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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무덤의 대성문 현판을 떼내어 풀스윙으로 뽀개는 홍위병. 구경꾼들의 표정이 무심하다.
목차
1 개요
한자 : 紅衛兵(정체자), 红卫兵(간체자)
병음 : Hóng Wèi Bīng
영어 : Red Guards[1]
혁명무죄![2]
중국 대륙 최대의 흑역사를 이끈 또라이들
집단광기의 폐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들
자매품으로 청위병이 있다
1960년대의 일명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일어난 마오쩌둥의 퇴진 이후 마오의 불타는 권력욕과 당대의 사회문제에 반발한 젊은이들의 상호작용으로 생겨난 일종의 극단주의 조직이다.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준동했고, 중국의 근대화를 최소한 10년어치는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집단. 이들의 만행으로 중국은 불과 10여 년 동안 100년이 지나도 메우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고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지금도 그 후유증이 상당부분 남아있을 정도. 특히 그들이 날려버린 온갖 유물과 역사서는 중국의 소프트 파워를 절반 가량은 날려버렸을 것이다.
병(兵)(病)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중국 공산당의 군대인 중국 인민해방군과 직접적인 연결은 없다.[3] 본래는 학생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조직이었으며 준군사조직 같은 성향이 있기는 했으나 본질은 운동조직으로 군 조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2 마오쩌둥의 퇴진과 복귀
1960년대에 마오쩌둥은 소련처럼 중공업 생산능력이 강한 중국을 실현한다는 기치 아래 대약진 운동을 밀어붙였다. 최종목표 자체야 그럭저럭 옳았어도, 문제는 중국의 당시 특성과 농업 생산력을 전혀 고려치 않았다는 데에 있다. 농업은 농업대로 망하고 공업은 공업대로 말아먹은 끝장나는 대실패로 결말이 났다.
그나마 만들어진 수백만 톤 쇠붙이도 너무 품질이 낮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쇠찌끄러기밖에는 되지 못했다. 거기다가 벌레를 잡아주는 새라는 것도 모르고 참새를 해로운 새로 규정하는 병크까지 터트려서 결과적으로 중국 전역에서 아사자가 수천만 명 단위로(!) 발생하자 덩샤오핑을 위시한 신진세력들이 마오쩌둥의 하야를 요구하고,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한 마오쩌둥도 국가주석을 류사오치에게, 당서기를 덩샤오핑에게 넘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직후로, 권력에서 물러날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던 마오쩌둥은 자신을 끌어내린 정적들의 정치적 생명력에 피해를 입히고, 잘 되면 다시 한 번 권력을 잡으려고 중국 전체에 내분을 일으킬 생각을 하게 된다.
마오쩌둥은 우선 자신이 아직은 상당한 발언력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부르주아와 자본주의 세력들이 다시 사회로 침투하고 있는데, 이들이 발붙이지 못하게 청년들이 바로잡아야 한다.라는 어조의 연설을 한다. 그 뒤 중국 전토 여기저기서 젊고, 앞뒤 안가리고, 신격화된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심으로 불타는 청년들을 주로 모아 홍위병이란 집단으로 묶고 지원하게 하는데…
사실, 마오쩌둥이 이 부분에서는 시대의 흐름을 또 한 번 잘 탔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대약진의 실패로 공산당의 문제점이 드러나던 시기였고, 마오주의의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었지만, 관료주의의 폐해도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관료가 아닌 젊은 층에서는 점점 관료주의에 대한 폐해가 지적되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은 관료일래야 관료일 수가 없고, 게다가 당시에 마오를 까기에는 아직 사회주의 붕괴 테크트리를 못 찍었다고 보면 된다.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하기 위해서 까임을 진행할 때는 순차적으로 관료 → 당 → 수뇌부 순이 된다.
홍위병도 원칙적으로는 자발적인 조직이었다. 원래 마오쩌둥이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밀리고 나서, 공산당 수뇌부는 마오쩌둥을 뒷방 늙은이로 만들려 했다. 그 뒷방 늙은이 플랜은 다름이 아니라, 아무 실권없는 상징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 마오쩌둥 신격화라는 과정이 갑툭튀하기에 이른다.
3 흑역사의 시작
3.1 광기의 극단주의
중국은 이제 대약진의 실패로 공산당의 집행능력 및 경제발전 능력에 심대한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원론적으로 좋은 말만 하는 마오쩌둥의 신격화가 가중되었다. 이렇게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가? 마치 종교와도 같은 원칙에 대한 숭배가 벌어진다. 쉽게 말해 극단주의 플래그가 뜨는 것이다.
마오쩌둥이 원칙적으로 하는 말은 사실 하나도 틀린 게 없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라.", "함께 고생하고 함께 이겨내자." 문제는 개념은 개념일 뿐 그것이 실생활의 목적이 될때 과정이 병크를 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다. 결국 홍위병이 자발적으로 생성되긴 했지만, 마치 이슬람 극단주의자 같은 무시무시한 과격파가 형성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결국 극단주의로 흐른 젊은이들은, 감히 마오쩌둥을 깔 생각은 못하고, 이게 다 관료주의와 우리 사이에 숨어있는 구 문화의 잔재 때문이다라며 관료를 까기 시작한다. 까는 이유는 다양했다. "경직된 관료", "주자파", "숨어있는 우파", "장제스 똘마니" 등등... 사실 당시 관료주의가 폐해로 지적된건 맞긴 맞으나 그렇다고 나라를 결딴내면 어쩌자는 거여...사실 당초 공격 대상은 부패한 관료와 마오주의를 안따르는 관료 및 구 문화의 잔재들이었으나, 역시나 통제가 안되는 집단들인지라 얼마 가지않아 사회 각 분야로 번지게 된다.[4]
쉽게 말해 '무식하고 행동력만 넘치는 학생들이 중국을 온통 개판 5분 전으로 만들고 분열시키면 당연히 지도부 놈들이 짤리겠지. 어디 한번 같이 죽어봐라.'라는 마오쩌둥의 이유와 이러한 목적으로 방관한 결과 탄생하게 되었다.
3.2 그들의 행각
문화 혁명과 홍위병은 한때 중국의 내정을 거의 초토화 레벨로 몰고 갔다.
청소년들이 교수, 예술가, 학자 등등 지식인과 정치인 등을 끌고 나와서 길거리에서 공개처벌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핵미사일을 만드는 로켓 과학자들까지 반동 지식인으로 몰려서 두들겨 패고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버렸다.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인생을 보면 이 당시의 미친 사회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주인공 부부가 임신한 딸을 데리고 대학병원에 갔더니 의사인 교수는 조리돌림 당하러 끌려가고 학생만 있다던가(...) 의사라고 자처하는 애들은 책 본 거 말고는 실습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애들이라던가(...). 결국 공산당원인 사위의 힘을 빌어 전문의사를 데려왔는데, 의사는 잔뜩 굶은 상태라 주인공이 사온 만두를 급히 먹다가 목에 걸려 기절하고, 딸은 아이를 낳다가 산후조리가 안 돼 과다출혈로 사망한다.
거기에 정부기관 등을 무력으로 장악(!)하기도 하고, 음악과 무술, 전통문화 등은 죄다 부르주아 시대의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며 금지(음악의 경우는 당에서 허가하는 음악만 가능), 마오쩌둥의 전투적인 지시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길거리의 모든 거리 이름과 간판 등을 죄다 '화약냄새'나 폭탄, 총, 칼 따위, 그 외 혁명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으로 바꿔버렸다고 하니 이게 얼마나 미친 짓거리였는지 알 수 있다.
한편 홍위병은 군대와 경찰조차도(!!!) 자신들이 어떻게 하고 싶어했으나 차마 그러진 못했고 한편으론 군대와 경찰에도 홍위병이 시키는 건 될 수 있으면 들어주고 간섭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나중에 가서는 도저히 통제가 안 돼서, 공장 노동자들이 홍위병들에게 제발 투쟁을 그만 두라며 파업을 하기에 이르기도 하고, 마오쩌둥이 부랴부랴 "무투 말고 문투를 하라."고 지시해도 씨알도 안먹히는 상황이 펼쳐진다. 말그대로 망했어요.
이들이 벌인 가장 큰 병크는 신호등의 빨간등이 정지신호란 것은 말이 안되며, 혁명을 상징하는 적신호는 전진신호가 되어야 한다고 이를 바꾼 것. 영화 마지막 황제 끝부분을 보면 잘 나타나있다. 이것 말고도 자동차의 우측통행조차 '미 제국주의자들의 유산'이라고 바뀔뻔 했으나, 누군가가 '영 제국주의자들은 좌측통행'이라 지적해서 흐지부지됐다고. 잘들 논다
문화유산에 대한 파괴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서 작게는 명나라 도자기, 서예, 고화를 비롯한 개인적 소장품에서부터 크게는 공자 사원, 절, 성, 궁궐같은 거대 유산들을 파괴했다. 자세한 내용은 문화대혁명/악영향 문서 참조. 애완동물도 반동이란 이유로 닥치는대로 압수했다고 한다. 문혁 당시 홍위병이었던 화가 장안거의 증언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집안은 흑오류, 즉 반동으로 몰려서 갖은 고초를 당했고 반동집안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홍위병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의 집 옆에 어느 노인이 많은 비둘기를 길렀는데 홍위병들이 비둘기를 압수하려고 몰려들자 노인이 커다란 식칼을 들고 "내 비둘기를 건드리는 놈은 내가 죽여주마."라고 버티고 서서 겁에 질린 홍위병들이 물러났다고 한다. 흠좀무. 반동이다!
문화혁명 후반부에 들면 홍위병의 분파끼리 권력투쟁이 벌어졌는데, 말이 좋아 투쟁이지 총기까지 동원한 내전이었다. 연길의 경우 홍위병끼리 강을 사이에 두고 영역을 확장한다음 시가전을 벌였다는 증언도 있다. 북경에서는 중국 최고 대학들이라는 베이징 대학과 칭화 대학 소속 홍위병 부대들이 충돌, 각 부대에 소속된 공돌이들이 각자 작업장에서 총기와 장갑차까지 만들어글라놀로지 상대방 캠퍼스로 쳐들어가는 사태도 터졌다고. 션판교수의 회고록인 홍위병을 보면 사상자가 여럿 발생했을 만큼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수준이었다. 리얼 연고전 고연전
당시의 홍위병은 크게 두파로 나뉜다. 초기의 보수파와 후기의 조반파. 여기서 말하는 보수파는 진짜 보수주의를 뜻하는것이 아니라, 문화혁명에 보수적인 입장과 방법으로 일관한 패거리를 지칭하는 말이다. 초기의 무력투쟁 병크나 사원, 유적에 대한 공격은 대부분 이들이 저질렀다고 한다. 게다가 출신성분이 좋았기 때문에 문화혁명 초기에 잠깐 반짝하다가 사라져도 별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실제로는 조반파라고 악행이 덜했던 건 아니다.
보수파나 조반파들은 마오동지의 어록이 적힌 마오어록을 끼고 살았으며 자기 교과서 암기도 제대로 하지 못한 청소년들이였지만 마오어록은 이미 정복해서 토씨 하나도 안 틀리고 외웠고 너무 자주 읽어서 책겉표지가 시꺼메진 적도 많다고.
반면 조반파들은 순수하긴 했지만 뭔가 병신같고 멋도 없는 아이들이었고, 후기의 파벌 싸움이나 고문은 대부분 이들이 저질렀다. 다행히도 70년대에 들어서는 이런식의 병크는 잦아들고, 하방활동[5]을 하거나 70년대 중반의 중국 대지진 때 다같이 구호활동에 나서는듯 좋아보이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먼저번에 벌여놓은 살육파티는 어쩔건데
홍위병들 본인은 홍위병의 준동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좋은 시절이었다고 뭐라고?! 회상하는 이들이 대다수다.[6] 그 당시에는 모두들 대문조차 닫고 살지 않았고, 배가 고프면 옆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는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며,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비록 마오주의에 한정되어있긴 하지만 자유롭게 집회를 열 수 있었고, 젊은이들은 단체를 만들어서 지역 기관에 "사무실 좀 달라"고 신청하면 얼마든지 사무실을 내어주었고, 신문과 잡지를 발행할수 있었다고 하며 당국의 검열이 손에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어째서 모두들 대문조차 닫고 살지 않을수밖에 없었는지, 어째서 배가 고프면 옆집에 가서 반드시 밥을 먹을 수 있었는지는 문화대혁명 항목에서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면 홍위병들에게나 천국이었지, 그들에게 맞아죽을까 두려워 그들의 횡포를 참아내야 했던 일반 대중에게는 지옥이었다. 그 시절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위의 좋은 시절이었네 하는 회상은 개소리일 뿐이다.
3.3 후폭풍
결과적으로 덩샤오핑을 비롯한 지도층은 권력에서 물러나고, 그 사이에 마오쩌둥이 다시 한번 권력을 잡게 된다. 그냥 물러난 정도가 아니라 국가주석이었던 류사오치는 홍위병에게 잡혀가 처참하게 고문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죽고, 당서기 덩샤오핑도 죽지 않을만큼 쳐맞고 집단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했을 정도. 그의 아들 덩푸팡은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걸로 자살을 시도했다. 살아남기는 했지만 평생 하반신 불구로 살게 되었고, 이걸 계기로 장애인의 인권을 위한 운동가로 활약했다. 물론 부정부패 건으로 구설수에 올랐지만.
하지만 마오쩌둥조차도 홍위병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었다. 홍위병 일파들은 파벌분열과 반목을 하여 자기들끼리도 싸움질을 벌이게 되었으며, 심지어 마오쩌둥의 아버지가 부농이라고 공격하는 대자보를 붙이기에 이른다. 홍위병은 타국의 공산권 지도자에게도 비판을 멈추지 않았는데,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라고 깠다! 일단 맞는 말이지만 넘어가자
결국 마오쩌둥은 1968년 7월 28일 공산당 지도부에서는 홍위병 운동의 지도자들을 불러 운동의 정지를 명했고, 68년에서 69년에 걸쳐서 '상산하향운동'이 진행되었다. 이 운동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젊은 학생들은 농민에게 배워야 한다'면서 학생들을 농촌으로 추방해버린 것으로, 처음에는 젊은이들도 좋아서 따랐으나 곧 그들은 낙후된 중국 농촌의 현실에 짓눌리고 말았다. 이 조치는 홍위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 역시 너무 지나치게 한 나머지 젊은 인재들이 모두 도시에서 빠져나가고 '학력붕괴'가 일어나서 무학자 세대가 생겨났다고 할 정도로 중국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아무튼 문화혁명은 1976년에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마오쩌둥 사후 당연히 X됐다. 덩샤오핑이 다시 복귀하고 사회가 다시 건전하게 돌아가기 시작하게 되면서, 문화대혁명 자체가 중국에서도 까이는 추세라[7] 당시 홍위병이었던 자들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조차도 시골지역 등에서 은둔해 살면서 자신이 홍위병이었다는 이야기는 입도 뻥긋 못하며 몸사리며 살고 있다고 한다. 더 무서운 건 그들 중 대부분이 과거를 뉘우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많다.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과 중국 전체에 끼친 무지막지한 피해를 생각하면 기가 차다 못해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뻔뻔함이다.
현대 중국의 정치/경제 엘리트 가운데 이공계 출신이 많은 것도 홍위병의 파괴적인 행각과 관련이 있다. 공산주의 국가야 원래 체제 통제 + 계획 경제 때문에 제대로 된 인문사회과학이 성장할 수 없는 환경이지만 개중에서도 중국은 유난히 문과 출신 엘리트가 맥을 못 추는 경향이 있었는데[8] 문과 출신 엘리트들이 다시 나오지 못할 정도로 문화대혁명 때문에 인문사회과 학계가 황폐화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나 공학자들도 힘들게 살긴 마찬가지였지만 문과 출신 학자나 엘리트들이 겪은 고충에 비하면 양반이라고.
4 평가
중국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그 문화는 여러차례 위기를 맞아왔다. 내부적으로 수많은 백성들의 반란과 군웅들의 난립이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이민족들의 침입이 있었다. 비록 왕조가 여러차례 바뀌고 때로는 이민족들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중국의 문화와 전통은 꾸준히 계승되었으며 이민족의 문화까지 융합하여 양적, 질적으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그렇게 전승되어왔던 문화를 중국인들 스스로 철저하게 파괴했다.
게다가 중국의 최대정파인 태자당은 말 그대로 건국 1세대의 자제들로 구성된 정파로, 대표적인 기득권 세력이다. 만약 홍위병이 정말 구체제 세력을 혁파했다면 권력자들이 권력을 세습하는 일은 없었을 터.
결국 애꿎은 문화유산만 때려잡은 셈이다.
5 여담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는 "청두의 홍위병"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내용에 따르면 마오쩌둥이 베이징이나 상하이와 같은 대도시에 인구가 너무 많이 넘쳐나자 소개(疏開)하기로 하고, 아이들은 홍위병교육대라는 이름만 교육대인 노동 수용소로 공산주의 교육을 시키러 보냈고, 톱밥으로 만든 섬유질 음식을 아이들에게 먹이는 실험을 하였다고 한다. 이 때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이며 홍위병을 책임지고 있었던 린뱌오가 불명예 퇴진하자, 당 간부들은 홍위병 아이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마오쩌둥의 이름으로 아이들은 수용소를 탈출하여 자신들의 선생들을 마구 때리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로 삼게 되었고 정품 어록을 전파한다는 구실로 나라 전역에 흩어졌는데, 사실 이 아이들은 중국을 탈출하고 싶어 했고 그 방법으로 기차역을 선택해 기차를 타고 모두 서쪽으로 떠나게 된다. 당시에 서쪽에는 은밀히 국경을 넘어 인도 땅으로 가는 길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걸 아이들이 믿었다고 카더라. 하지만 당시 이 열차들의 종점들은 모두 성도(청두)였고, 13살에서 15살된 아이들 수천 명이 이 성도에 모이게 된다.
처음에 아이들은 홍위병 수용소에서 자신들이 겪은 일을 이야기했고, 성도 사람들은 이 아이들을 동정하여 맛있는 것을 제공하고 먹여주었으며 잠잘 처소와 따뜻하게 입을 것을 주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성도로 홍위병 아이들이 몰려들었고, 처음에는 1,000명 정도였던 홍위병 아이들이 곧 20만명까지 불어났다고 한다. 결국 시민들의 호의는 아이들을 더 이상 만족시킬 수 없었고, 좀도둑이 횡행하게 되었으며, 이를 거절한 상인은 강탈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상인들은 시장에게 호소하였으나 아이들이 그를 불러 공개 자아비판대에 넘겨버리고 구타해 시장은 도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이들은 새 시장 선거단을 구성하고 "자신들"의 후보를 내세웠다. 그 후보는 뺨이 오동통한 13살의 꼬마였는데 실제 나이보다 더 먹어 보였으며 일종의 카리스마가 있어 다른 홍위병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별 어려움 없이 선출되어 시의회 의장이 15살인 아이들의 정부를 세우게 되었다. 좀도둑은 더이상 위법행위가 아니었다. 모든 상인들은 새 시장이 만들어 낸 세금을 내어야 했다. 모든 주민들은 홍위병들에게 살 집을 제공해야 했다. 하지만 성두가 워낙 서쪽 변두리 도시라서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다가, 일부 시민이 지역의 도지사에게 이를 알리러 사절을 파견하였다. 사절은 이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베이징에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를 보내달라고 진정하였다. 그래서 성도로 전차와 중무장한 수천명의 군인을 보냈는데, 이 때 내려진 명령은 "15세 이하는 모두 죽여라"였다. 아이들은 맞서 싸웠지만 시민들은 모두 자기 아이들을 보호하느라 바쁘고 이들을 철저하게 외면했으며, 홍위병들이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당연한 자업자득이잖아... 이틀간의 공격끝에 모두 살해당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대통령 리챠드 닉슨과 마오쩌둥이 회견하게 되어있으므로 중국을 비판하기에는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어디까지나 이야기일 뿐,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 실린 내용 그대로 믿지는 말자. 하지만 기본적인 사실 자체는 실제로 일어났다고 한다(...)
6 현재
현재 중국에서 어린 시절 홍위병질 했던 이들은 마오쩌둥 사망 후에 일부는 좆되기도 했고 지금 와서 후회를 토로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멀쩡히 살고 있고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랑스러워 하기도 한다. 홍위병은 문혁 직후에는 매우 빠르게 몰락했고 원한을 품은 사람에게 보복당하기도 했기에 자신들이 홍위병이었던 것을 한동안 숨기기도 할 정도였다.
허나 공산당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미화 혹은 은폐 시도 역시 꾸준히 있어 왔기 때문에 이들 자체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이나 반성의식은 흐지부지 되었다. 현대 중국에서 문혁과 홍위병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까는 이들도 있고 마냥 대놓고 미화시키지도 않지만 대개는 문화대혁명 당시에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는 상태다. 대놓고 미화는 아니라도 실상이 은폐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을 비판적으로, 혹은 사실대로 그리는 창작물은 여전히 검열을 먹게 된다. 그리고 말 그대로 집단광기로서 문화대혁명 무렵의 10~20대였던 세대의 대다수가 홍위병이었다.
이들은 한 술 더 떠서 바로 자신들이 중국 문화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말살시켜 놓고서 현대의 젊은 세대에게 '중국 젊은이들이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창의력이 부족해서 한국이나 일본 창작물 같은 것을 못 만든다'고 불만 투성이다. 진심 답이 없다.
7 C&C 제너럴에서의 홍위병
왜인지는 모르지만 커맨드 앤 컨커 제너럴에서 중국의 기본 보병 이름이 홍위병이다. '위아 더 레드가드스~'
원래는 버튼 대령처럼 근접한 보병을 총검으로 찌르는 총검술이란 스킬이 있었는데 밸런스 보정으로 삭제됨. 인해전술을 중시하는 중국답게 한번에 2명씩 생산. 보병장군은 미니건을 들고 있는 업그레이드 버전 미니거너 생산이 가능한데(한낱 한 명 인간이 미니건을 손에 들고다닌다), 대공능력이 매우 좋아 비행기가 우수수 낙엽떨어진다. 그래선지 탱크 헌터보다 비싸다!
8 한국에서의 홍위병
리그베다 위키의 위키 게시판의 경우 청위병 드립으로 사용되었다.
8.1 한국에서 '홍위병' 용어 사용의 계보
극좌 계열의 수치라는 이유에서인지, 홍위병은 보수정치권과 보수언론이 재야운동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하다 시민운동이 낙천낙선운동과 언론개혁운동 등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자 시민운동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가 됐다.
1975년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은 자유언론운동을 했던 동아일보 기자들을 '홍위병'이라고 매도했다. 그 당시 정치권력이 자유언론운동에 앞장선 기자들을 '홍위병'이라고 규정해 처음 사용했다.
1991년 6월 민자당 반대 투쟁이 한창일 때 발생한 정원식 총리 사건을 트집잡아 조선일보는 "홍위병에 이끌려 다니던 지식인의 모습이 연상"(91년 6월 6일치)된다며 '운동권학생=홍위병' 등식을 사용해 마녀사냥 했다.
홍위병 용어는 한동안 잠잠하다 1993년 초 김영삼 정부 초기 개혁 표방 때 정치권들이 언론사 사회부 기자를 홍위병으로 지칭하면서 잠시 사용됐다.
1996년 8월 한총련 연세대 사태 때는 학생들을 '친북 홍위병', '철없는 홍위병' 이라고 공격하면서 사용했다.
김대중 정부 들어 홍위병은 1998년 1월 22일 조선일보에 의해 처음 사용됐다. 정당과 지역 주변에서 연줄로 출세하려고 치열한 로비전을 벌이는 사람들을 빗대어 사용했다.
1998년 8월 19일 한나라당은 제2건국위가 '홍위병식 발상'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하면서 김대중 정부에 대한 색깔 논쟁의 하나로 홍위병을 사용했다.
시민운동에 대한 홍위병 논쟁은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이 최대 피해자였던 자민련과 한나라당, 보수언론이 시작했다. 2000년 1월 25일 자민련이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명단 발표를 두고 음모론을 제기하고, 1월 26일 한나라당이 문화혁명과 홍위병을 언급하면서 시작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DJ의 그림자 역할을 해온 시민단체가 여권의 홍위병이 돼서 문화혁명식 재판을 시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01년 6월에는 사학법 개정안에 반대했던 사립대 총장들과 일부 종교계도 "홍위병에 의한 문화혁명"을 연상케 한다는 내용의 신문광고를 내기도 했다.
그 후 홍위병 논쟁은 2001년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가 한창일 때 시민운동이 언론개혁을 주장하면서 다시 전면적으로 등장했다. 한나라당과 자민련 등 보수정치권과 보수언론, 일부 학자들은 시민운동이 포퓰리즘에 젖어있고 정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이나 특혜를 받고 있어 정권의 홍위병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지금은 김대중이 주도하는 좌익 광란시대다. 조금 있으면 DJ 홍위병들이 동원될 것이고 이들의 데모가 계속될 것이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 2000년 2월 14일 기자간담회에서
시민단체들이 정부로부터 막대한 지원과 특혜를 받고 있다. 시민단체의 탈을 쓰고 권력의 홍위병으로 전락한 일부 세력들은 역사와 민족의 무대 뒤로 사라져야 한다.
자민련 조부영 선대본부장 2000년 3월 21일
행자부의 자금지원을 받는 시민단체들이 홍위병식으로 동원돼 비판언론 죽이기 음모에 나서고 있다.
한나라당 언론자유수호비상대책위 2001년 7월 26일
오늘의 형국은 보수 진영을 고사하려는 듯 정권이 홍위병과 나팔수들을 총동원하여 선전전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공권력을 앞세워 총공격하는 양상이다.
자유시민연대
내 소설에 대한 장례식은 소설가인 나에 대한 장례식이나 다름없다. 그들의 행동이 홍위병의 그것이라고 더욱 확신하게 됐다."
소설가 이문열 2001년 11월 8일
8.2 '홍위병론'이 나온 배경
먼저 홍위병론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7년 선거에서 정권교체로 기존의 여야가 뒤바뀌게 되고, 시민사회의 민주적 역량 성장과 보수&수구세력의 기득권이 흔들리는 상황을 맞이한 가운데 등장한 논리가 '홍위병론'이다.
물론, 과거에도 학생운동이나 정치권 소장파의원을 대상으로 '홍위병'이라는 비유가 사용되기도 했지만, 과거 재야운동 등 민주화 운동세력과 일정한 인맥적, 조직적 관계를 맺고 있었던 김대중 정권이 등장과 함께 실제 과거 재야, 민주화세력 중 일부가 정권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시민사회단체와 정권의 커넥션' 음모론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추진했던 개혁정책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조직적 반발과, 시민사회운동의 성장으로 독점적 여론 형성력을 상실하고, 시민사회의 '언론개혁운동'의 대상이 되어버렸던 보수언론의 반발이자, 정치인들의 '입'을 빌린 우회적인 반격의 성격을 띄고 등장했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 초기에 소설가 이문열이 한국의 극단적 좌파세력을 홍위병으로 지칭하였다. 무조건적인 외세배격, 정치가 개인에 대한 종교적인 지지[9], 유산계급에 대한 증오, 절차(법)를 무시한 정의실현, 폭력적인 면 등을 홍위병와 한국의 극단적 좌파세력의 유사성이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고영주는 어버이연합에게 빨갱이로 몰린 적이[10] 있다.
대통령이 자신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시민이 아니라고 부추기는 모습도 있다.[11] 앞선 것들이 정황상 홍위병이라 얘기할 수 있었다면, 이건 대통령이 시민을 진짜 홍위병으로 만들 수도 있는 상황이다.
- ↑ 단, 'Red Guards'란 말은 러시아와 핀란드에서 일어난 적백내전의 적군을 가리키기도 한다. 위키피디아에서도 홍위병을 가리키는 표제어는 (China)라는 괄호 표기가 되어있다.
- ↑ 홍위병들이 했던 유명한 말이다.
- ↑ 중국은 국군이 없다. 인민해방군은 당군(黨軍).
- ↑ 여담이지만 당시 서양의 68혁명세대들이 마오쩌둥과 문화혁명을 지지한 이유는 이러한 관료주의에 대한 반대였다고 한다.
- ↑ 마오주의 특유의 "농촌에서 배우라"라든가 "농민과 함께 하라",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라"는 전략에 의거한 활동. 일종의 브나로드운동같긴 하지만, 혁명의 역량이 농민이라고 규정하고 농촌을 혁명의 근거지로 삼는 마오쩌둥주의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활동이다. 그러나 이것도 혁명이 진행되는 와중에는 그럴사한 농촌 게릴라 활동이겠지만, 이미 이때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이고, 그냥 농촌봉사활동 내지는 귀농활동에 지나지 않았다.
쉽게말해 마오쩌둥이 처치곤란한 홍위병들을 단체로 시골에 짱박은 것 - ↑ 출처 : "문화 대혁명, 또다른 기억"
- ↑ 마오쩌둥의 과오 중 대표적 사례로 지적. 이를 두고 중국공산당은 "극좌주의적 오류"라고 한다. 흔히 마오쩌둥을 평가할때 나오는 '공7과3'에서 과3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마오쩌둥 말기엔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발감이 엄청나게 커서 마오는 물러나시오! 같은 시위도 자주 일어났다.
- ↑ 개혁개방 이후에는 이런 현상은 많이 없어졌다.
- ↑ 당시에는 주로 김대중 후보/대통령을 의미. 실제로도 큰마을같은 당시 PC통신 정치포럼에서는 김대중 광신도(지금으로 말하자면 '슨상빠'정도의 어감)라고 지지자에 대한 폄칭이 심심찮게 돌았다.
- ↑ 친북인명사전 발간회견
- ↑ YTN 시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법안을 상정하는 국회를 기다리지 않고 경제단체 편에 선다. 동시에 서명하지 않는 사람을 시민으로 인식하지 않으려 한다. 대통령이 경제인(기업인)들을 앞세워 서명운동을 하는 것들이 쉽게 받아들여지면, 그 다음은 경제인(기업인)을 앞세워 국회의원에 대한 낙천 낙선운동을 벌이는 단계로 갈 수도 있다. 이 지경이 되면 사실상 선거의 중립의무 같은건 안중에도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