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고려)

" />?width=50
고려의 역대 국왕
23대 고종 왕철24대 원종 왕정 임시국왕 영종 왕창
임시국왕 영종 왕창24대 원종 왕정(복위)25대 충렬왕 왕거
묘호원종(元宗)
시호충경순효대왕
(忠敬順孝大王)
능묘소릉(昭陵)
왕(王)
전(倎)/정(禎)
일신(日新)
배우자정순왕후(靜順王后)
아버지고려 고종
어머니안혜왕후(安惠王后)
생몰년도음력1219년 3월 19일 ~ 1274년 6월 18일
양력1219년 4월 5일 ~ 1274년 7월 23일 (56세)
재위기간음력1259년 6월 30일(임인일) ~ 1269년 6월 21일(1차)
1269년 11일 ~ 1274년 6월 18일(2차)
양력1259년 7월 21일 ~ 1274년 7월 23일(15년 2일)

1 소개

고려의 제24대 왕. 자는 일신(日新). 휘는 정(禎). 본래 휘는 전(倎)으로 고종의 장남이다. 시호는 순효대왕(順孝大王)으로 원이 준 시호는 충경왕(忠敬王). 고려 왕사에서 종(宗)의 묘호를 받은 마지막 임금이다. 휘에 대해선 고구려고국원왕과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원종이 백승현(白勝賢)의 주청대로 자신의 휘를 고대 주나라의 성군 강왕(康王)의 이름자랑 같게 바꾸려다 하필 그 이름이 제 명에 못 죽은[1] 고국원왕의 휘와 같다는[2] 걸 알고 기겁해서 그냥 옛날 이름 그대로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2 태자 시절

몽골 제국과의 전쟁 중이던 1235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1259년 기나긴 몽골과의 전쟁 끝에 강화를 맺기 위해 태자 신분으로 몽골에 가, 당시 몽골의 실력자이자 화북지방의 총독이었던 쿠빌라이 칸을 만났다. 본래는 사천성 방면에서 원정 중이던 몽케 칸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는데, 몽케가 전쟁에서 급사하는 바람에 칸위가 공백이 되었다. 중국 화북에 있던 쿠빌라이와 몽골 초원 카라코룸을 지키던 아리크부카 사이에 칸위 계승 분쟁이 벌어졌고 고려 태자 일행은 둘 중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처했다. 어찌보면 한민족의 운명을 갈랐다고 할 수 있는 이 선택에서 태자는 쿠빌라이를 택한다. 신의 한 수 [3]

쿠빌라이는 기뻐하며 "고려는 머나먼 나라로 그 옛날 당태종이 쳐도 굴복시킬 수 없었던 나라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태자가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물론 이는 우리가 아는 고구려를 말하는 것인데 사실 고구려도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로 바꿔서 멸망할 때까지 사용했으니 그 고구려와 이 고려는 이름도 고려국으로 같은 걸 후대 사람들이 구분을 위해 앞의 고려를 시기에 관계없이 이름을 고구려로 통일했을 뿐이다. 쿠빌라이 입장에선 이 고려 태자의 방문을 반길 수 밖에 없었다. 칸위를 놓고 대립하는 상황에서 수십년간 전쟁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고려가 스스로 자신의 진영을 찾아와 제후국을 청하면서 명분에서 크게 앞설수 있었기 때문이다. # 내용 참조

쿠빌라이는 태자를 크게 환대하고 강화를 논의했으며 때마침 고종이 사망해 고려 국왕도 공석이 되자 쿠빌라이는 원종을 국왕으로 책봉해 고려로 보냈다. 그리고 향후 고려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한 가지 약속을 하게 된다. 바로 불개토풍(不改土風). 고려는 몽골의 속국이 되더라도 고유한 풍습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이었다. 이 약속은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도 불리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쿠빌라이(세조)의 유훈이라서 후대의 칸들도 건드릴 수 없었다. 동양 왕조, 특히 유교 문화권에서는 선대 군주의 제도나 유훈은 함부로 거스를 수 없었다. 특히 태조나 세조처럼 왕조에서 중요한 임금들의 유훈은 거의 불문법 역할을 했다.

덕분에 고려는 원의 간섭을 받는 한편으로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긍정적으로만 사용된 건 아닌데 권문세족의 기득권 유지 명분으로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원 간섭기에는 모수사패와 압량위천을 통한 농장의 확대와 양인 수 감소가 심각했는데 노비제 개혁을 통해 이를 개선하기 위해 원에서 환리길사라는 관료를 파견했을 때 권문세족이 노비제 개혁을 저지시킨 명분이 바로 이 세조구제였다. 노비제는 동국(고려)의 고유한 습속이니 세조의 유훈에 따라 바꿀 수 없다는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결국 제대로 된 개혁 목소리가 나온 건 공민왕 시기였다. 참조

3 재위 기간

원종이 즉위할 무렵은 그 기나긴 무신 집권기가 끝나던 시기로 최씨 정권의 마지막 수장 최의가 살해되고 새로운 실권자인 김준이 집권하던 시절이다. 사실 원종이 몽골에 입조하고 있을 때 고종이 죽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 있어서 위험할 뻔했다. 바로 김준이 원종의 동생인 안경공 창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종의 유언에 의해 고려에 남아 있던 태손 심[4]이 왕위를 대신하게 만들었고, 결국 이듬해에 몽골과 강화를 맺고 돌아와서 정식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1269년 태자 심을 몽골로 보내 친몽 정책과 개경 환도를 시도하다가 김준을 죽이고 무인 집정자가 된 임연에 의해 일시적으로 폐위되었다. 이때 잠시 즉위한 것이 이전에도 왕위에 거론이 되었던 안경공 왕창. 영종 항목 참조. 그러나 마침 귀국 중이었던 태자 심이 이 소식을 듣고 몽골로 다시 돌아가 쿠빌라이에게 이 소식을 알리게 되었고, 결국 다시 복위하게 되었다. 그리고 몽골로 가서 직접 쿠빌라이와 만나서 일의 자초지경을 알리게 되고 동시에 몽골의 황족과 세자 심과의 혼인을 추진하게 된다. 그리고 개경 환도를 시도하게 되는데, 때 마침 임연이 병으로 죽고 새롭게 집정자가 된 임연의 아들 임유무를 그의 측근인 홍문계, 송송례를 회유하여 결국 죽이게 하는데 성공하고 무신정권을 무너뜨린다. 그 후 귀국과 동시에 개경 환도를 하게 된다.

하지만 서경(평양)에서는 최탄 등이 또 반란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의 54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의 6성을 들어 원나라(쿠빌라이가 원나라라는 국호를 쓴 것은 1270년)에 투항하고 말았는데 이 때 원은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여 이 지역을 직할통치하기에 이른다. 원종은 이를 돌려달라고 계속 쿠빌라이에게 요구했으나 쿠빌라이는 이를 듣지 않아 결국 원종이 죽을 때까지 이 영토를 돌려받지 못한다. 이 지역은 1290년 충렬왕 시대에 돌려받는다.

어쨌든 개경으로 환도했으나 근본적으로 무신 정권의 친위대였던 삼별초가 고려 정부의 친원 정책에 반발하여 결국 배중손을 중심으로 강화도에서 봉기하여 진도와 제주도를 전전하며 원나라와 고려에 저항했다. 이들은 왕족 승화후 왕온을 즉위시키고 서해, 남해안을 전전하며 막강한 해상세력을 구축했다. 또한 고려를 거점으로 한 일본 원정에 쓰일 함선을 파괴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 함선들이 자신들을 토벌할 때에 쓰일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원나라의 흔도와 고려의 김방경을 위시한 여몽연합군에게 토벌되었다.

이 외에도 일본 공격 방침을 세운 쿠빌라이의 요구로 고려는 일본 원정을 위한 함대를 만드는 데 국력을 쏟아부었으며 또 '결혼도감'을 설치에 원나라로 가는 공녀를 모집하기 시작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한탄이 극에 달했다.

실로 안습으로 향하던 시기로 이를 지켜보다가 1274년 향년 56세로 승하했다. 고려의 정식 묘호인 '종'을 쓴 마지막 군주가 되었으며 이후의 왕들은 30대 충정왕까지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모두 '충(忠)'자를 붙이게 되었다. 원종 생전에 충경왕(忠敬王)'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그의 아버지 고종은 충헌왕(忠憲王) 시호로 다시 올렸다. 또 '태자'가 '세자'로, '(朕)'이 '(孤)'로, '폐하'가 '전하'로 바뀐 것도 원종 때가 시작으로, 왕실의 칭호가 모두 격하된 시대가 바로 이 때다. 이렇게 제후국의 격으로 격하된 칭호들은 이후 500년이 지난 1894년(조선 고종 31년) 갑오개혁 때에 와서야 되돌려진다. 왕실의 칭호 뿐만 아니라 각종 관직명도 이전까지는 공후백자남 오등작을 썼지만 원종 이후로 격하된다.

4 원 간섭기의 시작

원종 치세는 한국사의 한 '치욕'으로 남아 있는 '원 간섭기'를 연 시대이다.

그런데 정작 이후 고려 말이나 조선 사대부들의 평가를 보면 원종에 대해서는 동정적이다 못해 상당히 호의적이다. 무신 정권을 수습한 군주이고, 당시 몽골의 세력이 강했는데 원종은 치욕을 감수하고 나라의 보전을 꾀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이냐라는 식의 평가가 대부분. 청나라에 무작정 대항하다가 병자호란 맞고 털린 인조보다는 낫다는 맥락인가

다소 의외인 대목일 수도 있지만 당대 세계 최강국인 몽골과 장기전을 벌였음에도 직할 통치를 면한 점 자체는 나름 인정해 줘야 할 부분이다. 쿠빌라이 칸이 약속한 "불개토풍(不改土風)"으로 고려는 고유 풍속을 유지하고, 자치국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 세조의 유지를 이후의 몽골 칸들도 바꾸지 못하였다[5]. 원종 또한 치욕임을 알았으면서도 더 이상의 전란으로 백성들을 더 고단하게 하기보다는 몽골에 복속하는 것을 선택한 점은 나름대로 백성을 생각했을지도 모르며 이 때문에 고뇌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뭐 거의 코버넌트하고 전쟁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일 정도로 수많은 왕조와 수도들이 몽골에 갈려버렸으니.

사실 무신정권 주도 하에 벌어진 대몽항쟁은 말이 좋아 대몽항쟁이라고 불러줄 뿐이지 그 실상은 무신정권은 안전한 강화도에 앉아서 조세나 강탈해가고 본토의 백성들은 조세는 조세대로 뜯기고 몽골이 쳐들어오면 약탈당하고 학살당하는 게 일이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강화를 맺는 게 확실히 현명한 선택이긴 했다. 하다못해 쿠빌라이 칸 대신 다른 계승자를 지지했다면 작게는 고려 왕실, 크게는 한민족 전체의 존망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운이 따라준 감은 있지만 그의 이런 줄서기는 결코 그냥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5 기타 창작물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서 등장한다. 능력치는 시대가 시대인지라 안습하다. 정치력, 외교력 좀 높여줘야하는 것 아닌가

부하로는 김경손, 김방경만 있을뿐.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원종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고려사절요에 실제로 사용된 표현(不得其死)이다.
  2. 주 강왕과 고국원왕은 모두 이름이 쇠(釗)이다.
  3. 물론 사료에서는 쿠빌라이를 선택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사천 육반산에서 아리크 부카가 있는 몽골 초원과는 반대 지역인 카이펑 쪽으로 움직였다는 것만 봐도 쿠빌라이를 선택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4. 원종 사후 충렬왕으로 즉위한다.
  5. 다만 한국 학계에서 몽골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바꾸지 못한' 게 아니라 '바꾸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실제로 몽골 제국은 고려뿐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그 지방의 풍습을 대체로 인정해주었으며, 일 칸국 같은 경우는 아예 페르시아의 종교였던 이슬람을 국교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즉 왕조의 입장을 제하고 나면, 고려가 엄청난 특별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