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안 쟈노 드 몽세

나폴레옹의 26인 원수
장 란조아생 뮈라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앙드레 마세나장 바티스트 베시에르에두아르 모르티에
루이 니콜라 다부니콜라 장드듀 술트미셸 네
장 바티스트 주르당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피에르 오주로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기욤 마리 안느 브륀
도미니크 카트린 드 폐리농장 마티유 필리베르 세뤼리에아드리안 쟈노 드 몽세
클로드 빅토르오귀스트 마르몽자크 마크도날
니콜라 우디노루이 가브리엘 쉬셰로랑 구비옹 생 시르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엠마누엘 그루시
파일:28QRb3D.jpg

초대 코네그리아노 공작,
1754년 7월 31일에 출생했다. 1774년에는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지원해 군인이 되었다. 혁명이 일어나자 평민 출신이었는데다가 열렬한 혁명의 지지자 였기 때문에 출세가도를 달릴 수가 있었다. 그후 1794년 혁명전쟁 당시에는 스페인군과 맞서 싸워 스페인군을 모두 프랑스 본토 밖으로 내몰아 버린 공을 치하받아

준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엔 왕당파와 모의를 했다는 혐의를 받아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이후 백수로 지내다가 1800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전역을 일으키자 다시 기용되어 이탈리아 전역에서 큰 공을 세웠다. 1804년에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원수로 서임되었다.1812년에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감행하자 몽세는 반대했고, 아예 원정 자체에 따라가지 않았고 바로 해고 크리를 당한다. 하지만 1814년에 나폴레옹은 다시 몽세를 파리수비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몽세는 나름 그 역할을 잘 수행하였으나 파리 수비군을 지휘하던 오귀스트 마르몽이 이기기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항복하는 바람에 결국 몽세는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에는 어떤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적인 행보를 보이다가[1] 1854년 세상을 떠났다.
  1. 딱 한 번 그가 정치적 의사를 냈던 적이 있었는데 옛 동료원수인 미셸 네의 처형재판에 참석 자체를 안했고 그래서 루이 18세에게 작위를 박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