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샤 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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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 Aishah binti Wan Ariffin, 1965.4.14 ~

한때는 뉴질랜드에 말레이시아의 이름을 알려 인민들이 자부심을 갖게 했지만
한순간에 정치에 관여하면서 인생을 망친 여자

말레이시아의 가수로 1984년 말렉 리주안의 노래 "Mawar Putih Mawar Merah"의 피처링으로 데뷔하였다가, 훗날 뉴질랜드로 건너가서 현지인들과 함께 아이샤 앤 더 팬 클럽을 결성하고 해외 활동을 시작했으나 이후에 다시 귀국해서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말레이시아 가수로서는 이례적으로 서방국가인 뉴질랜드에 진출해서 가히 화제를 모았으며 말레이시아 인민들에게 애국심과 자부심을 일깨워줬지만, 이슬람 극단주의 정당인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에 가입하고 정치인으로 변모하면서 인생을 망쳤다. 한마디로, 연예인은 연예인답게 행동해야지 정치에 개입해서 일을 내면 안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보여준 반면교사.

1 이름

흔히 "아이샤(Aishah)"라는 예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이샤'는 무슬림들 사이에서 굉장히 흔히 사용되는 이름인데다가 당장 선지자 무함마드의 아내도 '아이샤'라, 문서명은 '아이샤 아리핀'으로 해 놓았다. 때문에 '아이샤'로는 들어올 수 없다. 본명은 '완 아이샤 빈티 완 아리핀'인데, '빈티'는 말레이시아 무슬림 여성들에게 붙는 것으로 '~의 딸'을 의미한다. 그냥 '완 아이샤 완 아리핀'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물론 해당 명칭으로도 다 들어올 수는 있다.

2 생애

몇년도에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확실한 것은 1965년생이자 말레이시아 출신이라는 점이다. 인터넷에 그녀의 생일이 언급된 경우는 없으나, 태어나면 서구식으로 0세로 치면서도 새해가 되면 한국식으로 1살을 먹는 형식의 말레이시아 나이로 보아서, 2001년에 작성된 어느 기사에서는 36세라고 했으며 2010년에 작성된 한 기사에서는 45세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그녀가 1965년생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며, 생일의 경우는 여기4월 14일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즉 1965년 4월 14일임이 확실하며, 2016년 기준으로 51세이다.

그러나 출신지의 경우 제대로 알 수가 없는데, 말레이어 위키백과에서는 느그리슴빌란젬폴 출신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한 주변인의 주장에 따르면 풀라우피낭바얀르파스 출신이라고 했으며, 과거 그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페이스북 계정에서는 슬랑오르암팡자야 출신이라고 하고 있다. 특히 페이스북 계정의 경우 그녀의 것일 가능성이 있으며, 만약에 진짜였으면 암팡자야 출신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해당 페이스북 계정은 폐쇄되었는데, 이러고 보면 해당 계정이 가짜일 수도 있다. 또한 훗날 총선에 출마했을 때 젬폴 선거구에 출마했는데, 대게 국회의원 후보자들은 왠만해서는 자기가 태어났거나 자란 지역의 선거구에 출마하므로, 오히려 젬폴 출신일 수도 있다. 물론 현재로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며, 때문에 우리는 아이샤의 생년월일은 대략적으로 알 수 있더라도 출생지는 알기가 힘들다.

3 가수 활동

3.1 불안한 데뷔

1983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가요대회에서 우승했으며, 라이프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말렉 리주안의 노래 "Mawar Putih Mawar Merah"에 참여하면서 정식으로 데뷔했다. 당시 19세.근데 19세 맞아? 비디오 봤는데 아닌듯...[1]

하지만 아버지의 허락도 안 맡고 몰래 데뷔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이 아버지에게 알려질 것을 두려워했던 아이샤는 "나타샤 아미나(Natasha Aminah)"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2]근데 가명을 쓴다고 될까? TV에 나오면 아빠가 알텐데? 안그래도 아버지가 말레이인 치고는 은근 교육열이 높았던 사람인데다가[3][4] 굉장히 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본인은 언제나 무릎꿇고 긴장하며 살아야 했다. 아버지한테 들킬 것을 두려워했던 나머지,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실은 끝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갔고, 아이샤는 결국 불명예스럽게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애초부터 몰래몰래 활동하다 보니 정규앨범 따위 낼 생각은 꿈 깨야했던 상황이었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했으므로, 그 누구도 아이샤의 퇴장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때문에 이렇게 잠깐 등장했다가 소리없이 사라진 아이샤를 80년대 가수로 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애초에 이런 건 제대로 활동했었다고 볼 수도 없으니깐.

여하튼 아버지는 애를 교육시키는 데 혈안이 되어서, 아이를 강제로 뉴질랜드오클랜드로 보냈고, 현지의 오클랜드 대학교에서 정치과학과를 다녔다. 그러나 애초부터 뉴질랜드에서 정치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이런거 한다고 우리나라에서 알아주기를 해 뭘 해'라는 생각을 갖았고, 결국 자녀양육과로 전과했다. 훗날 말레이시아로 귀국한 뒤 조국의 대학교에서 정치과학과를 전공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그녀의 미래를 제대로 알 수 있다.

3.2 뉴질랜드에 말레이시아의 이름을 알리다

하지만 가수가 되겠다는 여념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한참 학교를 다니고 있던 1986년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텔레퀘스트(Telequest)"라는 밴드에 당당하게 들어가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뉴질랜드답게 유럽계 백인 일색이던 텔레퀘스트는 유일한 말레이인이었던 아이샤를 노골적으로 무시했다.당장 마오리인도 무시당하는 판에...[5]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쫓겨났고, 두 차례나 불명예 데뷔를 거두었으니 연달아 재수만 없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은채 이번에는 제대로 데뷔하자고 각오를 했지만, 이리저리 되지는 않고, 결국 좌절하는 듯 싶던 그 때...

소울 온 아이스(Soul On Ice)라는 어느 밴드가 안 그래도 前 보컬리스트의 탈퇴로 새 보컬을 영입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는데, 아이샤는 어느 날 이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바로 그 밴드에 보컬로 지원했다. 밴드 측은 아이샤의 참여를 과감히 허락했고, 이로서 세 번째 데뷔를 치르게 되었다. 물론 페킹 맨(Peking Man)이라는 밴드에서도 영입 제의가 들어왔었지만, 아이샤가 추구하던 이상은 페킹 맨의 전 보컬리스트였던 마거릿 얼리치(Margaret Urlich)가 추구하던 이상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났기 때문에, 당당하게 거절했다.

폴 모스(기타), 맬컴 스미스(키보드), 데이브 라슨(드럼), 글렌 피터즈(베이스)로 구성된 소울 온 아이스는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했고, 이후 CBS사와 계약을 맺은 뒤 '더 팬 클럽'으로 개명했다. 마침내 1988년 1집 Sensation을 내고 본격적으로 데뷔했으며, 한순간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세 번만에 완벽한 데뷔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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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샤가 뉴질랜드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자, 말레이시아 언론들은 이를 대서득필했으며, '말레이시아인의 성공' 등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웃나라인 호주에서도 인기는 대단했고 이어 지구 반대편의 미국에서도 유례없는 인기를 얻었다. "Sensation", "Call Me", "Never Give Up On You", "Paradise" 등과 같은 대표적인 히트곡으로 아이샤는 국제적인 스타로 떠올랐고, 빌보드 차트 100위 안에 접어들면서 가히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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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모스

1989년 2집 Respect The Beat을 냈으나, 얼마 못가 더 팬 클럽은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이샤도 바로 대학을 졸업했던 터이고, 더 이상 비자도 나오지 않으니 가수 활동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말레이시아로 귀국하기로 결정했고, 이 때 현지 뉴질랜드인이었던 멤버이자 동지인 폴 모스도 말레이시아로 이주하기로 결심한다. 물론 귀국 후 둘은 서로 어울리거나 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지만, 훗날 모스도 말레이시아에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3.3 솔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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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후 유명 음악인으로 바로 데뷔했던 故 아드난 아부 하산을 만났고, 바로 1990년 1집 "Aishah I"[6]을 내고 솔로데뷔를 한다. 9개[7]의 신곡을 냈으며 "Janji Manismu"와 "Camar Yang Pulang"[8]과 같은 노래로 큰 히트를 쳤지만, 본인은 "말레이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고자 상대적으로 인기가 낮은 "Syurga Di Telapak Kaki Ibu"와 "Bahtera Merdeka"와 같은 고유 말레이 음악에 더 중점을 두었다.[9] 당연히 말레이어를 알아들을 리가 없는 뉴질랜드인들이나 호주인들은 관심조차 갖지도 않았고 해당 국가들에서는 한마디로 영원히 사라진 셈이었으나, 대신 말레이시아의 이웃나라들을 중점으로 했으며 싱가포르, 브루나이, 인도네시아에 진출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Janji Manismu"의 인기는 대단했는데, 훗날에야 이 사람 덕분에 "Camar Yang Pulang"이 더 히트를 쳤으나 애초에는 "Janji Manismu"가 최고의 히트를 쳤다. 이 노래로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했고, 바로 그 해 TV35차 Anugerah Juara Lagu에서 10월 우승곡을 거쳐 최종 우승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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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기에 힘업어 아드난의 지원 아래 1991년 2집 "Aishah II"[10]를 냈고, "Kemaafan Dendam Yang Terindah", "Kasih Kita" 등의 히트곡을 냈다. 이전보다 인기는 살짝 줄었으나, 대신에 좀 더 다양한 컨셉의 노래들을 시도했으며, 말레이 고유 음악에 좀 더 초점을 두었다. "Fatwa Pujangga", "Ayah"가 대표적이고, 말레이시아 연예계의 전설로 꼽히는 故 P. 람리의 노래 "Di Mana Kan Ku Cari Ganti"를 편곡해 부르기도 했다.[11] 말레이 전통 타령에 라틴음악을 혼합한 특유의 "Seloka Rindu"는 당시로서는 가히 파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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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992년 3집 "Aishah III"를 냈고, "Selanjur Bercinta" 등의 히트곡을 냈다. 예전에 비해 다소 세련됐으면서도 보다 더 다양한 컨셉의 노래를 취했는데, 고유의 말레이 리듬을 담고 있는 "Rintihan Si Anak Seri", 꼬마들의 동요로 유명한 "Bangau Oh Bangau", 서유럽 동요를 번안한 "Ambalamba", 일본 전통음악 "Hanakage"[12], 세련된 서구식 발라드 "Bayangan" 등 시도한 음악만 다양했고, 전설 살로마의 노래 "Jari-jariku Sakit Semua"를 편곡해 불렀다.

하지만 인기는 살짝 하향세를 보였고, 이 와중이던 1993년 어느 뉴질랜드인과 결혼했다는 둥의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가수 활동에 제동이 걸렸다. 어찌어찌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결국 논란 속에 잠정 활동을 중단하기에 이르렀고, 4집 발매 시기를 좀 늦출 수밖에 없었다.
  1. 사실 아이샤가 좀 노안이긴 하다. 화장도 매우 짙게 하고, 좀 뚱뚱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좀 늙어 보인다. 물론 지금은 노안이 전혀 아니다.
  2. 물론 해당 가명으로 들어올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가명임은 꼭 알아두자.
  3. 말레이인들은 교육열이 그리 높지 않다. 워낙 생활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보니 그냥 '잘 먹고 잘 살면 땡'이라는 인식이 세며, 정치인들도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라는 생각만 하고 땡이다. 여하튼 그 때문인지 말레이시아 내의 문제점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밖에.
  4. 결국 말레이시아의 경제권은 중국인들이 거며쥐고 있고, 사회의 문제점들은 오히려 중국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빨리 인식한다. 게다가 중국인들의 교육열은 은근 높아서, 대한민국 못지 않게 학원 뺑뺑이 돌릴 정도라고.
  5. 말레이인과 마오리인은 같은 말레이폴리네시아계 민족이다. 그러나 말레이인은 더 아시아화 되었다는 점이 있다.
  6. 원래 앨범에는 "Aishah"라고만 적혀 있으나, 후에 나온 동명의 앨범들과 구분하기 위해 일부러 "I, II, III" 등으로 구분한다. 시티 누르할리자지아나 제인처럼 본인의 이름을 쓴 앨범을 두개 이상 낸 경우도 이렇게 구분한다.
  7. 사실상 9곡이나, 총 10곡이다. 마지막 10번 트랙이 2번 트랙 "Camar Yang Pulang"의 반주곡이라 수록곡으로 치기가 좀 그렇다...
  8. 훗날 시티 누르할리자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불렀던 그 노래이다.
  9. 더더욱이나 후자는 독립열사들을 기리는 애국가요다.
  10. 다만 이번에는 II를 직접 붙였다.
  11. 안그래도 바로 그 해 셰일라 마지드도 해당 곡을 편곡해서 불렀다. 물론 아이샤가 부른 것은 별 주목받지도 못 했지만...
  12. 한국에서도 나름 알려진 노래이다. 다만 아이샤는 말레이어 가사를 추가해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