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왕후

조선의 역대 왕세제빈
경종
빈궁 어씨
(왕세자빈)
영조
빈궁 서씨
진종
현빈 조씨
(왕세자빈)
조선의 역대 왕비
경종
선의왕후
영조
정성왕후
영조
정순왕후

貞聖王后
1692 ~ 1757

조선 21대 국왕 영조왕비.

성은 서씨이며 본관은 달성.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이며 1692년 태어났다. 1720년 연잉군 이금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에 책봉되고, 1721(경종 1년) 20대 국왕 경종이 이복아우 연잉군 이금을 왕세제로 책봉됨에 따라 세제빈(世弟嬪)이 된다. 1724년 경종의 양위를 받은 남편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식 왕비가 되었다. 남편 영조와의 사이에서 소생은 없으며 창덕궁 관리각에서 66세로 사망하였다. 사망할 때까지 무려 33년을 재위하여 역대 조선 왕비들 중에서 가장 재위 기간이 길었던 왕비였다. 능호는 홍릉(弘陵)이다.

영조와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영조는 아예 정성왕후를 창덕궁으로 보내고 자기는 경희궁에 있으면서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정성왕후의 환갑잔치도 파토났고,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사도세자는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는데 자기는 느릿느릿 와서는 사도세자더러 "니 옷 꼬라지 그게 뭐냐?"라고 꾸중만 했다. 야사에는 첫날밤에 정성왕후가 연잉군 시절의 영조의 질문에 대답을 잘못하는 바람에[1] 그 이후 소박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2] 실록에 의하면 정성왕후의 남동생인 서덕수 때문에 곤경에 처한 일이 있어 그랬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 있다. 서덕수는 다름아닌 경종을 죽이고 영조를 옹립하려는 삼수의 옥의 주모자 중 하나였으며, 영조에게 "저하를 위해 모의하고 있으니 알아 두시라." 라고 발언하기도 했다.[3] 덕분에 영조는 경종 앞에서 폐세제를 자처하며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정성왕후는 영조에게 죽기 14년 전인 1743년부터 통증을 호소했으나 영조는 증 가지고 엄살부린다고 씹어버렸고, 그녀의 용태를 진찰한 의관도 애초에 영조가 자기 마누라 얘기면 들은 척도 안할 것이니 영조를 모시는 내시에게 대신 보고할 정도였다. 그녀가 죽은 후 영조가 죽은 마누라를 팽개치고 화순옹주의 남편인 사위 문상을 가자 대간이 경악하여 결사반대했지만 영조는 반대하는 대간들을 모조리 체차[4]해버리면서까지 강행했다.

다만 죽은 후에도 같은 곳에 묻히지 않고 한양(서울)을 기준으로 서로 정반대 지역에 묻힌 건 영조의 뜻이 아니라 정조정순왕후 김씨을 배려한 탓이었다.[5] 영조는 오히려 정성왕후 옆에 묻히려고 빈자리를 마련했다. 정조는 지금의 원릉 자리에 영조를 장사지냈는데, 이 자리는 원래 효종이 매장되었다가 비가 샐 우려가 있다 해서 천장된 파묘 자리였다.[6] 더군다나 경종을 여기에 장사지내자는 신하들의 주청에 영조는 '국장에 어떻게 파묘 자리를 쓰겠느냐'고 물리쳤던 적도 있었다. 손자에 의해 민간에서도 묏자리로 기피하는 파묘 자리에 잠든 것.[7]

사랑을 받지 못해 단명했을 거라 오해하겠지만 실제론 이분도 장수하신 분이다. 1757년 사망했을 때 그의 나이는 만 65세. 남편에 미치지 못해서 그렇지 당시 기준으로 꽤 장수한 것이며 요즘 기준으로는 일찍 돌아가셨단 소리는 듣기 애매한 수준이다. 자녀를 낳지 못해 후궁 영빈 이씨 소생인 사도세자친자식처럼 돌보지만...
  1. 첫날 밤 영조가 손이 참 곱다며 감탄했는데 무심코 "힘든 일을 하지 않아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영조의 눈 밖에 났다고 한다.
  2. 이것만 봐서는 이게 대체 왜 소박맞을 일인가 싶겠지만 영조에게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마누라의 이 발언을 자기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모욕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 숙빈은 출신도 불분명한 일개 나인 출신으로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외모와는 달리 손마디도 굵고 손이 참 거칠었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연잉군(당시)으로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3. 이 말을 세상에 알린 게 다름아닌 영조다! 즉 이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4. 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
  5. 과거 문정왕후중종장경왕후랑 묻힌 꼴은 못 보겠다고 이장을 했으나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곳이라 무산되었다. 문정왕후나 정순왕후나 남편에 대한 정은 있었는 모양.
  6. 석물이 해를 거르지 않고 기우는 등 최악에 가까운 자리였다.
  7. 물론 이것만으로 정조가 영조에게 불효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할아버지인 영조에 대한 효성 하나는 지극했다. 나중에 경종에게 신하노릇 하기 싫었다는 신하를 보며 "야 임마 선왕께서 경종께 한 우애가 얼만지 알어?" 하며 분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