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원왕후

조선의 역대 왕비
숙종
인현왕후
(복위)
숙종
인원왕후
경종
선의왕후
조선의 역대 왕대비
숙종
현렬왕대비
경종
혜순왕대비
영조
경순왕대비
조선의 역대 대왕대비
현종
~숙종
자의대왕대비
영조
혜순대왕대비
순조
예순대왕대비
호칭인원왕후(仁元王后)
시호혜순자경헌렬광선현익강성정덕수창영복융화휘정정운정의장목인원왕후
(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康聖貞德壽昌永福隆化徽靖正運定懿章穆仁元王后)
출생지순화방 사저
사망지창경궁 경춘전
본관경주(慶州)
배우자숙종(肅宗)
아버지경은부원군 김주신
어머니가림부부인 조씨
생몰
기간
음력1687년 9월 29일 ~ 1757년 3월 26일
양력1687년 11월 3일 ~ 1757년 5월 13일
재위
기간
1702년 ~ 1720년

1 개요

조선 19대 왕 숙종의 2번째 계비이다.

2 생애

2.1 간택과 왕비 책봉

1701년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곧바로 간택되어 다음해인 1702년(숙종 28년) 16세 때 왕비에 책봉되었다. 아버지는 경주 김씨 경은부원군 김주신, 어머니는 임천 조씨 조경창의 딸로 가림 부부인 조씨이다. 참고로 이때 숙종의 나이는 41세이런 도둑놈 그래도 65살에 15살 소녀에게 새 장가든 아들보단 낫다, 세자 균(후일의 경종)은 1살 연하인 14세, 연잉군 금(후일의 영조)는 8세였다.

사실 인원왕후의 간택은 당시에도 약간의 논란을 일으켰는데, 숙종의 아직 젊은 나이와 국모(國母)의 자리를 비워 두어서는 안 된다는 당시의 명분상 숙종이 언젠가 새 왕비를 세우는 것 자체는 기정사실이었지만 그 점을 감안해도 시기가 너무 일렀다는게 문제였다. 일반 사가에서도 정실 부인이 죽으면 도의상 3년상은 치르고 새장가를 드는게 관례였고 선조, 인조를 들이면서 이 원칙은 지켰는데, 숙종은 인현왕후가 죽은 지 1년도 안됐는데도 왕비 간택을 서둘렀던 것.[1] 결국 판윤 이인엽이 이 문제로 "간택을 나중에 하든가 정 지금 간택을 해야겠으면 처자를 별궁에 잠깐 모셨다가 즉위시키시던가, 하여튼 인간된 도리로 마누라 상 정도는 제대로 치르고 장가가시죠?" 하고 돌직구상소문을 올리자 역시나 성질대로 발칵 뒤집힌 숙종은 괘씸하다며 그 자리에서 이인엽을 파직시켜 버리고 만다(...)

또한 간택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사실 숙종이 제일 마음에 들어했던 규수는 맹만택[2]의 딸이었다고 한다. 인현왕후, 장희빈, 숙빈 최씨캣파이트에 질려 있었던 숙종은 그 캣파이트를 정치적으로 주도하면서 갖고 논 게 이 인간이라는 건 함정 간택을 하면서 규수의 도덕성과 순종을 특히 강조했는데, 맹만택의 딸은 그런 숙종의 구미에 딱 맞는 규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규수의 외할아버지이자 덕흥대원군의 5대손이었던 이홍일이 평소 사치스러운 생활 습관과 거만한 언행으로 미움받던 인물인 게 결정적인 결함 사유가 되어 결국 맹만택의 딸은 탈락하였고, 대신 간택된 것이 당시 순안 현감이었던 김주신의 딸 인원왕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급하게 결혼한 것치고는 숙종이 어린 인원왕후를 특별히 총애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입궁하자마자 1년 만에 쓰러진 것을 시작으로 숙종이 사망할 때까지 종기, 피부병, 전염병 등 이런 저런 병을 달고 살았는데 그런 탓인지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는 왕비 시절 인원왕후에 대한 기록은 "중궁(中宮)이 무슨무슨 병을 앓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내가 몹시 기쁘다" 라는 숙종의 상투적이고 의례적인 발언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러나 피부병을 핑계로 입궁한지 7년 만에 소박 맞고 경덕궁으로 쫓겨난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와 비교하면 그렇다고 딱히 숙종과 사이가 나빴던 것도 아니고 그냥 존재감 없는 왕비로 있는 듯 없는 듯 무난히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숙종과의 사이에 후사는 없었다.[3]

2.2 경종 시절

1720년 숙종이 사망하고 세자 윤이 경종으로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당시 왕실에는 인원왕후보다 윗대의 대비들이 없었기에 34살의 젊은 나이에 왕실 최고 서열이 된 것. 이때까지만 해도 왕비 시절과 다름없이 그냥 조용히 살아갈 줄 알았으나.. 바로 다음해인 1721년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과 뒤 이은 신임옥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노론과 소론의 아귀다툼이 시작되면서 인원왕후 역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입장상 이 암투를 피할 수 없게 된다.

2.2.1 연잉군 왕세제 책봉

1721년 신왕(新王) 경종은 후사가 없었지만 아직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러나 경종과의 사이에서 후사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17세의 경종비 선의왕후 어씨는 숙종의 총애와 노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세자 시절 경종의 지위를 흔들었던 밉살스러운 시동생 연잉군 대신 소현세자의 현손이자 밀풍군의 장남이며 경종의 9촌 조카인 관석(觀錫)을 경종의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올릴 계획을 세웠다.[4] 이를 듣고 몹시 놀란 노론은 선의왕후의 계획이 더 구체화되기 전에 무리수를 둬서라도 선빵을 치기로 결정, 정언 이정소의 상소를 시작으로 대계(大計) 즉 후사를 정할 것을 경종에게 강력하게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새벽 2시에 김창집, 이건명, 민진원 등 거물급 노론 대신 13명이 창덕궁 시민당으로 몰려와 어서 빨리 국본을 정하자며 왕을 반 윽박지른 것.이쯤 되면 명색이 왕조국가인 나라 맞나 의심스럽다 연잉군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노론 대신들이 요구하는 '국본'은 물론 연잉군이었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그 모든 것을 말 없이 묵묵히 듣고 있던 경종이 결국 굴복하자 김창집 이하는 더 나아가 대비인 인원왕후에게까지 그 증거로서 직접 손으로 쓴 수필을 받아내자며 경종을 들볶았다.[5] 이 때 청을 받은 인원왕후는 경종에게 수필 2장을 내주었는데, 1장은 한문 해서체로 "연잉군", 다른 1장은 한글로 "효종 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의 골육으로는 다만 주상과 연잉군뿐이니, 어찌 딴 뜻이 있겠소"라고 씌여진 것이었다.

날이 밝은 뒤에야 노론 대신들이 하룻밤 사이에 벌인 이 같은 엄청난 사건을 알고 광분한 소론은 뒤늦게 감히 떼거지로 몰려와 왕을 협박한 노론 대신들을 처벌하라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되려 총대를 메고 상소를 올린 소론 유봉휘, 그런 유봉휘를 지원사격한 조태구만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연잉군으로서는 태종 이후 조선왕조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왕세제(王世弟)가 된 것이며, 연잉군을 후사로 삼는 것에 전혀 적극적이지 않았던 경종 대신 연잉군이 왕세제로 즉위하는 데 쐐기를 박는 역할을 담당한 게 인원왕후였던 셈.

이러한 연유로 영조 등극 이후 후한 대접을 받으며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 영조의 등극 이전에 인원왕후는 대비로서 권력을 경종에게 넘기고, 병약한 경종의 후계로 영조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언문교지를 내려 영조를 양자를 삼고 왕세제를 책봉을 하였다. 영조가 왕세제가 되었는데 인원왕후는 영조를 보호하였다. 박상검 사건이 일어나 경종과 왕세제 이금이 불화가 생겼는데, 이를 안 대비 인원왕후는 자교를 내려 처벌을 감행해 위기에 몰린 영조를 구했다. 이후 영조의 왕비였던 정성왕후 서씨와 더불어 영조와 사도세자의 대립이 격화될 때에는 두 사람의 중재를 자처하며 고군분투하기도 했는데, 1757년 같은 해 인원왕후와 정성왕후가 모두 사망한 뒤 제어장치 해제두 부자의 관계는 뭐 다들 알다시피 막장의 막장으로.

2.3 성격

인원왕후는 어려서 일찍 궁에 들어와서 그런지 왕실의 법도를 엄하게 가르쳤다. 일례로 대천록에 따르면 영조의 후궁인 숙의 문씨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에게 함부로 대들었다. 당시 궁중 예법상으로 세자의 어머니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인원왕후는 이를 알고 노발대발하여, 세자와 영빈 앞에서 숙의 문씨의 종아리를 때렸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한중록에서 인원왕후를 "궁중예법을 잘 지킨 사람"이라고 적었다. 혜경궁 홍씨영조옹주들이 같이 있을 때면, 가장 어른인 인원왕후가 나서서 장차 왕비가 될 혜경궁 홍씨를 늘 상석에 앉혔다고 한다. 당시 궁중 위계 질서 중 하나로 윗사람 앞에 앉을 때는 아랫사람이 정면으로 앉지 않고 옆으로 조금 돌아앉아야 한다는 곡좌라는 예법이 있었는데, 인원왕후는 이를 엄격히 지키도록 했다. 화유옹주가 좁은 방에서 어쩔수 없이 법도를 어기자 인원왕후가 엄하게 옹주를 지적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궁중의 예법을 통해서 왕실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인원왕후 사후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이는 세자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한편 유일한 손자인 사도세자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사도세자 역시 할머니 인원왕후를 잘 따랐다. 영조는 인원왕후가 매일 사도세자를 끼고 밥을 먹여서 애가 뚱뚱해졌다고 투덜거릴 정도였다. 만약 인원왕후가 살아 있었더라면,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는 일을 면했을 것이다. 사도세자는 생의 마지막 순간 인원왕후의 빈소인 통명전의 부속 건물에서 머물렀다.

3 미디어에서의 인원왕후

  1. 사실 숙종은 이 점에서 전적이 있다. 첫째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가 사망하고 인현왕후 민씨를 들일 때 역시 1년 만에 새장가를 든 것. 다만 이때는 몸이 약한 숙종이 그때까지도 후사가 없었기에 하루라도 빨리 왕비를 들여야 한다는 이유가 분명했고, 숙종의 모후였던 명성왕후 김씨가 모든 반발을 물리치고 전두지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2. 세종대왕 때의 명신인 맹사성의 후손. 현종의 장녀 명선공주와 약혼하여 숙종의 매형이 될 뻔했지만, 명선공주가 혼례 직전 급사하면서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이후 출사하여 대사간에 이르렀다. 송시열의 직계 문하생으로 노론계열.
  3. 야사에 따르면 임신한 적은 있다고는 하지만 신빙성은 낮다.
  4. 원래 조선 시대 유교 종법은 장유유서의 원칙에 따라 같은 항렬대에 있으면 후사로 삼지 않고 항상 아래 항렬을 후사로 삼았기 때문에, 종손의 남동생은 종가의 뒤를 직접 잇지 않는다. 만일 종손에게는 아들이 없고 종손의 남동생에게 아들이 있다면, 그 자식(종가에게는 조카)를 종가의 양자로 삼아 후사를 잇게 했다. 그런 종법상의 원칙을 따지면 경종의 남동생으로 경종과 항렬이 동일한 연잉군을 경종의 후사로 삼는 것보다는 경종보다 한 항렬 아래인 관석을 경종의 후사로 삼는 선의왕후의 방식이 원칙적으로는 더 타당했다. 노론이 선의왕후가 관석을 양자로 삼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풍문만 듣고도 소스라치게 놀라 급하게 행동을 개시한 것 역시 선의왕후의 계획이 명분상 전혀 문제가 없었기에 더욱 그랬던 점이 컸다. 다만 왕위계승에 있어서는 왕과의 관계가 얼마나 가깝냐도 고려 대상이기 때문에 왕의 동생과 왕의 9촌 조카는 격이 완전히 다른 것도 사실이다. 동생은 후사가 안되는 법이라지만 태종정종의 왕위를 물려받은 것처럼, 명종이 형 인종의 왕위를 자연스럽게 물려받은 것처럼 선례도 있었고. 다만 태종의 경우에는 형의 양아들이 되는 형식으로 후사를 이은 케이스.
  5. 조선 왕실에서 정희왕후, 순원왕후, 신정왕후 등 대비들이 왕실의 어른으로서 왕의 후사를 지명하는 경우는 적지 않았지만 그것은 왕이 별달리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승하해버리는 바람에 대비 외에 의사결정권자가 없을 때나 가능했던 일이었다. 멀쩡한 젊은 왕을 두고 대비에게 허락을 받자는 말이 나오는 자체가 왕을 왕 취급 안한 거나 다름 없는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