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네이스

아이네이스(아이네이드라고도 한다)는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로마의 시조로 추앙받는 아이네이아스의 일대기를 소재로 쓴 서사시다. 베르길리우스는 농경시를 완성한 후, 자신을 후원하던 귀족 마이케나스와 아우구스투스가 그 완성도에 만족하여 베르길리우스 평생의 꿈인 서사시를 써 보라는 격려를 받고 서사시에 착수할 결심을 했다고 짐작된다. 베르길리우스는 이후 11년간 아이네이스에 매달렸는데, 앞으로 3년을 더 아이네이스에 바치기로 하고 답사를 위해 그리스, 터키로 여행을 떠났으나 열병에 걸려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되었고 곧 죽는다. 베르길리우스는 죽으며 이 미완성 작품을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아우구스투스[1] 이 작품을 불태우지 말라고 명령해 거의 초안 그대로 남게 되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이 서사시를 통해 로마의 역사와 그 지배자를 찬양하고 기릴 목적이었는데, 아우구스투스를 주인공으로 하자니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칼싸움도 해야 하고 고매한 독백도 해야 하고 신들과 대화도 나누어야 하고 아우구스투스의 반대편은 사악해야 하는데 당대의 인물을 그렇게 그려버리면 우스꽝스러운 서사시가 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이에 베르길리우스는 소재를 고르다 아이네이아스를 주인공 삼기로 결심했다. 아이네이아스가 주인공이 되자 또다른 문제가 생겼는데, 시간대였다. 베르길리우스는 이 문제를 아이네이아스가 라비니움 건설 - 아들 아스카니우스가 알바 롱가 건설 - 300년간의 통치 - 마지막 왕 누미토르의 딸 레아 실비아로물루스레무스를 낳는 것으로 해결을 봤다. 아이네이스에서 이 구성을 설명하는 세부적인 내용들은 베르길리우스가 당시 설화와 전설들을 채집해 나온 것이기 때문에 후세의 역사가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반면, 아이네이아스를 주인공으로 삼으면서 그는 호메로스에게서 많은 부분을 모범 삼아 따올 수 있게 되었고, 위대한 그리스적 전통과 로마의 기원을 연결시킬 수 있었으며, 호메로스에서는 묘사되지 않은 트로이 함락을 묘사해 작품의 몰입도와 신뢰감을 높이고, 아이네이아스가 방랑하며 카르타고에 닿았다가[2] 오디세우스와 같은 고난을 겪는 등 세계관을 크게 확장시킬 수 있었다.

라틴어로 쓰여진 서사시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으며, 후대에 강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그 뛰어난 완성도에 힘입어 베르길리우스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과서로 널리 사용됨은 물론, 로마의 국교가 기독교로 바뀐 이후에도 신의 소명에 전적으로 충실한 아이네아스가 갖은 고난과 역경에 부딪혀 괴로워하면서도 꿋꿋이 이겨내는 것이 기독교적인 가치를 담고 있다고 여겨짐으로[3] 변함없이 애송되고 필사되었다.[4]

서사시는 고대 그리스 로마 문학이 으레 그렇듯 무사 여신에게서 작품을 위한 영감을 불어넣고 줄거리를 내려달라고 간청하는 것에서 시작해, 아이네이아스 일행이 배를 타고 바다를 떠도는 장면을 비추고, 그를 둘러싼 신들의 분분한 의론을 보여준 후, 아이네이스 일행이 디도 여왕이 다스리는 시돈에 닿으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한다. 이후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 함락과 이후의 방랑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디도와 결혼한다. 메가데레 상태인 여왕님 디도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아이네이아스는 문득 디도가 수절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왕들과의 결혼을 거부하다가 자신과 결혼했음을, 디도가 고립무원의 상황임을 깨닫는다. 그러자 디도가 자신과 백성들을 지켜줄 강한 전사들과 지도자를 원하던 것이 무거운 의미로 다가오고, 이제 신들의 예언과는 동떨어진 장소에 정착했으면서도 커다란 위험에 둘러싸인 처지임을 자각한다. 그래서 아이네이아스는 행복한 결혼생활이 채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았음에도쓰레기처럼 시돈에서 몰래 도망친다. 디도는 떠나기 직전에 눈치채고 아이네이아스에게 간절하게 애원해 보나 소용없었다. 이용당하고 버려졌으며 버려진 몸으로 백성들을 바라보고 통치해야 하는 절망감과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그동안 청혼을 거절당했던 주변 왕들이 침략해올 공포를 이기지 못해 디도는 자살한다.

오디세우스가 겪었던 것과 같은 고난을 일부 겪은 항해 이후 이탈리아에 도착, 라티움의 공주인 라비니스와 결혼하여 동맹을 맺고자 한다. 허나 왕비의 반대 및 왕비가 지지하던 구혼자인 루툴리족의 왕 투르누스 및 그의 동지인 메제티우스와 함께 아이네아스를 정벌하러 군대를 일으킨다. 아이네이아스가 전쟁을 대비해 다른 도시들과 동맹을 맺고 동맹군을 모아오기 위해 떠난 사이 당한 기습이라 트로이 난민들은 위기에 빠지나, 아이네이아스의 귀환과 함께 두 번에 걸친 전쟁을 승리하고 투르누스를 죽이는데,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탓인지 책은 여기서 갑작스럽게 끝을 맺는다.

유명한 부분은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에서 도망나오는 2권,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의 파멸을 다룬 4권, 그리고 단테신곡 지옥편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6권이 있다. 특히 6권은 저승의 묘사가 세밀하고 독특해 흥미를 끄는 부분이 있다. 기독교의 지옥과 비슷한 고통의 장소 타르타로스, 장례를 못 치루면 유령처럼 떠돌게 되는 혼백들, 천국과 비슷한 엘리시움, 때가 되면 환생이 가능한 엘리시움의 유령들. 이 때 죽은 아이네이아스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 세우게 될 나라의 미래를 쭉 예언하는데, 많은 장군과 왕들과 현인들을 묘사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크게 찬미하며 끝을 맺는다.[5] 아우구스투스는 베르길리우스의 이러한 상세한 묘사를 통해, 아이네이스와 자신이 겹쳐지며 그가 행해왔던 냉혹한 처단은 마치 아이네이스가 살려달라고 비는 투르누스를 죽인 것처럼[6] 로마의 숭고한 미래를 위한 결단으로 포장되는 덕을 입었다.

아이네이스 전체를 용비어천가로 여기는 관점도 있으나, 농경시나 전원시 등에서 성실하고 건전한 농경생활이나 전원생활을 예찬하고 신봉하는 베르길리우스의 관점에서 볼 때 아우구스투스는 오랜 로마의 혼란과 전쟁을 종결하고 로마의 밝은 미래를 가져다 줄 지도자였다. 따라서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 내에서 많은 예언이나 계시,[7] 불카누스가 아이네이아스에게 마련해준 방패의 조각 묘사[8]를 통해 그리스 로마 시대와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하나로 묶는 효과를 거둔다.

또한 이 작품은 호라티우스가 그대들은 신들의 하인이므로 지상의 주인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아우구스투스가 마음껏 민족을 다스려라, 정복된 자들을 살려주고 교만한 자들을 쳐부수라라고 말했던 것처럼, 로마인의 기원을 신과, 그들의 사명과 권리가 정복, 문명[9]에 있음을 제시한다. 또한 아이네이스가 겪게 되는 수많은 아픔과 고난, 트로이 낙성, 아버지를 업고 아들의 손을 쥐며 필사의 탈출, 그 과정에서 부인의 실종, 오랜 방랑, 또다른 전쟁과 살육, 특히 모든 자존심을 내다버리고 애원하는어떻게 봐도 아이네아스가 개쓰레기짓을 한 디도와의 이별 등을 보면, 차라리 아이네아스는 이 과정을 전부 겪지 않는 것이 행복했을 것이다. 특히 디도와 결합한 채로 시돈의 왕이 되었어도 위태롭기는 해도 충분히 왕으로서 운명을 개척해 볼 만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에서 왕이 되는 것은, 로마를 건설하는 것은 그렇게도 위대한 임무였으니까 그러한 것이다. 로마인들이 아킬레우스를 무시하고 아이네아스를 칭송하는 것은, 아이네아스는 그들의 시조왕이지만 동시에 로마의 거대한 통치와 문명과 그 앞에 선 개인이기도 하다. 로마의 거대함 앞에 개인이 겪는 고통이나 좌절에도 불구하고 아이네아스는 운명에 대한 꺾이지 않은 희망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아킬레우스와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전문을 읽을 수 있다. 라틴어 원문은 여기.
  1. 이미 2, 4, 6권의 낭독을 들은 바 있었다.
  2. 나중에 크게 싸우다가 우리편 된다고 예언을 집어넣었다.
  3. 비록 아이네이스에서 찬미되는 신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이지만.
  4. 베르길리우스의 전원시 중 4전원시, 일명 메시아 전원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덕도 있다.
  5. 베르길리우스가 이 부분을 읽자 자신의 죽은 친척의 이름을 듣고 졸도한 귀족부인 등의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6. 아이네이아스는 마음이 약해졌다가 그가 투르누스 자신이 죽인 동맹군 왕자의 무구를 벗겨내서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죽여버린다.
  7. 유피테르이들에게 나는 시공의 제한을 두지 않노니 내 그들에게 무궁한 통치권을 주었노라,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거친 세대들이 부드러워지고 전쟁이 쉬게 되리라는 것을 알리며 의인화된 광폭이 쇠사슬에 묶여 헛되이 이빨을 갈아대는 것으로 예언을 끝낸다.
  8.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에서 방패를 묘사한 것에서 차용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호메로스는 문학적인 비유로 가득했던 반면 베르길리우스는 비교적 간결하게 묘사하되 아이네아스 시점에서 이후 이루어질 로마의 역사가 새겨져 있는 것을 묘사하였다. 참고로 이 방패는 신이 만들어준 거라 그런지 더럽게 단단해서 뚫리지 않는다. 다른 그리스 로마 서사시에서 질이 좋다고 묘사되는 여러 방패들이 툭하면 뚫리는데도 불구하고.
  9. civilization. 문명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