는 비루한 무리'란 뜻인 '시파'로 부르게 된다. 홍봉한의 몰락 이후에는 벽파가 우세했으나, 정조의 전형적인 군자의 모습에 감동하여 시파에 규장각 출신의 소장파와 구 김종수 계열 중에서도 왕에게 충성하는 여러 신료들, 동덕회 멤버인 공신 정민시등이 합류했고 역적으로 찍힌 소론, 남인이 대거 합류하게 된다.

3.2 세도정치 시기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벽파인 김한구의 딸이었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어 벽파가 시파를 몰아내고 명실상부하게 집권 정당이 되었으며, 1801년 신유박해로 정조가 등용했던 남인 세력이 개발살나고 이시수, 이병모를 비롯한 소론 세력은 납작 업드려 벽파 2중대 노릇을 하니 조정은 벽파의 뜻대로 굴러갔다. 그러나 1805년 정순왕후 김씨가 죽자 초조해진 벽파의 김달순 등이 자살골을 넣고 김치묵 등이 안동 김씨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탓에 약점을 잡힌 벽파는 시파의 대공세에 밀려 실각했고 김관주 등 핵심인물들이 죽으면서 사라진다. 동시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시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으나 같은 시파에 속해있던 소론남인이 이미 쓸려나간 상황이었으며 살아남은 소론 대신들도 후계자 양성엔 실패, 내지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신유박해에서 살아남았던 소수의 노론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는 세도정치가 전개되었고 붕당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뭐 시파란 계파 자체가 이미 과거의 붕당에 연연하지 않는 판국이고 세도 정치 시작 전에 남인과 벽파가 사이좋게 사라진 이후부턴 붕당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상황이 되긴 했지만.그렇다고 아주 의미가 없는 것은 또 아닌게 안동김씨고 풍양조씨고 일단은 서인 계열이고 그들에게 아부하기 위해 성균관 유생들이 서인 위인들의 배묘 등을 청하는 등 지속적인 아부가 있었다.

4 노론의 역대 영수

  • 송시열 - 효종, 현종, 숙종 초반부 때는 산당의 영수, 노,소론 분당 이후에 기사환국으로 사사되는 숙종 15년까지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시골에 낙향해 있을 때는 그의 수제자인 김수항이 조정에서 노론의 영수 역할을 했다.
  • 권상하 숙종 15년 ~ 경종 - 송시열의 수제자로 숙종말, 경종초의 노론 당수. 말기에는 주로 재야영수격이었다.
  • 이간, 한원진 - 호락논쟁으로 호론 한원진이 패하면서 기호계인 이간이 노론의 중심인물이 된다. 이후의 노론은 그의 문하, 지도자들
  • 조정영수 김창집, 이이명을 필두로 한 4대신. - 권상하 사후 노론의 지도자로 부각된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 이들은 신임옥사에 휘말려 모두 사사.
  • 김귀주(?) 또는 홍봉한(?), 홍인한(?) 영조 46년까지. - 홍인한은 홍봉한이 조정의 영수가 된 시점부터 정치적 당파 노론의 수장이라기보단 노론을 제외한 당파가 전멸한 상태에서 분열된 영조에게 영합하는 탕평파의 영수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기 때문에 애매하다. 이후엔 홍봉한이 과거의 세도를 잃고 경주 김씨와 세력다툼을 벌이면서 뚜렷한 영수가 없다. 사실상 통일된 노론의 수장으론 김재로가 마지막이었고 그 이후로는 탕평당과 청명당이 분할되고 이것이 각각 훗날의 시파와 벽파가 된다.
  • (시파와 벽파의 대립기간)
  • 김종수 - 정조의 사부로 세손 정조를 보호하던 유일한 노론인사. 이때문에 정조의 각별한 지우를 받고 조정내 노론의 당수가 된다.

4.1 벽파의 역대 영수

정순왕후 김씨 사후에 벽파가 대대적으로 숙청되면서 벽파는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벽파의 재야영수였던 김일주는 죽지 않고 유배를 가는 선으로 그쳤으나 끊임없이 순조에게 벽파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순조는 그 상소에 공감을 표시했지만 그렇다고 벽파를 신원해주진 않았고 벽파는 다신 부활하지 못했다.

5 노론의 집권기간

  • 노,소론을 망라한 범 서인 집권기간: 경신환국(1680)~기사환국(1689)
  •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을 중심으로 한 4대신 내각: 병신처분(1716)~신축환국(1721)
  • 민진원, 정호를 중심으로 한 강경한 내각: 영조 즉위(1724)~정미환국(1727)
  • 쌍거호대를 통한 노, 소론 공동집권: 기유처분(1729)~나주괘서사건과 심정연 등의 옥사(1755)
  • 홍봉한을 중심으로 한 노론 단독 집권:영조 31년 옥사(1755)~영조 사망(1776) - 이 시기는 사실 홍봉한, 홍인한, 정후겸, 김귀주를 비롯한 척신들이 중심이 된 시기라서 건전한 당파의 집권 기간은 아니다.
  • 정조 즉위 이후 시파, 남인과의 동거: 정조의 즉위기간(1776~1800)
  • 정순왕후의 수렴첨정으로 인한 벽파 집권, 김관주 내각: (1800~1804)
  • 정순왕후 사후 시파가 집권, 1806년에 벽파는 사실 멸족.(1804~1832)
  • 순조 32년부터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때까지 노론계 가문인 안동 김씨가 조선을 사실상 통치:(1832~1863) - 김조순이야 막후 정치를 즐겼지만 그의 장남 김유근의 졸기에 보면 순조 32년 이후로 군국의 사무를 그가 관장했다고 한다. 기존의 막후 통치가 아니라 전면에 나서서 안동 김씨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정치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흔히 풍양 조씨가 헌종 시대에는 안동 김씨를 능가했다는 설명이 많지만 그들이 안동 김씨에 맞서서 권력을 차지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1. 사실 이덕일 정도면 노론을 증오하여 노론에 대해 황당한 소릴 할지언정 어느 정도 지식 자체는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노론을 친일파와 연결지었지만 되지도 않게 영남과 연결지은 적은 없으며 '영남 노론'이라는 표현도 사용한 적 없다. 영남 노론까지 운운하는 양반들은 대개 그냥 반경상도 감정이 있는 알못들일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