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 「임소두정창전(任蘇杜鄭倉傳)」 | ||||
임준 | 소칙 | 두기 | 정혼 | 창자 |
倉慈
생몰년도 미상
회남군 출신으로 처음에는 군의 부리로 있다가 건안 연간[1]의 조조가 시작한 둔전이 회남 방면에 수집도위의 직위로 참가해 유민을 모은다.
시간이 지나 조조는 죽고 조비가 즉위한 황초[2] 말년에 창자는 장안의 현령이 되었는데, 청렴하고 검약해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에 모범이 되어 관리와 백성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아꼈다는(!?) 기록이 있다.
조비가 죽고 조예가 즉위한 태화[3] 연간에 서쪽 국경 지대의 돈황태수로 임명되는데,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 돈황이라는 지역의 위치를 보자.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한무제가 건설한 외지 중에 외지로 그 와중에 중원의 동란으로 인해 20년 동안이나 태수가 없었을 정도로 당연히 그 지방은 호족이 권력을 잡고 있던 시점으로 전임태수 윤봉이라는 자는 그런 호족의 권력을 막을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세력가들은 땅이 남아돌지만 백성들은 송곳 꽂을 땅조차 없는 현실을 개혁할 이치를 깨달은 창자는 식구 수에 따라 땅을 분배하고 빈궁한 사람들의 조세를 조정해 그들이 낼 수 있는 만큼만 내게 한다. 또 복잡한 법 문제가 얽혀있어 현에서 처리할 수 없는 내용들은 군으로 보내 처리하도록 하고 자신이 직접 사찰해 죄의 경중을 보고 사형 이외에는 채찍과 곤장으로 처리하니 1년에 판결을 내린 것은 10명 못 되었다고 한다.
또한 서쪽의 이민족들이 공물을 바치고자 할 때 호족들이 이를 막고 그들과 부당한 무역을 해 이민족들의 원망이 많았는데, 창자는 그들을 위로하면서 낙양으로 가고 싶어하는 자들을 위해 통행증을 만들어주고 군으로부터 돌아가려는 자가 있으면 그들을 위해 가치를 평가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예전부터 그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무역 문제를 그들과 현물 거래를 하기도 해서 해결하고 관리와 백성들을 동원해 그들을 호위한다.
이렇게 백성들을 위해 노력하니 한족 뿐만이 아니라 이민족까지 모두 일치해 그의 은덕과 은혜를 칭송했을 정도로 수년 후에 창자는 관리 생활을 하는 도중에 세상을 떠나자 관리와 백성들은 친적을 잃은 것처럼 비통해 했으며, 그의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그의 유상을 생각했다.
특히 그로부터 여러 이득을 받은 서역의 여러 이민족들은 창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무기교위와 장리들이 다스리는 곳으로 모여 장사를 지내고 슬퍼했다. 어떤 이는 칼로 얼굴을 그어서 창자에 대한 감정이 자신의 피처럼 진실됨을 나타냈고, 또 창자를 위해 사당을 세워 공동으로 창자를 제사지냈다.
그 후 창자의 후임으로 온 왕천이나 조기 모두 창자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며, 나중에 황보륭이 온 다음에야 돈황은 그나마 상황이 나아진다.
진수는 그를 정혼과 함께 백성을 구휼함에 있어서 방법이 있어 이들은 모두 위나라 역사상 유명한 태수라고 할 수 있다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