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모르티에

나폴레옹의 26인 원수
장 란조아생 뮈라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앙드레 마세나장 바티스트 베시에르에두아르 모르티에
루이 니콜라 다부니콜라 장드듀 술트미셸 네
장 바티스트 주르당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피에르 오주로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기욤 마리 안느 브륀
도미니크 카트린 드 폐리농장 마티유 필리베르 세뤼리에아드리안 쟈노 드 몽세
클로드 빅토르오귀스트 마르몽자크 마크도날
니콜라 우디노루이 가브리엘 쉬셰로랑 구비옹 생 시르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엠마누엘 그루시
파일:Attachment/에두아르 모르티에/모르티에.jpg

Édouard Adolphe Casimir Joseph Mortier
(1768.02.13 ~ 1835.07.28)

26인 원수들 중 유일하게 모든 원수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

1 개요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 초대 트레비즈 공작.[1]

다부, 마세나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뛰어난 군단 지휘관이자 명참모로 소수의 병력으로 훌륭히 임무를 수행했다.

2 생애

2.1 늦은 출발,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활약

모르티에는 르 카토-캄브레시에서 샤를 모르티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들을 상인으로 키우기 위해 영국으로 보내 영어 교육을 시켜줬다. 이 때의 경험으로, 모르티에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될 무렵, 모르티에는 릴 시에서 상업에 종사했다. 그 때문에 다른 원수들과 황제 나폴레옹과는 달리 "비교적 늦게 군대에 입대했다는 것"이다. 만약 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는 상인으로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1789년, 대혁명이 발발하고 곧이어 혁명 전쟁이 일어났다. 모르티에는 1791년 9월에 국민 자원군에 입대했다. 아버지가 지방의 유지였기 때문에, 모르티에는 손쉽게 중대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모르티에는 북부 벨기에 전선으로 보내진다.

프랑스 혁명전쟁에서 1792년1793년에는 북동 방면 전선과 네덜란드 방면군에 종군하면서 92년 9월에는 소령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북부 방면군 사령부의 참모진의 일원이 된다. 1794년, 모르티에는 플뢰뤼스 전투에 참여하여 생 피에르 요새공략을 총지휘하였으며, 1796년에는 대령으로 승진했다.

그는 참모 보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며, 기병대로의 전출을 신청했으나 그의 상관이었던 앙투안 발랑 장군은 참모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시민동지 모르티에는 자신이 맡은 임무를 정확하고 뛰어나게 수행하며 애국심에 불타고 있다. 그는 나에게 자신감과 확신을 주는 참모다."

발랑 장군의 보고서에 나온 말이다. 모르티에 본인은 참모직을 벗어나고 싶어했지만 그 능력은 참모에 걸맞는 것이었다.

1794년에 모르티에는 플뢰뤼스 전투에 참가하며 그 해 가을 내내 생 피에르 요새 포위 공략을 총지휘한다. 다음 해인 75년 여름에는 대령으로 승진했다.

모르티에는 참모나 부관보다는 더 능동적이고 실전에 참가하는 역할을 강하게 바랬고, 결국 1796년에는 그 소망이 실현되어 5월부터 8월까지 3개월 동안 15번이나 교전에 참가해 연대 규모의 병력을 일선에서 지휘했다. 그 외에도 뮤즈, 라인 전역에서 싸웠다.

1799년, 제 2차 대프랑스 동맹과의 전쟁이 시작될 때 육군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그의 부대는 얼마 안가 술트 장군 휘하 사단에 편입되었으며 그 대신 1800년에 3월에 모르티에는 갑작스럽게도 수도방위사단(제 17 파리 사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대단히 빠른 진급이다. 이 때 임명은 갑작스러운 것이었음에도 그는 매우 뛰어난 행정 능력을 보여준다. 당시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왕당파와 공화파 등 나폴레옹에 적대적인 세력들은 쿠데타 또는 선동 등을 일삼으며 나폴레옹을 타도하려 했다. 모르티에는 철저히 이들의 움직임을 제압하고, 언론을 통제했다. 그가 보여준 행정 능력은 마렝고 전역에 출정하고 돌아온 나폴레옹을 감탄하게 했다.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는 마세나 군 소속[2]으로 참가했으며, 좌익 8,000명을 맡아 지휘했다. 아미앵 화약이 깨지자 1803년 5월 처음으로 단독 지휘하여 하노버 공국으로 쳐들어가, 하노버군을 갈아버리면서 6월 4일에 수도 하노버를 점령해버렸다. 놀란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해 다음달에 아틀렌부르크 조약이 맺어졌고, 1804년에는 나폴레옹이 임명한 18원수[3]들 중 하나가 된다. 이 때 그의 나이 서른 여섯이었다.

1805년의 울름 전역에서 그는 1개 군단을 지휘했는데, 이 때 뒤렌슈타인 전투에서 최대한의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전투를 무승부로 이끌었다.[4]

이외에도 1806년에는 독일.폴란드 원정에 참가하여 다시 하노버와 독일 북동부 공략에 나섰다. 이 때 그의 작전 행동으로 영국의 프러시아 내 채권과 은행 자본 등에 큰 피해를 주는 전과를 올린다. 1807년에는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대육군 군단을 지휘했고, 스웨덴령 포메라니아의 스트랄순트 공방전, 콜베르크 공방전에 참가했다.

1808년 모르티에는 트레비소 공작[5]이 되었고, 1809년 이베리아 반도 전쟁 당시 대육군 5군단을 맡아 지휘, 사라고사를 포위했고, 오카냐(Ocaña)에서 스페인군 60,000명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탈라벨라 전투[6]에서, 모르티에는 마세나와 연합하여 영국군을 패퇴시켰으나 후퇴하는 영국군을 추격하지 않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이 때, 그는 낙오하거나 부상당한 영국군 병사들을 치료해주고 보살펴줬다. 훗날, 웰링턴 공작은 모르티에에게 이일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편지를 보낸다.

1810년, 바다호스 전투에서 9천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스페인군 1만 3천명과 격돌하여 단 400명의 사상자만을 내며 스페인군 5천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모르티에는 본국으로 돌아와 청년 근위대의 모집과 편성, 훈련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떠났을때 모르티에는 청년 근위대를 이끌고 황제를 수행했다. 나폴레옹이 퇴각할 때, 모르티에는 후미에 남아 1만명 정도 남은 청년 근위대와 함께 본대의 퇴각을 엄호하고 러시아군의 추격을 막아냈다. 그동안, 그는 비스켓과 브랜디로 끼니를 때우며 청년 근위대와 함께했다. 또한 그는 자기 막사 안에 초병을 불러들여 불을 쬐게 했다고 한다. 그의 부대는 최후까지 러시아에서 싸우다가 귀국했는데, 이때 청년 근위대의 숫자는 처음 출발했을때의 5분의 1인 불과 2천명 정도였다.

1813년,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대패했다. 이때 모르티에는 온힘을 다해 프랑스군의 패배를 막으려고 했다. 다른 장군들은 도주하거나 투항하는 데 비해, 모르티에의 군단은 황제를 위해 최선을 다해 항전했고, 황제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엄호했다. 1814년 동맹군이 프랑스로 진격해오자, 나폴레옹은 필사적으로 프랑스 방위전을 감행했다. 동맹군이 파리까지 몰려오게되자, 원쑤마르몽, 미셸 네 등 나폴레옹과 오랫동안 함께했던 부하들이 배신했지만, 모르티에는 끝내 나폴레옹을 배신하지 않고 그와 함께 싸웠다.

2.2 백일천하와 그 후의 뒷이야기

모르티에는 나폴레옹이 퇴위해 엘바섬으로 유배간 후에야 부르봉 왕가에 투항했다. 1815년 나폴레옹이 돌아오게 되자, 모르티에는 루이 18세가 파리를 무사히 빠져나가도록 도왔다. 다부는 모르티에에게 루이 18세를 체포하라고 권고했으나, 모르티에는 이를 묵살했다. 루이 18세가 영국으로 무사히 망명하자, 모르티에는 그제서야 나폴레옹을 찾아가 합류했다. 다부 등은 이런 모르티에의 행위에 분개하여 비판을 가했지만 나폴레옹은 모르티에의 행동을 신사적이라고 평가하고 아무 말 없이 받아줬다.

모르티에는 다시 청년 근위대의 지휘권을 받았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 바로 전날, 모르티에는 심한 신경통으로 인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결국 모르티에는 워털루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다.

워털루 전투가 끝난 후, 제2차 왕정복고로 다시 돌아온 부르봉 왕가로부터 "이 새퀴는 신용 불량임"이란 소리를 듣고 다부와 똑같이 안습스런 생활이 펼쳐지나...했는데 1819년에 다시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한참 잘 지내다가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쫓겨나고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오르자 총리 겸 육군장관을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1835년에 파리 시내에서 거행되는 긴 사열식을 참관하던 중 코르시카인 혁명가 주세페 피에스키가 루이 필리프를 암살하려고 쏜 총에 대신 맞아 순직했다.[7] 그의 나이 67세.

몇 주후 모르티에의 장례식에서, 루이 필리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피 흐느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공신으로 우대하고 후손들에게 후한 보상을 해줬고 범인인 피에스키는 고문과 구타를 거치며 단두대로 사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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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카토 캉브레지에 있는 모르티에 동상

3 평가

모르티에는 훌륭한 군단 사령관이었으며 명참모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능력을 완전하게 발휘할 수 있을 만큼 지휘권이나 병력이 주어진 적이 없었다. 언제나 소수의 병력과 제한된 지휘권만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는 그 적은 병력만으로도 언제나 좋은 성과를 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전후처리나 민간행정 능력은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 가장 뛰어났으며, 청년 근위대를 운용, 지휘한 행적 또한 주목할 만 하다.

그는 "항상 신사답게 행동했고, 명예를 중요시"해 적국 군인들조차 그를 존경했다. 또한, 영국인들은 그의 탁월한 영어실력을 보고는 그에게 호감을 품었다고 한다.
  1. 정식명칭은 1st Duc de Trévise.
  2. 헬베티아 방면군.
  3. 에두아르 모르티에, 장 란, 조아생 뮈라,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앙드레 마세나, 루이 니콜라 다부, 장 밥티스트 베시에르, 니콜라 장드듀 술트, 미셸 네, 아드리안 쟈노 드 몽세, 장 밥티스트 주르당, 피에르 오주로,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 기욤 마리 안느 브륀,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 도미니크 카트린 드 페리농, 장 마티유 필리베르 세뤼리에
  4. 그러나 어떻게 보면 프랑스의 패배였다. 황제의 독수리 깃발을 빼앗기고 4천 이상의 병사들과 47명의 장교들이 포로로 붙잡혔으니 말이다(…). 근데 상대가 그 유명한 미하일 쿠투조프였다. 어찌보면 상대운이 나빴던게 아닐까.
  5. 위에서는 트레비즈 공작이 되었다고 써 놓았는데, Trévise는 프랑스식 발음이다.
  6. 전술적으로는 프랑스군이 패배했지만, 전략적으로는 프랑스군의 승리였다.
  7. 나폴레옹이 코르시카 출신이긴 하지만 루이 필리프는 뭐 상관도 없는 부르봉 왕가 출신이다. 모르티에가 나폴레옹의 심복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