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on Ludwig August von Mackensen (1849년 12월 6일 ~ 1945년 11월 8일)
1 소개
빌헬름 2세와 독일 제국 장군들. 합성사진이라서 방향이 좀 어색하다. 맨 뒷줄에서 왼쪽으로 첫번째에 피켈하우베를 쓰고 서 있는 사람이 마켄젠. 그 옆에 역시 피켈하우버를 쓰고 있는 사람은 1차대전 발발 당시 참모총장이던 소 몰트케.
안톤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독일어: Anton Ludwig August von Mackensen, 1849년 12월 6일 ~ 1945년 11월 8일)은 아우구스트 마켄젠(August Mackensen)으로 태어난 독일의 군인이자 원수(Generalfeldmarschall)이다. 빌헬름 2세 40회 탄생일을 기념하여 1899년 1월 27일에 귀족에 서임되었고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2 생애
2.1 제1차 세계대전 이전
1849년 프로이센 왕국 작센 주 비텐베르크 근교 달렌베르크(Dahlenberg) 근교 하우스 라이프니츠(Haus Leipnitz)에서 태어났다. 농장의 관리인이었던 부친은 그가 가업을 잇기를 바래서 1865년에 할레에 있는 김나지움으로 보냈다. 1869년에 Leib-Husaren-Regiment Nr. 2에 자원입대했고, 보불전쟁에 참전해 2급 철십자 훈장을 받고 소위로 승진하는 등 공을 세웠다. 제대하고 나서 한때 할레 대학을 다녔으나 1873년 다시 군에 들어가 빌헬름 2세의 군사사 교사를 맡기도 했으며 이때의 인연으로 빌헬름 2세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으며 참모본부에서 복무(1891년~1893년)하면서 슐리펜 계획의 창안자인 슐리펜 백작(당시 참모총장이었다)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후 Leib-Husaren-Regiment Nr. 1, Leib-Husaren-Brigade, 단치히에 주둔하던 31사단을 지휘했으며 1908년에 제17군단의 군단장이 되어 대전 발발 직후까지 지휘했다.
2.2 제1차 세계 대전
제 1차 세계대전 시기에 그는 그의 참모장 한스 폰 젝트와 함께 독일 제국의 전략가로 명성이 높았다[1]. 1914년 8월 탄넨베르크 전투에 참전하고, 그 해 11월 제9군 사령관이 되어 세르비아 왕국을 정복했다. 이듬해 4월 제11군 사령관으로 옮겨 고를리체를 함락시키며 러시아 전선을 돌파[2], 이 전공으로 원수로 승진했다. 이후 세르비아 전역에서 마켄젠 집단군(독일 제11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3군, 불가리아 제1군)을 편성해 세르비아의 저항을 분쇄하는 데 성공했지만 세르비아군이 알바니아로 퇴각하여 프랑스에 의해 재무장되어 발칸 전선에 재투입되는 것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1916년에 루마니아가 참전하자 1개월만에(...) 루마니아 왕국을 탈탈 털고는(...) 종전 때까지 루마니아 군정 총독으로 있었다.
2.3 전간기 그리고 말년
마켄젠의 90세 생일을 축하하러 온 히틀러와 함께. 좌측 프로이센 기병원수 예복을 입은 노인이 마켄젠.
1918년의 휴전협정 이후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에 억류되어 있다가 이듬해 귀국하였고, 1920년에 전역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 반대하였으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 등처럼 정계에 진출하지는 않았다. 1933년에 헤르만 괴링은 그를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으로 임명했다. 나치 시대에 그는 황제빠군주제 지지자로 남아 있었으며 간혹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그의 기병 원수 군복을 입고 등장하기도 했다. 1945년 11월 8일 96회 생일을 얼마 앞두고 하노버 주에서 사망하였다. 즉 나치 독일의 패배까지 싹 다 보고 나서 죽었다는 것. 불쌍해라(...) 독일의 통일과 1차 세계대전의 패전, 대공황, 안슐루스, 2차 세계대전의 패전, 연합국의 분할통치까지 본 독일 근현대사의 산증인...좀 만 더 살았으면 동서분단까지 볼 뻔했다.
3 트리비아
- 마켄젠 자체가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보니 알려져 있지 않지만(...) 파울 폰 힌덴부르크보다 2년 늦게 태어났고(1849년생) 보불전쟁 당시에 자원입대까지 했던 사람이 힌덴부르크보다 12년을 더 살아 1945년까지 살았다.
- 두 번 결혼(Dorothea von Horn (1854–1905), Leonie von der Osten (1878–1963, 1908년 재혼))해서 4남 1녀를 두었는데(모두 전처 Dorothea von Horn의 소생) 그의 3남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에베르하르트 폰 마켄젠(1889-1969)는 2차대전 시기 국방군 장성으로 상급대장까지 진급했으며 동부전선과 이탈리아에서 전공을 세웠다.
-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시나리오 시작 당시 독일 제국의 육군사령관으로 있다가 은퇴 이벤트가 뜨며 리타이어한다.
- ↑ 물론 현대 한국 대중들
이라고 해봤자 1차대전에 관심 가지는 사람은 소수 역덕이나 밀덕 정도지만에게 있어서 이름이라도 잘 알려진 이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나 에리히 루덴도르프,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정도(...) - ↑ 그러나 애초 동맹군이 목표로 했던 러시아 주력군의 포위섬멸은 러시아군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 마켄젠을, 그리고 나레프 강 유역에 힌덴부르크를 오랫동안 묶어놓는데 성공하면서 달성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