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 「임소두정창전(任蘇杜鄭倉傳)」 | ||||
임준 | 소칙 | 두기 | 정혼 | 창자 |
任峻
(? ~ 204)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로 자는 백달(伯達). 둔전제의 실행자.
하남 중모 사람으로 동탁의 집권으로 관동 지방은 그의 폭정으로 크게 흔들렸는데, 특히 그의 고향인 중모의 현령 양원이 관직을 버리고 떠나려고 하자 임준이 그런 그를 설득하며 말하길
동탁이 혼란을 주도하고 있으나 천하에 이를 흘겨보지 않는 이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앞서 나서는 자가 없는 것은 그런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세가 부족한 까닭입니다. 명부께서 혹여 그들을 잘 이끈다면 필시 호응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임준의 말에 양원 또한 솔깃해 그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어보니 임준은
지금 관동에는 십여개의 현이 있고, 병 수가 일만보다 덜하지는 않습니다. 혹여 단독으로 하남윤의 직무를 대행하고, 그들을 통괄한다면 어찌 이루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양원은 그 계략을 듣고 곧바로 임준을 주부로 삼고 하남윤의 직무를 대행하고자 하는 상표를 올린다. 그리하여 여러 현의 방비를 굳건히 하고 병력을 일으켰는데, 마침 그 때 조조를 비롯한 반동탁 연합군이 관동에서 거병해 중모의 현경계에 들어온다.
양원 휘하의 사람들이 동탁과 반동탁 연합군 중 누구를 따라야 할지 의견이 분분할 때 오직 임준만이 같은 군 출신의 장분과 더불어 군을 통째로 바쳐 조조에게 귀복해야 한다고 제의했으며, 또한 임준은 일족과 빈객 등을 모아 낭당을 결성해 수백 인을 별도로 모아 조조를 섬기기를 청했다. 이에 조조는 크게 기뻐하면서 상표를 올려 임준을 기도위로 삼으면서 사촌여동생을 아내로 주고, 대단히 관심을 두고 신뢰해 조조가 정벌에 나설 때마다 임준은 항상 본거를 지키면서 군의 보급을 담당했다.
196년에 기근과 메뚜기 떼가 일어났으므로 병량이 부족해 영천 출신의 우림감 조지 등이 둔전을 실시할 것을 건의했는데, 이에 따라 조조는 임준을 전농중랑장으로 삼아 실시하게 하자 수년 후에는 사방에 곡식이 쌓여 창고는 꽉 들어차게 되었다. 그 후 관도대전에서는 군의 무구, 병량의 수송을 담당영원한 셔틀인생했으며, 그 도중에 도적들이 계속 약탈을 하자 임준은 치중 수레 수 천대를 한 부대로 삼아 횡 십열을 나란히 해 행군하면서 2중의 진형을 짜서 이를 경호케 했으므로 도적은 접근할 수 없었다.[1]
군대나 국가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둔전제를 조지가 입안하고 임준이 실행한 덕분으로 조조는 임준의 공적이 다대함을 인해 상표해 도정후로 봉하고 삼백호를 내렸으며, 장수교위로 전임케 했다. 이봐 한호는!
204년에 임준이 죽자 조조는 한참을 눈물을 흘렸으며, 아들 임선이 가문을 이었다가 임선이 죽자 그 자식이 없었으므로 그 봉토는 국가로 환원되었다. 한참 후에 조비도 그의 둔전제에 관한 공을 인정해 거슬러 올라가 공신을 기록케 했는데, 임준에게 성후라는 시호를 내림과 동시에 임준의 둘째 아들 임람을 관내후로 삼았다.
진수가 평하길 관용이 있으면서 온후하며 도량이 있었고, 사물의 이치를 통달해 의견을 진술하면 조조가 이를 높이 평가하는 일이 잦았다. 기근이 있을 때도 벗의 고아를 받아들여 길렀으며, 내친가나 처가에 곤궁한 자가 있으면 급히 이를 처리해 부족함이 없게 했으니 그 신의가 칭찬받았다.
2 미디어 믹스
삼국지 13 |
삼국지 3에서의 능력치는 육지 63/수지 26/무력 67/지력 54/정치 50/매력 60. 3탄 이후 쭉 등장하지 않았다.
100만인의 삼국지에서 재등장했다. 그러나 얼굴 일러스트가 삼국지 12 신무장 얼굴인게 단점이다.
삼국지 13에서 능력치는 67/60/53/41이다. 둔전제를 실행하자고 한 인물치고는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