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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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천군 사건 혹은 신천대학살이라고 불린다. 이 사건은 10월 17일~12월 7일까지 한국전쟁 중 일어난 사건으로 황해도 신천군에서 수만 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던 사건을 말한다. 북한에서는 신천대학살이라고 부르며 미군의 홀로코스트 전쟁범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증거가 없고, 대체로 좌우익 갈등 과정에서 학살이 일어난 것으로 본다. 일단 학살 자체는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휴전 1년 전인 1952년, 국제 사법단체로 공산주의 계열의 NGO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에서 북한의 요청으로 북한 지역을 돌며 ‘한반도에서의 미군 범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 그 시작이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까지 황해도 신천군에서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중위계급의 신천 점령군 지휘관과 예하 미군 1개 중대 그리고 한국군 장교들이 보는 앞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무려 약 3만 5천여 명,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2 북한측 주장

북한에서는 이 사건을 "미군과 한국군이 북진하면서 미군들이 38선을 넘어와 황해도 신천군을 점령하면서 '해리슨 중위' 라는 점령군 사령관의 지시로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5,383명의 무고한 양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황해도 신천군에 '신천박물관' 을 지어 반미 교육으로 이용하고 있다.


북한 '신천박물관' 그림으로 전시되있다 상당히 충격적인 그림이다. 비위가 약한 자의 클릭을 금한다.

북한의 '신천박물관'이나 북한에서 제작된 선전영화에 대한 탈북자의 증언들 #. 북한측 선전화를 찍은 사진이 있는데,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지만 정말 무서운 그림이니 주의.#

3 남한 측의 인식

남한에서는 일반적으로 해당 사건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채 그런 거 없다거나 사실은 북한이 다 죽여놓고 우리에게 뒤집어 씌운 거임 정도로 언급되었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신천 의거일이라고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간략하게(...) 공산당의 가족 처단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고 위의 링크된 분 글에 의하면 사람 죽이는 걸 그렇게 자랑할 정도로 모골이 송연한 수준의 업적 자랑도 있었으니... 농담 같은 이야기지만 1990년대 초반 나온 6.25와 민간항쟁이라는 반공서적에 버젓이 나온 이야기이다.

이쪽 부분을 설명한 작품이 황석영의 손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마을 사람들간의 학살로 다루고 있으며 약간 무리하게 화해와 갈등 해소를 강조하는데 막상 미국 교포 종북주의자들에게는 미군의 학살을 은폐했다는 이유로 까인다고 한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2년 4월 21일 방송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 북한측 기록 영상 화면을 최초로 소개하였고 당시 관련자 인터뷰를 일일히 했다. 황석영의 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였다는 점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곳에 나온 남한에 살고 있는 당시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당시의 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점이 충격적이다. 지하철에서 시비 거는 노인 행색으로 시비거는 게 자랑스럽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관련 논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21세기에도 1950년대식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느낌이 난다. 물론 지금 와서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엄청난 잘못이며 범죄인가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그러는 측면도 없지는 않겠지만. 사실 홍위병이나 나치 친위대 잔당들도 그렇지만 시류에 휩쓸려 만행을 저지른 자들의 상당수는 자기가 저지른 짓을 끝까지 반성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당장 최근 줄줄이 잡혀 들어오는 나치 전범들에게 각국 사람들이 잘못 반성하느냐고 묻자 그들의 대답은 대부분 그 시절이 자랑스럽다는 것이었다.

4 진위여부

학살의 주체는 미군이라고 하기에는 앞뒤가 안 맞는다. 당시 미군은 북진을 하면서 평양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붙었기 때문에 황해도 신천군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또한 북한이 주장하는 신천 점령군 사령관 '해리슨' 이라는 이름의 중대장은 당시 미군 미국국립문서보관소 명단 그 어디에도 없다. 이름만으로 따지면 미8군 부사령관 윌리엄 켈리 해리슨이 있지만 그는 신천이나 그 근방까지도 아무련 연관이 없는 인물이다.

더군다나 북한이 주장하는 수많은 잔학행위들을 모두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점령군이 피점령인을 재미와 공포로 살해하기에는 너무나 이념적 적개심이 가득한 내용이 많다. 이를테면 강간이나 칼로 살해한다는 등은 난징대학살이나 다른 미군 범죄에서도 자주 나오는 이야기지만, 머리에 노동당원증을 못박았다던가, 코를 꿰서 돌아다닌다던가 하는 일은 하기도 힘들고 피학살자들에 대한 증오심이 극도로 크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림이나 그려서 미군을 모함한다고 보면된다. 사진 없으니까 그림이나 그리는 놈들 [1]

북한측에서 주장하는 '미군&유엔군 주도 주장' 을 확증할 만한 증거는 현재까지는 전혀 없지만 학살 자체는 존재했음이 인정되며 이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설은 신천군 주민들 사이에 '좌우대립' 격화로 우익 세력들이 학살을 주동하여 3~4만명의 좌익계열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군이 진격한 후 즉시 대한민국이 북한을 접수하였더라면 이렇게 처참한 피의 복수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치안대 등 민간에 방임한 탓으로 무수한 무명의 부역자 가족이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쉽게 말해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이 북진에만 혈안이 돼서 점령지 관리를 내팽개친 덕분에 이런 헬게이트가 열렸다는 평가.

이런 경우가 남한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거나 미화되는 경향이 있다. 추모행사는 열리고 있지만 학살의 희생자가 아닌 '반공 의거' 때 사망한 반공주의자들을 추모하는 성격에 가깝다. 오히려 유엔군측 자료에는 많이 나오는 이야기이다.( 한겨레 21 2002년 4월 17일 405호 기사)

한국의 민정 경찰[2]이나 우익민병대, 게릴라부대 내지는 청년단에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민간인을 불법으로 처형 내지는 부상자들을 고의로 방치시켰던 건 의외로 많이 소개되었다. 1950년 황해도에서는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된 주민들을 학살하고 부상당한 민간인들에게 미군이 지급한 식량과 의약품도 갈취하는 반공 유격대의 만행에 격분한 영국군 정보 장교가 반공 유격대장 머리에 총을 겨누고 후에 미군 사령부에 항의한 기록도 존재한다.

당장 검색엔진에 신천 반공의거구월산 유격대 같은 것을 넣어보면 적지 않은 미화 사례가 검색된다. 실제로 1970년대까지는 "신천 반공의거" 라 하여 공산당에 대항해 싸운 유격대를 기리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ㅎㄷㄷ. 그러나 실제로는 치안관리라는 명목으로 좌익 혹은 무고한 주민 학살에 나선일이 대부분이다.이런 걸 볼 때 마을 단위에서 일어난 좌, 우간 학살극이 미국에 의한 학살 의혹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좀 더 구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당시 민간인 유격대나 자경단은 좌우익 할 것 없이 양 진영 모두 있었고 좌익이 점령하면 좌익 자경단이 우익을 살해하고 우익이 점령하면 우익 자경단이 좌익을 살해하는 등 막장일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북청년단도 비슷하게 탄생한 부류. 소련과 김일성 정권 때문에 갖은 박해를 다 받다가 하루아침에 전재산 다 날리고 좌익 민병대에 공격 받은 우익 세력의 분노와 보복극이 빚어낸 참사인 것이다. 이는 좌와 우를 바꿔 넣어도 성립되기도 한다.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학살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이 좌익/우익의 사상 가지고 학살하는 것도 정상이 아니건만, 그 와중에 좌익/우익 그딴 거 모르는 순진한 주민들이 단순히 평소의 친분 혹은 친인척/학연 등으로 같이 묶여서 절단나는 상황이 수도 없이 많았다. 심지어 아들이나 아버지가 사병이나 장교로서 한국군으로 열심히 싸우는데도 가족이나 친척이 이렇게 학살당해 나중에 그걸 알고 절망감에 탈영하거나 군을 그만두고 지금까지도 한국군에 대한 증오를 쏟아부으며 살아계시는 이들[3]도 있다.그만큼 한국전쟁은 개판이었던 것이다.[4]당시 증언자들 중에는 "그때 중학교 동창 다섯명이 끌려갔는데 나 빼고 나머지 애들은 지금도 행방불명됐다. 이런데 참을 수 있느냐"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넘었지만 당시 학살과 보복 학살 때문에 동네 주민들이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져서 아직도 화해하지 않고 있는 마을이 남한에도 여럿 있다.

이런 상황이니, 좌도 우도 똑같더라, 시대의 비극이더라, 북한은 더했다더라 라는 식의 주장은 자칫하면 물타기일본의 피해자 행세처럼 남용될 수도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누가 누구에게 했건 모든 학살은 모두 죄악이다.

대규모의 전쟁 때에는 이런 일이 사실 비일비재하다. 제 2차 세계대전 때만 해도 발칸이나 동유럽 같은 데에서는 점령군인 독일군이 오히려 놀라서 뜯어말릴 정도 현지인들이 주도한 학살극이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현재도 여러 나라의 내전에서 벌어지는 학살 대부분은 정규군이 저지르는 짓이 아니라 민병대가 저지르는 짓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재도 냉전적 패러다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도 현실이다. 이를테면 지금의 북한의 막장성만을 기준으로 수십년 전의 사건을 평가하는 오류를 저지르는게 전형적인 예인데, 확고부동한 보편적 가치관과 함께 그 시대의 현실을 치열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한 부분이다.

5 기타

massacre in korea (한국에서의 학살)

입체파의 대표화가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대학살도 위의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자세한 것은 파블로 피카소 항목 참조.

신천 학살에 대해 연구한 김귀옥의 논문에 의하면 남한에 살고 있는 실향민들 중에 고향방문을 신청한 사례가 꽤 되고 심지어 반공 청년단 등에서 활동한 이들도 있지만, 예외적으로 신천군 출신들만큼은 절대로 고향방문 신청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5]
  1. 시발점이된 보고서는 미군이 그 당시 사건을 사진으로 찍어갔다고 주장했지만 있지만 그 사진과 기록물은 그 이후로 행방도 알수 없고 북한도 언급 조차 안한다.
  2. 내무부 소속이 아니라 점령지에서 피점령 주민으로 구성된 자치부대.
  3. 2002년 당시 77살인 김창남(사병) 씨와 74살인 안종식(당시 소위) 씨가 증언하길, 우린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한국을 위해 싸웠으나 그러는 조국이란 것은 보답으로 내 부모와 친척을 이렇게 빨갱이라며 죽여서 시체조차도 집단으로 매장하거나 바다에 버려서 가묘와 추모비로 제사를 지낸다. 정말로 빨갱이라면 우린 이렇게 나서서 큰소리도 못낸다. 그분들은 그게 뭔지도 모르고 순박하게 농사짓고 살던 평범한 사람이었음에도 그냥 빨갱이로 몰아 죽였다. 그들이 빨갱이라는 증거도 그렇더라~~라고 할 뿐. 당시 지휘하던 이들도 증거라는 것도 제시못하고 피해다닌다. 이러는데 나라사랑? 대한민국? 이럴 수 있느냐? 라고 50년동안 참았던 울분을 쏟아부었다...--출처는 지리산 킬링필드.
  4. 사실 20세기 들어 벌어진 대부분의 전쟁에서 이런 모습이 보였다. 깨끗하고 정의로운 전쟁 따위는 없다.
  5. 다만 이산가족 상봉 대상 신청자들 가운데서는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2014년 이산가족 상봉대상자 가운데 최고령자였던 강능환(당시 93세) 옹의 고향이 황해도 신천군 초리면 출신. 1.4 후퇴 때 남하했다고. 이 당시 이산가족 상봉자 선발에서 안타깝게도 후보자 선정이 되지 못한 최봉현(당시 80세) 옹도 신천군이 고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