吉昌悳
1 소개
꺼벙이로 유명한 원로 만화가로 한국의 대표적인 1세대 만화가이자 화백.
2 약력
1930년 1월 10일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출생했고, 코주부로 유명한 만화가인 김용환의 그림과 일본 만화 등을 통해 독학했다. 6.25 전쟁 당시 월남하면서 홀어머니를 놔두고 와야했던 게 한이었다고... 1975년 그의 꿈에서 어머니가 나타나 멀리 작별한 다음, 산으로 올라가는 걸 보았다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같다며 종일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1955년에 <야담과 실화>라는 잡지에 허 서방을 연재하며 만화가로 데뷔하여[1] 1970년부터 만화왕국에 2년간, 소년중앙에 4년간 꺼벙이를 연재하고 1971년부터 여성중앙에 순악질 여사를 18년동안 연재하면서 명랑만화로 인기를 얻었다.
정의의 재동이, 꺼벙이, 순악질여사 등을 통해 4,800회로 국내 최장 연재기록을 세웠다. 순악질 여사는 후일 스핀 오프인 순악질 남편으로 재연재되기도 했으며 영화 및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의 작품 중 '순악질 여사'는 개그우먼 김미화가 쓰리랑 부부라는 개그코너를 할 때 활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이후 여러 매체에 어린이 만화와 시사만화 등을 연재했고, 명랑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만화가로 평가 받았다.[3][4]
현대정공 사보에서 미스터 현정을 연재한 것을 마지막으로 1998년부터 폐암으로 인해 작품 활동을 중지했다. 2009년에 한국만화100주년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했고, 한국만화가협회 고문으로 재직했었다.
3 별세
엄청난 골초였고 결국 이로 인해 폐암으로 작고했다. 같은 실향민이라 친하게 지내던 후배인 윤승운이 회고하길
하루에 2,3갑은 기본이고 심지어 하루에 5갑까지 피운 걸 봤다. 어이구, 선배님 피워도 너무 많이 피우시네. 너무 많이 한 번에 피우면 나쁘다고요! 라는 내 말에 그냥 웃으셨다...
그런데 술은 매우 꺼려했다고 한다. 만화가 모임에서도 한잔 마시고 그만두는게 허다했다고. 2010년 1월 30일 오후 12시 10분 ~ 오후 1시 사이, 폐암으로 12년간 투병 끝에 만 80세 열흘을 일기로 별세.
가족은 부인과 4녀가 있다. 경기도 평촌 한림대 성심병원 특1호실에 빈소가 마련됐고, 2010년 2월 1일 오전 9시에 발인.
인터넷 상에서는 추모 이미지로 꺼벙이 마지막화 장면이 업로드 되기도 했다.
원래 이 장면은 중동 지사로 발령나서 고국을 떠나는 꺼벙이 남매의 마지막 장면이다.
흔히 만화가로 알려졌지만 군인이기도 했고,더불어 훈장까지 받았다. 그래서인지 무덤에는 만화가 길창덕이 아닌 군인 길창덕이라는 이름으로 묘비가 세워졌는데 본인 뜻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만화에서도 반공적 요소가 강했는데(판문점에서 멀리 보이는 북한 군인들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는 어린 주인공들 대사를 봐도....),아무래도 6.25를 겪고 고향에서 강제로 나와야했으며 전쟁에도 참전했던 분이니 더 그런 성향이 깊을 수 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전투를 한 게 아니라 홍보 만화, 도면을 그리는 형식으로 참전했었다. 대담집에도 나온다.
4 작품
- 거북이
- 꺼벙이[5]
- 고집세
- 꼴뚜기
- 나원참여사
- 덜렁이
- 돌석이
- 딸딸이
- 뚝백이
- 뜸북이
- 마음의 소리 -
조석의 웹툰건국우유 부록으로 나온 옴니버스일본 및 구미 동화전래동화 모음집 김형배, 백성민 화백과 공동작업했고 길창덕 화백은 앞부분 나레이션을 그렸다. - 만복이
- 멀건이
- 선달이 여행기 - 대한민국 유람 이야기, 전라도를 끝으로 1부 종결 후 듀크 뉴켐 포에버.
- 순악질남편
- 순악질여사 - 1980년에 동명으로 영화화. 주연 장미희...
- 신판보물섬 - 모험+교훈+명랑을 조합한 만화.
- 온달 일등병
- 여사원 미쓰 희 - 한국화장품 쥬단학 화장품 사보 만화.
- 이웃집돌네 - 명랑만화와는 약간 거리가 있다.
- 정의의 재동이 - 후에 만화일기 시리즈로도 나온바 있음
- 쭉쟁이
- 코메디 홍길동 - 소년중앙 마지막 작품.
- 허 서방
5 수상 경력
- 1999년 '꺼벙이' 부천 만화정보센터 명예의 전당에 헌정
- 2001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공로상
- 2001년 정보통신부 꺼벙이 만화우표 발행
- 2002년 출판만화대상 공로상
- 2003년 한국만화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문화관광부 문화훈장 보관문화훈장
- 2006년 제4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어워드 코믹부문 대상
- 색동회상
6 활동
- 1955년 만화가로 데뷔
- 1961년 5월 25일 ~ 6월 28일 : 대한일보에 '꼴뚜기' 연재
- 1973년 1월1일 ~ 1974년 7월 1일 : 중앙일보에 '나원참 여사' 연재
- 1984년 1월 17일 ~ 1984년 2월 25일 : '거북이' 경향신문에 연재
- '돌석이' 학원에 10년 연재
- '순악질 남편' 주부생활에 10년 연재
- 한국만화100주년위원회 고문
- 한국만화가협회 고문
- 중앙일보 편집 위원
- ↑ 위키백과에서는 1955년 서울신문에 《머지않은 장래의 남녀상》으로 데뷔했다고 나온다. 어느쪽이 정확한지 근거 추가 바람.
- ↑ 김미화는 이 역할로 스타 개그우먼이 되자, 길창덕에게 직접 찾아가 감사인사를 했고, 그는 크게 기뻐하며 그녀에게 '순악질 여사'그림을 손수 직접 그려주고, 싸인까지 해줬다고 한다. 김미화 역시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도 이를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 ↑ 후에 알려지긴 하였지만, 실제로 꺼벙이나 순악질 여사에 나온 많은 에피소드는 일본 만화에서 무단 차용한 것이 꽤 많았다. 당시엔 일본 문물은 공식적으로 수입 금지였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뿐. 독창적인 만화가로 보기는 어렵다. 특히 순악질 여사는 캐릭터 외모부터 에피소드까지 대부분이 표절이었다. 아무리 저작권 개념 없던 시절이라도 대표작이 표절작이었다는 건 아무래도 좀...
- ↑ 길창덕 화백 본인도 이런 과거를 컴플렉스로 여긴 것으로 보인다. 둘리의 아버지 김수정이 새내기였던 시절, 만화가들 모임에서 김수정의 그림을 보더니 차갑게 "자네, 일본 만화 어느 걸 베꼈지?" 이 말에 김수정은 "선생님, 내가 베꼈더라면 당장 만화가를 때려쳤습니다." 이 대답에 길창덕 화백은 웃으면서 "그래,역시 그렇지.자네의 독창적 그림체였지? 미안하네. 한번 확인해보고자 일부러 차갑게 말해보았네." 그를 인정해주었다.
- ↑ 이 꺼벙이의 그림체가, 지강민 씨의 와라!편의점 웹툰 78화에도 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