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대전 | |||
제1차 세계 대전 (1914 ~ 1918) | |||
제2차 세계 대전 (1939 ~ 19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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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그려진 당시 열강 간의 각축 구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국가별 의인화. |
파일:Attachment/GreatPowersAlliances1914.jpg
위 지도에서 연합군이 초록색, 동맹군은 주황색, 연분홍색은 중립국이다.
하루마다 전선 변화를 반영한 제1차 세계 대전 지도 동영상.
제1차 세계 대전 정보 | ||
시기 | 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11일(4년 3개월 14일.) | |
연합군 | 동맹군 | |
사망(군 병력) | 5,525,000명 | 4,386,000명 |
부상(군 병력) | 12,831,500명 | 8,388,000명 |
실종 | 4,121,000명 | 3,629,000명 |
총 사상자 | 22,477,500명 | 16,403,000명 |
연합/동맹군 병력 | |||
연합군 | 동맹군 | ||
러시아 제국 | 12,000,000명 | 독일 제국 | 13,250,000명 |
영국 | 8,841,541명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7,800,000명 |
프랑스 | 8,660,000명 | 오스만 제국 | 2,998,321명 |
이탈리아 왕국 | 5,615,140명 | 불가리아 왕국 | 1,200,000명 |
미국 | 4,743,826명 | ||
루마니아 왕국 | 1,234,000명 | ||
일본 제국 | 800,000명 | ||
세르비아 왕국 | 707,343명 | ||
벨기에 | 380,000명 | ||
그리스 왕국 | 250,000명 | ||
연합군 총 병력 | 42,959,850명 | 동맹군 총 병력 | 25,248,321명 |
목차
1 개요
World War I.1914년 7월 28일[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의 전쟁으로 촉발되어, 1918년 11월 11일까지 전개된 전쟁. 기관총, 참호, 독가스, 비행선 폭격으로 대표되는 전쟁. [2]
일단은 전쟁에 관련된 국가들의 숫자만으로도 35개국이 관련됨으로서 이전의 그 어떤 전쟁보다도 대규모의 전쟁이었으며 전 세계로 전장이 확대된 최초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세계대전(世界大戰)이란 이름이 붙었다. 지금도 'Great War'는 제1차 세계대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다.[3] 물론 18세기 유럽은 늘 전쟁통이었으며 특히 7년 전쟁과 프랑스 혁명의 나폴레옹 전쟁도 대규모에 전장은 컸지만, 빈 회의 이후로 약 100년간 유럽 열강들 간의 전투는 크림전쟁, 보오전쟁, 보불전쟁이 전부라서 더욱 충격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던 당시 사람들은 이 전쟁을 '모든 전쟁을 끝낼 전쟁(War to End All Wars)'이라고도 했다. '이렇게 끔찍한 대 전쟁을 치렀으니 다시는 전쟁 같은 걸 못하겠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현실은 시궁창이였다. 왜 이 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인지 생각해보라..
전 계층이 전쟁에 참가하였으므로 인민전쟁(People's War)이라고도 한다. 전쟁 기간 동안 발생한 전사자는 약 990만 명이다. 또한 학자에 따라서는 이 전쟁에 참가한 국가들 대부분이 제국주의 국가라는 것을 지적해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이라는 제국전쟁(Imperial War)이라고도 부른다. 당장 독일, 영국, 러시아, 오스만, 이탈리아, 일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만 봐도 이미 답은 나온다. 이 전쟁으로 4개나 되는 제국이 몰락하고 나머지 제국들도 역사의 주도권을 사실상 상실하는 등, 제국주의를 끝장낸 전쟁이기도 하다.
일반인이나 밀덕후들 사이에서는 사실 제2차 세계 대전에 비해 인지도나 관심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왜냐하면 2차 세계대전의 경우 전쟁의 규모부터 크고, 2차 세계대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같은 극적인 면들이 많았던 데 비해 1차 세계대전은 전쟁 초기 1년 동안만 마른 전투, 탄넨베르크 전투 등 점령과 방어등이 일어났지 나머지 3년간은 참호에서 밀고 당기고만 하는 소모전의 연속이였기 때문이다.[4]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더욱 더 심한데, 왜냐하면 1차 때는 대부분의 전투가 유럽에서 일어났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독일의 북양함대를 박살내고 고작 칭다오를 빼앗은 것밖에 없었던 반면에 2차 때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아시아에서도 대규모 전쟁이 일어났고, 조선인도 참전했기 때문이다.
다만 전쟁사학자나 국제정치학자들은 2차 대전보다 1차 대전을 더 중요한 연구 주제로 간주한다. 2차 대전은 개전의 원인이나 직전의 국제 구조, 전후 처리 등이 비교적 명확한 전쟁인 데 반해 또라이들 vs 안(덜) 또라이들 1차 대전은 아직까지도 여러 가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여지가 많으며, 그만큼 논쟁도 많고, 또한 최초의 현대적 총력전(total war)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적으로도 중요한 시기였는데, (식민지 지역 같은) 야만에서 벗어난 문명국을 자처하던 유럽이 그 어떤 야만인들보다 더 끔찍한 전쟁을 벌였던 것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는 문명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낙관하던 분위기(벨 에포크 같은)는 문명의 이기들을 이용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통해 박살이 나고 만다.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전쟁에 자원하던 유럽의 젊은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생지옥이었으며, 1차 대전 이후로 유럽 문화는 상당 부분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허나, 그러한 반성에도 상황은 악화되고, 결국은 더욱 더 끔찍하고 잔인하고 충격적인 속편이 종전 21년 후에 일어난다.
군주정을 끝낸 전쟁이라고도 하는데,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에 유럽 바깥의 나라들의 군주정은 식민지배[5]나 내부 소요[6]로 무너지고 있었고 그나마 건재하던 유럽의 군주정들도[7] 이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4개의 제국이 망해 버리고 잠시 세워졌던 핀란드 왕국이나 독일 제국 내부의 수많은 제후국들의 왕정이 폐지되고 10여 개의 신생 공화국이 제국의 폐허 위에 세워지면서 20세기 왕정의 몰락의 신호탄을 울린 전쟁이기도 하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알바니아의 왕정도 폐지되어 버림으로 유럽의 왕정은 서유럽의 일부 국가[8]를 제외하곤 무너진다.[9]
2011년 현지 시각으로 5월 5일 제1차 세계대전 참전자 중 전투를 경험한 최후의 생존자였던 영국인 클로드 스탠리 슐스(14살 때 해군으로 참전)가 호주에서 사망하였다. 기사 친지들의 증언에 의하면 슐스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했기에 평생 동안 전쟁을 혐오했다고 한다. 전투를 경험하지 않은 최후의 생존자 플로렌스 베아트리스 그린(영국 공군 여성 항공대)도 2012년 2월 4일자로 사망했다. 하여 "우리 중 누군가의 경험인 1차 세계대전"은 21세기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여담으로 공식적으로 밝혀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최후의 사망자가 있다. 이름은 조지 로렌스 프라이스(George Lawrence Price)로 캐나다군 소속이었다. 그는 1918년 11월 11일 종전을 단 2분 남기고 독일군 저격수에게 총을 맞아 전사했다. 다만 이날 그 한 명만 죽은 것은 아니고 종전까지 양측 도합 11,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독일군이 예상보다 악착같이 저항했기 때문이다.
2 참전국
오스트리아-헝가리 | 1914년 7월 28일 |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對세르비아 최후통첩이 거부되자 세르비아에다 선전포고를 했다. |
세르비아 | 1914년 7월 28일 |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을 거부하여 침공을 당했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전쟁으로 뛰어들었다. |
러시아 | 1914년 8월 2일 |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같은 슬라브 국가이며 후견국이기도 했던 러시아는 즉시 총동원령을 선포했고, 이를 해제하라는 독일의 요구를 거부하여 독일의 선전포고를 받게된다. |
독일 | 1914년 8월 2일 | 러시아가 세르비아 지원을 위해서 총동원령을 선포하자, 삼국 동맹에 의거하여 동맹국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 위해서 러시아에다 선전포고를 한다. |
프랑스 | 1914년 8월 3일 |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한 독일이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키며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물론, 프랑스도 삼국협상에 의해 대독전 준비를 하고있었다. |
벨기에 | 1914년 8월 3일 |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킨 독일군이 벨기에 영토를 통과하려는 것을 벨기에군이 거부, 끝내 영토통과 승인을 받지 못하게 되자 독일은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고 침략한다. |
영국 | 1914년 8월 4일 | 삼국 협상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지키려던 영국이었지만, 독일이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고 침략을 하자 이를 이유로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
몬테네그로 | 1914년 8월 5일 | 발칸반도 남부의 소왕국이었던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언어, 문화, 종교적 동질성 및 오스트리아에 대한 강한 반감 등으로 인해 세르비아를 지지한다. |
조선(구 대한제국) | 1914년 8월 23일 | 일본의 전쟁수행에 합류 |
일본 | 1914년 8월 23일 |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은 영일동맹의 의무를 들어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그러나 애당초 영일동맹은 러시아의 남진에 대항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저 핑계에 불과했고, 일본은 독일 본토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고립된 독일의 아시아-태평양 식민지를 노리고 참전한 것이다. 실제 일본은 제발 병력 좀 보내달라는 영-프의 요청을 무시하고 강 건너 불구경만 했다. |
오스만 | 1914년 11월 1일 | 영국 해군성 장관 윈스턴 처칠이 오스만이 주문한 신조 전함 2척을 먹튀를 하자 반영여론이 대폭발. 반대로 피할 곳이 없어서 오스만으로 도망친 독일해군 지중해전대 소속 순양전함을 공짜로 준다는 빌헬름 2세의 선언에 친독여론이 대폭발.(…) 그래도 정부는 중립 입장을 견지했으나, 이스마일 엔베르의 독단과 오스만 깃발을 단 독일 해군의 흑해 러시아 항구 공격으로 인해 결국 세계대전에 휩싸이게 된다. |
아시르 이드리드 토후국[10] | 1915년 5월 사이 | 영국의 전쟁수행에 합류 |
이탈리아 | 1915년 5월 23일 | 본래 삼국 동맹의 일원이었으나, 대전 직후에는 그 의무를 내팽개치고(…) 중립을 선언[11]했다. 이후 전황의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연합국의 승리가 유력하다고 판단. 말을 갈아타고 오스트리아에다 선전포고를 한다. |
불가리아 | 1915년 10월 14일 | 본래 친 러시아, 반 오스만 국가였으나 제2차 발칸전쟁의 패배에 따른 원한을 갚기 위해서 세르비아에다 선전포고를 하면서 동맹국에 가담했다. |
네지드 하사 토후국[12] | 1915년 12월 16일 | 영국과의 다린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과 전쟁개시 |
포르투갈 | 1916년 3월 9일 |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 이후 수백여 년간 영국의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포르투갈은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나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16년 2월 말엽부터 자국 령에 들어오거나 항행중인 독일 선박들을 나포하고 화물을 압류했다. 당연히 이에 격분한 독일이 포르투갈에다 선전포고를 한다. |
루마니아 | 1916년 8월 27일 | 3년여 동안 중립을 지켜온 루마니아는 남쪽 불가리아의 위협, 동부전선에서 계속 죽을 쑤는 오스트리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점차 동맹국에 불리해지는 전황 등을 토대로 전리품 획득을 위해서 늦게나마 참전을 결정하고 브루실로프 공세를 틈타서 오스트리아에다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겨우 1년 만에 독일군에게 본토를 다 털리고 항복한다.(…) |
미국 | 1917년 4월 6일 | 유럽에서 싸우든지 말든지 우리는 열심히 돈이나 벌자는 주의에 입각했던 미국이었으나(사실 먼로 독트린때문에 참전할 수도 없었다.) U-Boat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대한 분노, 특히 루시타니아 호 격침으로 인해 국익에 타격을 입어 대독감정이 악화되었으며, 독일이 멕시코를 꼬드겨서 미국을 공격하려 했다는 내용의 짐머만 전보가 공개되자 여론이 대폭발하게 되고 마침내 연합국으로서 참전한다. 다만, 이런 여론악화의 이면에는 그동안 영국과 프랑스에 돈을 빌려주고 외상으로 물건을 제공한 자본가들이 영국 & 프랑스가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다면 빌려준 돈을 못 돌려받을까봐(...) 우려한 것도 상당했다. |
쿠바 | 1917년 4월 7일 | 미국의 전쟁수행에 합류 |
그리스 | 1917년 7월 2일 | 발칸 전선에서 세르비아가 신나게 털리자 그리스는 세르비아가 무너지면 오스트리아가 그리스까지 남하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영국 & 프랑스도 세르비아가 항복을 하게 되면, 발칸 전선의 추축 군이 다른 전선(특히 서부전선)으로 재배치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국가안보가 위험할 것을 우려하여 그리스에 지원을 약속, 그리스도 전쟁에 참전한다. |
태국 | 1917년 7월 22일 |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서부 전선에 1284명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
중국 | 1917년 8월 14일 | 제3혁명과 위안스카이 사망으로 공화국이 된 중국은 독일로부터 빼앗긴 이권을 다시 되찾고, 새 국가 건설에서 세계열강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연합국으로 가담한다.[13] 그러나 독일의 이권은 개전 첫 해에 이미 일본이 꿀꺽한 뒤였고, 중국의 말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
브라질 | 1917년 10월 26일 | 공식적으로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따른 피해, 그에 따른 반독여론 증가였지만…. 브라질은 당시 세계 커피생산량의 90% 이상을 독점하는 커피 플랜테이션 국가였는데, 1차 대전 직후 동맹국에 대한 해상봉쇄로 커피판로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면서 망했어요. 이후, 미국과 영국이 "커피재고 우리가 다 사줄 테니까 독일에다 선전포고해라."라면서 제안을 했고 브라질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
이 외에도 라이베리아, 파나마, 쿠바, 과테말라,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아이티, 온두라스, 에콰도르가 연합국에 속해 있었지만 그냥 미국이 선전포고를 하니까 따라서 하거나 형식상으로만 선전포고를 한 경우로 기껏해야 미국의 전쟁수행에 합류한 수준이다.
위의 목록 외에도 연합국에 합류한 국가들이 더 있는데 대표적으로 안도라, 네팔, 산마리노, 모나코 등이 있는데 제대로된 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나마 네팔의 경우 수십명의 병력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또 영국의 식민지 또는 보호령이었던 캐나다, 인도, 뉴펀들랜드 자치령,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 로디지아, 몰타 등등도 전쟁에 합류했다. 또 국가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의용군이 싸운 곳으로는 아르메니아, 폴란드, 헤자즈 왕국, 체코슬로바키아[14] 등이 있다.
기타 동맹국에는 다르푸르 술탄국, 데르비시 국[15], 자발 샴미르 토후국,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이 있으나 선전포고 시기가 모호하며 폴란드나 리투아니아도 잠시 독일에 의해 점령되어 동맹국이었던 시절은 있으나 어디까지나 강제 점령이었으므로 제외.
2.1 중립국
도중에 중립이 침범 받고 태도를 바꾼 나라들은 기재되지 않는다.
전쟁의 주 무대가 중부 유럽인 만큼 북해와 발트해 너머의 북유럽쪽 국가들이 주로 중립국임을 표방했음을 알 수 있다.
3 원인
- 아래의 내용은 그나마 단순화하면 그렇다는 거고, 사실 전쟁은 크게는 일련의 유럽내 외교적 동맹 변화(세력 균형 변화)에 의해 일어났다. 전쟁의 복잡한 배경, 특히 발칸반도의 배경은 제1차 세계 대전/배경을 참조할 것.
원래는 A&A 1914에 있던 문서
제1차 세계대전의 기원은 팽창된 유럽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유럽의 생산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급성장했다(벨 에포크 시대). 이런 상황에서 산업에 필요한 자원을 얻고 생산된 상품을 판매할 식민지가 필요하게 되어 유럽 각국은 식민지 쟁탈전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일찌감치 산업혁명을 성공시키고 국내 정치가 안정되어 있던 영국은 우위에 서있는 해군력 등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보유했고 프랑스도 여기에 가세했다.
그에 비해 보불전쟁으로 통해 새로 떠오른 신흥 강국 독일 제국은 통일전쟁을 거치면서 영국, 프랑스에 비해 산업과 공업 발달 과정이 늦어졌고 이 때문에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고 보니 이미 알짜배기들은 영국, 프랑스 등이 차지한 상태였다. 결국 독일이 식민지를 획득할 방법은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를 뺏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독일은 기존 식민국가인 영국, 프랑스와 대립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가장 크게 지적되고 있다.[16] 특히 빌헬름 2세는 이를 위해 영국 해군에 맞서 해군 증강 계획을 추진했는데, 이것은 영국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다.[17]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독일과 영국, 프랑스의 대립은 위험수위에 달해있었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계 보어인들과 싸운 보어전쟁에도 보어인들의 배후에 독일이 있었고, 프랑스와는 두 차례에 걸친 모로코 사건으로 대립하는 상황이었다.
한편 식민지와는 인연이 없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범게르만주의와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로 인한 발칸 반도를 둘러싼 갈등도 전쟁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발칸 반도는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하게 되었는데, 독립 이후 발칸 반도의 각국은 영토를 놓고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을 선동하여 지중해로의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와 이를 견제하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불만을 품은 것은 세르비아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를 합병하고 러시아가 독일의 압력으로 이에 굴복하자 (1878년, 1908년)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에 극렬한 적대감을 품게된다. 세르비아의 적대감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세르비아 비밀결사 '검은 손'과 연계된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암살하는 사건으로 발전했고,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방아쇠를 당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바로 사라예보 사건이다. [18]
하지만 이것만으로 대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애당초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과 관련 세르비아 측에 검은 손의 해체 및 처벌과 내정간섭 허용만을 요구했기 때문 (다만, 당시의 오스트리아 외교관의 회고록을 보면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대한 최후통첩을 일부러 받아들이기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독일의 지원이 확실시 된 이후에는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 역시 예견되어 있었고, 그에 대한 핑계가 필요했던 것 뿐.). 진짜 원인은 러시아가 영-불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 그래서 명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노련한 감각으로 유지하던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삼각동맹체제를 빌헬름 2세가 폐기 해버린 것이 독일의 결정적 실책으로 꼽힌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러시아가 동맹을 맺어 포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이가 좋지 않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를 잘 구워삶아 삼각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빌헬름 2세 즉위 후, 노 재상 비스마르크를 강제로 은퇴시키고 외교체제를 개편하면서 러시아를 버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유일한 동맹 파트너로 선택한다. 이에 러시아는 당연히 (서로 고립된) 프랑스와 연합하며(1894년) 독일은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러시아를 함부로 건드리면 X되는 거에요 심지어 이 다음 전쟁에서도 그랬다. 세계사적으로 그건 잘한 일이었지만 영국 역시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충분히 약화되었다고 보고 1907년 동맹을 맺는다.
이에 따라 독일은 이러한 전략적 약점을 전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먼저 프랑스를 치고 나중에 러시아를 손본다!"는 슐리펜 계획을 구상한다. 결국 슐리펜 계획 자체가 1차 대전 개전 원인의 일부가 됐으니 1차 세계대전 개전의 가장 큰 책임은 독일의 빌헬름 2세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무지막지하게 복잡한 인종구조, 그리고 이로 인한 주변국들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대접, 각국 외교사절들의 뻘짓-지금에야 와서 뻘짓이라 부르지만 당대에는 당연했던 행동들도 전쟁의 발발에 큰 원인이 되었다. 학계에선 현재 독일에게 가장 큰 책임을 부가하는 설이 힘을 잃고 있다. 또한 유럽의 국가들은 각국의 해결해야할 문제들-대영제국의 아일랜드 독립운동, 독일의 사회주의의 성장,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인종문제,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한 군의 명예실추, 러시아의 라스푸틴 사건으로 인한 차르 황실의 명예실추...등 이런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으로 전쟁을 택하였다. 그리고 독일이 책임이 제일 크다고 말하기도 뭐한 게, 러시아는 당시 슬라브주의의 바람을 타며 강경하게 동, 남쪽으로 팽창주의를 펴고 있어서... 사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적은 세르비아가 아닌 러시아라고 봐도 될 정도.
4 발발 과정
제1차 세계대전 개전 과정의 막장스러움은 꽤 유명해서 외교사나 국제관계사에도 단골로 소개된다. 그리고 이렇게 했는데도 전쟁이 터진 건 어차피 터질 전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14년 6월 28일 벌어진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초강경모드로 나설 것이라는 것이 국제외교가의 공통된 관측이었다. 그러나 정작 오스트리아 제국은 對세르비아 최후통첩에 1달 가까운 시간을 소모한다. 우선적으로 동맹국 독일의 절대적인 지지가 필요했으며, 두 번째로는 세르비아의 후견국인 러시아와 그 동맹국 프랑스의 태도를 주목해야 했다.
독일의 절대적 지지는 의외로 쉽게 떨어졌다. 빌헬름 2세는 영국과 프랑스가 발칸 문제에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며, 러시아도 최종적으로는 위기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언을 받고 전면적인 오스트리아 지원을 약속하고 3주 일정으로 뱃놀이하러 갔다.(…) 다만 독일의 지지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강경책을 쓰건 유화책을 쓰건 오스트리아가 확고한 결심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태의 직접 당사자는 오스트리아였으니 이 요구는 당연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는 여러 가지 내부 문제로 인해 사라예보 사건 발발 후 10여일이 지난 7월 7일에야 제국 내각이 소집되었고, 여기서 각료들의 출신별로 다른 정치적 입장 때문에 조율에 또 10여 일을 보내 7월 19일에야 통첩문이 완성되었으며 실제로 세르비아 및 유럽 열강에 이 통첩이 통보된 것은 7월 23일이었다. 통첩문이 완성되고도 오스트리아가 통첩 발송을 지연시킨 건, 그 시점에 프랑스 대통령-외무장관이 러시아를 방문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러시아 영토에 있는 도중에 통첩을 발송한다면 러시아-프랑스간의 공동대응이 논의될 시간과 여지를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렇게 세르비아에 전달된 최후통첩은 세르비아의 주권을 침해하는 수많은 조항이 담겨진 내용이었다. 반(反)오스트리아 교육의 금지, 사라예보 사건에 연루된 세르비아 관리들의 체포 및 심문, 오스트리아 관리가 직접 세르비아 영토에 들어가 수사에 참여할 것 등이 그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48시간 내에 통첩에 대한 답문을 요구했다. 이는 사실 오스트리아의 계략도 있었는데 오스트리아는 당시 세르비아 정부 수반들과 세르비아 주재 외교관들의 행적을 감시하고 있었고 세르비아 정부가 대답하기 어렵고 다른 나라와 외교적 협의가 어려운 타이밍에 최후통첩을 들이밀어 세르비아가 제대로 된 대처를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리고 이 최후통첩이 세르비아에 도착했을 때 세르비아 수상은 지방 여행 중이어서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그나마 수도 복귀가 늦어 이미 최후통첩 48시간 중 24시간을 날려먹었다.(…) 거기다 외교적 조언 역할을 해줄 강대국 외교관들도 우연의 일치로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러시아 공사는 사망, 프랑스 공사는 병환으로 각각 공석 중이었으며 후임자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영국 공사는 자리는 지키고 있었지만 역시 병환. 총체적 난국
이 때문에 유럽 열강의 권고는 상당히 늦게 세르비아에 전달되었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한결같이 님이 잘못했네여. 걍 수용하고 살려달라 하셈(…)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비관론이 지배적이던 세르비아 내각은 이와 같은 권고를 받아들여 오스트리아의 통첩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려 했다.
그런데 통첩시한을 몇시간 남기고, 러시아 주재 세르비아 공사로부터 러시아가 우릴 지원한다!는 희소식과 함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실질적인 낭보가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사실 오스트리아가 조금만 더 빨리 행동했어도 러시아가 이런 신속한 결단을 내리긴 어려웠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사라예보 사건 이후 약 1달여를 허비하는 동안 니콜라이 2세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중관료들은 설마 독일이 개입하겠어? 이참에 오스트리아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식으로 결심을 굳혀버린 상태였다. 이에 세르비아 내각은 일제히 궐기하여 대 오스트리아 강경론으로 전환했으나, 러시아가 지원한들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라는 제국을 상대로 딱히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최후통첩 중 오스트리아 관리의 자국 영토 진입을 거부하고 나머지를 수용하기로 하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오스트리아에 통보했다.
하지만 백지수표를 내준 독일을(이것은 독일이 1차 세계대전을 피할 수 없는 원인이 되었다.) 등에 업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의 제안을 무시하고 세르비아의 외교공문 접수를 거부하는 동시에 국교를 단절했다.[19] 7월 28일에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자 러시아는 세르비아의 독립을 보호할 것을 선언하고 7월 31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러시아는 애초 부분 동원령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특히 총동원령을 내리면 독일을 자극할 것이 명백하다는 것은 러시아 역시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 수뇌부들은 "부분 동원령 내리면 오스트리아 놈들은 총동원령 내릴 텐데 그러면 빠르게 군사적인 대응을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참전할 경우 세르비아 전선과 러시아 전선을 동시에 유지해야 하므로 병력면에서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었으니 러시아가 부분 동원령을 내리더라도 오스트리아로서는 총동원령 수준으로 대응해야 했던 게 사실이었다.
거기다 이 시기에는 산업의 발전과 철도의 등장으로 총력전이 가능해지면서 전쟁은 더 빠른 시간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 달리기 경쟁으로 바뀌어갔고 적들이 유리한 곳을 차지하기 전에 먼저 가야 한다는 생각이 당시 유럽의 군 수뇌부 모두를 지배했다. 결국 차르인 니콜라이 2세는 참모들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총동원령을 내렸다.
러시아의 총동원령에 위협을 느낀 독일 제국은 뱃놀이 갔던 카이저가 허겁지겁 베를린으로 돌아오고 수많은 격론 끝에 강경파의 주장대로 이런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두었던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키고 8월 1일 총동원령이 내려진다. 독일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수 있었던 건, 주 러시아 공사 및 독일 본국의 외무 관료들이 너네 1904년 못 봤음?? 러시아는 전쟁 좀만 하면 혁명나서 망함여. 그래서 함부로 전쟁 못하고 설사 하더라도 혁명 때문에 GG칠거임이라고 호언장담을 했고 이를 빌헬름 2세 및 독일 수뇌부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오판의 대가는 혹독했다.[20]
한편, 빌헬름 2세는 양면전쟁의 위험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승리가 불확실한 슐리펜 계획 대신 영국이 보증하는 프랑스의 중립 약속을 받아낼 수 있는 쪽을 선택하여[21], 몰트케에게 "당장 서부로 가는 병력 다 동부로 돌려야한다. 그러면 우리는 러시아만 이기면 승리한다라고 의기양양하게 외쳤으나 몰트케는 폐하, 지금 병력동원 다 시작되고 철도 움직이는 중인데 여기서 병력 이동을 취소하고 동부로 옮기면 혼란에 빠져 재배치되다 자멸할 것 라면서 맞섰다. 빌헬름 2세는 그에게 니 삼촌[22]은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대 프랑스 개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23]
결국, 독일은 8월 1일에는 러시아에, 8월 3일에는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이에 8월 4일에는 프랑스가 의회 만장일치로 독일과의 전쟁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대로 벨기에를 침략하는데 사실 벨기에 침공 직전에도 빌헬름 2세는 다시 한 번 몰트케에게 벨기에 공격하면 영국이 참전한디. 벨기에를 피해서 공격하라라고 명령했으나 몰트케는 안됩니다. 병력집결부터 기동, 전투까지 이미 계획이 짜여 있어서 벨기에가 넘어가지 않는다면 계획이 다 무너집니다라며 펄쩍 뛰어서 어쩔 수 없이 벨기에를 지나가게 된다.
당시, 영국은 느닷없는 발칸의 분쟁이 전 유럽을 휩쓰는 대규모의 전쟁으로 커지려고 하자 기가 질려서 직접적 참전을 꺼리는 중이었으나[24] 영국이 보증한 국제적인 벨기에 중립이 슐리펜 계획에 의한 독일의 침략으로 무시되면서 참전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 결국 독일에 맞서 참전하게 된다.
또한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는 아닐 것 같던 일본도 칭다오 무너트린 거만 빼면 별로 싸운 건 없지만 영일동맹을 핑계로에 근거해서 8월 28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했다.
이로서 당시 주요 열강국가 중 동떨어진 아메리카 대륙에서 혼자 놀고 있는 미국과, 중립을 선언해버린 이탈리아, 그리고 열강은 열강이지만 내부적인 문제가 많아서 참전은 무리라고 평가되던 오스만 제국을 제외하고 모조리 대전에 참가하게 된다. [25]
사실, 인척관계로 얽혀있던 각 참전국의 군주들은 내심 전쟁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높은 수준으로 산업화된 국가들은 이미 군주들이 일일이 통제하기는 어려운 수준으로 복잡해졌으며, 민족주의의 열풍은 군주들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해 있었다. 이미 군주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국가를 제대로 제어할 수 없었고, 오히려 군주들의 어설픈 조치 때문에 내부에서의 모순과 문제점은 더욱 커졌다. 게다가 20세기 초는 유럽에서 민족주의 열풍이 매우 강하게 불던 시기로 전쟁을 피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겁쟁이, 매국노 등으로 몰리기 일쑤였고 심지어 프랑스의 장 조레스처럼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보불전쟁 이후 40년 동안이나 이어진 벨 에포크 시대의 평화 때문에 오히려 전쟁에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실상 따지고 보면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는 전 유럽 규모의 전면전이 백 년간 없었고, 전쟁을 치르더라도 대부분 단기간 내에 좀 치고받고 끝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민족주의와 군국주의 열풍으로 많은 유럽의 젊은이들은 전쟁과 모험에 흥분하고 있었다. 사실 오랫동안 유럽 본토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탓에 유럽인들의 세계관에서 전쟁이란 기껏해야 머나먼 식민지에서 낙후된 토착민들을 압도적으로 우월한 과학 무기로 학살하거나 형식적으로 출정해서 몇 달 대치하다가 슬그머니 집으로 복귀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1910년대 초에 벌어진 몇 차례의 형식적인 대치가 이런 착각을 더욱 부추겼다. 독일과 프랑스가 식민지 대결을 하면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졌는데 그러다 보니 양쪽 청년들 모두 "이번에도 적당히 대치하다가 끝나겠지?"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유럽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전쟁은 한 몇개월 정도 형식적으로 치고받다가 끝날것으로 예상되는 전쟁이었다. "전쟁 그까이거... 그냥 뭐 대~충 한판 제대로 붙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지?"라고 여겼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쟁 발발 초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의 모병소에서 지원병들이 미어터졌던 것도 이렇게 새롭게 터진 전쟁이 그렇게 참혹할지, 오래 갈지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영웅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빠졌으면서도 정작 전쟁영웅이 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일부 기회주의자들을 포함한 얼간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저 형식적으로 싸우는 척만 하고 전쟁에 가담하고 보초만 서는 대치만 하면서 대충 놀다가 귀국한 뒤에 전쟁영웅 행세를 할 수 있었던 매우 좋은 기회였던 셈이다.
물론, 그들 중에서 (살아남은) 일부는 진짜로 전쟁영웅이 되기는 했다. 다만, 가족들을 비롯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죄다 잃고 전장에서 사선을 넘나들어 무려 4년 동안이나 지옥보다도 끔찍한 전쟁 생활을 버텨낸 뒤에야 전쟁영웅이 되어서 문제였지.
5 전쟁의 전개
5.1 참호전과 독가스
제1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것으로 유명한것이 참호전인데 정작 전쟁 발발 시점에 어느 나라에도 참호전이란 교리가 없었으며 슐리펜 계획의 실패 이후 독일이 점령지에 참호를 판 것을 시점으로 양측이 서로 참호를 파고 틀어박히게 됨으로서 참호전이 전개되었다. 게다가 서부전선을 제외한 동부전선이나 발칸, 중동전선에서는 참호전이라고 부를 만한 상황 자체가 없었다. 이쪽에서는 철도와 기병을 동원해 대규모 기동전을 펼치고 있었다. [26] 국내에서 동부전선은 자료나 관심이나 거의 아웃 오브 안중이라 1차 대전의 이미지는 참호전으로 더욱 확고하게 고정되어 버렸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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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군 참호와 상대편 참호 사이를 NO MAN's LAND(무인지대)라고 불렀으며 그 사이에는 살아있는 것이 별로 없었고, 미처 수습되지 못한 병사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전술은 닥치고 돌격하여 전멸 or 승리라는 무식한 전술이 사용되었다. 무기 수준은 근대화되었지만 지휘관들의 머리는 아직 전열보병 시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 은 당연하게도 과장된 이야기이다. 바로 그 지휘관들이 동부전선에서는 보병에 의한 기동전을 잘만 수행했으니까. 사실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양상이 판이하게 달라진 이유는 병력밀도에서 차이나는 게 컸다. 서부전선은 병력밀도가 높아서 병력밀도가 낮은 취약점을 찾을 수 없게 되면서 참호전이라는 일종의 공성전 양상으로 변모한데 비해 동부전선은 거의 흑해에서 발트해까지의 길고도 긴 전선이 형성되다 보니 참호에 의존한 고수방어를 하려다가는 쉽사리 측면돌파를 허용할 수 밖에 없었고 부득이하게 보병과 기병에 의한 기동전 양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전쟁에 동원된 근대적 병기들도 기관총과 철조망, 그리고 간접사격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한 야포의 조합이라는 방어에 적합한 병기들이 주류를 이룬 반면 공격에 적합한 병기들은 대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야 개발이 시도 되었으니... 결국 참호선과 그에 의존한 백병전 양상이 전개되었으며 백병전이 빈번해지면서 중세시대에 볼 법한 냉병기나 갑옷 같은 것을 참호에서 자작하는 사례까지 벌어졌다.
사실 이 참호의 위생상태가 매우 열악했는데, 비가 내리면 땅은 발이 쑥쑥 빠지는 진흙밭으로 변했고, 참호에 고인 빗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가 병사들이 참호족(Trench Foot)이라는 병에 걸리기도 했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포탄과 공격해오는 적에 대한 압박감으로 쉘 쇼크(Shell Shock)라는 일종의 정신공황 상태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서 시체 등을 뜯어먹고 일종의 진화를 한 초거대 서생원급 쥐에게 습격당해서 식량을 빼앗기기도 했으며, 심지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병이 쥐에게 공격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하여간 도저히 사람이 장시간 있을 곳이 아니었기에 일정기간을 두고 로테이션을 하는 방식을 취했던 모양이다. 그나마 독일군의 참호는 전반적으로 연합군의 참호보다 상대적으로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호의 위생 상태는 연합군보다 나았지만, 독일군은 연합군에 비해 보급이 시원찮았던 터라 결국 퀘스트 난이도는 거기서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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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전을 타개하기 위해 숱한 신병기와 전술이 개발되었다. 현대적인 형태의 박격포와 수류탄이 처음 등장했고 현재까지 사용되는 거의 모든 보병전술이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독일은 독가스를 사용해 최초의 화학전을 시도했고 영국은 전차를 발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병기들로도 참호전의 양상을 궁극적으로 타개하지는 못했다. 독가스는 사용조건에 제한이 있는데다 화학전 방호장비가 보급되면서 효력이 없어졌고, 전차는 가장 획기적인 발명이었으나 초기 전차는 성능이 부족한데다 전차 운용에 대한 노하우가 없어서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바람에 참호전을 궁극적으로 타개하는 데는 실패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동안의 전차는 거의 움직이는 엄폐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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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의 군사적 활용의 발전도 두드러진다. 전쟁 초에는 단순히 정찰, 그리고 상대 국민에 대한 테러 목적으로 미미한 폭격이 있었으며, 비행선을 이용한 폭격이 시도되기도 하지만, 공냉식 기관총과 동조식 발사장치의 개발로 1-2정의 기관총을 가진 빠르고 민첩한 전투기가 상대의 기구, 비행선, 정찰기를 격추시켜 나갔으며, 이에 따라 폭격용 비행선은 빠르게 사라지고 보다 빠르고 크기대비 폭장효율이 좋은 대형 폭격기가 등장하여 상대국의 도시를 노리게 된다. 이에 따라 자국 방공망 구축보다 효율적인 항공기 운용을 위해 1918년부터 영국 공군이 세계최초로 결성되었으며, 다른 참전국들도 따라간다. 대전 말 전략폭격의 이론이 영국의 트렌차트, 미국의 미첼, 이탈리아의 두헤에 의해 서서히 탄생하기 시작한다.
대전기간 어느 쪽도 참호전 양상을 타개하는 데 실패하여 무제한 소모전을 벌였다. [28] [29] 결국 국력이 완전히 소진된 독일은 킬 군항에서 발생한 해군의 폭동을 계기로 연합국에 항복한다. 이 때 독일은 계속 밀리는 중이었긴 하지만 프랑스 영토에서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국 영토에 적군을 한 발짝도 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한 패전은 많은 독일 국민들에게 분노와 의심을 안겼으며 일명 내부로부터의 중상이라는 도시전설이 폭넓게 퍼지게 된다. 이것이 후일 히틀러와 파시즘이 일어나는 배경이 된다.
사실 이 당시의 독일은 전선의 병사들도 굶주림에 못 이겨 연합군 참호를 습격해 음식을 약탈해 오고, 후방의 민간인들은 1주일에 감자 한번 구경할 정도로 굶주리고 있다가 마침내 전선과 후방에서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즉 한 1년 정도는 더 버티더라도 패전을 면할 길은 전혀 없었으며, 이런 상태에서 패전하지 않았다면 그걸 바로 기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힌덴부르크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시 계획경제에서 군수물자 생산에 너무 치중하다가 식량 생산 등의 기본적인 요소에서 일이 틀어진 것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경제 전체가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독일의 경우 관료들이 자원을 비교적 유능하게 잘 배분해서 가용한 모든 자원을 완전히 탕진할 때까지 끌고 오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으며, 식량이 풍부하다고 알려진 프랑스도 독일보다 먼저 그러한 상황에 직면한 적이 있는데, 미국의 식량 원조로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이 때 식량 원조분이 4일만 늦게 도착했으면 프랑스 전역에서 식량이 고갈될 상황이었다. (다만 이것은 춘궁기의 일시적인 상황으로, 이는 프랑스가 식량이라는 요소를 경시하다가 문제를 겪은 것을 보여줄 뿐 독일과 달리 프랑스는 전반적인 농업생산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전체적인 인구수와 공업생산력에서 독일에 심각하게 밀렸던 프랑스가 유일하게 비교우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압도적인 농업생산력이었다. 그러나 그런 프랑스조차도 식량을 자급자족할 정도로 충분히 생산하지는 못해서, (전쟁 중이니까) 미국은 1914~24년 사이에 프랑스에 842만 톤이나 되는 식량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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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독일은 경제가 한계에 다다르자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마지막으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쥐어짜서 춘계공세, 루덴도르프 총공세를 펼쳤고, 그것마저 실패로 돌아간 것이 확실해지자 정부가 무너져 버렸던 셈이다. 물론 연합국의 상태도 막장이라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지루한 대치가 이어졌겠지만 미국이 참전했기 때문에 독일은 항복하는 수밖에 길이 없었다.
이렇게 제1차 세계대전은 역사상 첫 세계대전이자 근대 전에서 현대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이 많이 보였다. 이 시기에 국가들은 최신 무기뿐 아니라 구식 대포는 물론이고 군마, 군견, 전서구, 낙타 등 동원할 수 있는 건 다 동원해서 전쟁을 치렀다. 오죽하면 동물원의 코끼리를 징발해서 물자 수송에 쓸 정도였다. 그래서 1차 대전은 지금까지의 모든 전쟁 중에서 가장 많은 동물을 동원한 전쟁으로 기록을 세웠다.
위에 나열된 막장 상황들은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통해 접해볼 수 있다.
6 사용 장비
제1차 세계대전기의 동맹군 보병장비 | |||
개인화기 | 볼트액션 소총 | 게베어 1871, 게베어 1888, 게베어 1898, 만리허 M1893/95, 만리허-쇠나워 | |
반자동소총 / 기관단총 | 젤프스트라더 M1906, 몬드라곤 M1908, 젤프스트라더 M1916, 헬리겔 1915, MP18 | ||
권총 | 독일제 | 보어하르트 C93, 마우저 C96, 드라이제 M1907, 루거 P08, 마우저 M1910/14 | |
오스트리아-헝가리제 | 라스트&가서 M1898, 로트-슈타이어 M1907, 슈타이어 M1912, 프로머 슈토프 | ||
지원화기 | 기관총 | 경기관총 | 마드센 M1902, 호치키스 M1909, MG15nA, MG08/15, MG08/18, MG14/17 |
중기관총 | 호치키스 M1900, 스코다 M1909, 슈바르츠로제 M.07/12, MG08 | ||
대전차화기 | 탕크게베어 M1918 | ||
화염방사기 | 벡셀아파라트 M1917 | ||
박격포 | 그라나트베르퍼 16 |
제1차 세계대전기의 연합군 기갑장비 | ||
전차 | 중전차/지상함 | 리틀 윌리, Mk. I, Mk. II, Mk. III, Mk. IV, Mk. V |
중형전차 | 생 샤몽, 슈나이더 CA1, Mk. A 휘펫, Mk. B, Mk. C 호넷 | |
경전차 | 르노 FT-17, M1917 경전차, 포드 3t 전차 | |
프로토타입 중전차/지상함 | Mk. VI, 피아트 2000, 플라잉 엘레펀트, 차르 탱크, 베즈데코드, 홀트 가스-일렉트릭, FCM 1A | |
자주포 | 건 캐리어 시리즈 | |
탱켓 | 모리스-마르텔 탱켓 | |
장갑차 | 푸조 146, 르노 ED, 오스트로-다임러 장갑차, Ml. IX, 오스틴 장갑차, 롤스로이스 장갑차, 데이빗슨 캐딜락, 킹 장갑차, 란체스터 장갑차, 피어리스 장갑차, 화이트 장갑차, 테르니 장갑차 | |
자주포 | 건 캐리어 Mk. I, 240mm 캐터필러 자주포, M1919 16인치 자주포 |
제1차 세계대전기의 동맹군 기갑장비 | ||
전차 | 중전차 | A7V |
프로토타입 | LK I, LK II, A7V, A7VU, 트레파스바겐, 그로스캄프바겐, PzZug II 장갑열차, 오리온바겐, 오버슐레지엔 | |
노획전차 | Mk. IV, Mk. A 휘펫, FT-17 | |
장갑차 | E-V/4 에르하르트, P.A.1, 오스트로-다임러 장갑차, 란치아 안살도 강갑차, 뷔싱 A5P, 롬펠 장갑차 |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군 항공기 | |||||||||||||||||||||||||||||||||||||||||||||||||||||||||||||||||||||||||||||||||||||||||||||||||||
전투기 | 영국 | 에어코 DH.2, RAF F.E.8, 숍위드 펍, RAF S.E.5, 솝위드 삼엽기, 솝위드 카멜, 솝위드 스나이프 | |||||||||||||||||||||||||||||||||||||||||||||||||||||||||||||||||||||||||||||||||||||||||||||||||
프랑스 | Morane-Saulnier L, Morane-Saulnier N, 뉴포르 시리즈, 스패드 | ||||||||||||||||||||||||||||||||||||||||||||||||||||||||||||||||||||||||||||||||||||||||||||||||||
폭격기 | 경 폭격기 | RAF R.E.8 | |||||||||||||||||||||||||||||||||||||||||||||||||||||||||||||||||||||||||||||||||||||||||||||||||
중 폭격기 | 핸들리 페이지 폭격기 시리즈, 빅커스 비미, 일리야 무로메츠, Caudron G.4,카프로니 시리즈 | ||||||||||||||||||||||||||||||||||||||||||||||||||||||||||||||||||||||||||||||||||||||||||||||||||
기타 항공기 | 샘슨 2 |
제1차 세계대전의 독일 제국군 항공기 | |||||||||||||||||||||||||||||||||||||||||||||||||||||||||||||||||||||||||||||||||||||||||||||||||||
전투기 | 포커 아인데커, 알바트로스 D시리즈, 할버스타트 시리즈, 포커 Dr.1, 지멘스 슈커트 시리즈, 포커 D.VII | ||||||||||||||||||||||||||||||||||||||||||||||||||||||||||||||||||||||||||||||||||||||||||||||||||
폭격기 | 타우베, 고타 G IV, AEG G.IV | ||||||||||||||||||||||||||||||||||||||||||||||||||||||||||||||||||||||||||||||||||||||||||||||||||
기타 항공병기 | 체펠린 비행선 |
7 연표
1914년 | |
날짜 | 사건 |
6월 28일 | 사라예보 사건: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 |
7월 5일 |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의거해 개전시 오스트리아 지지 천명 |
7월 28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
7월 29일 | 러시아 제국, 보호국 세르비아를 위해 총동원령 발동 |
8월 1일 |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에 선전포고 |
8월 3일 | 독일 제국, 프랑스에 선전포고, 벨기에 침공. 슐리펜 계획 발동 |
8월 4일 | 독일 제국, 영국에 선전포고 |
8월 6일 |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선전포고 |
8월 23일 | 독일군, 프랑스 침공 시작 |
8월 23일 | 일본, 영일동맹에 근거해 독일에 선전포고 |
8월 25일 | 일본,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
8월 26일 | 러시아군,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참패 |
9월 6일 | 마른 전투 개시 |
9월 14일 | 마른 전투의 실패로 독일군 총참모장 소 몰트케가 해임되고 에리히 폰 팔켄하인으로 교체. |
10월 18일 | 제1차 이프르 전투 |
10월 28일 | 독일 경순양함 SMS 엠덴, 영국령 페낭 항구 습격 |
10월 29일 | 오스만 제국 독일과의 동맹에 의거해 참전. 서부전선에서는 참호전 양상 |
11월 2일 |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 카프카스 방면 공세 시작 |
11월 6일 | 영국군이 오토만령 이라크에 상륙. |
11월 7일 | 일본, 중국 칭다오에 있는 독일군 기지 함락 |
11월 9일 | 독일 경순양함 SMS 엠덴, 영국군에 격침 |
12월 25일 전후 | 크리스마스 휴전 |
1915년 | |
날짜 | 사건 |
1월 19일 | 제1차 체펠린 호의 런던 공습 |
2월 19일 | 영국군, 다르다넬스에 있는 터키군 요새 폭격 |
4월 25일 | 갈리폴리 전투 시작 |
5월 7일 | 독일, U보트로 영국의 루시타니아호 격침 |
5월 23일 | 이탈리아, 3국 동맹을 깨고 연합국에 참전. 전 동맹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
8월 5일 | 독일군,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의 바르샤바 점령 |
9월 25일 | 루스 전투 개시 |
12월 19일 | 연합국, 갈리폴리에서 후퇴 |
1916년 | |
1월 27일 | 영국, 징병제 개시 (이전까지 지원 병제) |
2월 16일 | 러시아군, 오토만 제국의 에르주룸 점령 |
2월 21일 | 베르됭 전투 시작 |
4월 15일 | 러시아군, 오토만 제국의 트레비존드 점령 |
4월 29일 | 메소포타미아의 영국군, 쿠트에서 오스만군에게 항복 |
5월 31일 | 유틀란트 해전 |
6월 4일 | 러시아군,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에 대해 브루실로프 공세 개시 |
7월 1일 | 솜 전투 시작 |
8월 10일 | 브루실로프 공세 성공적으로 종결 |
8월 29일 | 독일군 총참모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해임되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취임. |
9월 15일 | 영국군, 솜므에서 세계 최초로 전차를 대량으로 운용 |
12월 7일 |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이 됨 |
1917년 | |
2월 1일 | 독일, 무제한 U보트 작전 개시 |
3월 8일 | 러시아에서 2월 혁명 발발, 니콜라이 2세 퇴위. 러시아 제정 붕괴, 임시정부 수립 |
3월 9일 | 러시아군의 카프카스 전선 붕괴. |
3월 11일 | 영국군이 오토만 군을 격파하고 바그다드 점령. 오토만 제국은 페르시아 작전을 중단. |
4월 6일 | 영국의 항구로 향하던 미국 수송선들이 U보트에 격침되자 미국, 독일에 선전포고 |
4월 9일 | 아라스 전투 시작 |
4월 16일 | 프랑스군, 니벨 공세를 시작하나 실패 |
7월 1일 | 러시아 임시정부, 케렌스키 공세를 실시하나 참패 |
7월 6일 | 이프르 부근에서 영국군이 공세를 감행한 메시네 전투 시작 |
7월 31일 | 제3차 이프르 전투 시작 |
10월 24일 | 카포레토 전투. 이탈리아군, 오스트리아군에 참패 |
11월 6일 | 영국군, 서부전선 공세 개시 |
11월 7일 | 러시아에서 10월 혁명, 임시정부 붕괴, 볼셰비키 집권 |
11월 10일 | 이탈리아군은 베네치아에서 30km떨어진 피아베 강까지 퇴각 |
11월 20일 | 캉브레에서 영국군이 전차380대를 투입하여 승리 |
12월 5일 | 러시아-독일, 휴전하고 정전협상에 들어감 |
12월 9일 | 영국군, 오스만 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 점령 |
1918년 | |
2월 18일 | 독일군, 러시아 공격 재개 |
3월 1일 | 독일군, 키예프 점령 |
3월 3일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러시아-독일 정전. 러시아, 연합국에서 공식 탈퇴 |
3월 21일 | 독일군, 솜므에서 대공세 |
3월 29일 | 프랑스, 포슈 원수를 연합국 서부전선 최고사령관에 임명 |
4월 9일 | 독일군,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역에서 공세 시작 |
5월 7일 | 독일-루마니아의 평화 조약 체결 |
7월 15일 | 제2차 마른 전투 개시, 독일군의 전선 붕괴 시작 |
9월 2일 | 독일군, 힌덴부르크 라인으로 퇴각 |
9월 19일 | 영국군, 메기도 전투에서 승리 |
9월 26일 | 프랑스와 미군의 아르곤 공세 시작 |
9월 29일 | 불가리아, 연합국에 항복 |
10월 4일 | 독일, 연합국에 휴전요청 |
10월 17일 | 독일군의 힌덴부르크 라인 붕괴 |
10월 24일 |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개시. 이탈리아, 카포레토 전투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 |
10월 29일 | 킬 군항의 반란 |
10월 30일 | 오스만 제국, 연합국에 항복 |
11월 1일 | 영국군, 모술 점령 |
11월 3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연합국에 항복 |
11월 9일 |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 퇴위 |
11월 11일 | 독일, 연합국과 콩피에뉴 휴전협정Compiegne armistice 체결. 적대행위 공식적 종결 |
1919년 | |
1월 4일 | 파리 강화 회의 열림 |
6월 28일 | 베르사유 조약 체결 |
7월 21일 |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 |
8 결과와 영향
1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의 지도 변화 (붉은색 국경선이 이후) |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아래 베르사유 조약, 트리아농 조약, 세브르 조약 등등이 체결되어 패전국들은 많은 영토가 민족별 국가로 나눠저 독립해버렸다.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연합국과 신생 독립국에 일부 영토를 할양하고 가지고 있던 식민지도 토해내야 했다. 독일 황실과 오스트리아 황실도 무너젔고 오스만 제국도 사실상 멸망했다. 러시아 제국도 혁명으로 붕괴했고 발트3국이나 핀란드,폴란드의 독립도 이루어젔다. 승전국인 프랑스,영국은 식민지를 가지거나 영토를 일부 할양 받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얻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약간의 영토를 할양 받고 터키쪽에 세력을 폈으나 생각외로 많은 이득을 얻지 못해 이에 불만을 품은 국민이 파시즘을 지지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에서 빼앗은 땅을 합쳐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건국하였다. 일본은 독일의 아시아 식민지를 조금 획득하였다.
8.1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More than 60 million soldiers fought in 'The War to End All war'.It ended nothing.
Yet it changed the world forever.
6천만 명 이상의 병사들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에서 싸웠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끝내지 못했다.
다만 세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 배틀필드 1 인트로
제1차 세계대전의 가공할 피해는 대전 직후 대부분의 국가에서 염전사상을 확대시켰다. 전쟁에 대한 가공할 공포는 열강들에게 더 이상의 1차 대전과 같은 재앙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이 염전 풍조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영-불의 독일에 대한 소극적, 유화적 외교시책의 원인이 되었다. 당대의 이러한 염전 풍조 확산은 그 시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제1차 세계대전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평가를 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게, 인류 최악의 미치광이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으로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은 또 다른 거대한 전쟁의 시작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1차 대전보다 더욱 참혹하고 가공할 피해를 주었던 2차 대전도 끝이 났지만, 모든 전쟁이 끝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2차 세계대전까지를 겪은 이후 유럽에서는 수십 년 이상 강국간의 전면전은 생각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생각도 방향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쟁을 끝내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8.2 세계사적 영향
제1차 세계대전은 전쟁 이후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기관총의 유용성과 항공기, 독가스, 전차의 등장, 잠수함의 최초의 전술적 운용 등이 그것이다.
군사학적으로는 승자와 패자에게 완전히 다른 영향을 미쳐 2차 대전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승자인 영국과 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의 전훈을 압도적인 화력과 방어자의 우세로 결론짓고 방어 위주의 군사사상을 도입, 마지노 선 건설 등의 뻘짓을 벌이지만, 독일은 그 우세를 극복하기 위한 기동전 연구에 힘을 써 결국 1940년, 20년 전에는 4년 동안 점령하지 못했던 프랑스를 단 6주 만에 점령하는 쾌거를 달성한다.
또한 제정 러시아와 독일은 정부 자체가 무너져 각각 소련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다시 탄생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어 그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계기로 식민지와의 연결이 끊어지고 경제적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어 제국 해체의 발단이 된다. 특히 프랑스는 인구측면에서도 국가발전의 근간이 되는 성인청년 인구들의 1/3(부상자 포함)을 잃어버렸기때문에 전쟁 후유증은 심대했다. 유일하게 일본만은 피해를 입지 않은 채 태평양(남양군도라고 불렸던 미크로네시아 연방 일대)과 중국에 식민지를 획득함으로서[30]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만들어 놓았다. 페르디낭 포슈 원수는 평화 조약에 대해 이 조약은 기껏해야 20년 휴전 협정에 불과하다고 평가했고 20년 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또한 이 전쟁은 이전 전쟁과는 달리 전쟁으로 인한 인적 자원의 손실을 국가들이 감당하기 힘든 경우였다. 무기체계의 발달, 특히 참호전 양상으로 흘러간 전쟁 양상과 더불어 새롭게 개발된 기관총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은 속도로 병력이 소모되게 하였으며, 이에 반해 나이 많은 고령의 지휘관들의 생각은 나폴레옹 전쟁 시대의 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전의 경우 비교적 엉성한 화망과 포를 뚫고 닥치고 기병 or 보병이 진격해서 적군을 유린하면 되는 반면, 1차대전 초기 전선에서는 기관총에 병력을 돌진시켜야 하는 상황임에도 양군의 지휘관들은 돌격하여 상대의 방어를 분쇄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같은 무모한 돌격명령은 지휘관들의 '공격낭만주의'와 더불어 공격하여 적의 진영을 탈취하고 적병을 사살하는 것을 명예로운 일이자 커다란 전공으로 여기고, 방어선을 굳게 하여 나오지 않는 것은 불명예스러우며, 계집애같은 행위로 여기던 경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어느 나라 군대에서 이 어처구니없는 사고방식을 여전히 유지하는 이들이 있었다 [31]
초기 전선이 고착된 이후에 무모한 돌격은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거 말고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는 게 더 큰 문제. 최근에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지휘관들의 무능력에 대해선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보고 있다. 지휘관들이 전선이 아닌 후방의 성에서 체류하면서 작전 지시를 했던 것도 전선의 크기나 결정해야할 사항 등을 고려할 때 몸을 사렸다기보다는 불가피한 지휘 방식이었다는 것이며 이는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전선 시찰 과정 등에서 일어난 고위급 지휘관들의 사상률 역시 상당해서 몸을 사렸다는 주장 역시 부정확하다고 한다. 1914년 전쟁 초기를 지나서 참호선이 구축되고 전선이 고착될 때까지만 해도 보불전쟁의 전훈으로 구축된 보병 기반의 기동전 교리가 대부분이었지만 전황이 참호전으로 고착되면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교리로는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으며 포격을 비롯해서 적의 진형을 보병의 돌격 이전에 무너뜨려야 된다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하였다. 단지 참호와 철조망으로 구성된 적의 진지에 충분히 빠르고 효과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포격이나 화학전, 공습, 전차의 개발 등 당시에 할수 있는 일은 다 해보았으며 그러한 시행착오의 결과 전쟁발발 당시인 1914년의 보병 기동전술과 전쟁후기의 1917, 1918년에 독일군이 보여준 후티어 전술이나 연합국이 보여준 제병합동전술의 수준은 천지차이였다.
문제는 이러한 학습이 무수한 병사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과 향상된 전술이 효과를 보는 상황에서조차도 높은 손실률 자체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한계는 있었다. 진격조차 못했던 무의미한 희생이 그나마 진격은 가능한 유의미한 희생으로 바뀐 정도. 무엇보다도 매끄러운 작전 연계를 위한 통신 기술, 특히 무선통신 기술이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렀기 때문에 포격으로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는 순간에 보병을 돌격시켜 적을 섬멸한다는 것은 책상 위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실제로는 아군에게 포격을 하는 불상사에 대한 염려로 쌍방의 매끄러운 연계가 거의 부재했다. 존 키건은 자신의 저술에서 과학 기술이 인명을 살상하기에는 충분히 발전하였으나 인명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막기에는 미흡하였다고 하였다. 즉, 세상을 밝게 해줄 것처럼 여겨졌던 과학 기술이 인간을 죽이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었지만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 기관총이나 가스탄 같은 병기가 너무도 쉽게 인명을 살상하는 반면에 철도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계속된 징병을 통해 전선의 병력을 바로바로 보충하였기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도 전선이 유지되었다. 결국 동부 전선이 어느정도 정리되고 독일이 서부 전선에 총력을 다 했을 때에도 발전된 전술에 힘입어 전선의 돌파는 가능했지만 그 돌파를 확대시킬 역량은 없었고, 이후 제병합동전술로 독일군을 밀어붙이는 연합국에 대항하여 더는 싸울 수 없을 만큼 자원이 소모된 이후에야 전쟁이 끝나게 된다.
이런 시체의 산을 손쉽게 쌓아올리는 지옥도 같은 전쟁 양상은 이전 과학기술이 평화로운 풍경 하에 발전하던 시절에 품었던 벨 에포크적인 과학과 이성으로 가득 찬 희망차고 밝은 미래상의 붕괴를 불러오고 그 과학이 미치광이 같은 전쟁 상황에 동조하고 도리어 더 악화시켰다는 점에서 과학에 대한 회의주의적 시각을 불러오게 되었다. 반면에 당시의 미흡한 군사 기술에 대한 연구는 어마어마하게 발전하였으며 이후 이어지는 2차 세계대전에서 일말의 희망마저 꺾이게 된다.
여기에 또다른 문명의 발달인 국가 관리 체계의 발달과 민족주의에 의거한 국가 총력전으로의 변화는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대량의 인원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는 앞서의 요인 등으로 도리어 인적 손실을 극대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특히 양심적이고 지성을 갖추었던 젊은 세대의 20~30대 엘리트들이 굉장히 큰 희생을 치렀다. 엘리트로써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기에 능력여하를 불문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앞장서서 전장에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다수가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며, 살아 돌아온 사람들도 상당수가 장애를 입거나 PTSD 상태가 되었다. 영국의 이튼 수상 같은 경우 이 시기 입은 부상으로 평생을 고통스러워했으며, 명문대인 영국 캠브리지나 옥스포드의 전사자 비율이 엄청나게 높았다고 한다. 당시 귀족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회계층의 참전자수 대비 전사자수 비율은 8:1이었는데 귀족층은 5:1이었다. 다섯명 중 한명은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대부분의 젊은 엘리트들이 초급장교로서 공격의 선두에 서야만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참고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2~30대 남자 석사나 박사가 소위, 중위 계급장 달고 나라를 위해 군에 입대했다가 되도 않는 닥돌전략으로 1/3이, 철조망에 막히고, 기관총과 가스탄에 맞아 전사했고, 또 다른 1/3이 중추신경계 손상, 실명, 사지의 일부 절단 등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고 생각해보자.
엄청난 소모전이 끼친 또 하나의 영향으로는 바로 진정한 귀족계층의 몰락. 당시 많은 귀족들이 하급 장교로 참전하였는데 위와같은 끔찍한 소모전을 거치면서 전멸하는 바람에 귀족의 대가 끊어져버렸다. 소위 프랑스 혁명으로 구체제가 몰락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이후도 구체제의 잔재가 꽤나 많이 남아 있었다. 허나 이 전쟁으로 인해서 정말 다 죽어버려서 비로소 진정한 구체제의 종말을 가져왔다. 당연히 과거 지배계층이 몰락하는 것으로 전통적인 제국 또한 종언을 맞이하게 되었다. 여기에 동반하여 민주주의 사회가 발아하게 되었다. 위의 계층이 전멸하는 것과 동시에 후방에서 갖은 군수물자 동원을 통해 대중들의 발언권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여성들이 참정권을 획득한 것이다. [32] 전쟁동안 여성들이 남성들을 대신해서 공장에서 일했는데 이것이 여성들의 사회적 발언권을 키운 것이다.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스스로의 권리와 힘에 대해서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점 역시 대중들을 선동하는 형태인 파시즘의 탄생을 가져왔고, 이 파시즘 발흥의 맥락에서 나치즘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 나치즘은 다시 한번 극단적인 팽창주의를 지향하며 2차 세계대전이라는 더 끔찍하고 더 참혹한 전쟁이 터지게된다.
이렇게 국민들을 총알받이로 희생시켰으니 국가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공산주의 계열에서는 국가의 지배세력들이 자본주의의 논리로 움직이므로 국가를 전복하고 공산 국가를 만들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로 살자고 주장했고, 자유주의자들은 국민의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극이 있으면 또 다른 극이 있듯 이와는 반대로 국가에게 모든 권력을 실어주고 국민들을 국가가 시키는 대로 총 단결하고 자신의 국가와 민족만 잘 살자는 극단적인 전체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했고, 전쟁에서 지면 모든 걸 잃지만 이기면 모든 걸 보상받을 수 있으니 군대가 국정을 좌우하는 군국주의가 패전국은 물론이고 일부 승전국에서도 보여 졌다. 20세기 사상의 대립과 충돌의 시작이다.
한편으로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들이 이 전쟁 이후 독립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종전 전에 국회에서 공표한 14개조 평화원칙 Fourteen Points에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되어 민족의 운명은 민족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사상이 널리퍼지게되면서 대한민국을 포함한 식민지 내의 독립운동에 큰 불을 지폈다. 또한 소련의 레닌은 이 전쟁을 극단적 자본주의인 제국주의적 전쟁으로 규정하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여러 나라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게 되는데 이런 공산권의 지지 또한 혁명에 불씨를 당기는데 일조하게 된다. 식민지를 전세계에 가지고 있던 제국주의 국가들도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해외 영토를 그나마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이마저도 유지시킬 힘이 남아있지 않아 전부 독립시키게 된다.
지금도 엄밀하게 말하면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은 끝나지 않았으며 크게 보았을 때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등 20세기 대부분의 사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뒤처리 과정에 불과하다.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끝나고 보니 사실은 많은 전쟁의 시작이 된 전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미 18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던 자유주의 무역에 기반 한 100년의 세력균형 평화시대는 전쟁이 아니었어도 경제적인 이유로 종결될 기미를 보였으며, 1차 대전은 단지 그 부산물이었지 결코 원인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칼 폴라니가 대표적.
한편으로는 세계 평화에 기여한 면도 있는데 히틀러를 비롯한 추축국 수뇌부들의 똘기(...)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과 달리 제1차 세계대전의 개전과정은 당시 기준으로 수뇌부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한 결과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 때문에 국제정치학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과제로 떠올랐고 그 성과로 인류는 과거에 비해 대규모 총력전을 회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특히 바바라 터크먼의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정을 연구한 저서인 "8월의 포성"은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핵전쟁을 막고 인류를 구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33] 역사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
여담인데 프랑스는 전몰장병 추모일, 즉 현충일이 11월 11일이다. 1차 대전 종전일인데 프랑스는 1차 대전에서 2차 대전보다도 더 많은 전사자를 낸 데다 이 시기 20~30대 청년세대의 희생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류의 역사가 2014년에 들어서면서 1차대전 개전 100주년을 맞았으며, 2018년에는 종전 100주년이 된다.
8.3 연도별 주요 전투
- 아프리카 전선은 워낙 따로 놀았던 고로, 별도 항목에서 기술한다. 제1차 세계 대전/아프리카 전선 참조.
9 관련 항목
9.1 관련 용어
- 국제 연맹
- 파리 강화 회의
- 내부로부터의 중상
- 뇌이 조약
- 민족자결주의
- 러시아 혁명
- 로잔 조약
- 베르사유 조약
- 생제르맹 조약
- 세브르 조약
- 슐리펜 계획
- 치머만 전보
- 트리아농 조약
- 무제한 잠수함 작전
9.2 관련 인물
기껏해야 20년 정도의 전간기 이후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기 때문에 상당수의 인물들이 제2차 세계대전시기 인물들과 겹친다. 제2차 세계대전기의 지도자나 군인들이 이 시기에는 어떤 위치였는지도 보면 흥미로운 부분.
9.2.1 연합국
- 영국
- 더글러스 헤이그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 윈스턴 처칠
-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
- 존 로널드 루엘 톨킨 - 우리가 잘아는 소설가 맞다. 솜 전투에 참전했다가 자신은 병에 걸려 죽을 뻔 하고 나머지 같이 참전한 친구들은 모두 전사했다.
- 러시아 제국(~1917)-러시아 연방 임시정부(1917)-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1917~)
9.2.2 동맹국
- 독일
- 마타 하리[36]
- 막스 호프만
-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 빌헬름 2세
- 소 몰트케
-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 아돌프 히틀러[37]
- 에르빈 롬멜
- 에른스트 우데트
- 에리히 루덴도르프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한스 폰 젝트
- 헤르만 괴링[38]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 소설가로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썼다.
- 오스만 제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베르히톨트
- 프란츠 요제프 1세
-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호르티 미클로시[39]
9.3 창작물
9.3.1 소설・영상물
- 갈리폴리
- 거인들의 몰락 - 켄 폴릿 지음. 1차 대전 직전의 유럽과 미국의 상황을 그린 대하 소설이며 2차 대전과 냉전을 다룬 후속작도 있다.
- 고독의 우물 - 래드클리프 홀 지음. 1차 대전 당시 앰뷸런스 부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라파예트(원제 flyboys)
- 레비아탄, 베헤모스, 골리앗 - 스콧 웨스터펠드 지음. 기계 병기로 싸우는 동맹국과 생체 병기로 싸우는 협상국 사이에서 오스트리아의 숨겨진 어린 황태자가 주인공인 대체역사소설. 아쉽게도 국내엔 미번역된 작품이다.
- 무기여 잘 있거라
- 서부전선 이상없다
- 아라비아의 로렌스
- 정무문 100대1의 전설
- 인게이지먼트(A very long engagement)
- 8월의 포성(원제 The Guns of August)
- 파스샹달
- 60고지 전투
- 워호스
- 워터 디바이너
- 로스트 바탈리온
- 레드바론
- 대야망(the blue max)
- 메리 크리스마스
- 데스워치(영화)
- 영광의 길
- 버드송(bird song, 2012)
- 37 데이즈(37 Days, 2014, BBC 3부작)
- 더 크림슨 필드(The Crimson Field, 2014, BBC 6부작)
- 아워 월드 워(Our World War, 2013, BBC 3부작)
- 더 패싱 벨스(The Passing Bells, 2014, BBC 5부작)
- 앤잭 걸스(Anzac Girls, 2014, 호주 ABC)
- 사라예보 1914(Das Attentat - Sarajevo 1914, 2014, ZDF 2부작)
9.3.2 게임[40]
- 네크로비전 [41]
- 다크스트 오브 데이즈 [42]
- 더 그레이트 마션 워 [43]
- 라스트 익스프레스
- 라이즈 오브 플라이트
- 발리언트 하츠 : 더 그레이트 워
- 배틀필드 1[44]
- 베르됭(게임) [45]
- 빅토리아[46]
- 아이언 스톰 [47]
- 암네시아: 어 머신 포 피그스[48]
-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49]
-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대체역사물MOD)[50]
헐 - 토이 솔져스
- 플레임즈 오브 워 - Great War 확장
- A&A 1914 (보드게임)
- european war 3
- Warfare 1917
- 영광의 길(보드게임)
9.3.3 대체역사물
이 또한 2차 대전에 밀려서 존재감이 미미하다. 그리고 간단히 생각해보더라도 2차 대전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뒤바뀌었더라면 극악무도한 파시즘이 전세계를 장악한다는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이 나왔겠지만 1차 대전은 선악의 구분 자체도 애매해서 연합국이 동맹국에 비해 딱히 더 도덕적이라고 하기도 힘들고 승자와 패자가 뒤바뀌었더라도 결과는 그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살아남고 프랑스와 대영제국이라는 두 식민제국이 해체되는 것, 유럽 국경선에 약간의 변동이 생기는 것 정도 뿐이었을 것이다.
10 관련 어록
이봐, 전우여, 난 자넬 죽이고 싶지 않았어. 자네가 참호에 또다시 뛰어들더라도 얌전히만 있으면 죽이지 않을 거야. 난 자네가 뛰어들 때 자네의 수류탄을, 자네의 총검을, 자네의 무기만을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난 자네의 얼굴을 보고 자네의 아내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공통점을 발견했어, 전우여! 부디 나를 용서해다오! 우리는 이러한 공통점을 너무 늦게 깨닫고 말지. 자네들 어머니들도 우리의 어머니들처럼 근심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죽음과 고통을 똑같이 두려워하며 똑같이 죽어 간다는 사실을 말이야. 전우여! 어째서 그대가 나의 적이 되었던가. 우리가 무기와 군복을 벗어 던지면 자네도 나의 벗이 될 수 있을 텐데...-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
참호에 있는 군인들에게 왜 전쟁을 하는지 물었다.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굴복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왔다. 독일이 왜 우리와 전쟁을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모든 전쟁을 끝내는 전쟁이 될 것.하지만 더 다이나믹한 속편이 남아있다
우리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우리를 끝낼 것이다.[52]- 전쟁 뒤, 허버트 조지 웰즈.
인간은 미쳤다! 현 사태를 지속한다는 것은 미친 것임에 틀림없다. 이 지독한 살육전이라니! 이 끔찍한 공포와 즐비한 시체를 보라! 내가 받은 인상을 전달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지옥도 이렇게 끔찍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미쳤다!- 프랑스 보병 중위 알프레드 주베르가 사망하기 전에 적은 일기(1916년 5월 23일). 출처는 <참호에서 보낸 1460일>.
온 유럽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다. 우리 생전에 다시 켜지는 일은 없겠지.(The lamps are going out all over Europe, we shall not see them lit again in our life-time)- 영국 외무상 에드워드 그레이(Sir Edward Grey)가 1914년 8월 3일 영국의 참전 결정 후, 그의 친구에게.
11 관련 항목
- ↑ 2014년 7월 28일에 개전 100주년을 맞이했다.
- ↑ 독가스 대신 철조망이 나오기도 한다.
- ↑ 간혹 위대한 전쟁으로 오역하는 경우도 있다.
이게 어딜 봐서 위대한 거지?시간 전쟁 항목 참조. - ↑ 사실 뛰어난 장군들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뛰어난 공훈을 세워도 빠른 승진이 어려웠던 보수적인 사회 시스템이나 통신, 운송 시스템의 미발달로 인해 대규모의 전역을 지속시키기 힘들었던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명 인물이 적어서 1차 대전이 주목을 덜 받는 것이 아니라, 1차 대전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에 당대 인물들에 대한 주목이 적은 것이다. 브루실로프, 페탱, 힌덴부르크와 같은 경우 당대에는 구국의 영웅 대접을 받았다.
- ↑ 인도, 베트남, 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 중앙아시아의 군주정이 식민 지배로 무너졌다.
- ↑ 신해혁명으로 제정이 폐지된 청나라나 내부의 불만으로 제정이 폐지된 브라질 제국.
- ↑ 하지만 유럽 군주정도 1870년 프랑스 제정 폐지와 1910년 포르투갈 왕정 폐지로 불안한 조짐이 있었다.
- ↑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리히텐슈타인, 룩셈부르크, 모나코, 안도라.
- ↑ 스페인은 1930년대 왕정이 무너졌다가 스페인 내전 이후로 집권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왕정을 부활시켰다. 헝가리도 왕정이 무너졌다가 호르티 미클로시에 의해 복고되었으나 호르티도 초기의 프랑코처럼 왕 없는 왕국을 유지했다. 그리스 왕정도 1920년대에 무너졌다가 요안니스 메탁사스가 부활시켰지만 1973년 요르요스 파파도풀루스가 도로 폐지했다.
- ↑ 아라비아 반도에 있던 작은 국가로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에 흡수됨
- ↑ 다만, 이탈리아는 의무를 그냥 방기한 것이 아니었다. 삼국동맹은 원래 상호방위조약이므로, "독일이 선전포고를 한 거나 다름없는 이런 전쟁에는 끼어들 수 없다."라고 분명히 선언한 것이다. 실제로 독일과 같은 편에서 참전한 오스트리아도 "야, 이탈리아? 너네 왜 참전 안 해?"라고 나오기는커녕 "제발 그대로 중립 좀 지켜줘. OK?"라는 태도를 보였다.
- ↑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에 해당하며 리야드토후국이라고도 불림
- ↑ 이때 비전투 노무자 20만명을 서부전선으로 보낸다.
- ↑ 선전포고를 한 적은 없으나 엄연히 참전
- ↑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에 위치
- ↑ 말이야 그렇다 쳐도 독일도 다른 유럽 열강들보단 적긴 해도 해외 식민지들을 뜯어먹었다. 중국 칭다오라든지 아프리카 나미비아, 탄자니아, 카메룬, 토고, 남태평양의 비스마르크 제도 등 식민지들을 꽤 확보했는데 자세한건 독일 항목을 참고.
- ↑ 처칠은 함대는 영독 관계에서 알자스-로렌이 의미하는 것과 같다고 경고했고, 런던 주재 독일대사였던 메테르니히도 해군을 증강하면 1915년 이전에 영국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영국의 경고를 무시했고, 계속해서 해군증강을 반대한 메테르니히는 1912년에 해임해 버렸다.
- ↑ 암살자 프린치프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사형은 면하고 2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수감 중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 ↑ 만약 세르비아가 전면적으로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가 무시한 거였다면 오스트리아가 세계대전의 원흉 중 하나로 지목되었을 테지만, 결국 세르비아가 전면적 수용을 거부한 탓에 세르비아가 욕을 많이 먹고 말았다. 애초에 최후통첩을 하게 된 원인인 사라예보 사건의 주범이 세르비아의 보스니아 합병을 지지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였으니.
- ↑ 사실 오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러시아는 러일전쟁 때보다 훨씬 더 심하게 털렸고 결국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졌으니 말이다. 물론 무너진 후에 훨씬 강력한 존재로 부활하기는 했지만.
- ↑ 런던 주재 독일 대사인 리크노브스키 왕자가 본국에 전보를 보냈는데, 이는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영국 역시 중립을 지킬 것이며 프랑스의 중립도 보장하겠다"라고 영국이 제안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것은 잘못된 전보였다. 영국의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가 외교적인 기법으로 '러시아'를 생략한 것으로 실제론 프랑스와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하지 않기로 약속한다면, 프랑스의 중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벨기에를 침범하지 않는다면 영국의 직접적인 참전은 이뤄지지 않았을 공산이 높았지만 프랑스의 중립은 영국이 보장할 수 없었다.
애초에 자기 나라도 아니잖아보불전쟁 이후 알자스로렌 문제로 안그래도 프랑스 국민 전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에 프랑스 국민들은 만세를 부르고 파리 시청에 알자스로렌의 깃발을 올리는 등 환호하는 분위기였다;; 영국이 중립을 지키더라도, 분명히 프랑스는 러시아를 공격하는 독일의 뒤통수를 쳤을 것이다. 이후 리크노브스키는 영국의 긍정적인 제안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다시 전보를 보냈다. - ↑ 보불전쟁과 오스트리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독일의 명장.
- ↑ 사실 이런 병력 이동은 이미 독일이 부속계획으로 준비해놓았기에 가능했다. 당시엔 철도 국장이었던 폰 스타브 장군은 몰트케의 회고록을 보고 격분하여 서부전선의 7개 군 중 3개 군은 방어를 위해 남겨두고, 나머지 4개 군은 8월 15일까지 동부전선으로 배치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책에서 장황한 설명으로 입증했다.
- ↑ 18명의 내각구성원 중 12명이 프랑스에게 영국의 지원을 확약하는 것에 반대했다. 당시 영국의 양대 정당이던 자유당은 벨기에를 포함하여 무슨 일이 있더라도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제안을 지지했다. 영국 은행 총재는 은행가와 사업가를 대표하여 전쟁 개입을 반대한다고 로이드 죠지에게 전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프랑스는 영국과의 협약에 의해 모든 함대를 지중해로 보냈고, 이로 인해 프랑스의 해안은 독일 해군에게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 대사 캉봉은 타임즈 편집자에게 "영어사전에서 '명예'라는 단어가 지워지는 것인지 지켜볼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 ↑ 그러고 이 세 나라도 결국 시간 차이를 두고 모두 참전하게 된다. 참고로 오스만 제국의 경우 영국의 병크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 ↑ 그래서인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은 동부전선에 배치되는 걸 선호했다고 한다.(…)
- ↑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상황을 보면 적이 제대로 참호를 파고 은신해 버릴 경우 선진적 의식을 지닌 장교가 있다 할지라도 답이 없는 것 또한 현실이었다. 자세한 부분은 참호전 항목 참조.
- ↑ 2차 세계대전의 장비 정도는 되어야 참호전 양상을 타개할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도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경우처럼 제대로 된 요새와 진지, 참호를 구축한 상태의 적에겐 여전히 큰 피해를 입었다.
- ↑ 이오지마 전투 나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이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요새화 된 지역에 정면으로 병력을 들이 부었기 때문인데 문제는 당시에는 이 방법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반드시 점령해야만 하는 요충지인데다가 섬이라는 지역적 특성 덕분에 우회기동이 불가능하였고 결국 정면공격으로 함락 시키는 방법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타라와 전투에서 호되게 당한 미군은 전략적 요충지가 아닌 곳은 포위만 하고 우회하기로 결정했지만 이오지마와 오키나와는 반드시 점령해야만 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피해가 커진 것이다.
- ↑ 근데 웃긴 건 중국도 연합군에 참전한 같은 승전국이었다는 것. 어차피 일본이 날름한 중국지역 식민지는 독일이 확보한 것을 신경 못 쓰는 사이 거저 먹은 거지만... 결국 후에 前 카이저 독일령 중국 영토는 중국 5.4 운동의 여파와 다른 국가들의 외교적 간섭으로 도로 토해내게 됐고, 이는 일본에게 피해의식을 제공해 침략전쟁을 꾀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된다.
- ↑ 오히려 1차 대전 당시 칭다오 전투에서 일본군의 전투 교리는 반자이 돌격이 아니었으며 포격이 주축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정신력만 강조하는 교리가 일본군을 지배하게 되는 것은 1920년 후반이다. 이러한 교리가 성립되는 데는 1차 세계대전의 탄넨베르크 전투와 총력전 양상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해석되고 있다.
- ↑ 뉴질랜드나 노르웨이, 캐나다 같은 나라들은 세계대전 전에 여성참정권을 인정했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두차례의 세계대전후에야 인정했다.
- ↑ 단, "8월의 포성"은 저자의 러시아 혐오 성향이 반영되어 러시아에 대해 지독하게 폄하하고 있으니 다른 책과 같이 읽어야 한다.
- ↑ 독일군 최후의 서부 공세. 동부전선에서 승리한 독일이 병력을 끌어모아 총 5차례 공세를 펼쳤으나 결국 실패로 끝난다. 이후 연합군의 반격(백일 전투)으로 인해 독일군은 붕괴한다.
- ↑ 이 당시에는 그냥 장교였음.
- ↑ 인도네시아인인척 했던 네덜란드 출신이지만, 독일에 포섭됨.
- ↑ 이때는 그냥 사병이었지만 20년 후에는...
- ↑ 이때는 일선 파일럿.
- ↑ 이때는 해군 제독.
- ↑ 1차 대전 자체가 소재로선 2차 대전에 비해 인지도, 인기면에서 저조한 마이너 소재인지라 세계적으로 1차대전 소재 게임은 얼마 없다. 그 얼마 없는 게임들조차도 몇몇 매니아들을 빼면 대중적인 흥행은 장담하기 어려워 중소게임 제작사에서 저자본으로 만든 B급 작품들은 있어도 대형 게임사에서 소재로 삼은 경우는 거의 없기에 AAA급 게임으로 만들어진 것은 배틀필드 1을 제외하면 사실상 없다. 당장 배틀필드 1조차 국내에서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다고 하자 이에 대한 거센 반발과 이번 신작은 구입하지 않겠다는 유저들도 있었을 정도. 사실 게임뿐만 아니라 영화같은 다른 2차 창작물도 상황은 똑같다.
- ↑ 제1차 세계대전에 뱀파이어, 흑마법등 다크 판타지가 가미된 FPS게임.
- ↑ 완전히 1차 세계 대전 배경의 게임은 아니고 설정 상 주인공이 역사 개변을 막기 위하여 시간대를 넘나들며 싸우는 게임인데 그 중에 한 차례 1차 세계 대전 당시에 들르게 된다.
- ↑ 제1차 세계대전 컨셉이나 화성인의 지구 침략을 배경으로 하는 안드로이드용 게임. 트레일러가 꽤 일품이다. https://vimeo.com/107454954
- ↑ AAA급 게임 중에서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FPS 게임중 세계 최초라고 봐도 된다. 심지어 동 시기를 배경으로 싱글 캠페인도 포함된다. 여전히 버그와 크래시가 가득한 배틀필드 시리즈이지만 역대 최고의 그래픽과 싱글 캠페인의 염세적 분위기가 고평가를 받고 있다.
- ↑ 베르됭 전투를 배경으로 한 게임으로, 게임 개발사 측은 '최초의 사실주의 1차대전 FPS 게임'이라 소개하고 있다. 맵은 참호전 위주라서 앞 서 말한 참호전을 몸소 경험하고 싶다면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 ↑ 게임 종료 시점이 현실의 1차대전 종전이며 플레이 역시 세계대전이 가능하다
물론 플레이어는 10차례가 넘는 세계대전을 반복하는 게 일상이다 - ↑ 1차 세계대전이 1964년까지 계속 된다는 내용의 대체역사 FPS게임.
- ↑ 주인공이 미래를 보고 미쳐버렸던 이유로 등장한다.
- ↑ 본편 주인공 제이콥 프라이의 손녀 리디아 프라이의 기억으로 신디케이트 본편에서 짧게 등장한다.
- ↑ 제1차 세계대전에서 카이저 독일이 승리했다면?
- ↑ 사실 이 말 자체는 전쟁 전에는 막대한 자원을 쏟아 붓지만 결과적으로는 소규모 국지전이 되는 충돌을 통한 전쟁의 해소를 의미했다. 이후에는 영구적인 평화를 위한 조직이 생길 거라고 본 것. 실제로 그 예상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성능이 충분하지 못했을 뿐. 그리고 전쟁 뒤에는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못할 만큼 끔찍한 전쟁"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더욱 끔찍한 속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 ↑ 이 말은 이후 존.F.케네디 대통령이 인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