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리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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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lieffenplan(독일어)

1 개요

아무리 훌륭한 전투 계획이라도 첫 포성이 울리는 순간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린다.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1905년 12월 작성해 제1차 세계대전 초반의 양상을 결정지은 독일의 전쟁 계획. 제2차 세계대전프랑스 침공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 계획이다.

빌헬름 2세 즉위 뒤 공격적인 대외정책으로 러시아 제국과의 동맹이 결렬되자, 프랑스는 1892년 러시아와 불러동맹을 체결해서 독일은 양면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이에 독일 참모본부는 이런 불리한 여건을 타개하려고 전쟁 계획 수립에 착수한다. 당시 독일군 참모본부는 러시아의 전근대적인 행정체계와 부실한 철도수송망을 고려해서 예비군의 동원, 편성, 훈련, 최전선까지의 수송까지 최소 2달 이상(6주 이상)이 걸리리라 예상했다. [1] 따라서 러시아 전선에는 최소한의 병력만 배치해서 견제하고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여 러시아를 막는다. 그와 동시에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서 먼저 프랑스를 39일만에 박살내고 42일차에 점령을 끝낸 뒤 주력군을 빠르게 동부전선으로 돌려서 러시아를 상대한다는 계획을 구상한다.

프랑스를 치기 위해 슐리펜은 보불전쟁 당시 격전지인 스당 등의 중부전선 지역을 회피하고 우익에 전력을 집중, 대우회를 통해 파리를 북부에서 포위한 다음 프랑스군을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프랑스도 보불전쟁으로 상실한 실지인 알자스-로렌 확보를 위해 우익(독일측의 좌익)으로 주력을 투입한다는 제17계획을 세운 상태였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헛점을 찌른, 설정만으로는 잘 짠 계획이다. 정작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독일 본토로 하는 공세야말로 프랑스로서는 가장 안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럴 가능성은 적다라 판단했었다. 프랑스가 제17계획을 만든 까닭은 독일이 차마 중립국벨기에를 못 침공하리라고 확신해서였다. 더불어 당시 독일의 예비군 동원 능력은 프랑스를 훨씬 상회했으니 전쟁 발발시 즉각적인 공격으로 평시 전력을 최대한 강력하게 써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이 계획을 간략하게 간추리면,

  • 전선을 양쪽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선 프랑스와의 전면전에 집중해야 한다.
  • 일단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승부를 본다. 그 사이에 전력의 10% 가량을 동부로 돌려 최대한 러시아의 공세를 지연시킨다.
  • 오스트리아(B계획, R계획)를 내세워 러시아(A계획, G계획)를 막는다.
  • 러시아의 전력이 예상밖으로 세서 전선을 고수하기 힘들면, 동프로이센과 쾨니히스베르크는 내준다. 러시아 놈들을 우리 영토 깊숙히 끌여들여 시간을 번다.
  • 프랑스를 박살낸 뒤엔 남은 전력을 동원하여 러시아를 이기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황제의 깃발을 꽂자!

이 계획이 나온 1905년 당시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한테 털리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독일은 전력의 10%만으로도 러시아군을 충분히 막아낼 만하다고 봤다.

2 문제점

병력 수송 등 여러 문제점이 있으나 가장 크게 작용한 건 小 몰트케[2]의 수정안(1911)이었다.(마른 전투 이후 몰트케는 해임되고 팔켄하임이 임명되었다.)

애초에 슐리펜 계획은 단기결전을 염두한 것이었다.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듯 슐리펜 계획에서의 독일은 우익 5개군을 네덜란드, 벨기에, 아르덴느 지역으로 대우회시키고 좌익 2개군은 전략적 후퇴를 통해 프랑스군의 주력부대를 유인하여 포위섬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小 몰트케가 슐리펜 계획에 초를 쳤다. 그는 수정안을 제시했는데 결론적으로 군사력 집중의 원칙의 이점과 슐리펜의 함정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중립국인 것을 고려하고 영국의 전쟁 불참 방안을 강구하는 것을 생각하던 小 몰트케는, 전 전선에서 동시에 승리하는 것과 러시아의 빠른 군사력 회복에 따라 서부전선의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우익과 좌익의 병력 비율을 7:1에서 3:1로 변경하였고 독일 1,2군은 18개에서 13개 군단으로 축소하여 군사력 집중의 원칙의 이점을 포기했다. 동부전선에서도 승리하기 위해 우익 병력(4,5개 군단)을 일부 동부 전선으로 전환하였고, 우익 전선 후방에 있던 6개 후비군단(예비대)을 좌익 지원 가능 위치로 이동시키면서 우익의 군사력이 슐리펜 계획을 달성할 수 없게 되도록 만들었다.

2.1 계획시

먼저 '42일'이라는 시간 안에 프랑스를 잡아내야만 했고, 프랑스의 자금지원으로 러시아가 철도망을 확충하면서 실제적인 시간제한은 갈수록 짧아졌다. 이 때문에 계획의 유연성이 아주 떨어져 1번 발동하면 멈추거나 바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실제 계획(소 몰트케의 수정안)을 따를 때 여실하게 드러났다. 제1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 빌헬름 2세가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3]에게 계획 변경을 요청했지만, 소몰트케는 수많은 시간표로 서로 이은 계획을[4] 그렇게 단시간 안에 못 바꾼다고 답변하며 계획을 그대로 밀어부쳤다. 이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 그 날 밤, 뒤늦게 황제 빌헬름 2세가 "영국과 타협할 수 있다. 군대를 멈춰라!"라고 명하자 小몰트케는 우울해하며(정확히 하자면 반쯤 넋이 나가서) 이렇게 답했다. "폐하, 이미 시작했습니다." 이건 이미 못 멈출 수준까지 왔다는 뜻이었지만, 사실 정말로 그 순간 독일군 일부가 룩셈부르크의 국경을 넘었다.

이러한 경직성 때문에 영국의 참전을 불러오는데, 개전 초 영국은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략하지 않는다면 대륙의 전쟁에 끼어들 의사가 약했다. 개전 초 프랑스의 영국 참전을 위한 외교적 노력은 애처로울 정도.[5] 그러나 독일은 예정한 작전 수행을 위해 당시 중립을 지키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까지 쳐들어갔으니 영국은 독일에 개전을 선포한다. 영국 해군육군이 제1차 세계대전 수행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하면 스스로 패망의 원인을 불러들인 꼴. 게다가 슐리펜 계획(小몰트케의 수정안)은 영국의 불참을 강구하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시점에서 계획은 -더 이상 말해 뭐해....국 끓여먹겠지~

게다가 그 당시의 현실도 녹록치가 않았다.

  • 대규모의 물자를 철도로 날라야 하는데, 철군시 철도파괴는 상식적으로 하는 일이었고 철도지점 중 중요한 곳은 요새가 이미 있는데다 철도복구 부대는 편성도 제대로 안한 상태였다. 따라서 철도복구 능력이 전진하는 병사의 속도를 못따라갔다. 끝내 후방에서 대량의 물자가 부패, 파손하는 사이 주 보급을 마차와 몇 대 안되는 자동차, 인력, 현지약탈로 충당했다. 이런 현지약탈, 학살 등으로 독일군은 훈족과 비교받는 등 이미지가 크게 떨어졌고, 이는 전쟁 기간 사이 외교전에서도 상당한 손해를 유발했다. 특히 미국과의 외교전에서 이 효과가 커서 네덜란드를 거친 교역의 확대에도 실패하고 각종 외교적 실책을 저지른 끝에 미국의 개입까지 불렀다.
  • 이 먹을 마초의 수송계획은 없었고, 마초는 현지약탈로도 못 보급할 만큼 소요량이 많았다. 결국 개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병대에 말이 다 굶어죽어서 사람만 남거나, 전투용으로 못쓸 만큼 말들이 쇠약해져 버려 낭패를 봤다.
  • 계획의 주력이었던 우익부대는 도보로 벨기에를 관통해서 북부 프랑스와 파리 근처를 지나는 대장정을 펼친 끝에 파리를 포위하는 역을 맡았으나, 짧은 제한시간에 매일 마라톤 풀코스를 전투하면서 도보전진한 사람이 이 모든 것을 끝내고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행군을 겪어보신 분들은 다 절감하는 이야기. 끝내 파리 근처까지 온 독일군은 전투 이전에 이미 제대로 걸을 힘도 없었다고. 위의 계획도만 봐도 1군, 2군의 기동거리가 대략 400km 이상인데 이 거리를 병력교체도 없이 전투하고 행군하며 또 전투하고 가야 한다.
  • 공간이 없다. 우익부대는 계획의 성패를 좌우하는 주력이라 병력의 규모가 컸는데, 규모에 비해 지나갈 곳(네덜란드, 벨기에, 아르덴느 산림지역)은 지나치게 좁았다.(이 때문에 조르프의 제17계획도 프랑스 북부 지역엔 병력을 거의 배치하지 않았다.) 도로망도 모자랐지만 무엇보다도 벨기에 및 프랑스 국경선 일대가 너무 좁아서 문제였다. 이는 우익 강화에 장애물이었고, 나중 小몰트케의 우익 약화의 원인이기도 한 문제이다.
  • 파리(도시). 우익의 1차 목표지는 파리였지만 이 파리를 어떻게 지나갈까가 문제였다. 전통적으로 파리는 강력한 요새들로 방어되고 있었고, 이 파리를 어찌할지는 독일의 누구도 끝까지 안 말했다. 파리를 공략하면 강력한 요새지대가 지키는 파리 시의 방어력으로 시간이 끌려 계획의 최종 목표인 프랑스군 포위 섬멸에 실패할 여지가 있고, 파리의 우측으로 지나가면 파리를 지키는 수비대의 측면 공격을 받으며, 파리의 좌측으로 지나가면 우익과 중앙 사이에 파리 시가 끼면서 전열이 갈라진다. 공간 부족 문제와 함께 슐리펜 계획에서 끝까지 못 푼 문제.

2.2 실행시

이러한 원초적 약점에 더해 소몰트케는 슐리펜이 유언으로까지 남겼던 우익강화 방침을 저버리고 우익:좌익의 병력비를 7:1에서 6:2(3:1)로 약화시켰다.

벨기에 방면 병력의 약 1/7이 서부전선의 좌익인 알자스-로렌 방면으로 간 것이라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아니지만, 네덜란드의 저항을 우려해서 마스트리트 돌출부를 점거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줄어든 우익 병력이 이동할 통로가 더 좁아짐은 확실한 실책이었다.

물론 네덜란드군은 숫자에 비해 정예로 평가받는 데다가 지형상의 문제로 독일군 2개 군의 발이 묶일 수도 있다는 점, 네덜란드는 중립국이라지만 프랑스보다 오히려 독일과 가까운 사이라는 점 등을 감안해서지만 당면한 큰 적을 공격할 때 이미 벨기에의 중립까지 무시한다는 결단을 내린 상태에서 네덜란드만 남긴다는 것 자체가 주객전도인 판단이었다.[6]

게다가 그나마 하던 계획이 한꺼번에 헝클어졌다. 일단 예상과는 달리 러시아 제국이 총동원을 일찍 끝내고 대규모의 군대를 동부전선에 투입하면서 개전 초 동프로이센이 위험했고, 이에 동프로이센에 기반하고 있던 독일 제국의 고위층들(군부의 고위 장성들, 프로이센의 토지 귀족 융커들)은 슐리펜 계획을 무시하고 상당 병력을 동부전선을 파견했다. 끝내 이 금쪽같은 병력은 동부전선에서도 적시에 활용되지 못하고, 철도에 탄채 독일을 동서로 왔다갔다만 하느라 시간을 낭비했다. 한편 독일군의 좌익이 예상외로 선전하자, 단익포위에서 양익포위를 위한 전선돌파를 명령하는 등 갖가지 전투지도상의 실책을 연발한다.

전략적으로 포기하기로 한 동프로이센은 독일의 시작이자 심장부였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의 실력자들은 불안감이 심했다. 단적으로 러시아가 생각보다 빨리 참전했을 때, 러시아가 동원한 군대는 70개 사단이었다. 하지만 이에 맞설 독일군은 겨우 12개 사단 정도였다. 그럼에도 소몰트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러시아 제국을 공격할 때 독일군의 즉각적인 지원 의사를 비추었다. 물론 독일에겐 그럴 여력이 없었으므로 명백한 소 몰트케의 거짓말.

끝내 뛰어난 전략가였던 참모 호프만의 건의로 탄넨베르크 전투와 마수리안 전투에서 독일군이 대승을 거두지만, 이건 결과론에 가깝다. 애초에 슐리펜은 동부 전선은 프랑스를 쓰러뜨릴때까지 전황유지만 하면 된다고 봤기 때문에, 여차하면 동프로이센을 (일시적으로) 내주는 전략적 후퇴도 고려한다는 강경책이었지만, 동프로이센 지역을 근거로 하고 있던 독일 제국의 상층부는 이를 결코 수용할수 없는 입장이었으며 이건 독일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끝내 동부전선의 강화는 시간이 지날 수록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애초에 슐리펜 계획부터가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가 틀어진 덕분에 단기간에 결판을 봐야 승산이 있다는 결론에서 전략이었으니, 끝내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유지한 러시아와의 관계를 틀어버린 빌헬름 2세가 모든 배경의 근원임을 빼면[7], 누가 딱히 문제라고 일컫기도 애매하다. 끝내 소 몰트케는 국가의 운명을 한판 도박에 거는 것보다는 안정적으로 가는 방법을 골랐다고 볼 수도 있다.이러나저러나 독일은 망...

3 결과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적은 완벽한 계획을 꿈꾸는 것이라는 자기네 선조의 금언을 무시한 결과 슐리펜 계획은 1차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초반기에는 슐리펜이 프랑스의 가장 하책이라고 여긴 알자스 진공을 프랑스군이 기꺼이 해서 장밋빛 미래가 보였으나, 벨기에의 저항으로 이레 가까이 전선이 벨기에 방면에 묶였고, 세느 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버텨보려는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의 작전[8]을 프랑스군 소장파와 노장 조제프 갈리에니가 막아서 역사적인 마른 전투가 났다.

끝내 이 싸움에서 측면을 찔린 독일군이 안정적인 고지대를 선점하러 전선을 조금 물리면서, 서부 전선은 북해 연안에서 스위스 국경지대까지 참호가 나왔다. 그리고 피로 피를 씻는 4년 간의 참호전이 열렸다.

그리고 이 참호전 속에서 굴렀던 아돌프 히틀러는 극도로 공산주의를 혐오했지만, 1939년 전격적으로 독소 불가침조약을 성사시키면서 전선을 서쪽으로 한정하고 파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어떤 뜻에서 보자면 2차 대전 초기 소련과 동맹을 맺고 서쪽으로만 급속 진군한 독일군의 모습이야말로 슐리펜 계획의 진정한 형태였다.

독일에서 프랑스로 진격할 때 알자스-로렌 방면은 라인강과 보주산맥 및 고지대를 지나야만 하니, 신속하게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내려면 저지대 지역인 베네룩스 3국을 강행통과해야 한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여서, 신속하게 독일과의 전쟁을 마무리하려면 역시 베네룩스 3국을 강행통과해야 하며, 실제로 1913년의 프랑스군 총참모장은 독일과의 전쟁시 벨기에를 통과해서 독일로 진격하자는 제안을 총리에게까지 했다. 슐리펜 계획에서 설정한 돌파경로는 보편타당한 셈. 그러나 이건 프랑스 입장에서나 그럴듯한 이야기지 양면전쟁을 벌여서 시간에 쫓기는 독일제국에게는 울며 겨자먹는 도박일 뿐이다. 결국 목표달성을 위해 무리한 작전을 뽑아놓고 다른 대안도 없었으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작전이 그 자체로 반드시 이행해야될 목표가 되어버리는 목표대치의 행태까지 보이고 만다.[9]

슐리펜 본인 생전의 계산은 어떨지 몰라도 이 계획을 금과옥조로 받들던 후임들은 자국의 공세역량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도 않았으며 모든 군사적 행동이 순수한 군사학적 측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도 간과하고 있었기에 사방팔방에 적을 만들어내고 만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일찍이 설파했듯이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이다. 따라서 자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고려하지 않고 동서양면의 강대국 프랑스와 러시아를 모두 적으로 돌려버린 병신 카이저의 트롤링과 이런 3류 외교가 통용되게 만든 당시 독일제국 특유의 군국주의 문화야말로 독일제국 패전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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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펜 계획의 작성자인 알프레드 폰 슐리펜 장군은 사진에서 풍기는 인상처럼 전형적인 독일 장군이었던 듯하다. 새벽녘에 부관과 같이 바깥 순찰을 돌다가 부관이 아침 햇볕에 빛나는 강을 보며 감탄하자, 흘끗 쳐다보고는 "사소한 장애물일 뿐!"이라 일갈하며 갈 길을 갔다고 한다.그래도 장애물 취급은 해준 거 보니 감흥은 있었던 듯 거기다가 시계마냥 철저하게 시간표대로 생활했다고. 그러니까 저런 계획을 만들었지.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인간적으로 보일 정도.

만화가 굽시니스트프랑스 침공과 슐리펜 계획을 소재로 다룬 적이 있다. 움직이는 일의 어려움

  1. 러시아는 워낙 광대한 영토와 라스푸티차 탓에 장거리 도로수송은 힘들다. 지금도 인력과 물자 수송은 절대적으로 철도에 기댄다.
  2. 1858년에 참모총장이었던 몰트케의 조카로 성이 같으므로 조카는 小몰트케로, 삼촌은 大몰트케로 구분한다. 小 몰트케의 풀네임은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3. 大몰트케.본명은 헬무트 카를 베른하르트 폰 몰트케
  4. 특히 정교하게 짠 철도수송 계획. 독일내의 모든 철도역과 화차 사용, 각 부대별 이동이 분 단위까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계산되있었다. 따라서 한군데만 건드려도 마비...
  5. 1차대전 개전 전, 프랑스의 장군 페르디낭 포슈는 "우리에겐 딱 1명의 영국 군인이 필요하며, 우리는 그가 죽게 놔둘 것."이라고도 말했다. 인계철선 용도의 동맹군 주둔 필요성을 알게 해주는 사례.
  6. 다만 이는 순수하게 군사적인 측면만을 고려했을 때의 이야기이며, 네덜란드의 침공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곤란한 문제였다. 독일 정부는 영국 해군이 독일을 해상에서 봉쇄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영국이 감히 미국 상선을 공격하지는 못하리라고 판단했으니, 네덜란드 상선이 미국 국기를 달고 물자를 수송하면 이를 네덜란드를 거쳐서 구매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이 영국의 독일 봉쇄에 동의해 실제로는 못했다.
  7. 대러관계는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이미 천천히 망가져 갔지만 그렇다고 빌헬름에게 면죄부가 나오지는 않는다.
  8. 이미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이전. 2차 때도 똑같이 해보려다가 끝내 길을 멈추고 비시에서 독일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9. 독일은 전략적 불리함을 작전술적으로 푸는데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불리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그런 상황을 군사작전을 통해 타개하려는 것. 슐리펜 계획은 이처럼 전략과 작전술의 본말이 전도한 대표적인 사례다. 이뿐만이 아니라 "당장 눈앞에 보이는 전술적인 이점을 취하기 위해 원래 목표를 잊어버린다."는 의견도 있다. 슐리펜계획에서 알자스-로렌 방어선은 적을 깊숙히 끌어들여야 했는데 초반 방어에 성공하자 이 방향으로 역습한 결과 프랑스가 방어한 게 대표적인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