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의 건국자 칭기즈 칸의 4남인 툴루이의 막내 아들로 몽케 칸, 쿠빌라이 칸, 훌라구 칸의 동생.
어릴 때부터 큰 형인 몽케의 총애를 받았고 어머니인 소르칵타니 베키는 아예 같이 살 정도로 크게 아꼈다고 전해진다.
1259년 몽케 칸이 죽자, 형제인 쿠빌라이와 훌라구가 각각 원정에 나선 틈을 타 아리크부카는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해 대부분의 몽골 귀족들의 지지[1]를 받아 대칸에 추대된다
이에 반발한 쿠빌라이가 개평부[2]에서 독자적인 쿠릴타이를 소집해 자기 휘하의 몽골인, 만주족 출신 장수들의 지지를 받아 대칸에 추대되면서 정통성 문제를 놓고 내전이 벌어진다. 아리크부카는 명분과 정통성[3]에서 앞섰지만 결국 중원에 세력을 잡고 있어 풍부한 물자를 지원받을 수 있었던 쿠빌라이가 승리하게 되면서[4] 아리크부카를 비롯한 반 쿠빌라이 세력은 제거되고 쿠빌라이는 비로소 정식으로 제5대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아리크부카는 용서를 받아 몽골 고원 서부를 통치하다가 1266년 사망한다.[5] 그가 차지하지 못한 몽골 제국의 대칸 지위는 124년 뒤 명나라에 밀려나 완전히 몰락한 원평제(쿠빌라이 칸의 후손)를 아리크부카의 후손인 조리그투 칸이 살해하고 차지하게 된다.
애초에 군사력, 정통성에서 앞섰던 아리크부카가 진 것은 그가 그럴만한 깜냥이 아니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전투에서는 승리했는데 포로들을 잔혹하게 대했고 이 때문에 많은 인망을 잃었을 뿐더러[6] 내분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계속 편을 잃었고 끝내 많은 일족들이 싸움에서 패배하기 시작하자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된다. 배신한 자들을 쫓느라 중앙아시아를 활보했고 안 그래도 세력이 줄어가는데 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기까지 했으니 애초에 정치력이나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이 칸에 걸맞지 않은 인물이었던 셈이다.- ↑ 주로 오고타이 가문, 차가타이 가문 세력이 아리크부카를 지지하였다.
- ↑ 훗날 원의 수도 상도로 오늘날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위치했음
- ↑ 몽골인들은 막내에게 자기 재산을 물려주는 풍습이 있어 아리크 부카는 몽골 본토를 다스릴 수 있었고 또한 쿠빌라이가 칭기즈 칸이 경계한 한화 정책을 펼치면서 대다수의 몽골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몽케가 공공연히 자기 후계자로 아리크부카를 찍어둔 걸 가신들도 전부 알았다. 다만 가산과 가권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말도 있으니 참고하자. 링크
- ↑ 이 때 고려 원종이 태자 시절에 몽골 제국과의 강화를 위해 카라코룸으로 가던 중 쿠빌라이를 만났는데 이 만남이 몽골과 고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자세한 것은 여몽전쟁 참조
- ↑ 독살 의혹이 있고 정황상 그럴 가능성도 높다.
- ↑ 이게 타민족이면 상관없는데 같은 유목민족에게 그랬다는 것이 문제다. 실제로 그의 할아버지인 칭기즈칸이 쟈무카를 비롯한 다른 경쟁자를 이길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관대함'이었다는 걸 감안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