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누엘 그루시

나폴레옹의 26인 원수
장 란조아생 뮈라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앙드레 마세나장 바티스트 베시에르에두아르 모르티에
루이 니콜라 다부니콜라 장드듀 술트미셸 네
장 바티스트 주르당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피에르 오주로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기욤 마리 안느 브륀
도미니크 카트린 드 폐리농장 마티유 필리베르 세뤼리에아드리안 쟈노 드 몽세
클로드 빅토르오귀스트 마르몽자크 마크도날
니콜라 우디노루이 가브리엘 쉬셰로랑 구비옹 생 시르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엠마누엘 그루시
파일:Attachment/엠마누엘 그루시/그루시.jpg

Emmanuel de Grouchy (1766년 10월 23일 ~ 1847년 5월 29일)

"Où est Grouchy!?"

"Where is Grouchy!?"
"그루시는 어디 있는 거야!?"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임명한 마지막 원수. 원쑤동맹의 한 명.[1]

1 개요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이자 나폴레옹이 임명한 26인 원수 중 한 명. 초대 그루시 후작.[2]

나폴레옹의 원정에서 여러 전장을 전전하며 큰 활약을 보였으나, 사단장 내지는 기병대장 이상의 임무는 맡아보지 못했다. 그는 충성심과 실력을 보인 군인이었지만, 원수 직책을 소화하기엔 모자란 인물이었다.

2 일생

2.1 대혁명 이전

혁명 프랑스군의 장교들 중에서는 특이하게도 후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구체제(앙시앙 레짐)의 귀족출신이다. 1766년 수도 파리에서 프랑수아 자크 드 그루시 후작의 장자로 태어났다. 왕립군사학교에 입학해서 포병으로 근무를 시작했으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기병대로 병과를 바꿨고, 우수한 근무성적으로 근위대에 들어간다.

그의 아버지는 루이 15세의 시종직을 수행하기도 했고 왕족의 서자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궁정에서의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루시는 일찍부터 혁명사상을 감화되어 꾸준히 옹호했으며 혁명 전까지 위험 인물로 찍히고 진급에도 차질을 빚었다.

2.2 혁명 이후

혁명 이후 공화파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1792년에 혁명전쟁이 발발하자 고위 귀족이었음에도 그루시는 기병 연대장으로 복직, 곧 이어서 소장(Maréchal de camp)으로 진급하여 남동부 최전선으로 갔다. 그리고 1793년에는 방데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크게 활약했고, 그 전공으로 사단장까지 진급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 시대에 출신 성분이 문제가 되어 일시적으로 군에서 나와야 했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고 이내 복귀할 수 있었다. 1795년에는 아일랜드 원정군의 참모로서 종군했으며, 혁명군의 아일랜드 원정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다. 1798년에는 사르데냐 국왕의 퇴위와 더불어 피에몬테의 군정 총독으로서 부임했다. 또한 1799년에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사단 지휘관으로서의 훌륭한 역량을 보여주어 그의 능력을 입증했다.

그러나 노비 전투에서 패배해 퇴각하는 프랑스군의 사이에 섞여서 퇴각하던 그루시는 14군데에 부상을 입고 포로로 붙잡혔다. 그 후 곧 석방되어 그는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당시, 이에 소극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했지만, 나폴레옹에게도 중용되어 호엔린덴 전투에서 또 다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루시가 새 체제에 순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나폴레옹 휘하에서 여러 차례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1805년의 오스트리아 원정, 그 후의 독일-폴란드 원정, 그리고 1808년의 반도 전쟁에 참가했다. 특히 독일-폴란드 원정 중 벌어진 아일라우 전투와 프리들란트 전투에서는 크게 활약했다. 1809년에는 이탈리아군의 기병대 지휘관에 임명되어 이탈리아 부왕 외젠 드 보아르네의 빈 진군에 함께했다. 1812년의 러시아 원정 당시, 그루시는 대육군의 네 개 기병군단을 지휘했고, 스몰렌스크와 보로디노의 격전에서 기병대를 지휘했으며, 모스크바 후퇴 당시 나폴레옹은 그루시에게 호위대의 지휘를 맡겼다. 그렇지만 화려했던 그리고 그것밖에 없던 그루시의 기병대장 역할은 1813년 나폴레옹이 그루시를 군단장으로 올리면서 끝났고, 게다가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었다.

1814년에는 프랑스 방위 전쟁에서 방어전을 지휘하며 분전했지만 크라온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 후 퐁텐블로 조약에 따라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자 완전히 찍혀서[3] 나폴레옹의 휘하 요직 중 하나였던 추격기병대 지휘관의 직책을 박탈당하고, 군에서 퇴출당했으나,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하자 나폴레옹에게 달려가 재기용되었고, 원수봉을 받음과 동시에 귀족원의 일원이 되었다. 그 후 나폴레옹을 따라 나폴레옹과 부하들이 다 같이 삽질한 워털루 전투에서 예비 기병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2.3 그루시는 어디 있는 거야!?

인생을 바꾼 전쟁.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리니 전투에서 패배하고 달아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는 임무를 그루시에게 맡겼는데, 그루시는 프로이센군의 주력을 따라잡지 못하고 와브르에서 블뤼허가 남겨놓은 미끼부대를 상대하느라 시간만 낭비했다. 그루시는 이들을 열심히 추격하며 어떻게든 박살내려 했지만, 6월 17일에는 여전히 이 미끼부대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워털루 근처에서 포성이 들려오고, 이에 부하들이 "워털루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일단 퇴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라고 의견을 내놓았지만,

우리의 그루시는

"임무는 끝까지 수행해야지"

라고 하며 3만 3천의 귀한 병력을 데리고 와브르에서 숨바꼭질 놀이를 하며 해맸다.

이에 반해 나폴레옹은 그루시가 프로이센군을 잘 처리할 걸로 기대했다가 프로이센군이 워털루에 나타나자 기겁했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긴다.

"Où est Grouchy!?"

"Where is Grouchy!?"
"그루시는 어디 있는 거야!?"

황급히 그루시군에게 워털루로 오라는 전령을 보냈지만, 전령은 끝내 그루시에게 도착하지 못했고, 나폴레옹이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에게 샌드위치 신세로 털리는 동안 그루시는 와브르의 프로이센 미끼부대를 열심히 추격한 끝에 와브르 전투에서 섬멸하는 쾌거를 올렸다.[4]

그렇게 신나게 와브르에서 프로이센 군대를 박살낸 그루시는 전투에서 이긴 후에야 "아, ㅈ됐구나"라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이 이끌던 3만 3천의 장병 및 워털루의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통솔해 파리로 귀환, 다부에게 자신의 지휘권을 반납했다.

2.4 영구 까임권을 수여받다

나폴레옹 몰락 후, 그가 열렬한 혁명지지자였다는 것이 드러나자 동족혐오를 한 부르봉 왕가 및 귀족들은 군사재판에 세워 그를 사형에 처하려고 했지만 그루시는 미국으로 망명했고, 거기서 쭉 생활하다가 1822년에야 프랑스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적이었던 왕당파의 조롱과 함께 싸운 보나파르트파의 멸시속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5]

7월 혁명으로 즉위한 루이 필리프는 그루시를 후작으로 복권시키고 명예 원수봉을 다시 쥐어주었다. 그러나 그루시의 실추된 명예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워털루 전투 패배는 내 탓 아니라능~!!"[6]라는 회고록을 여러개 써내다 1847년에 생테티엔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워털루에서의 삽질로 그에게 남은 것은 "Où est Grouchy!? 그루시는 어디 있는 거야?" 뿐이었다.[7]

사실 이런 평가는 그루시로서는 좀 억울할 수 있다. 워털루에서의 오판은 분명 그의 책임이 맞지만 그가 잘할 수 있는 보직이 있음에도 전혀 엉뚱한 보직을 맡긴 나폴레옹의 실책이 더 크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의사보고 동물 치료하라그러면 잘할까? 물론 잘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제대로 못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클 것이다.

3 관련 링크

  1. 단, 이것은 워털루 전투에서의 실책 때문이다. 그루시는 다부와 함께 열렬한 나폴레옹의 지지자였다.
  2. 정식 명칭은 1st Marquis de Grouchy.
  3. 귀족출신인데도 혁명을 지지하고 나폴레옹에게 충성한 것. 그와 비슷한 사람으로 몇명이 있다. 예를 들어 다부라든지, 다부라든지, 다부라든지(…).
  4. 그러나 사실 섬멸도 섬멸이 아닌 것이 와브르에 있던 프로이센 병력은 17,000명 정도였고 대포숫자도 그루시가 40문 정도 많았고 병력은 이미 1만6천이나 많았다. 그럼에도 피해는 둘 다 비슷비슷했고 프로이센군이 패배하고 이리 저리 도망치긴 했지만 전사자나 부상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1만6천의 병력이 더 많았다면 아예 완벽히 쓸어버릴 수도 있을텐데 그렇지 못했다는 건 그루시가 역시 원수라는 직책을 수행하기엔 부족한 인물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
  5. 심지어, 대육군의 동료들은 그루시가 나폴레옹을 배신했다고 가정하기까지 했다. 이쯤되면 정말 죽고 싶었을 듯.
  6. 이 사람 잘못한 게 아닌 건 맞다.
  7. 하지만 그루시는 당시 휘하의 병력들을 안전하게 살려서 프랑스 영토 내로 무사 귀환시키기는 했다. 당연히 절망에 빠진 나폴레옹은 이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졌거니 생각했지만, 제국 의회나 수많은 기회주의자들의 훼방과 자기 자신의 의욕결여로 인해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