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top: 5px solid gray;padding:12px;" {{{+1 현재 건설이 취소 또는 무산된 구간입니다.}}} 이하 내용은 참고용으로만 사용하시기 바라며, 잘못된 이해로 발생하는 피해는 나무위키에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1 개요
Cincinnati Subway.
철도교통이 안습인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시의 흑역사. 1920년에 공사를 시작했지만 1925년에 자금이 다 떨어지는 바람에 공사가 중지되었고, 그 상태로 무려 오랜 기간 동안 버려진 미성선이다. 2020년이 되면 착공 100주년을 맞는다(...).
2 꿈은 창대했던 건설 계획
원래 신시내티 시내에는 마이애미-이리 운하(Miami and Erie Canal)가 지나가고 있었다. 오하이오 강과 오대호 중 하나인 이리 호를 연결할 목적으로 건설된 이 운하는 신시내티에서 시작하여 북부의 톨레도 시까지 이어지는 내륙 운하였다. 운하의 시작점이 신시내티였지만 마이애미라는 플로리다주의 도시 이름이 붙은 이유는, 오하이오 강과 미시시피 강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가면 멕시코 만을 통해 마이애미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철도 교통의 발달로 운하가 쇠퇴했고, 신시내티 시내의 운하는 도시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 1856년부터 이미 운하는 적자를 내고 있었고, 1877년에 신시내티 시는 운하를 폐지했다.
당시 철도 교통의 발달로 미국 각 도시에서는 시내교통에 너도나도 지하철이나 고가철도, 노면전차 등을 채택하고 있었다. 신시내티도 이 흐름을 따랐고, 1888년에 신시내티 시가 노면전차를 도입하자 이는 주요 대중교통이 되었다. 그러나 신시내티의 자동차 보급도 증가하면서 교통체증이 시작되었고, 노면전차도 이 교통체증에 휘말려 느린 교통수단으로 전락했다.
도시철도의 필요성을 느낀 신시내티는 폐지된 운하를 메운 뒤 지하에는 지하철을 건설하고, 지상에는 도로를 건설하기로 했다. 1911년에 이 계획이 처음 나왔고, 계획을 몇 번 수정하여 1914년에 노선이 최종 결정되었다. 최종 결정된 노선은 신시내티 도심을 관통하여 외곽에서 지상으로 나와 북부의 교외 지역인 세인트 버나드와 노우드를 거친 후, 다시 남쪽으로 턴하여 동부 교외 지역인 오클리와 하이드 파크를 거쳐 오하이오 강까지 내려온 뒤, 강변을 따라 다시 도심으로 진입하는 순환선이었다. 즉, 신시내티 시내 뿐만 아니라 교외 지역까지 커버하는 일종의 광역철도를 겸하는 지하철로, 신시내티 시내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상으로 건설될 계획이었다. 총 길이는 16.46 마일(약 26.49 km)였다.
3 현실은 시궁창
계획이 완료되자 건설자금 조달이 시작되었다. 건설비용으로 600만 달러가 책정되었고, 시는 이 금액만큼 채권을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주민투표까지 거쳐 1917년 4월 19일에 도시 철도 건설 채권을 발행하기로 이야기가 다 끝났는데,
1차 세계 대전이라는 변수가 생겼다.
채권이 발행되기 직전인 1917년 4월 6일,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모든 채권발행이 중지되었다. 신시내티 도시철도 채권도 여기에 같이 갈려들어가면서 발행이 중지되었다. 돈을 조달할 방법이 없으니 계획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전쟁은 1919년에 끝났지만, 그 사이 건설비용이 1200~1300만 달러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전쟁통에 물가가 오른 것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신시내티 시는 일단 합의된 채권을 발행하여 600만 달러를 확보한 뒤, 1920년에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를 시작한 후 자금을 추가로 조달해서 완성시킬 계획이었다.
1925년까지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시내 지하구조물은 다 묻었고, 역을 만들 구조물도 만들어 놓은 뒤 그 위로는 도로를 덮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와 세인트 버나드와 노우드로 가는 지상 노선도 노반을 닦고 지상 승강장 구조물도 만드는 등 이때까지는 꽤 원활하게 진행하였다.
그리고 올 것이 왔다.
600만 달러의 건설자금이 다 떨어진 것이었다. 시는 추가자금을 조달하려고 하였지만,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자동차 보급률이 더욱 늘어나면서 시민들은 도시철도 건설보다 도로 확충을 더 원했던 탓이었다. 그래도 신시내티 시는 자금을 어떻게든 추가 조달하여 이걸 완공하려고 했지만,
세계 대공황이 터졌다.
1929년에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를 강타한 세계 대공황으로 말미암아 경제가 엉망진창이 되었고, 결국 이 시점에서 신시내티 시는 지하철 건설을 포기했다. 한편 이 지하철 위로 건설 중이었던 도로는 1928년 계획대로 완공되었고,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1936년 신시내티 시는 어떻게든 이걸 되살려 보기 위해 건축설계사들을 모아 의견을 물었다. 결론은 도시철도 이외에는 다른 방안이 없었다. 1939년에는 지하 도로터널로 활용할 생각도 해봤지만 조사 결과 부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결국 1940년, 신시내티 시는 이곳을 노면전차가 다니는 지하철도로 활용하기로 했다. 노면전차가 유발하는 교통체증이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획을 추진하려는 순간,
진주만 공습이 터졌다.
결국 미국이 전시 체제로 전환하면서 1941년에 또다시 모든 계획이 중지되었다. 그리고 지하철 건설 계획은 그대로 흑역사가 되었다.
4 그리고 유적이 되었다
지하철 건설이 끝장난 이후 구조물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지하 역들은 그대로 남아 유령역의 반열에 올랐다. 신시내티 시내에는 레이스 스트리트(Race Street), 리버티 스트리트(Liberty Street), 브라이턴 플레이스(Brighton Place)의 3개 역이, 시외 지상노선에는 마샬 스트리트(Marshall Street), 러들로 애버뉴(Ludlow Avenue), 클리프턴 애버뉴(Clifton Avenue)의 3개 역이 남았다. 지상 노반은 노우드까지 있었지만 클리프턴 애비뉴 이후에는 역 구조물은 건설되지 않았다.
지하 노선은 그대로 남아 있다. 상부에 도로가 지나가기 때문에 철거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상 노선은 1960년대 고속도로와 노우드로 가는 이면 도로로 활용되면서 흔적 자체가 사라졌고, 지상노선에 있던 역도 싸그리 철거되었다. 남아 있는 구간은 레이스 스트리트, 리버티 스트리트, 브라이턴 플레이스의 3개 역과, 이 역을 잇는 터널, 그리고 브라이턴 플레이스에서 지상으로 나가는 구간 까지이다. 그 북부에는 지상 노선에 있던 짧은 터널이 한개 남아 있지만, 흔적이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다.
지하 노선은 지금 당장 공사를 재개해도 될 정도로 관리가 잘 되고 있는데, 상부 도로 때문에 개보수를 꾸준히 했기 때문이다. 이 지하 노선은 1년에 두 번 둘러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5 여러 가지 재활용 방안
어떻게든 이 터널을 살려보려고 여러가지 재활용 방안이 나왔지만, 제대로 시행된 것은 없다.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에는 방공호로 활용할 방안도 있었고 준비도 했지만, 알다시피 미국 본토가 공습을 당하는 그런 일은 없었다.
이후 꽤 여러가지 계획이 나왔다. 1966년에는 포도주 저장고로 활용하려고 했지만 무산, 1970년에는 지하 상가로 활용하려고 했지만 무산, 1980년에는 헐리우드에 영화 촬영 장소로 활용하려는 계획도 나왔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아서 무산. 2002년에는 이 터널을 활용하여 경전철을 놓으려고 했지만 무산되었다.
1950년에 이 터널을 이용해서 대형 수도관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 수도관은 설치한 후 바이패스도 따로 설치해 놨는데, 도시 조례에 지하철 계획이 재시동될 경우 이 수도관은 철거되어야 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각종 재활용 방안들 중에 유일하게 제대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