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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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文壽(1939년 9월 24일 ~ )
한국의 만화가.

길창덕 화백의 꺼벙이,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과 더불어 신문수 화백의 로봇 찌빠는 한국 명랑만화의 대명사로 통한다.

어려서 동양화를 배우며 홍익대 주최의 미술대회에서 특선으로 입상하는 등 그림을 잘 그리기로 유명한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 미술을 배우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2~3학년때에는 그림에 손을 놓게 되었고 공군사관학교 시험을 치뤘으나 떨어졌다.

공군 3년 복무를 마치고 진로를 고민하다 '그림을 잘 그리니 만화가를 한번 해볼까' 하고 생각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당시 만화를 가르쳐줄 스승도 없었고 교재도 없던 상황에 만화에는 문외한이었던 그는 자기 혼자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만화를 그리며 실력을 키웠는데, 그러다가 고바우로 유명한 김성환 화백의 눈에 띄여 만화잡지에 투고를 한 것으로 만화가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만화가 초보 시절 원고를 가지고 출판사로 가다가 그만 원고를 떨어뜨려서 그것을 지나가던 시장에서 찾느냐 반나절을 헤맸는데 자꾸 왔다갔다하는 그를 본 어느 고추 판매상인이 왜 그러냐고 말을 걸었다. 원고를 떨어뜨렸다고 하자 그 상인이 웃으며 이거 찾냐고 가리킨 게 바로 그 원고. 그 사람이 주워다가 가게 구석에 매달아뒀다고. 40년이 넘었어도 그 가게인 경동 고추상회라는 간판을 잊지못한다고 회고했다.

그 뒤로 도깨비 감투의 엄청난 흥행과 함께 유명한 만화가로 발돋움하게 되었고 이 인기로 인해 소년중앙에 연재를 시작한 것이 그 유명한 로봇 찌빠[1]였다. 이 두 작품의 폭발적인 인기로 70~80년대 엄청난 다작을 하게 되었는데, 문하생도 두지 않았던 터라 밤샘작업을 하기 일쑤였고 주인공 이름까지 헷갈릴정도 였다. 본인은 이 때 돈을 많이 벌긴 했지만 이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다작을 하는 것보단 한두 작품에 열중하였으면 더 좋은 작품이 나왔을 것이라는 회고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로봇 찌빠를 너무 신경쓰지 못한 것도 아쉽다고 했다.[2]

한국 만화가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90년대 후반, 일본만화가 협회와 친선 모임에서 벌어진 갈등에서 큰 소리로 일갈하신 적이 있다. 결국 한국만화가들이 화내면서 모임자리에서 나갔다. 당시 신문 보도에 의하면 일본 만화가 협회 사람들이 한국 만화가들을 무척 대놓고 깠는데 한국 만화는 수준이 낮으니 일본에게 배워야 한다느니~이랬다고,,, 물론 표절 같은 문제로 암울한 것은 사실이지만, 해당 문제를 논하는 공식석상도 아닌 친선 모임에서 굳이 거론하면서 따지고 들 필요가 있었을까. 사실 로봇 찌빠도 일본만화 표절 논란이 있긴 하지만... 자세한 건 로봇 찌빠 항목을 참고할 것.

여담으로 이끼의 만화가 윤태호와 같은 단지에 살며, 포토샵(...) 작업을 할 때 모르는 게 있으면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네이버 캐스트 인터뷰만화가 김진의 인터뷰(웹툰) 이제 신문수가 이끼를, 윤태호가 로봇찌빠 등을 그리는 일만 남았다.
  1. 물론 요즘 시각으로 보자면 시대적 한계가 뚜렷한 작품이긴 하다. 찌빠 항목 참고. 하지만 반공적 요소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금강산 관광을 두고도 어느 주간지에 연재하던 시사만화로 북에 돈 퍼주는 짓이라고 부정적으로 보았으니...
  2.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대부분의 만화가들이 겪는 '캐릭터 고정화'의 함정에서 벗어났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