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칙

위서 「임소두정창전(任蘇杜鄭倉傳)」
임준소칙두기정혼창자

蘇則
(?~223)

삼국시대의 인물이자 위나라의 장수로 자는 문사(文師). 부풍군 무공현 출신이다.

소칙의 가문은 대대로 명가였지만 삼보의 난[1]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지자 북쪽으로 난을 피해 도망가 안정에 집을 빌려 살며 부호 사량을 의지했다.

그러나 사량의 대우가 불충분하였으므로 소칙은 개탄하며 말했다.

천하는 필시 안정될 것이다. 그리 먼 훗날의 일이 아닐 터이다. 반드시 이 군의 태수가 되어 귀환하여 범용한 자들을 몽땅 쓸어버리겠노라.

그리고 태백산으로 들어가 서적으로 시간을 때우는데, 곧 학식과 품행으로 소문이 나 효렴과 무재에 천거되거나 공부에 초빙되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후에 평민의 신분에서 기용되어 주천태수가 되었다가 안정, 무도태수가 되었는데, 재직하는 곳마다 뛰어나다는 소문이 퍼져 특히 안정태수가 되었을 때 사량이 그에게 망명하려고 하자 사자를 보내 해명하면서 예로 그에게 보답을 했다.

215년 조조가 한중을 정벌하러 갈 때 소칙을 보고서 마음에 들어해 소칙은 군대의 선도가 되도록 했으며, 장로를 정벌하자 하변의 저족을 달래 하서길을 개통시키면서 금성태수로 임명된다. 당시 전란으로 인해 관리와 백성은 고향을 떠나 흩어지고 남아있는 백성들도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소칙은 남아있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돌봐 밖으로는 강족과 호족을 불러 감싸주면서 소와 양을 얻어 빈궁한 자와 나이든 사람을 봉양했다.

또한 자신은 백성들과 식량을 나누어 먹자 열 달 사이에 유민들이 모두 돌아와 수천 가구가 되었으며, 금령을 확고히 만들어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처형하거나 잘 따르는 자에게는 상을 주었다. 친히 백성들에게 경작법을 가르쳐 그 해에는 큰 수확을 거둬들였는데, 이 때문에 그에게 돌아와 의탁하는 유민이 나날이 많아졌다.

이월이 농서에서 모반하자 강족과 호족을 인솔해서 그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으며, 220년에 조조가 죽으면서 서평의 국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소칙이 군대를 이끌고 토벌해 이 공으로 호강교위, 관내후에 임명된다. 그러나 국연이 다시 인접한 군과 결탁해 장진, 황화 등이 호응하거나 무위군의 이민족들이 동시에 노략질을 하면서 길이 단절되면서 무위태수 관구흥이 도움을 요청하자 조정에서는 학소위평을 보냈는데, 그러나 적의 세력이 너무 거세 그들은 금성에서 황하를 못 건너고 기다리고 있었다.

소칙은 강족과 학소 등을 만나 상의하면서 말했다.

비록 적군이 강성하지만 최근에 모인지 얼마 안되므로 협박당하여 따르는 자도 있을 것이고, 반드시 마음을 하나로 하고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 사이의 원망하는 틈을 잡아 공격한다면 그들 중에서 착한 사람과 사악한 사람으로 반드시 나뉘게 될 것이고,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우리 군대로 돌아온다면 우리는 증가하게 되어 그들은 손실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군대는 숫자가 증가하는 실리를 얻을 수 있으며, 용기가 배로 증가하는 형세를 얻게 됩니다. 이러한 군대를 이끌고 나가 그들을 토벌하여 격파시키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만일 대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린다면 오랜 시일을 소비하는 지구전이 되고, 착한 사람들이 귀순할 곳이 없으므로 반드시 악한 사람들과 협력하게 될 것입니다. 착한 사람과 사악한 사람이 이미 결합되었는데, 양쪽을 급히 떼어 놓는 것은 형편상 곤란합니다. 비록 지금은 조서에 의한 명령이 있지만 그것을 위반해 시기적절하게 방책을 강구하는 것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학소는 소칙의 견해대로 시행해 무위군을 공격해 무위군의 위급함을 풀어 세 이민족을 항복시켰으며, 관구흥과 함께 장액에 있는 장진을 공격했다. 국연이 말로는 군을 도운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반란을 일으킬 마음을 가져 3천 명의 군사로 소칙을 맞이하자 소칙이 국연을 유인해 회견하자고 한 다음에 그를 죽였으며, 소칙이 이 사실을 국연의 군대에게 알려 모두 달아나게 하면서 학소도 장진을 처형해 황화를 항복시켰다.

하서가 평정되면서 소칙이 금성으로 돌아가자 조정에서 도정후에 봉하면서 식읍 3백호를 하사받았는데, 조비가 옹주자사 장기에게 시험삼아 금성태수로 삼은 소칙이 생각보다 잘해서 관직과 영지를 증가시켜야 할 지의 여부를 물었다. 장기는 금성은 이미 한수가 온갖 노략질과 약탈을 해서 소칙이 올 때 5백호도 없던 것을 이산자를 모아서 천여호를 모아 한수와 함께 악행을 저지르던 강족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 그들의 삼천여 집락이 금성군에 있는 것을 얘기했으며, 또한 국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막아 인질을 보내 항복시키는 것까지 했으니 작위, 영지 뿐만 아니라 기록을 해서 널리 알리도록 해 신하에게 충성을 권면하는데 써야 한다고 주장하자 소칙은 그 보답을 받았다고 한다.

얼마 뒤에 조정으로 돌아와 시중이 되었는데 옛 방식에 따르면 시중이 황제의 기거를 직접 돌보았으므로 속세에서는 시중을 "변기잡이"라 불렸다. 소칙과 같은 군 출신의 길무는 당시 현령을 역임하다 한직으로 좌천되었는데 길무는 소칙을 만났을 때 그를 조소하며 "출사를 하더라도 변기잡이 따위 일은 말도 안된다."라고 하였고 소칙 또한 웃으며 "나는 그대처럼 작은 수레를 모는 고생은 익숙치 않으니 말일세."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변기잡이 노릇 하느라 고생 많으십니다 ㅎㅎ” “티코 끌고 다니는 것보다 이게 더 편하지 뭡니까 ㅎㅎ”

한제가 양위하였음을 듣고 한제가 붕어하였을 것이라 여겨 복상하였으나, 후에 건재함을 듣고 자신의 행동을 멍청하게 여겨 마음으로부터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당시 조식 또한 조조의 환심을 잃은 것을 슬퍼하여 조비가 제위에 오른 날 역시 격렬히 한탄하며 곡을 하였는데 어느 날 문제가 유람을 나왔다가 조식을 떠올리며 분하게 여겨 좌우를 돌아보며

나는 하늘의 명에 응해 황제가 되었는데, 이 일을 듣고 큰 소리로 우는 자가 있다고 들었으니 사람의 마음은 참 알 수 없구려.

이 말을 들은 소칙은 자신이 질문을 받았다고 생각하여 말에서 내려 수염을 곧바로 세워 바른 논리로 대답하려 했는데, 시중 부손이 눈빛으로 제지를 하니 소칙은 그제서야 이해를 하여 행동을 그만두었다.

그래서 소칙은 대답하는 것을 즉시 멈추었으며, 문제가 소칙에게 질문했다.

이전에 주천과 장액을 격파시킨 후 서역에서 사자가 내조하고, 돈황에서는 직경이 1촌이나 되는 큰 진주를 헌상했으니 다시 교역하면 이익을 구할 수 있지 않겠소?

소칙이 대답했다.

폐하께서 교화로 중국을 다스리면서 덕을 사막까지 퍼지게 한다면 이익을 구하지 않으셔도 자연스럽게 올 것입니다. 구하여 얻는다면 진귀하고 할 수 없습니다.

조비는 묵묵히 있었다고 하며, 그의 강직한 성품을 알려주는 일화로는 또 소칙이 시중일 때 동소와 동료였던 동소와의 일화가 있는데 동소가 소칙의 무릎을 베고 자려고 하자 이에 소칙은

나 소칙의 무릎은 아첨하는 자의 베게가 아니오!

라며 그를 밀어냈다.

후에 소칙이 조비를 수행해 사냥을 나갈 때 나무 울타리가 튼튼하지 못해 사슴이 달아나자 조비가 매우 노여워하면서 감독하는 관리들을 전부 죽이려고 하자 소칙이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신이 듣건대, 옛날의 성스러운 왕은 금수로 인해서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당요의 교화를 융성하게 하려고 하시면서 오히려 사냥놀이로 이처럼 많은 관리들을 죽이려고 하시니 우둔한 신하로서는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일입니다. 저는 감히 죽음을 각오하고 사면할 것을 청합니다.

이 말을 들은 조비는 소칙을 충직한 신하라고 추켜세우면서 사면했지만 그를 미워하게 되어 결국 223년에 소칙은 동평상으로 좌천[2]되었다가 결국 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강후라 하고 소칙의 아들 소이가 작위를 계승하였다.

진수가 소칙에 대해 평가하기를, "위엄과 용맹으로 반란을 평정했으며 나라를 다스림에 뛰어나 위엄도 있고 강직했으며, 그의 풍모와 절개는 칭찬할 만하다."고 하였다. 강직하며 악을 증오하고, 항상 급암[3]과 같은 인품을 사모했다고 한다.
  1. 이각, 곽사는 장안 일대에서 3~4년 동안 꾸준히 수탈, 약탈을 일삼았는데, 삼보의 난이라 하면, 특히 195년에 벌어진 '대약탈'을 일컫는다. 자세한건 해당 항목 참조 바람.
  2. 3품인 시중에서 5품의 태수로 임명되었으니 좌천 맞다
  3. 고사 문전작라의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