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헤 전투 상상도. 그냥 '파르티아 궁기병이랑 로마 군단병이 저거 비슷하게 생겼구나' 정도로만 생각하고 보자.
카르헤 전투 | ||
날짜 | ||
기원전 53년 봄 | ||
장소 | ||
카르헤 평원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로마 | 파르티아 |
지휘관 |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수레나스 |
병력 | 추정 보병 약 3만 ~ 4만 명 기병 4000기 | 추정 궁기병 약 9000기 카타프락토이 1000기 |
피해 규모 | 전사 및 실종 2만. 포로 1만 | 1~2천으로 추정[1] |
결과 | ||
로마의 동방 확장정책 제동. 제1차 삼두정치의 붕괴 |
1 개요
카르헤(현재 터키 남동부의 하란)에서 벌어진 로마군과 파르티아군의 전투. 칸나이 전투, 토이토부르크 전투와 함께 로마 사상 최악의 패배로 손꼽히는 전투 중 하나이다. 영어로는 Battle of Carrhae라고 쓰고, '카리'라고 읽는다. 고전 라틴어로 하자면, '카르하에' 정도가 될 것이다. 국내에선 카레, 카라이, 카르하이, 카르헤 등 다양한 표기가 뒤섞여 사용되고 있다.
2 전투 배경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두상.
기원전 1세기, 크라수스는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로 로마를 통치하고 있었지만, 점점 흔들리는 입지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막대한 재력으로 대중과 원로원 의원들의 환심을 사면서 입지를 다졌지만, 당대 로마 시민들이 가장 열광하던 군사적 업적이란 측면에서 경쟁자들에게 현격하게 밀리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젊은 나이에 지중해의 해적을 일소하고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당시 알렉산더 대왕을 의미하는 '마그누스'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천재 장군이었고, 카이사르 역시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갈리아 전체를 정복하면서 막대한 인기와 부를 거머쥐었다.[2] 반면에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을 진압한 공적은, 노예 반란 자체를 쉬쉬하던 로마의 당대 분위기에서 은근슬쩍 묻히게 된다. 당시 원로원은 스페인에서 개선한 폼페이우스에겐 성대한 개선식을 열어주면서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크라수스는 그냥 무시해버린 것이다.[3] 무엇보다도 오로지 정복을 통해서 성장한 정복국가 로마에서 대중들이 크라수스의 노예반란 진압보단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외 정복에 더욱 열광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결과 크라수스는 새로운 군공(軍功)을 강렬하게 원하게 되었고, 그 목표물로 선택한 것이 동방의 떠오르는 강국 파르티아였다. 그때까지 파르티아는 로마에 특별히 적대행위를 한 적이 없었고, 오히려 양국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따라서 로마 내에서도 선제공격에 대한 반발이 심했지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크라수스의 군사 원정을 지지하면서 원로원의 허가가 떨어졌다.
크라수스가 군단을 이끌고 시리아에 도착해 본격적인 침공 준비를 하자 깜짝 놀란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는 로마에 전쟁 자제를 촉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파르티아는 왕위 계승을 두고 벌어진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데다가, 강대국 로마와의 대결은 가능한 한 피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전쟁을 결심한 크라수스와 기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는 사신의 태도 때문에 회담은 별 효과 없이 '오가는 욕설 속에 싹트는 험악한' 분위기만 조성되고 말았다. 플루타르크의 기록에서는 이 상황을 묘사하며, 파르티아 사신이 "만약 파르티아를 침공한 로마군이 로마 원로원에서 보낸것이면 샤힌샤[4]께서는 자비를 베풀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이 군대가 망령 들린 크라수스의 탐욕때문에 온것이라면 샤힌샤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돌아가게 해줄것이다." 라는 서신을 가져와서 크라수스 앞에서 읽었다고 전한다. 한마디로 좋게 말할때 침략을 중단하고 돌아가라는 것. 화가 난 크라수스는 서신을 무시한다.
동맹국인 아르메니아의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6000명에 달하는 기병 지원을 약속하면서, 크라수스에게 평지 대신 파르티아 기병들이 활약하기 어려운 아르메니아의 산악 지대를 통해 이동하라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이를 거절하고 사막 지대를 가로지르는 길을 택했다. 이는 최단 루트를 통해 파르티아의 중심 도시 셀레우키아를 노리기 위한 목적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것이 크라수스의 최대 오판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크라수스가 진군해 오자 파르티아 측도 대응에 착수, 국왕 오로데스 2세는 아르메니아 공격에 나서는 한편 장군 수레나스를 파견해 크라수스의 침공군에 대응하도록 했다. 아르메니아 본토가 공격받아 아르메니아의 기병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아르타바스데스 2세가 로마군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격파한후에 곧바로 지원해주러 가겠다면서 이 문제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파르티아를 향해 진군해 들어갔다.
당시 부관이자 이후 ‘카이사르 암살 사건’으로 유명해지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진격하자는 주장을 했지만 거부당했고, 현지 아랍 부족장인 아리암네스의 안내에 따라 사막지대를 가로질러 진군했다. 아리암네스는 과거 폼페이우스의 원정에 협력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크라수스는 그를 신뢰했지만, 아리암네스는 이미 파르티아 측의 사주를 받은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크라수스의 군대는 파르티아 기병대가 활약할 수 있는 최적 지형인 ‘사방이 뻥 뚫린 평탄한 사막지대’에서 수레나스와 조우하게 되었다. 로마군 장교 대부분은 물가에 캠프를 치고 하룻밤 쉰 다음 공격할 것을 원했으나,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는 지체하지 말고 진격할 것을 주장했다. 크라수스는 아들의 주장을 따랐고, 양군의 본격적인 대치가 시작되었다.
3 전투
3.1 양군의 전력
로마군은 7개 군단, 총 2만 8천~3만 5천 명 정도의 로마 군단병과 4천 명의 경보병으로 총 3~4만 명 정도의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경보병의 대다수는 궁병으로 추정되며, 로마 군단병들은 모두 로리카 하마타(로리카 항목 참조), 글라디우스, 커다란 방패를 갖춘 중장보병대였다. 기병 전력으로는 3천 명 정도 되는 아랍 및 소아시아 경기병들, 그리고 카이사르 휘하에서 복무했던 푸블리우스가 데려온 용맹한 갈리아 귀족 중무장 기병[5] 1천 명으로 총 4천 명[6]이 있었다.
파르티아군은 9천 명 정도의 경무장한 궁기병과 1천 명의 4미터 이상의 장창과 철퇴,장검으로 중무장한 카타프락토이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병은 전혀 없었으며, 낙타 1천 마리와 짐수레 200여 대로 구성된 화살 보급 부대가 있었다.[7]
3.2 배치 및 진행 과정
크라수스의 의견에 따라, 로마군은 거대한 네모꼴 진형으로 배치되었다. 보병들이 바깥쪽에 줄지어 배치되고, 그 안에 보급품 수송대와 기병대가 위치했다. 이는 파르티아의 대규모 기병대에게 측면을 잡히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진 배치였으나, 기동성의 현저한 저하를 가져왔다.
수레나스는 처음에는 카타프락토이를 이용한 공격을 시도했다. 로마군의 시야 범위에 접근한 카타프락토이들이 위장용으로 입고 있던 겉옷들을 벗어던지고[8] 번쩍이는 갑옷을 과시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정면 돌격을 시도했지만 애초에 숫자가 1천 명밖에 안 되는 데다 로마군이 한치의 동요도 없이 굳건하자 수레나스는 카타프락토이들을 뒤로 물리고 궁기병들을 내보냈다.
넓게 퍼진 궁기병들은 순식간에 로마군의 사방을 에워싸고 화살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로마군 측의 경기병과 경보병들이 맞서 싸웠으나 엄청난 기세로 쏟아지는 화살의 비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 다음에는 군단병들이 근접 전투를 위해 전진했지만 역시 뾰족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군단병들은 큰 방패와 갑옷을 입어 화살은 잘 막아낼 수 있었지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궁기병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 때 등 뒤로 활을 쏘면서 도망가는 파르티아 기병들 때문에 '파르티안 샷'이라는 말이 생겼다. 게다가 방패로 미처 가리지 못한 팔, 다리에 화살을 맞는 부상병들이 속출했다. 귀갑 진형(테스투도)을 갖추면 화살은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 대신 기동성과 근접 전투력이 현저히 저하되는 바람에 카타프락토이들의 돌격에 큰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 사람들은 3만 5천명이나 되는 로마 중무장 보병을 1천명이나 1천명을 약간 상회하는 카타프락토이 기병이 어떻게 큰 타격을 줬냐고 의문을 제기 할텐데 그건 대략 다음과 같다. 로마군 조직은 대대, 중대, 소대로 이루어진 조직인데, 한낮의 사막의 고열에다 탈진하니까 카타프락토이 기병의 강력한 장창 돌격공격을 받은 소대는 우왕좌왕 했고 그것이 중대와 대대에까지 악영향을 미쳐서 조직이 연쇄적으로 무너진 것이다. 어떤 자료에서는 파르티아 카타프락토이 기병의 4미터 이상의 장창이 로마군 중무장 보병2명을 한꺼번에 꿰뚫었다는 말도 있으며 자주 있거나 쉬운일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물론, 일격에 로마군 보병군단이 전부 박살난건 절대 아니지만 앞서 언급한 사막과 갈리아, 에스파냐 기병을 능가하는 카타프락토이를 처음 접한 병사들의 공포를 느끼는 등 여러 복합적 요소가 로마군에 안좋은 결과를 다수 발생시켰다.그리고 사실 기병은 경무장을 해도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 당연하게 말의 무게만 해도... 파르티아 카타프락토이 기병이 돌격해서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고 금방 물러났다. 뒤이어서 다시 파르티아 궁기병대의 중장거리 합성궁 사격이 계속되었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크라수스는 파르티아군의 화살이 다 떨어지기를 기다렸으나, 수레나스는 낙타와 짐마차들을 이용해 기병들에게 화살을 공급하고 있었다.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크라수스는 별동대를 조직했고, 푸블리우스가 1천 명의 갈리아 중무장 기병들을 포함한 별동대를 이끌고 파르티아군을 추격했다. 하지만 그들은 카타프락토이들의 정면 돌격을 당했고, 곧이어 궁기병들이 측면과 후면을 둘러싸 퇴로를 차단했다. 갈리아 중무장 기병들은 기마전이나 낙마한 상황에도 카타프락토이의 마갑(馬甲)이 미처 가려주지 못하는 말의 배를 창으로 찌르는 등 투혼을 발휘하며 끝까지 싸우려했지만 전력의 열세로 1천기 모두가 전멸을 면치 못했다. 푸플리우스도 이때 전사했다. 일설에는 갈리아 중무장 기병의 전멸 직후에 자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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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위험에 처한 것을 파악한 크라수스는 전진을 명령했지만, 화살을 보급받은 궁기병들의 역습으로 오히려 진형이 흐트러지고, 여기에 카타프락토이들이 다시 장창 돌격을 가하여 더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창대에 매달린 아들의 잘린 머리를 보게 된 크라수스는 공황상태에 빠졌고 그는 서둘러 남은 군대를 이끌고 근처의 고지대로 이동하여 하룻밤을 보냈다. 이때 수천 명의 부상병들을 전장에 버려 두고 퇴각했으며, 이들은 모두 파르티아군에게 죽임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다음날 양군은 교착 상태에 놓였고, 수레나스는 크라수스에게 회담을 제안했다. 크라수스는 이상한 분위기를 알아채고 응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로마 병사들이 크라수스가 회담을 하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협박하여 억지로 회담에 응한다. 크라수스가 눈치챈 그대로 이 회담은 로마군의 숨통을 확실히 끊기 위한 수레나스의 유인책이었다. 결국 크라수스는 협상장에서 장교들과 함께 살해당했고, 파르티아인들은 그의 탐욕을 조롱하기 위해 그의 목구멍에 녹인 금을 들이부었다.[9]
남은 로마군은 도주를 감행했지만 이미 사막 깊숙히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화살 과녁 신세가 되면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많은 수가 죽거나 붙잡혔다. 거의 4만에 달하던 로마군 중 2만 명이 죽고 1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파르티아의 피해는 미미했다.[10]
4 이후의 경과
카르헤 전투의 패배로 로마는 상당한 인명 피해를 겪은 동시에 군단기(軍團旗)를 여러 개 빼앗겼는데, 이는 엄청난 굴욕이었다. 또한 삼두정치가 중 하나였던 크라수스가 순식간에 증발하면서 남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권력을 두고 본격적으로 대결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공화정의 종말로 이어졌다.
한편 1만 명 가량의 패잔병을 이끌고 시리아에 도착한 카시우스는 몇 년 후 벌어진 파르티아의 공격을 잘 막아내서 키케로의 칭찬을 들었다. 카르헤 전투에서 파르티아군은 로마군을 겁주기 위해서 거대한 북을 치고 시끄러운 음악 소리를 내면서 수많은 깃발들을 휘날리며 난리를 쳤는데, 이 때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비단 깃발을 로마군이 처음 보게 되어 로마에 비단이 처음 알려졌다고 한다.
카르헤 전투의 승전과 동시에 오로데스 2세는 아르메니아군을 격파하고 아르메니아를 점령했다. 한편 수레나스는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공이 너무 컸던 바람에 오히려 오로데스 2세의 의심과 질투를 사게 되었다. 파르티아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아니라 대귀족들과 유력 부족들이 왕과 연합한 형태의 국가였다. 중세 유럽의 봉건제 국가와 비슷할 정도. 따라서 오로데스 2세가 카르헤 전투 이후 수레나스의 급부상을 몹시 경계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결국 그는 오로데스 2세에게 처형되었다.(일설에는 축하 만찬에서 오로데스2세가 미리 준비한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죽었다고 한다.) 이후에 오로데스 2세는 파르티아 군 전체의 지휘권을 장악하여 차후 시리아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말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내전을 정리한 뒤 이 패배에 복수하기 위해 파르티아 원정을 추진, 드디어 원정을 떠날 채비를 끝마치나 출발하기 3일 전에 암살당했다. 그 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 패배의 복수를 명분으로 쳐들어오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했다. 안토니우스는 크라수스의 전례를 참고하여 아르메니아의 산악 루트를 이용해 아제르바이잔의 도시 프라스파를 포위했지만, 파르티아군의 공격으로 후위 부대와 공성 무기들이 큰 피해를 입자 별 소득 없이 철수했다. 그 뒤 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꺾고 패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협상을 통해 군기와 생존 포로들을 인도받는 선에서 파르티아 측과 타협하였다.
카르헤 당시 포로로 잡힌 로마인들은 파르티아의 동방 변경인 마르브(현 투르크메니스탄 지역)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농노 겸 변경 수비에 동원되었다. 이후 중국의 한(漢)이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 로마인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이것이 중국과 유럽인 사이에서 최초의 접촉이라고 한다.
카르헤 전투로부터 20여 년 후 중국 간쑤성 융창 지역에 리첸이라는 마을이 나타났고, 21세기인 현대에 이 마을 주민들의 유전자를 조사한 결과 주민중 2/3 가 백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호머 덕스 교수는 이 마을이 파르티아에 포로로 끌려갔다 어찌어찌 중국까지 흘러간 크라수스 군단 병사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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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투의 의의
카르헤 전투의 압도적인 결과 때문에 당시 로마와 파르티아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로마군은 야전에서 파르티아군을 당해내지 못한다'라는 오해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카르헤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은 가장 큰 요인은 크라수스의 오만과 무능, 그리고 수레나스의 뛰어난 용병술이다. 이후 파르티아와 로마 사이의 전적을 보면 파르티아가 딱히 우세한 것도 아니었다. 기원후 1세기 동안에만 파르티아의 수도가 3차례나 약탈당할 정도였으니…. 중보병 중심의 로마군과 기병 중심의 파르티아군 사이의 차이점은 확실하지만, 각자 일장일단이 있으며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요인은 그 외에도 매우 다양하다.
한편 기세등등하던 로마군이 처참히 발린 것, 그리고 이후 파르티아가 로마와의 전적에서 카르헤 전투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수레나스를 시대를 앞서간 천재 비슷하게 보는 시각도 일부 있다. 그리고 이 천재를 질투한 오로데스 2세가 수레나스를 잡아 죽였다는 설명이 곁들여진다. 그러나 수레나스의 군대와 전술은 전형적인 유목민 군대의 스웜 전술이었다. 후대 파르티아군이 로마군을 상대로 수레나스와 버금갈 정도의 큰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후대의 로마군 지휘관들 중에 크라수스만큼 무능한 자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카르헤에서의 압승을 가능케 한 가장 큰 원인은 아랍 부족장을 매수하여 크라수스를 보병이 기병을 상대하기에 최악의 장소로 끌어들인 것이다. 물론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으로 끌어들이고, 싸우기도 전에 적의 전력을 소진시켜 절망에 빠뜨린 수레나스의 전술은 훌륭했다. 사막이라는 지형에서 고열건조하다는 기후와 병사들의 심리를 무시하고 물 보급을 무시한 것도 크라수스의 최대 실책 중 하나였다.
또 시오노 나나미는 파르티아의 궁기병들이 사용한 합성궁을 뭔가 대단한 신무기처럼 치켜세우는 경향도 있는데[11], 이 합성궁은 파르티아는 물론이요 서아시아 유목민 궁기병들이 수백 년 동안 사용해 온 것이다. 거기다 이미 살라미스 해전 이전의 스키타이인들도 합성궁을 사용했던 건 어떻게 설명하겠나? 이 합성궁으로 쏜 화살이 로마 군단병들의 방패를 뚫어버렸다는 말을 들먹이며 파르티아군이 화살만 쏴서 로마군을 전멸시킨 것처럼 묘사하는 예도 있는데[12],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직사로 쏘지 않는 한 로마군의 두터운 방패가 화살에 그리 쉽게 뚫리진 않는다. 뚫는다 해도 뚫린채로 박히는 것이지 만화처럼 무조건 뚫고 나가는건 절대 아니다(시오노 나나미의 말에는 확인되지 않은 거짓말이 많으니 절대로 그대로 믿지말자). 화살의 역할은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혼란시키며 부상을 입히는 등 다분히 보조적인 것이며, 실제 직격타를 날리는 것은 카타프락토이의 역할이었다. 당대 로마군은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에서 파르티아의 카타프락토이와 비슷하게 무장한 아르메니아군 카타프락토이 기병들을 상대로 승리한 적이 있는데, 그 때는 기병이 기동하기 힘든 지형에 그들을 몰아넣은 뒤 압도적인 군단병 물량으로 근접전을 강요하여 무너뜨린 것이었다. 그러나 카르헤에서는 궁기병과 카타프락토이가 로마군을 포위한채 자유롭게 기동하면서 합동 전술을 구사하는 것을 전혀 막지 못했고, 그 결과 로마군의 참패가 된 것이다. 거기에 약탈에만 신경쓰느라 군사 훈련을 제대로 하지않은 크라수스의 실책도 무시할 수 없다.
어쨌든 파르티아가 포에니 전쟁 승리 이후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며 유일 초강대국이 돼 가던 로마의 확장을 최초로 저지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후 로마 제국은 파르티아, 그리고 파르티아 이후에 들어선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수백 년 동안 전쟁을 벌이며 승리와 패배를 주고받았지만, 결국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거나 멸망시키지 못했다. 즉 카르헤 전투는 향후 수백 년 동안 로마 제국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되는 이란 국가의 등장을 알리는 서곡이 된 것이다.- ↑ 단 돌격 임무를 맡은 카타프락토이는 상당한 사상자를 냈을 것을 추정되며, 궁기병들도 로마군 갈리아 기병들이 시도한 돌격전에 휘말려 입은 피해가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 ↑ 이전까지 카이사르는 크라수스과 로마의 주요 재력가들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었으나, 갈리아에서 쌓아올린 막대한 부로 빚을 모두 청산하게 된다. 카이사르에 대한 크라수스의 영향력이 떨어진건 명백.
- ↑ 크라수스가 강력하게 요구해서 나중에 개선식이 열리게 된다. 다만 폼페이우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소규모였다.
- ↑ 왕중왕,대왕이라는 뜻.
- ↑ 철제갑옷과 투구를 갖춘 갈리아 유력자 출신 기병들이다.
- ↑ 모두 비싼 돈주고 고용한 용병들이다. 로마에선 말이 신분의 상징이라할 정도로 고가이기에 기병을 양성하기가 힘들었다. 로마군에서 말을 타고 다니는건 지위가 높은 고급 지휘관들이나 전령들이다. 그래서 기병은 비싼 돈을 주고 용병을 고용할수 밖에 없었다. 이것도 비용문제땜에 많은수를 고용하지도 못했다. 로마 이탈리아 반도 자체의 말 생산지 부족탓도 있었다.
- ↑ 일부 미확인 자료에서는 카타프락토이 기병 1200명~1500명 정도에 궁기병 1만이라는 자료도 있었다.
- ↑ 파르티아의 카타프락토이들은 위장 겸 장식용으로 화려한 겉옷이나 망토들을 걸쳤다. 화려한 옷이 어째서 위장용이 되는가 의아하지만, 사실 파르티아의 주력부대인 궁기병들은 대부분 밝은 색조의 옷을 입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섞여들어 눈에 잘 띄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 ↑ 협상장에서 파르티아군이 크라수스를 잡으려고 하자, 로마군 장교가 상관이 포로로 잡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직접 찔러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 ↑ 당연하게도 검이 주무기인 군단병으로 말의 무게+장창으로 돌격하는 카타프락토이를 상대하기는 쉽지 않았으며, 궁기병이야 활로 장거리 사격하며 접근전을 피했기에 당연하겠지만. 그리고 궁기병도 몽골 기병처럼 호신용 칼 한두 자루는 있어서 카르헤 전투처럼 적이 완전히 붕괴 되어 추격할 때는 가지고 있던 칼로 퇴각하던 적병을 공격했을거라는 어느정도 근거있는 자료도 있다고 한다.
- ↑ 아예 수레나스가 합성궁에 쇠붙이를 붙여 신무기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 ↑ 실제로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카르헤 전투 당시 수레나스가 카타프락토이는 하나도 없이 오로지 궁기병만 운용했다고 서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