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나폴레옹 전쟁/인물
François Joseph Lefebvre (1755.10.25 ~ 1820.9.14)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이자 나폴레옹이 임명한 26인 원수 중 한 명. 초대 단치히 공작.[1]
르페브르는 알자스의 루파흐에서 경기병 연대 병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774년에 프랑스군에 입대했으며,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프랑스 방위군"[2] 하사로서 혁명에 참가했다. 1793년에는 여단장으로 진급했고, 플로이루스 전투에서 한 축을 담당했다. 그러나 잘 해놓고도 적을 추격하지 않았다고(…) 우샤르 장군이 처형당한 뒤, 1797년 9월에 그는 상브르-뫼즈 강 방면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1799년 그는 주르당이 이끄는 다뉴브 방면군의 선발대를 맡아 지휘했다. 그리고 같은 해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파리군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그는 나폴레옹을 적극 지원했다.
1800년 나폴레옹은 르페브르를 프랑스 상원의원으로 지목했고, 1804년에는 원수봉을 받았다. 르페브르는 독일.폴란드 원정 당시 무장 근위대 사단을 지휘했고, 1806년의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에서는 제국 근위대의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이듬해 1807년에는 단치히를 공격해 점령했고, 그 공으로 단치히 공작이 되었다.
1808년 르페브르는 반도전쟁에 참가했고, 1809년에는 에크뮐 전투와 바그람 전투에서 바이에른 군단을 지휘했다. 그러나 같은해에 그는 티롤리아 지방의 민병대장 안드레아스 호퍼[3]에게 무참히 깨졌다.
그 후 1812년부터 1814년까지 그는 고참 근위대를 지휘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슬슬 몰락해 가던 때, 상원에서 나폴레옹의 퇴위를 가지고 투표하게 되자 찬성표를 던졌고, 루이 18세에 의해 귀족원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 백일천하를 시작하게 되자 다시 나폴레옹을 지원하러 달려갔고, 그 때문에 제2차 왕정복고 당시 귀족원에서 제명당했다. 하지만 여전히 원수직은 유지할 수 있었다. 1819년에 루이 18세로부터 다시 귀족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받았고, 1820년에 죽었다. 죽은 뒤에는 Père-Lachaise에 앙드레 마세나 근처에 묻혔다. 향년 6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