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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Avshalom(אבשלום)
성경에 나오는 다윗왕의 아들. 어머니는 그술 왕 탈매의 딸, 마아가. 성경에 따르면 엄청난 장발[1]을 가진 미남이었다고 한다. 사실 압살롬의 뜻은 압살할 놈이라 카더라[2] [3] 다윗에게 가장 총애 받았던 아들이지만, 여러 가지 복잡다난한 사건이 꼬이고 꼬인 결과 아버지 다윗 왕에게 반기를 들다가 파멸한 인물. 성경판 아서스 메네실.
꽤 치밀하고 권력욕이 큰 인물이었다.
2 성경에서의 행적
2.1 암논을 암살하다
압살롬의 위로는 두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한 명은 다윗이 헤브론에 있던 시절 아히노암에게서 낳은 장남 암논이었고, 둘째는 아비가일[4]의 소생인 길르압이 있었다. 하지만 길르압은 어릴 적에 죽었기에 왕위 계승 서열은 암논 다음이 되었고, 성경에 기록된 바는 없지만 이 탓에 둘의 사이가 그리 좋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지 아버지의 안 좋은 점[5]만 쏙 빼닮은 개망나니 이복형 암논이 자신의 친동생이자 그의 이복누이인 다말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는데, 잔꾀가 많은 친구 요나답[6]과 상의한 끝에 자기가 지금 아픈데 네가 직접 주는 음식을 먹으면 나을 것 같다고 꾀병을 부려서 다말을 자기 침실에 끌어들인 다음에 강간해버리고, 곧바로 그 마음이 식어 오히려 가해자 본인이 피해자에게 적반하장한다.그야말로 천하의 개쌍놈
다말은 오빠인 압살롬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고, 압살롬은 더 이상 소문이 퍼지지 않게 다말을 집에 꽁꽁 숨겨놓으면서 암논에게 복수할 준비를 시작한다. 한편 피해자 다말은 극심한 정신적 충격에 괴로운 나날들을 보냈다. 그런 다말의 모습을 보고 친오라비인 압살롬은 암논에 대한 복수심을 더욱 불태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암논과 압살롬의 아버지인 다윗 왕은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을 듣고 심히 노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 암논을 처벌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세 가지의 이유가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다윗 자신이 우리아의 처인 밧세바와 불륜을 자행한 사람으로서 아들의 강간을 징계할 도덕적인 명분과 도덕적인 권리가 없었다. 둘째, 다윗이 장자인 암논을 사랑하여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사무엘상에서 유추할 수 있는 다윗의 어린 시절에서의 트라우마이다. 다윗의 가정환경이 워낙에 콩가루고, 형제들로부터 무시받고 자란 터라 '내가 크면 저런 아버지는 되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이 잘못 작용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7]
그로부터 2년 후, 암논 사건이 잊혀질 때쯤 압살롬은 성대한 잔치를 열어서 암논[8]을 비롯한 다른 형제들을 초대했고, 암논은 별 의심 없이 압살롬이 주관한 파티에 참석했다가[9] 죽게 된다.[10] 한편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처음에 압살롬이 암논 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까지 모두 죽인 줄 알고 통곡을 했으나, 요나답[11]의 변호로 인해 진정할 수 있었고, 이윽고 암논과 압살롬을 제외한 다윗의 아들들이 무사히 돌아온다.
한편 암논을 죽인 압살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할아버지인 그술 왕 탈매에게로 도망가 그곳에서 3년 간의 도피 생활을 시작한다.
2.2 예루살렘으로 귀환
다윗은 왕으로서 살인자인 압살롬을 마땅히 처벌해야 하지만, 실은 암논의 잘못도 있는지라 압살롬의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살인자의 몸인 압살롬을 쉽게 용서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거기다 더욱 골치 아프게도 장남인 암논이 죽고 둘째인 길르압마저 세상에 없는 상황에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 1순위는 압살롬이 되어버린 상황.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 이가 있었으니 바로 다윗 왕의 조카이자 군대장관인 요압이었다.
그는 드고아에서 여인 하나를 불러다 과부처럼 위장시켜 다윗에게로 보내 이렇게 말하라 한다,
'저에게는 아들이 둘 있는데 둘이서 서로 싸우다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그만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살인자인 아들을 죽이려 하는데 그 아들마저 없어지면 남은 아들마저 사라지니 이를 어찌하련지요.'
이에 다윗은 명을 내려 여인의 아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명령을 내릴 것을 약조하였고, 이에 여인은 감사를 표하면서 '그런데 왕께서는 그렇게 자비로우시면서 왜 내쫓긴 아들은 집으로 들여보내지 않으신지요?'라고 덧붙이자, 다윗은 이 여인이 요압이 보낸 사람이라는 걸 눈치 채고 곧바로 요압을 불러 압살롬을 데려오라는 명을 내린다.
이로서 압살롬은 3년 간의 타향 생활을 마치고 그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만 완전히 용서할 생각이 없었던 다윗은 "자신 앞에는 얼씬도 못 하게" 했다.[12] 즉 다윗 입장에서는 아무리 원한이 있다고는 하나 압살롬이 저지른 잘못은 잘못이니 돌이키기를 바랬을 뿐이었지만, 정작 압살롬에게 이를 깨달을만한 구실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압살롬으로 하여금 자신의 처신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든 계기가 되었고, 이런 생활이 2년 동안 계속되자 압살롬의 인내심에 슬슬 한계가 다다랐다. 그 사이에 압살롬은 네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었다.[13]
그러다 문득 자신을 복귀할 수 있게 손을 써준 요압을 떠올리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요압에게 몇 번이나 전갈을 넣어보지만 요압 역시 다윗과 마찬가지로 거들떠보지 않았다. [14] 안 그래도 아버지에게 /차단 압살롬 먹은 상황이라 기분도 안 좋은데 요압마저 이런 식으로 나오자 제대로 빡친 압살롬은 요압의 밭에다 불을 질러버리는 배째라 초강경한 수를 둔다.
자기 밭이 홀라당 타버리자 요압은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압살롬의 앞에 나타나 "왕자님하가 지금 내 밭에다 불을 질렀음? 이게 무슨 짓임?"이라고 따지자 압살롬은 가뜩이나 성질 뻗친 요압 앞에서 더욱 언성을 높이며 "이따구로 대접할 거면 그술에서 잘 먹고 잘 살던 난 왜 데려온 거임?"라고 아버지 다윗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자신의 처우에 대한 개선을 요청한다.
압살롬의 요청을 받아들인 요압은 다윗을 설득해 압살롬과 다윗을 화해시켰으며, 다윗 역시 압살롬을 다시 불러들여 용서하였다. 그러나 이미 압살롬은 서서히 삐뚤어지고 있었다.
2.3 왕위를 계승중입니다, 아버지.
다윗에게 용서받은 이후, 압살롬이 맨 처음 시작한 일은 왕을 대신해서 백성들의 송사를 들어주는 것. 당시 고대 사회에서 재판은 성읍의 장로들부터 시작해서 왕 앞에까지 나아가 진행하는 방식었는데, 다윗이 제대로 제도를 만들지 않은 탓에[15] 그 틈새시장을 노린 압살롬은 ‘아아, 울 아부지가 너무 바쁘셔서 왕자인 내가 대신 함. ㅇㅇ 괜찮겠져?’ 라는 식으로 은근슬쩍 그 권한을 넘보기 시작한 것이다. 왕까지 올 정도의 재판은 대개 지역에서 유력한 유지들이나 귀족들이었으므로 과정에서 압살롬은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을 은밀히 모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세력이 갖춰지자, 압살롬은 다윗에게 제사를 지내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다윗의 구 거점이었던 헤브론으로 내려가 다윗의 책사였던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비롯한 유다 지파의 유력자들을 모두 초청해[16] 그 자리에서 자신이 헤브론의 왕임을 선포했다. 특히 길로 사람 아히도벨[17]은 예전부터 유다 지파 내에 명망이 높은 당대의 명사이자 한때 다윗의 밑에서 책사로 일했던 인물로 그가 압살롬과 합류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그를 따라 압살롬에게 합류하는 이들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다윗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유다 지파가 다윗을 등지고 압살롬에게 붙은 것이다!
이렇게 된 원인에는 다윗의 유화 정책이 컸다. 원래 유다 지파와 타 이스라엘 지파는 서로 이질적이 면이 많아 사울 왕 이전부터 거의 남남처럼 지내던 관계였다가 유다 지파 출신인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면서 억지로 붙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골수 유다 민족주의자로서 철저한 정복을 주장했던 요압과는 달리 다윗은 유다 지파뿐만 아니라 전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해 사울 왕의 혈족인 므비보셋을 비롯한 사울 왕의 잔당들과 타 지파들을 어떻게든 끌어 모으려고 노력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유다 지파에게 소홀해지면서 유다 지파, 정확히는 극우적 성향을 지닌 유다 민족주의자들이 다윗에게 불만을 품던 상황에 나타난 것이 압살롬이었다. 그들로서는 훌륭한 대안이 나타난 셈.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다윗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다윗은 자신의 심복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빠져나갔고, 다윗은 요단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므비보셋이 예루살렘에 남아 압살롬과 결탁해 이스라엘의 왕권을 되찾으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소식과[18], 구 사울 왕의 잔당인 시므이의 위협을 받는 등 비참한 여정을 겪는다.[19] 덕분에 압살롬은 별 피해 없이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이 과정에서 다윗이 왕궁에 두고 온 후궁들을 대낮에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으며,[20][21] 예루살렘을 점령한 직후 아히도벨은 다윗이 거점에 들어가 세를 회복하기 전에 추격군을 보내 일망타진해야 한다고 간언한다. 그러나 압살롬은 다윗의 조언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아렉 사람 후새를 불러서 그에게도 조언을 구했는데, 그는 비록 도망치고 있는 적이지만 아직 휘하에 있는 역전의 용사들이 버티고 있으니 우리도 좀 더 병력을 모아서 제대로 승부를 봐야 한다고 압살롬에게 말했고 압살롬은 그의 말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압살롬이 간과한 점이 하나 있었으니, 이 후새란 양반은 예루살렘에 다다른 압살롬을 환영하며 맞아들인 인물이지만 사실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도주하기 전, 예루살렘에 남아서 압살롬의 작전을 방해하도록 심어둔 일종의 이중첩자였다. 즉, 압살롬은 다윗의 첩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다윗의 추격을 주저하는 오판을 저지르고 만 셈.[22] 후새 뿐 아니라 대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도 언약궤를 다윗에게 가져가려다가 리턴, 압살롬을 심리적 기만에 빠지게 했고,[23] 자신의 아들 요나답과 아히마하스 둘을 전령으로 사용했다. 결국 후새의 계략대로 다윗이 전력을 가다듬게 되자,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패망할 것을 직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 압살롬이나 다윗 그 누구의 편도 들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자결한다.
2.4 이 정도론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단다. 아들아.
요단 강을 건너 마하나임에 도착한 다윗은 요압을 중심으로 토벌군을 결성하기 시작했고, 이에 호응하듯 온 이스라엘 지파에서 다윗을 구하기 위한 군대가 속속 합류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토벌군 구성이 완료되자, 다윗은 요압, 아비새, 잇대에게 지휘권을 주어 반란군 토벌의 명을 하달했고, 그 와중에 압살롬을 너그럽게 봐달라 요청하면서 자신이 직접 반란군 토벌에 앞장설 것을 천명하나 군사들의 만류로 후방에 남기로 한다.
이윽고 압살롬의 반란군은 에브라임 수풀에서 다윗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이들이 상대하는 이는 다름 아닌 다윗 왕의 오른팔이자 이스라엘 최고의 명장인 요압과 오랜 세월동안 다윗과 함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역전의 용장들이었다는 것이 이들의 패인이었다. 게다가 서술은 수풀이지만 실상은 늪지대였다. 전쟁 경험이 압도적으로 높은 다윗의 정예병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달걀로 바위치기와 같았다. 결과는 참담할 정도로 압살롬 측의 완패였는데 무려 20,000명이 도륙을 당했고 늪지에서 죽은 자가 칼에 맞은 자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이를 지켜보던 압살롬은 혼이 빠져서 노새를 타고 도주하기 시작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자랑하던 긴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의 가지에 걸리는 바람에 노새는 그대로 빠져나가 버리고 압살롬은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버렸다.[24][25] 그리고 이 광경을 다윗의 군사 한 사람이 목격하고 그대로 요압에게 보고한다.
출정하기에 앞서 다윗은 반란을 일으킨데다가 자기 후궁까지 건드렸는데도 혈육의 정에 압살롬을 죽이지 않도록 부하들에게 신신당부했었으나 반란군의 주동자를 살려두면 분명 후환이 있을 거라 판단한 요압은 이를 보고한 병졸에게 "그를 죽였다면 큰 상을 받았을텐데 왜 안 죽였냐?"며 문책하고는 손에 단창 셋을 쥐고 가서 압살롬의 심장을 찌른 다음 부하 열 명과 함께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였다. 압살롬을 죽인 후, 요압이 수풀 가운데 큰 구멍을 판 다음 시체를 던진 후 그 위에다 돌무더기를 쌓자[26] 이를 본 반란군이 기세가 꺾여 각자 도주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을 애도하며 크게 통곡하자 요압이 뻔뻔스럽게도 다윗에게로 가서 '오늘 모든 백성들이 왕을 위해서 싸웠는데 왕이 반란군의 수괴의 이름을 부르며 슬퍼하고 있으면 싸워 이긴 백성들은 뭐가 됩니까?'라고 간언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위로하길 권한다. 다윗은 요압의 말을 따라 반란군 토벌에 공을 세운 장병들을 치하하고 한때 반란군에 가담했던 이들을 용서하는 유화책을 펼치는데 문제는 가장 큰 공을 세운 요압은 군대 사령관의 직위를 박탈하고 압살롬의 군대 사령관이었던 아마사[27]를 기용해버림으로서 자신의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한 문책과 동시에 너무 커져버린 요압의 권력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마사를 기용함으로서 뭇 유다지파의 마음을 돌리려는 의도도 깔려있었다.
여하튼 반란군의 수장인 압살롬의 사망과 다윗의 반란군 잔당들에 대한 포용 및 뒤처리가 끝나면서 압살롬의 반란은 종결된다.
2.5 반란 이후...
압살롬의 반란은 당시 다윗 치세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겹쳐서 일어난 사건으로, 특히 다윗의 유화책에 대한 유다 지파의 반발이 빚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 이후 다윗은 유다 지파 역시 각별히 신경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지금까지 어찌어찌 무마하고 있던 타 이스라엘 지파들의 불만 세력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며, 이는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복귀하던 도중 유다 지파가 단독으로 다윗을 환영하는 일로 인해 타 이스라엘 지파들이 격분한 사건을 통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28] 결국 유다 지파와 타 이스라엘 지파와의 갈등 조율 속에 맺힌 애로사항은 뒤이어 세바의 반란이라는 또 다른 민란이 봉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유다 지파의 강경파 민족주의자들은 잠시 꼬리를 내렸으며, 다윗의 예루살렘 복귀를 환영하거나 이후 터지는 세바의 반란 토벌에 적극 협조하면서 다시 탄탄해진 다윗의 왕권을 지지했다. 그러나 다윗의 유화책은 유다 지파로서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처사였고 이들은 본래부터 강경한 유다 민족주의 스탠스를 고수하던 다윗의 측근인 요압의 손을 들어주기 시작하면서[29] 당시 다윗 왕의 견제로 잠시 직위해제 당했던 요압이 국왕의 명령도 무시하면서 다시 이스라엘의 정계에 복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때문에 다윗은 자기 멋대로 신임 군대장관 아마사를 참살하고 세바의 반란을 진압해서 돌아온 요압을 어찌 건드리지도 못했고 훗날 자신의 뒤를 이은 솔로몬 대에 이르러서야 다윗의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를 지지했다는 명목과 아브넬 암살의 건으로 요압을 제거할 수 있었다.
또한 압살롬의 반란은 다윗의 자식교육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결과물이기도 했다. 장남인 암논이 이복동생을 강간하는 천하의 개쌍놈 짓거리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별 다른 처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30] 압살롬을 불러들이기로 했으면서도 일부러 압살롬을 반쯤 연금상태로 만들어 압살롬에게 의혹과 불신을 품게한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 셈이니 사실상 암살롬의 반란은 다윗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다 제대로 사망하면서 다윗의 후계 서열은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에게 자연스럽게 넘어갔고, 이 덕에 아도니야는 자신이 차기 왕이 될 꺼라고 요압과 함께 제대로 김칫국을 동이 채로 드링킹했지만, 실제로 다윗의 뒤를 계승한 인물은...
성경에 따르면 이런 압살롬의 반란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네토리한 것에 대한 징벌이었다고 한다.- ↑ 자른 머리가 자그마지 3kg이나 되었다고 한다.
- ↑
성격이 개쪽같아서 그렇지'나의 아버지는 평안이다'라는 좋은 의미이다. - ↑ 한결의 구약 성경 만화에서 그 드립이 나온다.
- ↑ 다윗이 산적 생활하던 시절 양식 좀 꿔달라고 손 벌렸다가 퇴짜 맞았던 그 나발의 아내로, 이후 나발이 급사한 후 다윗이 거둬들였다.
- ↑ 다윗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다윗은 여자관계가 굉장히 문란한 편에 속했다. 더군다나 부하인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사건은 비교적 최근에 터진 사건이며, 이미 온 이스라엘에 암암리로 다 알려진 상황.
- ↑ 다윗의 형인 시므아의 아들이다. 즉, 암논과는 사촌지간.
- ↑ 다윗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결혼을 적어도 두 번 이상 한 것으로 보아 여자관계가 역시 복잡했으며, 다윗이 정실 부인의 자식이 아니라는 설이 꽤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 ↑ 원래는 아버지인 다윗을 초대하려고 했다가 다윗이 바쁘다며 거절하자 다윗 대신이라며 장남인 암논을 초대했다.
- ↑ 여기서 압살롬의 치밀함을 볼 수 있다. 2년이 지났기로서니 친누이를 강간한 사실을 어떻게든 잊지 않았지만 그것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아 암논이 경계하지 못하도록 했다.
- ↑ 성경에 나와 있는 바에 따르면 압살롬은 직접 암논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암논을 살해했다. 압살롬은 부하들에게 암논의 살해를 명령하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담대히 용기를 내라고 격려까지 했다.
- ↑ 암논과 함께 다말 강간 사건을 작당한 그 요나답 맞다! 주범인 암논과 함께 계획을 짰으니 당연히 전후사정을 훤히 꿰고 있던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지만, 사실상 자기보신을 위해 친구인 암논을 배신한 셈.
그 아들에 그 친구 - ↑ 사무엘하 14장 32절에 압살롬이 요압에게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가하니라 는 서술이 있다. 정말로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이 없었던 듯.
- ↑ 특히 외동딸의 이름을 자기 여동생의 이름을 따서 '다말'이라고 지었다. 어지간히 다말 일을 마음에 두었던 것 같다.
시스콘 속성 - ↑ 그도 그럴 것이 요압은 압살롬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그를 복귀시켜 준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제 1 왕위 계승자가 해외에 도피행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복귀시킨 것. 물론 확실하지는 않다.
- ↑ 이스라엘은 사울이 1대 왕이인 시절이 있었다지만 오랜 내전으로 제도가 무너져 다시 재정비를 해야 했었고, 다윗은 재위기간동안 주변의 이민족들과 오랫동안 전쟁을 하러 돌아다니느라 상대적으로 내부 정리에 덜 신경썼다. 제도가 완전히 정비되는것은 여호사밧 왕 때의 일이다.
문제는 그 여호사밧도 전투 한번에 저 제도로 잘 정리해놓은 군사력 다 날려쳐먹었다는 게 함정 - ↑ 귀족들을 데리고 가는 와중에도 압살롬은 자신의 반역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압살롬의 치밀함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모습.
- ↑ 게다가 그는 다윗이 네토리한 그 밧세바의 할아버지가 되는 인물이다! 가만히 있었으면 솔로몬 왕의 외척이 될 수 있었으나 당시 그는 다윗에게 불만이 많았기에 압살롬과 합류했다. 덤으로 당대 이스라엘 지역 최고의 지략가이기도 했다.
- ↑ 물론 이 사실은 반역 진압 후 허구로 드러났다. 다윗을 향한 애도의 표시는 진심임이 드러났는데, 더러운 옷차림은 금방 만들 수 있어도 수염의 길이만큼은 결코 속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 ↑ 훗날 므비보셋은 자신의 시종인 시바가 모함했다고 둘러대며 위기를 모면했고, 시므이는 요압의 동생이자 다윗의 측근이었던 아비새가 전날의 일을 들이대며 기어코 죽이려던 것을 다윗 앞에서 싹싹 빈 덕에 간신히 목숨을 구명했지만 훗날 솔로몬에게 빌미가 잡혀서 처형당했다(사실은 다윗이 노환으로 죽기 전에 솔로몬에게 시므이를 처단하라는 유언을 미리 내렸다).
- ↑ 왕의 소유인 후궁을 자신이 취함으로써, 이제 자신이 왕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는 훗날 압살롬의 이복동생인 아도니야가 다윗의 첩인 수넴 여인 아비삭을 달라고 청했다가 솔로몬에게 제대로 찍혀서 처형당한 원인이기도 했다. 또한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후에 선지자 나단이 찾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그 말씀이 이루어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사무엘하 12:11.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 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아이러니하게도 여동생이 강간당했을 때 그토록 분노했던 압살롬이 자기 아버지의 후궁들을 강간한다.
- ↑ 이는 아히도벨의 책략이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에 귀족들이 확실히 다윗과 압살롬 사이에서 저울질할 수 없이 확실하게 압살롬의 편을 들게 되었다.
- ↑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후새는 압살롬의 공명심을 자극했다. 백성들을 모아 다윗이 있는 성에 밧줄을 매달아 강으로 끌고가 수몰시킬 정도라고 압살롬을 추켜세웠다.
- ↑ 물론 다윗은 '돌아가라, 될 대로 되겠지' 라는 식의 이야기는 했지만, 종교사회에서의 대제사장의 영향력은 세다.
- ↑ 실제로 저랬다면 아마 엄청나게 고통스러웠을 듯하다. 자신의 온 체중이 머리카락에 실려 있다는 것인데 그야말로 두피 전체가 찢겨져 나가는 수준이었을 듯. 게다가 모근이 꽤나 튼튼하고 머리숱도 많았으니 더더욱.
- ↑ 이스라엘에서 나무에 달린다는 것은 저주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대제사장 등은 예수를 율법에 따라 돌로 쳐죽이지 않고 '저 사람은 메시야가 아니라 저주받은 사람이다!'라는 의미로 굳이 재판같지도 않은 재판을 벌여 나무(십자가)에 달아 죽였다.
- ↑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것은 저주의 상징이다.
- ↑ 다윗의 또 다른 누이인 아비가일의 아들로 요압과는 사촌 관계이다.
- ↑ 그도 그럴 것이 압살롬의 반란 당시 토벌군에 지원한건 타 이스라엘 지파들이었는데 유다 지파 혼자서 생색을 내고 있으니 불만을 품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유다 지파는 압살롬의 반역에 가장 크게 공헌한 지파이다.
- ↑ 다윗 진영으로 귀순한 사울 왕의 군대장관인 아브넬을 요압이 쳐죽였을 때에도 다윗이 요압을 공개적으로 책망만 했을 뿐, 직위해제 같은 실질적인 견제는 하지 못했을 정도로 요압은 이전 부터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유다 지파 내에 지니고 있었다.
- ↑ 율법에 의거해 근친상간은 돌로 쳐 죽여야 할 죄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