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 ||||
순위 | 이름 | 국적 | 격추 수 | 비고 |
1위 |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 독일 | 80대 | 붉은 남작 |
2위 | 르네 퐁크 | 프랑스 | 75대 | 연합군 1위 |
3위 | 빌리 비숍 | 캐나다 | 72대 | 후에 캐나다 공군 원수 |
4위 | 에른스트 우데트 | 독일 | 62대 | |
5위 | 에드워드 메녹 | 영국 | 61대 | |
6위 | 레이먼드 콜리쇼우 | 캐나다 | 60대 | |
7위 | 제임스 멕커덴 | 영국 | 57대 | |
8위 | 앤드류 보샹-프록토르 | 남아프리카 | 54대 | |
9위 | 에리히 뢰벤하르트 | 독일 | 54대 | |
10위 | 도날드 맥라렌 | 캐나다 | 54대 | |
11~20위로 |
Ernst Udet
1896년 4월 26일 - 1941년 11월 17일
제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우데트.
제 3제국 시절의 우데트.
1 리즈 시절
제1차 세계대전에서 공인격추 62기를 기록한 에이스.
붉은 남작에 이어 독일군 2위 에이스였으며, 종전까지 살아남은 에이스 중에서는 가장 높은 기록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자신이 날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우산을 펴고 지붕에서 뛰어내리기도 했고, 고대하던 파일럿이 된 뒤에도 무모한 기동술을 시험하다 기체를 갈아먹어서 영창에 가기도 하는 등 사고뭉치였다. 안죽은게 신기할 따름.
물론 죽을뻔한 적도 많다. 프랑스군의 톱 에이스 조르주 기네메르(Georges Guynemer, 54기 격추)와 대결한 적이 있는데, 기관총이 고장나서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기네메르가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 그냥 보내줘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전최강 전투기 대전에도 소개된, 초창기 공중전 특유의 낭만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사례.##
어쨌든 그는 타고난 파일럿이었고, 그 자질을 인정받아 붉은 남작 휘하의 '플라잉 서커스'로 전속되어 격추 스코어를 꾸준히 늘려나갔다.
전후에는 다른 수많은 전투비행사들이 그랬듯이 몇 년동안 민간 곡예비행사로 일했으며, 날개 끝으로 지상의 손수건을 걷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조종술을 가지고 있었다.
2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에 입당해서 아돌프 히틀러의 신임을 받았으며, 그 덕분에 1935년, 신생 루프트바페 발족 당시 항공기 조달 책임자가 된다. 미국의 헬다이버를 보고 "우왕ㅋ굳ㅋ"을 외치면서 히틀러한테 의견을 상신, Ju87 슈투카를 개발하게 했다. 이후 단좌 1인승 전투기 개발을 추진해서 여러 시제기를 몸소 몰아본 이후, Bf109 모델을 선택한다.
그런데 이후론 병맛이 물씬 풍기는 행정 수완을 발휘했다. 원래 4개였던 전투기 개발 부서를 13개로 나누는 등 행정 계통을 쓸데없이 세분화시킨 덕분에 원래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도 못한 채 관료제의 단점만 잔뜩 부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독일공군 내의 세력 다툼에는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사생활에도 문제가 많았는데, 상당한 주당이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1941년 11월 17일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게다가 죽은 후에까지 독일 공군에 민폐를 끼쳤는데, 전투기 총감이자 최고의 에이스로 모든 조종사들의 신망을 받던 베르너 묄더스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사망했다.
- ↑ 사실은 그의 소꿉친구이자 연인이던 Eleanor "Lo" Zink의 애칭.
비범한거 맞나?