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 유

鈴木 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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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세가의 도약기를 이끈 일등공신이자 체감형 게임, 3D 대전 격투게임의 아버지.
분명 다른 친구들보다 운전을 더 잘하는 사람이, 게임 내에서는 차가 폭발하고 리셋되는 틈에 친구들에게 추월당한다면 그 게임은 잘못 만들어진 것이다. - 스즈키 유

2

2.1 게임 개발자가 되다

스즈키는 1958년, 일본 이와테 현 가마이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린 시절 미술과 음악, 서예 등 예체능 활동과 학업에 전념했고, 오카야마대학 전자물리학과에 진학한 후에는 밴드 기타리스트 활동을 포함한 각종 스포츠와 레저를 즐겼다. 얼핏 게임과는 전혀 연이 없던 모범생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의 유년 시기(6~70년대)는 게임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시대였다. 대신 스즈키는 게임 제작자뿐 아니라 크리에이터로서 필요한 다양한 감성을 키웠다. 자동차나 오토바이 운전에서 얻을 수 있는 스피드 감각, 밴드 활동을 통한 음악적 감각, 미술과 서예 활동을 통한 미적 감각 등은 향후 그의 작품들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후 대학에서 스즈키는 컴퓨터를 처음 접했고, 같은 시기 1세대 전자 게임인 퐁(PONG) 등을 통해 게임이라는 문화를 만났다. 애플 컴퓨터 속에서 돌아가는 다양한 게임을 보며 감명을 받은 스즈키는 게임이야말로 현대 전자기술이 보여줄 수 있는 정점이라는 생각을 했고, 자연스레 프로그래밍에 빠져든다. 이윽고 82년, 대학을 졸업한 스즈키는 프로그래머로 세가에 입사하게 된다.

사실 스즈키는 게임을 딱히 즐기거나 잘 하는 편이 아니었으며, 입사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게임에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대학 시절에 친구들과 게임센터에 가면 항상 지기만 했었다고 한다. 덕분에 그는 기존의 게임 개발자들이 눈치채지 못했던 게임이 가진 단점을 누구보다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바로 합리성과 사실성의 부재였다.[1] 스즈키의 이러한 철학이 고스란히 녹여있는 게임들은 평소 게임을 많이 접하지 않은 일반인들도 납득하며 즐길 수 있고, 게이머들에게는 새로운 방식의 재미를 선사했다. [2]

세가에 입사한 스즈키는 84년, 챔피언 복싱이라는 작품을 통해 게임 개발에 처음 참여하게 된다. 챔피언 복싱은 세가 최초의 가정용 콘솔 SG-1000으로 발매되었고, 이후 아케이드로도 이식된다. 당시 회사에서 페라리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는 건방진 신입사원으로 유명세를 떨칠 정도로 레이싱에 심취해 있었던 스즈키는 자신이 경험한 스포츠카와 오토바이의 속도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레이싱 게임을 제작하길 원했고, 이를 위해 행온의 기획서를 들고 세가 경영진을 찾아갔다.

2.2 AM2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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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온의 컨트롤러.

스즈키가 기획한 행온은 아케이드용 오토바이 레이싱 게임이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기존 게임과 같이 스틱과 버튼으로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바이크를 연상시키는 탑승 기구 위에 올라타 몸을 기울여 가며 실제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것처럼 즐기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었다. 아케이드게임이라면 모니터와 조이패드밖에 없었던 시절, 스즈키의 아이디어는 너무나도 혁명적이었고 위험했다. 당연히 수많은 반대 의견에 부딪혔다.

그러나 체감형 게임에 대한 스즈키의 열정은 대단했다. 끈질긴 설득 끝에 세가 경영진으로부터 개발 허가를 받는 데 성공한 그는 본격적인 행온 개발에 들어갔다. 참고할 만한 자료도 하나 없는 새하얀 눈밭 같은 기로에서, 스즈키는 프로그래밍과 음악, 하드웨어 제작, 테스트, 사업 분야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총괄하며 행온 제작을 주도했다. 몸을 기울이면 와이어가 끊어지거나 브레이크가 고장나고 스프링이 나가는 등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업사와 오토바이 제작사를 뛰어다녔고, 사실적인 운전음을 내기 위해 실제 바이크 엔진을 기기에 달려는 시도도 했다. (물론 이는 배기가스 문제로 인해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게임센터에 기기를 팔 때 스페어 부품까지 패키지 형태로 끼워 주는 등의 사업 모델도 구상했다. 무엇이 최선인 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수많은 시도와 실패를 경험하며 세계 최초의 체감형 게임을 만들어나갔다.

그리고 85년, 스즈키의 지휘 하에 제작된 세계 최초 체감형 아케이드 게임 행온은 일본과 전세계 아케이드 센터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더 이상 게임은 모니터 앞에 앉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을 움직여가며 플레이하는 활동적인 놀이 문화가 되었다. 입사 2년 차가 조금 지난 젊은 프로듀서와 10여명의 스태프, 그리고 불과 몇 개월밖에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만들어낸 성과로서는 놀랄 만큼의 성공이었다. 이전에 없던 역동적이고 체감적인 게임에 전세계 게이머들은 환호했고, 세가는 체감형 아케이드게임 시장의 선구자 타이틀을 얻었다.

스즈키가 행온을 개발하겠다고 할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던 세가 경영진 역시 행온의 성공으로 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다. 결국 세가는 그를 필두로 세가의 기술력을 총 집결시킨 세계 최고 수준의 개발팀을 조직한다. 이름하여 AM2다.

2.3 3D 게임시대를 열다

일세를 풍미했던 AM2의 야자수.

AM2의 정식 명칭은 AM R&D DEP.T#2, 즉 제2 어뮤즈먼트 연구 개발부로 당시 최고 수준의 기술력이 요구되던 아케이드게임 시장을 주 목표로 삼았으며, 기존에 없던 새로운 아케이드게임 개발이 주 임무였다. 80년대 AM2는 스페이스 해리어 (1985)와 아웃런 (1986) 애프터 버너 2 (1987), 파워 드리프트 (1988), 갤럭시 포스 (1989), G-LOC (1990) 등 다양한 채감형 아케이드 게임들을 출시하며 전설을 써내려갔다. 스즈키는 특히 누구보다 빠른 개발 속도, 그리고 빈틈없는 완성도로 유명했다. 일례로 스페이스 해리어는 게임 개발 완료까지 불과 2개월, 세가의 아케이드 게임 제작 기준과 캐비닛 컨트롤 등을 맞추는 데 4개월. 총 반년 만에 제작되었다. 제작 인원도 행온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명확한 방향성과 과감한 개발 전략으로 세가의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내놓았고 수많은 아케이드게임과 버추어 파이터 등에 삽입된 SEGA 로고와 AM2 마크는 고품질 게임의 상징이 되었다. 세가는 일본 게임업계 전체의 1/3 가량을 독식하였다.

G-LOC의 개발을 완료한 90년, 세가가 3D 게임을 위한 기판을 만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스즈키는 학생 시절부터 꿈꿔 온 본격적인 3D 게임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물론 90년 이전에도 3D 게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3D 게임이라면 다수의 2D 이미지에 스프라이트 기법을 적용하여 여러 층의 화면을 하나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폴리곤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고 사실감을 준다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었고, 실제로 AM2가 제작한 수많은 체감형 게임들에도 이러한 제작 기법이 사용되었다. 폴리곤을 활용한 3D 게임은 83년 출시된 최초의 3D게임이라 불리는 아이 로봇 이후 소수가 나왔으나, 하드웨어적 능력 부족으로 인해 다수의 폴리곤을 한 화면에서 부드럽게 처리하지 못함에 따라 3D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는 못했다.

본격적으로 3D 기판을 이용한 폴리곤 게임에 뛰어든 스즈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게임을 만들기에 현재 게임업계의 기술 수준은 다소 낮았다. 세가에서 만든 첫 번째 3D 기판은 1프레임 당 300개의 삼각형 폴리곤만을 지원하는 수준이었고, 이 정도로는 도저히 사실적인 게임을 만들기 어려웠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스즈키는 하드웨어 칩 설계부터 손을 보기 시작했다. 비행기 조종사 교육용으로 사용되는 3D 컴퓨터 기술을 응용하기 위해 비행기 제조사 록히드 마틴과 제휴를 맺고 기판을 제작한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게임 개발을 위해 비행 업계의 기술까지 사용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최첨단 기술을 모아 제작한 기판이 바로 MODEL1이다. 이를 기반으로 스즈키는 폴리곤을 활용한 세가의 첫 3D 게임 버추어 레이싱을 제작했다.

버추어 레이싱의 ‘버추어’ 는 ‘사실상의’, 혹은 ‘거의 …과 다름없는’ 이라는 뜻의 영어단어 ‘Virtual’ 에서 마지막 글자 ‘L’ 을 뺀 것으로, 스즈키가 늘 꿈꿔왔던 실제와 같은 가상 현실을 의미한다. 당초 버추어 레이싱MODEL1 기판의 성능 실험용으로 제작되었으나 내부 평이 너무 좋아 아케이드로 상용화 되었고, 당시 가격으로 40만 엔을 호가하는 16:9 와이드비전 16인치 모니터와 공기압을 이용한 부스, 세미 7단 기어를 사용하는 등 최고급 사양으로 출시되어 아케이드게임의 전반적인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버추어 레이싱은 최대 8대의 기기를 연동해 즐기는 후속작 버추어 포뮬러 등으로 발전했다.

2.4 버추어 파이터의 탄생

아케이드 게임 업계에서 더 이상의 적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히트작을 출시한 스즈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바로 스트리트 파이터 2였다. 버추어 레이싱이 출시된 92년, 전세계 아케이드 게임센터는 캡콤의 스트리트 파이터 2로 한바탕 난리를 겪고 있었다. 수많은 게이머들이 기기 옆에 줄을 서 있었고, 대전격투 특유의 높은 회전율로 인해 금방금방 동전이 쌓였다. 버추어 레이싱 역시 많은 팬들을 양산했지만, 시대의 대세는 대전격투였고 메이저 개발사부터 소규모 개발사까지 매달 수십 개의 대전격투게임이 나왔다. 그러나 그 중 살아남은 것은 극히 일부분이었으며, 그마저도 스트리트 파이터 2의 높은 벽을 넘은 작품은 거의 없었다.

여기서 스즈키는 3D 대전격투게임으로 눈을 돌렸다. 버추어 레이싱에서 얻은 3D 폴리곤 기술을 살린 대전격투게임을 만들면 스트리트 파이터 2와 완전히 다른 매력으로 승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3] 그러나 각면체가 아닌 곡선으로 이루어진 인간을 폴리곤으로 구성하고, 그 인간의 움직임과 상대방과의 상호 작용을 하나의 화면에서 구현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너무나도 어려운 작업이었다. 때문에 3D 폴리곤 격투게임을 만든다는 그의 말에 주변에서 많은 만류가 있었다. 당시 게임업계에서는 3D로 제작된 대전격투게임에 대한 이미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스즈키는 이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많은 애로사항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3D로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만들고 싶었던 스즈키는 완강했으며, 수많은 시도와 설득을 통해 세가 경영진에게 개발비 정도는 뽑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심는데 성공. 3D 대전격투게임 프로젝트 버추어 파이터의 개발을 시작했다.

버추어 파이터에서 스즈키는 스트리트 파이터 2와 다른 방향의 격투를 구현하고 싶었다. 그는 이전부터 ‘게임이 갖춰야 할 첫 번째 요소는 생생한 현실감’ 이라고 생각했으며, 대전격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인간이 공중을 날고 장풍을 쏘는 만화영화가 아니라, 현실 속 중국 무술이나 길거리 싸움, 복싱과 유도 등의 격투기를 재현하고 싶었다. 이에 그는 중국 소림사와 미국 특수부대 등을 찾아가 직접 무술을 배우고, 싸움에 임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철저히 연구했다. 상대의 공격에 얻어맞을 때의 기분을 알기 위해 동료 개발자로 하여금 자신을 때리라고 지시했으며, 나중에는 AM2 동료 제작자들에게도 무술을 배우도록 시켰다. 개발자들의 몸에 생긴 멍 자국이 늘어날수록 게임은 점점 더 사실성을 띄어 갔다는 당시 AM2 개발실 풍경 묘사는, 게임 제작자가 해당 게임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즐겨야만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그의 좌우명을 확실히 대변해준다.

버추어 파이터의 개발을 위해 스즈키는 GPU 평행구조 도입 등을 통해 MODEL1 기판의 하드웨어적 환경도 대폭 개선했다. 버추어 레이싱에 사용되었던 기술 수준에서는 캐릭터와 배경 등에 사용되는 수많은 폴리곤들을 초당 30프레임의 부드러운 동작으로 계산해 나타내기 어려웠다. 스즈키는 이러한 기술적 어려움을 프로그래밍 최적화와 하드웨어의 발전 양쪽에서 활약하며 마침내 두 캐릭터의 부드러운 대전 장면을 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93년 12월, 세계 최초의 3D 대전격투게임인 버추어 파이터가 아케이드 게임센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2.5 버추어 파이터 이후의 3D 폴리곤 아케이드 게임의 시대

2.6 쉔무

  1. 심지어 F-355를 개발할 때는 프로 카레이서들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사실감을 극대화시키고 중력 값과 페달 사용법 등의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 페라리를 십수 대씩 빌려가며 실험을 하는 등 게임 이상의 사실감을 연출하기 위해 애썼다.
  2. 예를 들어 레이싱 게임 행온에서는 당시 레이싱 게임에 무의식적으로 포함되어 있던 차 폭발 등의 비현실적 시스템을 없애고 오로지 플레이어의 운전 기술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도록 했고, 2D 그래픽을 사용한 입체적 슈팅게임 스페이스 해리어에서는 멀리 있는 대상을 쉽게 맞출 수 있도록 자동 미사일 조준 시스템을 도입하여 3D 슈팅은 어려워서 성공하지 못한다는 편견을 깼다. 알고 보면 굉장히 심플한 방법이지만, 이전까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해결책이었다.
  3. 사실 3D 대전격투게임에 대한 생각은 스즈키가 처음 한 것이 아니었으며, 실제로 남코 역시 ‘철권’ 의 프로토타입 개발을 논의하고 있었다. 시대가 3D로의 전환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