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 ||
날짜 | ||
서기 378년 8월 9일 | ||
장소 | ||
아드리아노플 근교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동로마 제국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 고트족 연합군 |
지휘관 | 발렌스† 트라야누스† 세바스티아누스† 리코메르 | 프리티게른 알라비우스 사프락스 |
병력 | 추정 약 1만 5천 ~ 3만 명 | 추정 약 1만 5천 ~ 10만 명 |
피해 규모 | 추정 약 1만 ~ 2만 명[1] | 불명 |
결과 | ||
테오도시우스 1세의 등극. 고트족의 대두 |
목차
1 개요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378년 고트족 연합군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스가 직접 이끄는 제국군을 격파하고 황제 발렌스까지 전사시킨 전투로써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 붕괴와 비잔티움 시대의 전조라고도 불리운다.
칸나이 전투, 토이토부르크 전투, 카르헤 전투에 비해 잘 부각되지 않은 편이나 전투 결과는 이 전투들과 비교해도 한 수 위 수준으로 로마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2 배경
2.1 훈족의 침공으로 인한 고트족의 동요
서기 376년경 훈족의 세력이 팽창하면서 도나우 강 이북에 거주하던 고트족은 훈족의 압력에 못이겨 동로마 제국에 보호를 요청하게 된다. 당시 고트족을 이끌던 알라테우스와 프리티게른 등의 주요 고트족 족장은 동로마의 황제 발렌스에게 제국이 고트족의 도나우 강 이남 거주를 허락해준다면, 고트족을 이끌고 평화롭게 농사를 지으면서 얌전히 살겠으며, 훈족이 쳐들어오거나 다른 적들이 침공한다면 제국의 외원군(포이데라티foederati)이 되어 열심히 싸우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이때 황제 발렌스는 고트족의 요청을 쾌히 승낙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고트족이 로마 제국에 주었던 군사적 인상은 상당히 강력한 것이었다. 황제 데키우스가 고트족과 싸우다 전사한 적도 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자신의 조상이라고 칭했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는 고트족을 괴멸시켰다는 이유로 짧은 통치기간에도 불구하고 군인 황제 시기의 손꼽히는 명군으로 알려져 있었다. 또한 이미 당시 로마군에는 상당수의 고트족 병사들이 가담하고 있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에는 고트족 병사들의 활약으로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에게 승리를 거둔 적도 있었다.
둘째.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대립으로 동로마 제국은 더 많은 인적 자원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발렌스는 강력한 군주였던 서로마 제국의 발렌티니아누스 1세보다는 기량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었으나, 그래도 무난한 지도자였다. 다만 페르시아와의 대립이 이어지면서 군사적 긴장 상태가 고조되고 있었기에, 당시까지 제국 북방 전선의 제1 경계대상이던 고트족이 제국에 종속된다면 동방 전선에 힘을 집중할 수 있을 터였다.
셋째. 발렌스 황제 자신의 개인적인 초조감도 한몫 했다. 가뜩이나 형 발렌티니아누스 1세보다 떨어지는 인물이라는 평을 신경쓰던 그로서는, 형이 죽은 뒤 그 뒤를 이은 조카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영명한 인물이라는 칭송을 받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라티아누스는 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렸던 콘스탄티우스 2세의 사위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 또한 동서 로마제국 전체에 주권을 주장할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발렌스로서는 어떻게든 서로마 제국에 대해 동로마 황제로서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실적이 필요한 시기였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제국의 가장 큰 적들 중 하나인 고트족을 고스란히 포섭할 수 있다는 건 업적의 필요성을 느끼던 발렌스에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매력적인 떡밥이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발렌스 황제는 고트족의 도나우 강 도하를 허락했고, 모이시아와 트라키아 등 고트족이 정착할 것으로 예정된 속주의 관리들에게 고트족의 지원을 명했다. 고트족도 별다른 문제 없이 도나우 강을 건너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2.2 동로마 제국의 자폭과 고트족 궐기
황제 발렌스가 고트족에 대한 대민지원을 맡겼던 속주의 관리들은 극심한 부정부패로 유명한 탐관오리들이었다. 모이시아와 트라키아의 총독이던 루피키누스와 막시무스는 새로 이주해온 고트족을 지원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대로 착취하고 괴롭힐 수 있는 호구로 보았고, 고트족을 지원하기 위해 발렌스가 보낸 물자와 돈을 착복하고, 고트족의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치우고, 반항하는 고트족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병크를 저지르고 만다.
이에 격노한 고트족의 족장들이 회합을 가지고 제국에 항의하려 했으나, 루피키누스와 막시무스는 연회를 빙자하여 이들을 몰살시키려는 졸렬한 음모나 꾸미다 실패(....), 가장 강력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프리티게른은 제국 관리들의 음모로 죽을 뻔한 뒤 휘하 고트족과 동료 족장들을 설득하여 궐기하게 된다. 이후 루피키누스가 이끄는 약 1만 규모의 제국군을 마르키아노폴리스 전투에서 프리티게른이 5천 명 남짓의 병력으로 격파하면서, 고트족과 동로마 제국의 전쟁은 그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이때 고트족 반란의 규모를 최대 100만 명까지 보는 견해도 있는데, 물론 비전투인원을 모두 포함했거나 고대 역사가들 특유의 과장이 섞인 표현이겠지만 규모가 어느 정도였건 간에 당시 동로마 제국으로서는 이는 거대한 자폭이 맞았다. 사산조 페르시아에 신경쓰느라 황제 발렌스와 그가 이끄는 정예부대부터 동방 전선에 상주하고 있었고, 고트족을 비롯한 북방민족 출신들이 계속 늘어나던 당시 제국군으로서는 고트족 반란 진압에 열의를 보일래야 보일 수도 없었다. 약탈과 착취에나 능했지 군사적 수완은 쥐뿔도 없었던 속주 총독들의 병크도 한몫했고.
2.3 지지부진한 전쟁, 발렌스 출정
376년 발발한 고트 전쟁은 이후 2년 동안 지리한 소모전을 반복하게 된다. 고트족의 기세는 맹렬했지만 통합적인 지휘체계를 확립하지 못한 점, 그리고 제국의 탐학에 반발했다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뚜렷한 군사적인 전략이 없었다는 점이 원인으로 보인다. 동로마 제국군이 마르키아노폴리스 전투 이래로 계속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물론 발렌스도 그동안 손놓고 있던 것은 아니어서, 쪽팔림을 무릅쓰고(...), 서로마 제국의 조카 그라티아누스 황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라티아누스는 자신이 직접 출정하겠다고 했으나, 당시 라인강 일대에서도 전쟁이 한창이었던지라 프랑크족 출신의 프리게리두스, 리코메르 등의 장군들이 우선 지원군으로 동로마에 보내졌다.
이들 서로마 지원군과 합류한 동로마 제국군은 마르키아노폴리스 근교로 추정되는 아드 살리스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의 보병장관(magister peditum) 트라야누스와 서로마 제국군의 리코메르 등의 지휘로 고트족과 호각에 가까운 싸움을 벌였다. 이는 무승부에 가까운 전투였지만,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의하면 양쪽 모두 피해가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그때까지 무기력한 모습만 보이던 제국군이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 때문에, 고트족의 기세도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
이에 고무된 발렌스 황제는 그라티아누스 황제와 협의하에, 자신은 시리아 일대의 정예부대를, 그라티아누스는 갈리아 일대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합류하여 고트족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로 결정하고 그때까지 머물던 안티오키아를 떠나 378년 5월 30일,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다.
3 전개
3.1 양군 전력
3.1.1 동로마 제국군의 전력
3.1.1.1 편제
발렌스의 군대는 당시 동로마 제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3개 야전군의 대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발렌스 황제를 따라 페르시아 전선에 종군하고 있던 황제 직속의 2개 근위군과, 고트족과의 교전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던 트라키아 군이 그것이었다.
전체적인 규모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황제 직속군단으로 편성된 약 7개 군단의 보병 전력이 중핵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때의 7개 군단이라면 약 5천에서 7천 정도의 규모였다. 여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로 맹위를 떨쳤던 근위기병대 스콜라이와 기마궁수 부대, 그리고 아라비아 지방에서 징병한 경기병대가 합류했다. 다만 근위기병대를 제외하고 나머지 기병대는 스커미쉬 전술에 특화된 부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대대 규모로 추정되는 바타비아(지금의 네덜란드) 출신 용병대와 조지아(그루지아) 일대의 중무장 기병대와 궁수 부대가 가세했다.
3.1.1.2 주요 지휘관
- 발렌스 : 동로마 제국 황제
- 트라야누스 : 동로마 제국의 마기스테르 페티툼(보병장관).
- 빅토르 : 동로마 제국의 마기스테르 에퀴툼(기병장관).
- 세바스티아누스 : 율리아누스의 사산조 페르시아 원정에서도 중임을 맡았던 용장. 이탈리아 주둔군을 지휘하던 중 동로마 제국군에 가세했다. 제국군 수뇌부 중에서도 개전에 가장 적극적인 장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리코메르 : 프랑크족 출신의 서로마 제국군 장군. 그라티아누스의 근위대를 지휘했다. 개전 직전 스스로 인질역을 자임하여 휴전을 이끌어내려 시도했던만큼,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 에퀴티우스 : 발렌스 황제의 친족으로 동로마 궁정의 고관. 원래 그가 고트족과의 협상을 맡아야 했으나, 인질이 될 수도 있다는 위험을 의식하여 거부하는 바람에 리코메르가 대신하게 되었다.
- 포텐티우스 : 콘스탄티우스 2세의 맹장 우르시키누스 장군의 아들. 기병대를 지휘했다. 상당히 젊은 나이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능이 뛰어나 인망이 높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약 40명 정도의 대대장을 비롯한 동로마 제국군의 주요 간부들이 거의 다 참전했다.
3.1.1.3 규모
역사가 워렌 트레드골드는 서기 395년 트라키아 야전군의 규모가 2만 5천여명 정도였고, 테오도시우스 1세 휘하의 제1근위군과 제2근위군의 규모가 도합 4만 2천여 명에 달했던 것을 바탕으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당시 로마군의 규모를 추산해보려고 시도했다.
다만 395년 당시 제국군은 테오도시우스 1세가 고트족과 동맹을 체결하고, 페르시아와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등 온갖 노력을 다해 간신히 재건한 것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거듭된 전쟁으로 피해가 컸던 378년 당시 제국군과는 동일시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총병력 7만에 달하는 저 규모를 그대로 신용하더라도, 각지에 수비대를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발렌스가 7만에 육박하는 대군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당시 동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때문에 현대 역사가들 대부분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 동원된 로마군은 보병 1만에 기병 5천, 약 1만 5천 정도를 하한선으로 최대 3만여 명 정도까지 추산하는 편이다. 병력 자체는 황제가 지휘한다고 하면 최대 10만에서 최소 5만 단위 병력을 연속적으로 동원하던 예전 제국군에 비하면 적은 편이라지만, 기병대의 비율이 보병대 대비 50%에 육박하는 등 상당히 높은 편이고, 또한 대부분의 병사들이 고참병이었다는 기록을 보면, 실제로든 어쨌든 간에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충분히 강력한 부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 휘하에서 단련되었던 서로마 제국군이 원군으로 가세할 예정이었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3.1.2 고트족의 전력
고트족은 기병보다는 보병을 상대적으로 주력으로 운용했다. 다만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등의 기록을 보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은 최대 5천기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기병대를 운용했다고 하고 실제 전투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은 기병대가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트족 부대는 크게 2개 부대로 나뉜다고 여겨지는데, 프리티게른이 지휘하는 테르빙기(후에 동고트 족으로 발전한다.) 부대와 알라테우스와 사프락스 등이 지휘하는 그레우퉁기(후에 서고트 족으로 발전한다) 부대가 그것이다. 다만 숫적으로 프리티게른의 부대가 좀더 많았던 것으로 여겨지며, 알라테우스와 사프락스는 고트족 연합군 기병대 대부분과 소수의 보병대를 지원했다. 고트족 보병대 중에는 알라니 족 부대도 소수 가담했다고 전한다.
암미아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개전 직전 로마군 정찰대는 고트족 부대의 규모를 약 1만 정도로 보고했다고 하는데, 이는 알라테우스와 사프락스 등의 원군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현대 역사가들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 참전한 고트족 부대의 총병력을 1만 2천 명에서 1만 5천 명 사이로 추정한다.
암미아누스를 필두로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이 전투에서 고트족 기병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고, 심지어 이후 수천년 동안 이어지게 될 기병대 중심의 군사적 경향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실제로는 보병대의 비중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것이 이후 발견된 기록들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기병대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은 기병대와 보병대의 공조가 거의 없었던 고트족 지휘체계의 결함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적지 않다.
3.2 전투 경과
3.2.1 전초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군을 정비하던 발렌스 황제는 이탈리아 주둔군을 지휘하던 세바스티아누스 장군을 선발대로 파견하여 트라키아 주둔군을 재편성할 것을 지시했다. 세바스티아누스는 약 2천 규모의 선발된 부대를 지휘하여 고트족을 습격, 하드리아노폴리스로 접근하던 고트족을 밀어내는데 성공했고, 프리티게른은 니코폴리스 근교로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서로마 제국군의 정예부대를 판노니아 일대로 진출시켰으나, 이때 하필이면 라인강 일대에 있던 알레만니 족이 침공을 시도했고, 그라티아누스는 화급히 부대를 소환하여 아르겐타리아(지금의 프랑스 콜마르)근교에서 알레만니 족을 격파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서로마 제국군의 지원군이 동로마로 진군하는데 막대한 차질이 빚어졌고, 설상가상으로 발렌스 황제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세바스티아누스 장군이 승리를 거두고,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알레만니 족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듣고 발렌스 황제가 자기도 이제 공을 세워야겠다면서 교전을 서두른 것이다(......).
마르키아노폴리스로 이미 진군했던 발렌스는 8월 경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세바스티아누스의 선발대와 합류한다. 그리고 8월 6일, 정찰을 위해 파견한 수색대가 고트족의 규모가 1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는 첩보를 보내온다. 고트족의 주둔지는 하드리아노폴리스 북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이때 리코메르 장군은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전갈을 발렌스에게 전한다. 자신이 달려갈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동로마 제국군의 주요 장군들도 이에 동의했지만, 발렌스 황제는 1)적의 규모가 예상보다 적고, 2)서전에서 다른 놈들이 이겼으니 이제 나도 승수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빠져(...), 이들의 요청을 거부하고 개전을 결의한다. 고트족의 실제 규모도 파악하지 못했고, 장거리 행군과 계속된 교전으로 병사들이 지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발렌스는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이었다.
반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였는지는 몰라도, 프리티게른은 로마 측의 정세를 거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8월 8일, 프리티게른은 제국에 강화를 제안하고, 적당한 영토를 보장해준다면 당초 약정했던 협약을 준수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미 공훈에 미쳐있던(...) 발렌스는 이를 단박에 거부해버린다. 전투에 필요한 시간을 벌면서 제국군을 도발하기 위한 프리티게른의 속셈을 전혀 간파하지 못한 그는 결국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3.2.2 운명의 날
8월 9일 아침, 발렌스는 숙영지를 철거하고 하드리아노폴리스를 떠났다. 그러나 이때 고트족은 이미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로마군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로마군은 무거운 군장을 짊어진 채 장장 7시간에 달하는 행군을 강요받게 되었다. 계절은 한여름, 게다가 지형도 구릉이 연이은 곳이어서 병사들의 체력 소모가 심했다. 정예부대로 이루어졌다고 평가되었지만, 달리 말하면 체력적으로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고참병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는 의미기도 했던 점을 감안할 때, 로마군의 이 장거리 행군은 이후 있을 재앙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후에 접어들어 로마군은 지친 상태에서 고트족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진입한다. 이때 고트족은 보병대를 파견하여 고지를 선점하고 있었으며, 그 후방에는 고트족이 이동할 때 사용하는 수레들이 원형으로 포진하고 있었다. 전사들의 처자와 노약자들로 이루어진 이 후방 인원들은 고트족 전사들에게 일종의 배수진 역할을 했다. 발렌스는 이때까지도 고트족이 1만 정도에 불과하다고 믿었지만 프리티게른의 계략으로 로마군의 진군이 지체된 틈에, 고트족은 유리한 지형을 선점했고, 다른 지역에 파견되었던 기병대를 불러올 수 있었다. 따라서 이미 이 시점에서 양군의 전력은 거의 동등한 수준이었다.
로마군이 진군을 개시하자, 고트족은 들판에 불을 질러 열기와 연기로 로마군의 진군을 방해한다. 땡볕 아래에서 몇시간 동안이나 행군을 해야 했던 로마 병사들에게는 실로 괴로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리코메르가 이끄는 사절단이 고트족과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으나, 프리티게른에게 있어 이는 어차피 계략에 불과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로마군은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어야 했지만,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연기와 불꽃에 그을리기까지 하자 로마군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냈다. 더군다나 2년에 걸친 전쟁으로 고트족에 대한 적개심이 강한 상태였고, 고트족의 전력이 별것 아니라는 첩보를 믿고 진군해온 것이기에 적을 얕보기까지 했다. 결국 근위기병대를 선두로 로마군은 고트족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한다.
로마군 좌익이 고트족 민간인들이 있던 고트족 부대의 후방에 진출하는 등, 상당히 격전이 될 듯한 조짐을 보였지만, 로마군은 이미 고트족의 함정에 빠진 상태였다. 그새 돌아온 고트족 기병대가 보병대의 지원 아래 무질서하게 움직이던 로마군을 역으로 포위하고 만 것이다. 지형상 이미 불리한 지점에서 공세를 개시한데다, 체력이 극도로 소모된 상태에서 무거운 갑옷과 방패를 장비하고 싸워야 했던 로마군은 곧 적에게 밀리기 시작했고, 전투는 이내 학살로 돌변했다.
가장 먼저 무너진건 로마군의 좌익이었다. 먼저 좌익의 버팀목인 기병대가 나가떨어졌고 그 다음엔 주력부대가 궤멸되었다. 그들은 고트족의 짐마차 막사와 돌진하는 기병대 사이에 끼여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로마군의 좌익이 무너지자 중앙이 적군의 측면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빽빽한 밀집대형을 이루고 있던 중앙군은 제대로 칼을 빼지도 못하고 우왕좌왕 하다가 무너져버렸다.
다른 주요 지휘관들 대부분이 그러했지만, 발렌스 황제 또한 처참한 운명을 맞이하고 만다. 근위대로부터 버림받고 만 황제는 도주를 시도했지만 고트족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소수의 환관들과 근위병들을 이끌고 도주하던 중 기병대에 따라잡혀 살해당했다거나, 오두막집에 피신해있던 중 고트족의 방화로 불타죽었다는 설이 제기되는 등, 하여간 곱게 죽지 못했다(....).
밤까지 계속된 학살은, 로마군의 3분의 2에 달하는 전력을 몰살시키면서 고트족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트라야누스, 세바스티아누스 등 로마군의 주요 지휘관 전원이 전사했고, 협상 중 탈출한 리코메르 장군과 기병대장 빅토르 장군이 이끄는 소수의 부대만이 하드리아노폴리스로 퇴각하여 참사를 모면했다. 고트족은 이 승리의 여세를 몰아 하드리아노폴리스를 공격했지만 고트족의 피해도 결코 적지 않았고, 공성전에 적합한 전력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로마측에 더 이상의 참사는 없었다.
4 결과
사실 피해 규모로만 보면 과장 섞어 8만이 죽었다는 아라우시오 전투나 5만이 죽었다는 칸나이 전투 등을 비롯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상가는 처참한 패전이 수두룩하지만, 동시대 로마인들에게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가 준 충격은 그런 패전들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일개 장군도 아니고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제국군이 기습도 아니고 정면으로 벌인 회전에서 난민 집단에 불과한 고트족에게 한방에 박살이 나버렸으니 멘붕이 일어난 것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정도의 전력이 있다면 그걸로 훈족을 조질 것이지, 왜 페르시아 상대하기 바쁜 로마군을 작살내나 했을 것이다.
직접적인 피해야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발빠르게 테오도시우스 1세를 옹립하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활약으로 사태가 수습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즉위한 뒤에도 동로마 제국군은 고트족을 순군사적으로 제압한 적이 거의 없다(....). 결국 고트족 수만 명을 외원군으로 받아들이면서 테오도시우스가 고트 전쟁을 수습하기는 했지만, 376년경 고트족이 동로마 제국에 거의 데꿀멍상태였던 것에 비교하면, 이후 고트족과 로마 제국의 역학관계는 제국의 열세가 두드러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쨌거나 디오클레티아누스 등 후기 군인황제들과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의 황제들의 활약으로 계속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한방에 무너져서 명분상으로는 고트족이 제국을 섬긴다고 하지만 사실상 대등한 교섭 관계가 되다시피 했으니까. 로마 제국 붕괴의 시작이라는 후대의 평가도 직접적인 피해보다는 이런 장기적인 문제에 기인한 바 크다.
5 기타
고트족 기병대가 사용한 등자가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아이작 아시모프같은 경우는, 고트족이 훈족으로부터 도입한 등자를 사용하여 강력한 기병대를 운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는 현대 역사가들 대부분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기병의 활약이 워낙 쩔어서 이후 보병이 안습한 신세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교전 자체가 등자를 이용한 기병의 활약이 어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고트족이 기회를 잘 잡았고, 로마군은 가지고 있는 이점은 모두 죽이고 약점만 잔뜩 부풀려놓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순수하게 군사적으로 어떤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기도 어렵다(....).- ↑ 3분의 2를 상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