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 Gran Capitán
이름 | 아우렐리오 라몬 곤살레스 베니테스 (Aurelio Ramón González Benítez) |
생년월일 | 1905년 9월 25일 |
사망년월일 | 1997년 7월 9일 |
국적 | 파라과이 |
출신지 | 루케 |
포지션 | 인사이드 포워드 |
신체조건 | 170cm / 72kg |
등번호 | -[1] |
소속팀 | 클루브 스포르티보 루케뇨(1920-1927) 클루브 올림피아(1927-1940) |
국가대표 | 14경기 / 10골(1924-1937) |
감독 | 클루브 올림피아(?-?) 파라과이(1946-1947) 파라과이(1957-1959) 파라과이(1966) 파라과이(1967-1968) 파라과이(1970-1972) 파라과이(1974) |
1 생애
1.1 선수 생활
아우렐리오 곤살레스는 스포르티보 루케뇨에서 처음 커리어를 시작했고 올림피아 아순시온에서 남은 커리어를 보냈다. 그 중 커리어의 하이라이트는 1927년부터 1929년까지의 3연속 우승 기록이다.
클루브 올림피아에서 커리어를 보내던 중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하였고 해트 트릭을 포함하여 5골을 집어넣어 파라과이를 준우승시키는 활약을 펼쳤다. 이 활약으로 곤살레스는 파라과이 축구계를 대표하는 스타로 떠올랐고, 자연히 그의 활약으로 파라과이 국민들의 관심은 초대 월드컵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골은커녕 자책골만 넣은 기록만 남기면서 쓸쓸히 월드컵 무대에서 퇴장하고 말았다.
그 이후 국제 대회와 큰 인연이 없이 파라과이에서 선수 생활을 보내던 곤살레스는 1937년에서야 다시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2골을 넣으며 분전했지만 파라과이는 꼴찌의 수모를 당했고 이것이 그의 선수로서 마지막 국제 대회가 되었다.
1.2 감독 생활
곤살레스는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얼마 안되어서 올림피아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1946년, 코파 아메리카에 이번에는 감독으로 출전했고 여기에서는 3위로 대회를 마감하였다.
그 이후에도 파라과이 대표팀에서 계속 감독 지휘봉을 잡았다 놓았다 했고, 월드컵에도 출전하였다. 파라과이는 다크 호스로 인정받고 있는 도깨비팀이었고 프랑스와 유고슬라비아, 스코틀랜드 등을 상대로 1승 1무로 선전했지만 아쉽게 8강에 오르지 못했다. 비록 팀은 탈락했지만 개인 기량과 공격 스타일에서 꽤 호평을 받았다.
이듬해의 코파 아메리카에서 곤살레스가 이끄는 파라과이는 다시 3위를 차지했다. 같은 3위라도 무게감이 딸려 보이는 건 기분 탓이 아니다. 그 이후에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고 월드컵 예선 등에 참가했지만 큰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2 플레이 스타일&평가
역대 파라과이 선수들 중 아르세니오 에리코의 바로 뒤 순위를 잇는 공격수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3 뒷이야기
- 곤살레스는 오랫동안 멕시코의 마누엘 로사스와 함께 초대 월드컵 자책골의 주인공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2006년 FIFA의 재조사에서 곤살레스의 자책골이라 알려졌던 것이 베르트 파테노드의 골로 인정되어 76년간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 로사스 혼자 월드컵 최초의 자책골의 주인공이란 독박을 쓰고 있다 - 파라과이에서만 뛰었기 때문에 델핀 베니테스 카세레스나 마누엘 플레이타스 등과 비교하면 선수로서 내세울 것은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득점왕 기록이 전부일 수도 있다. 하지만 CA 산 로렌소에서 거액을 베팅했을 때, 곤살레스는 차코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오퍼를 거부했다.
4 수상
4.1 클럽
- 파라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7회: 1927, 1928, 1929, 1931, 1936, 1937, 1938(올림피아)
- 파라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2회: 1924(스포르티보 루케뇨), 1939(올림피아)
4.2 국가대표
-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 1회: 1929
4.3 개인
-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득점왕 1회: 1929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